환상의 여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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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선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더불어 세계 3대 미스터리로 꼽히며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그런 유명세에 비해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 기껏 해야 일본어 중역판이나 요약본 정도가 나왔던 터라 '유명한 작품이라니 읽기는 읽는데 이거 어쩐지 손에 안 붙는데…' 하며 내가 작품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것인지 원래 그냥 그런 작품인 건지 영 헷갈렸었다. 그러던 차에 엘릭시르에서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를 론칭하면서 『환상의 여인』을 새롭게 번역해 선보여 이번에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구나 기대를 안고 다시 읽었다. 엘릭시르판 『환상의 여인』을 읽기 전만 해도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환상의 여인』 하면 '오렌지색 모자'만 떠올랐을 뿐 딱히 어떤 인상이 남지 않았고, 수작이라는데 왜 그런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새 옷을 입고 나온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샌가 점점 이야기에 몰입해 '그 여자'를 찾기 위한 피 말리는 조사에 합류하게 됐다.  


  『환상의 여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내와 다툰 스콧 헨더슨이란 남자가 무작정 거리로 나와 아내에게 홧김에 얘기한 것처럼  바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아내와 예약해둔 데이트 코스를 즐긴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고, 그는 유일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 여자뿐. 하지만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심지어는 신체적 특징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그녀가 쓴 오렌지색 모자만이 떠오를 뿐이다. 경찰과 변호사 등은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나 그를 봤다는 사람들은 있으나 그와 그녀가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증언은 나오지 않는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무고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을 선도받은 스콧 헨더슨. 그는 담당 형사의 조언을 듣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절친에게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생사가 오직 한 여자의 손에 걸려 있는 상황. 하지만 헨더슨의 절친 존 롬바드와 헨더슨의 애인 캐럴 리치먼이 '환상의 여인'의 흔적을 더듬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결정적 증언을 해줄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은 살인일까 단순한 사고일까? 사형 집행 전까지 과연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환상의 여인』은 본격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많이 허술하다. 그래도 몇 시간이나 함께 있었던 여자에 대해 오렌지색 모자를 썼다는 사실 말고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이야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주요 증인이 하나둘 죽어나가는 것이나 사형선고 받아놓고 한참 손놓고 있다가 날짜가 임박해져서야 해외에 파견근무 나간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도 '읭?!'스럽다. 하지만 이런 허점에도 불구하고 『환상의 여인』은 매력적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허점 때문에 매력적인 건지도 모른다. '환상'의 여인이라는 제목답게 어딘가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의 존재도 그렇지만 주인공 헨더슨도 도무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사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환상, 사랑에 대한 환영을 쫓을 뿐 도무지 현실감각이 없어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답답한 인물인데, 그 점이 이 책에서는 되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현실감이 있는 것은 헨더슨의 죽은 아내의 웃음 소리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사건 자체도, 이것을 풀어가는 과정도 이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긴가 싶지만 그러면서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어느샌가 이야기에 빠져버린다. "초심자를 위한 추리소설 No.1"이라는 띠지문구처럼 『환상의 여인』은 단순한 '누가 범인인가'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소설이 아니라 사랑, 질투, 배신 같은 통속드라마 같은 내용에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는 작품이라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반전이 주는 충격은 없지만 그 분위기와 매력만큼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한 책. 세계3대 미스터리라는 과장된 수식어가 아니어도 한번쯤 읽어봄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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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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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소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에 가장 많이 소개된 작가 중에 한 명인 히가시노 게이고. 워낙 다작을 하는 편이기도 하고(그래서 작품의 퀄리티가 들쑥날쑥하지만), 영상화해도 좋겠다 싶은 작품도 많다보니 그의 작품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든 경우가 꽤 많다. 더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용의자 X의 헌신>부터 <백야행>, <명탐정의 저주>, <유성의 인연>, <갈릴레오>, <비밀> 등 히가시노 게이고는 단순히 '미스터리'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로 다양한 독자(혹은 관객)을 만나왔다. 그렇게 많은 영상물 중에서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이 <신참자>였다. 가가 형사 시리즈야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적이 있었기에 가가 형사와는 구면이었지만 책으로 만나는 가가 형사와 아베 히로시의 모습으로 만나는 가가 형사는 사뭇 달랐다. 일본에서 드라마로 꽤 인기를 끌었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도 선정된 작품이라 금방 번역되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조금 시간이 걸려 출간된 <신참자>.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더 반갑게 읽기 시작했다. 

