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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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진리는 시간의 딸』을 읽고 난 뒤 조세핀 테이의 매력에 빠져 다른 작품이 없는지 찾아봤다. 하지만 『진리는 시간의 딸』 외에 국내에 번역·출간된 다른 책은 없었고, 일본 미스터리가 대세인 흐름 속에서 조세핀 테이 같은 영미 고전미스터리 작가가 새삼 소개될 수 있을까 하며 내심 포기했었다. 그렇게 조세핀 테이를 잊어갈 즈음, 신간 도서 목록을 살피다 우연히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을 발견했다. 아, 얼마나 기다려온 조세핀 테이던가! 마침 좋은 분께서 책선물을 주신다고 해 넙죽 받아 이번 주말, 오랜만에 고전 미스터리의 매력에 푸욱 빠졌다.

  입양됐긴 하지만 제대로 된 집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난 열다섯 소녀 베티 케인. 방학을 맞아 고모댁에 놀러간 그녀는 개학한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고 실종된다. 그리고 4주만에 온 몸에 멍자국을 안고 돌아온 소녀. 그녀는 자신이 프랜차이즈 저택이라는 곳에 납치·감금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프랜차이즈 저택에 사는 샤프 모녀는 소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소녀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저택의 세부를 세세히 설명한다. 주변에 집이라고는 한 채도 없는 허허벌판 위에서 떨어져 살아 마을 사람들에게 마녀 취급을 받아온 모녀, '키스라고는 성경책 말곤 해본 적이 없는 애'처럼 순수한 모습의 소녀. 이들의 진술은 엇갈리지만 소녀의 진술이 너무나 명쾌했기에 사건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모녀의 소행으로 흘러간다. 세상이 모두 샤프 모녀에게 등을 돌리지만 우연히 이 사건을 변호하게 된 로버트 블레어는 이들을 신뢰하기 시작하고, 베티 케인의 진술과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탐정으로 나서 조사를 시작한다.

  <타임스>가 선정한 '위대한 범죄소설작가 50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정도로 영미 추리소설계에서는 인정받고 있지만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달랑 『진리는 시간의 딸』 한 권뿐이라 아쉬웠던 조세핀 테이. 이번에 소개된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영국추리작가협회, 미국추리작가협회에서 선정한 100권의 도서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영화와 TV드라마로도 제작된 작품으로 탄탄한 스토리가 보증된다. 18세기 영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엘리자베스 캐닝 유괴 사건'을 착안한 이 작품은 결국 미결로 남은 실제 사건을 작가 나름대로 재해석해 보여준다. 국내 독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엘리자베스 캐닝 유괴 사건'이 낯설지만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데 있어서 곁가지 이야기에 불과하다.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사건 자체의 자극성에도 눈길이 가지만 이 사건을 둘러싼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시체 한 구도 없이 그저 무고죄를 증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이야기는 크게 보면 샤프 모녀와 베티 케인의 대립이 중심이 된다.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왜 하필 그들이 타깃이 된 것인지를 추적해가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소위 '마녀사냥'이라고 하는 샤프 모녀를 향한 시골 사람들의 공격이다. 옐로페이퍼 격인 지역 신문에 이 사건이 소개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1948년이 아니라 2011년의 일이라 해도 믿길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말단은 자극하는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조금은 심심한 추리소설일 수도 있다. 유혈이 난자하는, 정교한 트릭을 깨부수는 류의 추리소설도 아니고 현대 법정 스릴러에 비해서 법정신도 약하다. 하지만 자극적인 맛은 없어도 먹다보면 자꾸만 생각나는 집밥처럼 그 담백한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나게 된 조세핀 테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또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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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1-08-30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리는 시간의 딸]에 대한 기대가 커서인지 막상 읽고나니 그저 그랬는데, 이거 재밌을 거 같네요.

이매지 2011-08-30 22:53   좋아요 0 | URL
살인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긴장감이 유지되더라구요.
약간의 로맨스(?)도 곁들여져 애거사 크리스티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ㅎㅎ

pjy 2011-08-3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이야기보다는 그나마 기증전결이 제대로 있는 고전소설이 좋아요^^

이매지 2011-08-31 11:20   좋아요 0 | URL
요새는 정말 트릭 위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고전은 또 고전 나름의 탄탄한 맛이 있죠 :)

카스피 2011-08-3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테이의 작품이 번역되었네요^^

이매지 2011-09-01 12:47   좋아요 0 | URL
네, 카스피님도 어서 읽어보세요! :)
 