  혼자 살아가던 40대 이혼 여성 미쓰이 미네코가 도쿄 니혼바시의 한 아파트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혼자 살던 미쓰이 미네코. 왜 그녀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인지, 대체 누가 그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 좀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니혼바시 경찰서에 갓 부임한 형사 가가 교이치로는 관할서 형사로서 미쓰이 미네코 주변의 탐문수사를 시작하고, 닌교초 거리에서 그녀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센베이 가게, 민속 공예품점, 시곗방, 요정 등 아직 옛 풍경이 남아 있는 닌교초 거리.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히 고인 물처럼 무사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이 거리에는 몇 개의 비밀과 거짓말이 잠들어 있다." 닌교초 사람들이 각자 품고 있는 소소한 거짓말 혹은 비밀. 이 거리의 '신참자'인 가가 형사는 조금씩 어느샌가 이 거리의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크게는 미쓰이 미네코란 여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생전의 그녀의 모습을 되짚는 과정에서 가가 형사가 만나는 닌교초 사람들에 더 눈이 간다. 그들이 감추고 있는 사소한 비밀들. 그 비밀을 알아챈 가가 형사가 당사자들을 배려하면서 움직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앙금 또는 오해를 풀어주는 과정을 읽노라면 어딘가 너무 한가해보여서, 왜 잡으라는 범인은 안 잡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고 다니나 싶어지기도 한다. 이런 독자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일까. 가가 형사는 이런 의문에 이렇게 답한다.

 

 "형사는 수사만 하는 게 아닙니다. 사건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또한 피해잡니다. 그 피해자를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이거 뭐 작가 스스로 <신참자>의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한 것 같다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피해자까지 신경 써주는 가가 형사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전에 출간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도 그렇지만 가가 형사라는 캐릭터 자체가 배려심 있고 따뜻한 형사라는 점 외에는 사실 큰 개성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고, 전체적인 전개가 사람에 맞춰져 있다보니 본격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한번쯤 닌교초 거리를 거닐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쯤 이 가슴 따뜻한 형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살인사건이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 두 사람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같은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얽히고설킨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드라마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으면 두 배로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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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5-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가가 형사 좋더군요 아베 히로시의 드라마도 좋고 이번에 영화를 기대하고 있어요

이매지 2012-05-21 19:25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 기대하고 있어요.
아베 히로시와 가가 형사 은근히 참 잘 어울려요. ㅎㅎ

유부만두 2012-06-10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sp 까지 챙겨봤어요. 그런데, 범인이 누구였더라, 기억이 안나네요;;;

이매지 2012-06-11 13:28   좋아요 0 | URL
범인은 바로!!!! ㅎㅎㅎ
책으로 만나보셔요. ㅎㅎ
 
사우스포 킬러 - 본격 야구 미스터리
미즈하라 슈사쿠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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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앞날이 창창한 두 프로야구 선수가 경기조작으로 적발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내가 응원하는 팀의 선수라 한동안 패닉에 빠져 있었다. 애증의 엘지와 이제 연을 끊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었고, 두 선수만 처분받는 수준에서 조사를 마무리하는 것 같아 영 찝찝하기도 했다. 야구 때문에 속이 상할 때는 그깟 공놀이라며 애써 쿨한 척했지만, 그깟 공놀이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 차마 놓을 수 없어 시범경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야구장에 직접 가서 남은 선수들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시범경기로나마 야구에 대한 갈증을 조금씩 채우던 중 만난 야구소설 한 권. <사우스포 킬러>다.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기 팀 오리올스. 2년차 투수인 사와무라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떠오르는 좌완 에이스다. 다른 선수들과도 별로 교류하지 않고, 대중의 인기에도 신경쓰지 않으며 묵묵히 페이스를 유지하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재수 없다는 평가도 받지만 어쨌거나 실력은 발군인 투수다. 이렇게 앞날이 창창한 그의 인생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사와무라의 집에 뱀 같이 생긴 한 남자가 찾아와 약속을 지키라며 그를 폭행하고, 구단에는 사와무라가 경기조작에 가담했다는 내용의 투서가 날아온다. 이에 구단에서는 사와무라를 자택근신시키고 2군으로 내려보내지만 언론은 들끓기 시작하고, 사와무라는 순식간에 경기조작 선수로 낙인 찍힌다. 방심하다가 당한 공격에 어리벙벙했던 사와무라. 누구보다 자신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직접 조사에 나선다. 대체 누가, 왜, 사와무라에게 경기조작이라는 누명을 씌운 것일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이라는 점과 야구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컸는데, 이 책은 그 기대를 가볍게 충족시켜줬다. '사우스포(좌투수) 킬러'라는 다소 험악한(?) 제목이지만 실제로 누군가 죽지는 않고 프로선수로서의 생명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프로선수들에겐 이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을 꼼꼼히 그려냈다. 겉으로 냉정해보이지만 사실은 "망망대해에서 돛이 부러진 요트처럼 엄청나게 휘청거리고 있"는, "살아오면서 표정을 감추는 훈련을 너무 많이 해온 탓"에 "냉정하게 보일 뿐"인 사와무라라는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었던 데다가 그가 직접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발로 뛰고, 또 그 과정에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맞서 싸우기도 하는 모습 등이 시체 한 구 없는 이 독특한 미스터리에 충분히 힘을 더해줬다. 이렇게 얘기하면 조금 비약일 수 있겠지만, 역량은 뛰어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가 선발로 등판해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완투, 완봉승을 거둬 점차 뉴에이스로 거듭나는 소설이랄까. (아, 써놓고 보니 박현준 생각이 또 날 뿐이고...)   

  사와무라라는 캐릭터도 좋았지만, 프로야구단이라는 하나의 집단 안에서의 서로에 대한 질투와 견제, 각 선수의 심리, 트레이드 같은 구단 운영, 그리고 실제 경기에 대한 생생한 묘사 등을 읽는 것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야구로 치면 9회말 2아웃 상황 정도될 것 같은, 사와무라가 자신의 선수 생명을 걸고 등판한 경기 장면이 하이라이트였지만, 9회까지 가는 과정 또한 생동감 넘쳐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단순히 야구소설 혹은 미스터리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진위 여부는 둘째치고 껀수가 된다 싶으면 승냥이떼처럼 덤비는 언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대중의 알 권리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뜨리는지에 대한 반성 또한 담겨 있어 야구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부담없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은 최소한 안타는 쳐주니 말이다. 이제 내일이면 프로야구 개막이다. 올해는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지 자못 기대된다. 모두의 건승을 빈다. (소심하게, 엘지트윈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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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12-04-0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범하게, 쌍둥이 화이팅!ㅋㅋㅋㅋ 읽을까 말까 했는데 저도 조만간 함 열어봐야겠어요.^^

이매지 2012-04-06 16:24   좋아요 0 | URL
사실 더 써야 하는데 쓰다 보니 기력이 쇠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에 재미도 있으니 한번 읽어보시구요...
쌍둥이네는... 제가 격하게 아끼는 찬규찡!이 있으니까요. ㅠ

다락방 2012-04-06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야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제 남동생을 위해 이 책을 구입해야 겠네요. ㅎㅎ

이매지 2012-04-06 16:33   좋아요 0 | URL
야구와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읽으실 겁니다.
아, 다락방님도 오랜만에 영접! ㅠ

한솔로 2012-04-0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이 리뷰를 보고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이매지 2012-04-06 17:35   좋아요 0 | URL
엇, 이기웅 선생님이신가요? ㅎㅎ
트위터에서 뵙다가 여기서 뵈니 새삼 반갑습니다. ㅎㅎ
 
짐승의 길 - 상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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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모토 세이초와의 첫 만남은 <모래그릇>이었다. 그 당시(2007년)만 해도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가운데 <너를 노린다> <점과 선> <모래그릇> 정도만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세 작품 중 뭘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셋 중 가장 평점이 낮았던 <모래그릇>을 골랐던 기억이 난다. 큰 기대 없었기 때문일까. 다소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내친 김에 드라마 <모래그릇>을 찾아봤고 점점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수많은 작품을 영상화했기에 마음만 먹으면 그의 작품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부지런한 일본어 능력자분(이분들에게 축복이 가득하길!) 덕분에 <검은 가죽 수첩> <의혹> <나쁜 녀석들> <역로> 같은 작품을 원작보다 먼저 접했다. 이렇게 마쓰모토 세이초의 몇몇 작품을 드라마로 만나긴 했지만 아무리 잘 만든 드라마라도 원작의 변형이고 대리만족일 뿐 그의 소설을 '텍스트로' 읽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커져갔다. 약 100편의 장편, 350편의 중단편, 여기에 에세이까지 더하면 1천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던 마쓰모토 세이초. 일본미스터리가 붐처럼 인기를 끌었지만 주구장창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나 소개될 뿐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만나는 길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역사비평사와 북스피어가 손을 잡고 '세이초 월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규모가 작은 두 출판사가 힘을 모아 함께 만든다는 것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아니던가. 기대는 점점 커졌고, 드디어 세이초 월드가 시작됐다.

  

  "짐승길: 산양이나 멧돼지 등이 지나다녀서 산중에 생긴 좁은 길을 말한다. 산을 걷는 사람이 길로 착각할 때가 있다"라는 정의로 시작하는 <짐승의 길>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간, 한 여자의 이야기다. 뇌연화증으로 누워 있는 간지. 그런 간지를 부양하기 위해 고급 온천 여관에서 일하는 다미코. 집에 돌아올 때마다 간지는 다미코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는 않을까 질투하고, 짐승처럼 그녀의 몸을 탐한다. 이런 생활에 조금씩 지쳐가는 다미코. 무능하고 병든 남편.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의 무게가 다미코를 점점 억누른다. 그러던 중, 여관에 손님으로 온 고급 호텔의 지배인 고다키가 다미코에게 잠시 '도구'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세상에는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며 "당신도 그래 볼 마음이 없"냐고 묘한 제안을 한다. 설사 도구가 된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의 행복을, 여자로서의 행복을 되찾고 싶었던 다미코는 집에 불을 내 남편을 죽이고 정재계를 쥐고 흔드는 기토 고타의 애인 겸 하녀로서의 새 삶을 시작한다. "자네도 기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 있어.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맞이했을 때의 마음가짐이네. 그만한 기회에 올라탈 수 있는지 어떤지는, 본인의 평소 준비에 달려 있거든"이라는 말처럼 다미코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움켜쥔다. 하지만 그 댓가로 그녀는 인간의 길을 뒤로한다. 욕망의 길, 다시 말해 짐승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다미코. 과연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짐승의 길>에서 다미코의 길을 대로(大路)라고 볼 때 그녀와 이어지는 몇 개의 간로(間路)가 있다. 모두가 간지의 죽음을 사고사라고 볼 때 다미코에게 의심을 품은 형사 히사쓰네. 그는 다미코를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기 위해 쫓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한번 품고자 하는 일념으로 그녀를 추격한다. 히사쓰네 외에도 뒤에서 정재계를 막론하고 세상이라는 무대를 조종하는 기토 고타, 그런 그를 은밀히 돕는 고다키 등의 인물의 행적이 뒤섞여 크고 작은 길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길은 도덕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부이건, 사회적 성공이건 행복이건 간에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비뚤어져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짐작하지 못한다. 그저 "행선지를 알 수 없는 탈것"에 올라탄 이들처럼 운명에 몸을 맡긴 채 파국을 향해 질주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짐승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그들이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시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고,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이 시대의 이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짐승의 길>은 더 서글프다. 뒷표지의 기리노 나쓰오의 말처럼 “인생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등바등 살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을 일삼아 누구 한 사람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라니. <짐승의 길>을 읽으며 오히려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해온 것이 얼마나 같잖은 것인가 싶어져 씁쓸했다.

 

  드라마화된 <짐승의 길>의 주연도 요네쿠라 료코이긴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다미코와 요네쿠라 료코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하긴 2000년대에 드라마화된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의 주연은 거의 요네쿠라 료코의 몫이었던 것 같다.) 내가 본 마쓰모토 세이초 드라마에는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심 다미코도 그런 캐릭터가 아닐까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녀가 측은해졌다. 그 누구도 그녀를(혹은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없지만, 그저 그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는 것으로, 그녀에게 잠시 마음을 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것이 때로는 불편했고, 요즘 TV에서 하는 막장드라마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단순한 치정극이라고 치부하기엔 사회비판적인 내용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곁들여져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분량은 제법 되지만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 오랜만에 독서의 즐거움을 되찾아준 책. 앞으로, 길게. 그리고 즐겁게. 세이초 월드를 계속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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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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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끝자락에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스노우맨>. 검정색과 하늘색이 이렇게 세련되게 어울릴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 '스노우맨'인데 식상하지 않게 눈사람을 앞세우지 않은 점도 좋았다.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화한다는 띠지문안에 혹해 들춰봤는데, 별 거 아닌 것 같은 첫 문장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스노우맨>이라는 제목의 소설 첫 문장이 이거라니. 어떻게 보면 식상해보였지만, 전체적인 전개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북유럽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해서는 다소 심드렁했지만(굳이 이렇게 규정지어야 하나 싶다), 요 네스뵈라는 새로운 작가를 만날 겸, 해리 홀레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겸 겸사겸사 이 두꺼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0년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엄마는 아들을 데리고 내연남을 마지막으로 만나러 간다. 마지막 정사를 치른 방 창문 밖에서 그들의 모습을 눈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아들은 겁에 질린 채 눈사람을 봤다며 "우린 이제 죽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2004년 첫눈이 내리는 날, 어느 집 앞에 커다란 눈사람이 집을 보는 듯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목도리를 두른 눈사람만 남긴 채 사라진다. 첫눈이 내리고 눈사람이 나타나면,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는 한 여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대체 그들은 왜 사라진 것일까? 눈사람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스노우맨의 정체를 두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되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등장 인물들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시리즈를 책임지고 있는 고독한 히어로 해리 홀레. 시리즈의 첫 권이 아니라 그의 자세한 과거사는 알 수 없지만, 해리 홀레에겐 뭔가 사연이 있다. (아, 사연 있는 남자는 잘 생기지 않아도 얼마나 매력적인가.) 끊임없이 그를 유혹하는 알코올과 한때는 뜨거웠던 전 여자친구 라켈과 그의 아들 올레그, 주변 동료들의 시기와 견제 등 해리는 많은 문제를 끌어안고 묵묵히, 하지만 치열하게 살아간다. 만약 해리 홀레가 슈퍼맨 타입이었다면 멋있었을지언정 몰입이나 공감은 힘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워커홀릭이긴 하지만 일에만 매달리는 타입은 아니고, 고독하긴 하지만 고립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차도남 같은 해리는 자신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달려든다. 해리 홀레 반장이라는 인물이 전무후무한 캐릭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건사고 없이 마냥 평온할 것 같은 노르웨이라는 배경과 만나면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 더 멋있게 느껴진다.

 

  <스노우맨>에서 해리 홀레 이외에 매력적인 캐릭터는 카트리네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젊은이든 노인이든) 10분도 채 되지 않아 침대로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성적 매력의 소유자인 카트리네는 해리네 부서로 전근 오자마자 당신 소속이라고 하면서 실종사건에 바로 투입되어 그와 손발을 맞춰간다. 끊임없이 도발을 하고 저돌적인 자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사를 강행하는 카트리네. 그런 카트리네의 모습에 해리는 왠지 모르게 카트리네가 자신과 비슷한 부류임을 받아들이게 되고, 점차 그녀를 동료로서 인정하기 시작한다. 불같은 해리와 카트리네 사이에 이들의 뜨거움을 중화시켜주는 인물도 있다. 전 남친인 해리와 곧 결혼할 남친 마티아스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라켈과 그의 아들 올레그는 스노우맨의 정체를 쫓는 긴장감 넘치는 추격 속에서 잠시 숨 쉴 여유를 만들어준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일부일처제가 아닙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 정도가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거나 짐작하는 사람이 친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무려 20퍼센트나요! 다섯 명 중 한 명 꼴이죠! 거짓된 삶을 사는 겁니다." 어쩌면 <스노우맨>은 차갑게 내리는(혹은 쌓인) 눈 때문이 아니라 이 문장 때문에 쓰여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거짓된 삶을 살아간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마치 해리의 집에 생긴 곰팡이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 자리에 자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가 집 전체를 망쳐버리듯이 거짓된 삶을 사는 이는 사회를 망쳐버린다. 하지만 요 네스뵈가 주목한 점은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혹은 그렇게 살아가게 만든 부모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사회가 애써 만들어놓은 울타리. 그 울타리의 경계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하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보이는 세상이 사실은 얼마나 썩어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해리 홀레 반장은 기존의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캐릭터였고, 북유럽의 날씨만큼이나 서늘한 이야기였지만 여전히 난 북유럽 미스터리가 뭔지도 모르겠고, 굳이 나눠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해리 홀레는 해리 홀레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니 말이다. 이어질 혹은 과거의 해리 홀레 이야기.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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