미인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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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미미 여사의 에도 이야기, 그 아홉번째다. 지난 번에 읽었던 『하루살이』가 각각의 이야기가 마치 하나의 장편처럼 연결된 연작 단편이긴 했지만 분량이 짧아 다소 아쉬웠는데, 이번 작품 『미인』은 두툼한 장편이라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따라갈 수 있어서 좋았다. 장편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일지 몰라도 미미 여사의 작품 또한 단편보다는 장편이 더 힘이 느껴져서 좋다. 원제가 '텐구 카제(천구 바람)'인『미인』을 읽기 전에는 제목이 무슨 의미일까 갸웃하게 된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아아' 하고 『미인』이라는 제목에 수긍하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름다워지기를 바라고, 아름다운 여인을 부러워하는 여인네의 마음은 같았던 걸까. 『미인』은 바로 그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마음을 나눈 남자와 결혼을 앞둔 한 처녀가 갑자기 사라진다. 처녀의 아버지는 핏빛의 붉은 노을과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 딸을 데려갔다고, 자신의 딸이 '가미카쿠시'를 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비현실적인 이야기였기에 되려 그가 딸을 죽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받는다. 결국 그는 자살을 선택한다. 그 무렵 다른 가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두번째 실종사건에는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날아든다. 첫번째 사건 이후 조사를 시작한 오하쓰는 오빠 로쿠조를 도와 돈을 몸값을 지불하러 가고, 그곳에서 거센 바람과 함께 관음보살을 빼닮은 요물을 만난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 오하쓰는 우쿄노스케와 함께 조사를 시작하고, 또 한 명의 조력자 꼬마 고양이 데쓰를 만나게 된다. 제각각의 능력을 가진 세 주인공. 과연 요물의 정체를 밝혀낼 수, 사라진 처녀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책의 소재인 '가미카쿠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온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사람이 사라져버리는 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가미카쿠시가 재미있게 그려졌다면 『미인』에서는 좀 더 절박하게 그려진다. 요물에게 조금씩 기운을 빼앗기는 처녀들을 죽기 전에 구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의 답이기도 하다. 다른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질투하고, 아름다움을 손에 넣지 못한 마음이 낳은 망념. 하지만 누가 이 여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이 하나의 권력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과연 더 아름답고 싶은 마음이 비뚤어져 요물이 되어버린 천구가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졌다.

  미야베 미유키의 초능력 쪽의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미인』은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아예 말하는 고양이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어느 정도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읽어서인지 그리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가미카쿠시도 한몫을 한 듯) 오하쓰와 데쓰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이라던가 오하쓰와 우쿄노스케 사이의 미묘한 핑크빛 기류 등 책의 주된 줄기보다 부수적인 잔재미가 쏠쏠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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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1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매지님 리뷰를 읽어보니 급 책이 땡기는데용^^

이매지 2011-08-19 23:04   좋아요 0 | URL
제 리뷰에 잘 호응(?)해주시는 카스피님 ㅎㅎ
 
까마귀의 엄지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0
미치오 슈스케 지음, 유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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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등으로 인기몰이를 시작해 다양한 작가군으로 이어져온 일본 소설계에서 최근 돋보이는 작가는 단연 미치오 슈스케가 아닐까 싶다. 나오키상 수상작인 『달과 게』를 비롯해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외눈박이 원숭이』 『솔로몬의 개』 등 제법 많은 작품이 소개됐다. 다양한 작품이 나온 터라 첫 만남으로는 어떤 책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처음 보기에는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가 무난하다는 추천을 받아 얼마 전 처음 미치오 슈스케를 만났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이야기였지만 나쁘지 않네, 하고 좀 더 알아볼 마음이 들었던 차에 『까마귀의 엄지』를 만났다. "사기는 신사의 범죄다"라는 띠지 문구만 봐도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라는 것이 느껴졌기에 더 기대감을 안고 읽어나갔다.

  사채 때문에 가족도 잃고 인생이 꼬여버린 중년의 두 남자, 다케자와와 데쓰. 생김새도 삶과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사기'라는 기술 하나만 가지고 세상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소소한 사기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두 사람 앞에 소매치기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소녀 마히로가 나타난다. 꾼은 꾼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다케자와와 데쓰는 자기들처럼 남을 속이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마히로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살고 있는 곳에서 쫓겨나게 된 마히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하지만 마히로는 자신의 언니 야히로와 언니의 애인 간타로라는 덤까지 데리고 다케자와의 집에 들어온다. 나이도, 개성도, 생김새도 다른 다섯 사람이지만 그럭저럭 한 지붕 아래서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이런 평화도 잠시. 7년 전 다케자와가 와해시킨 사채 조직의 추적과 위협은 날로 심해진다. 그저 상대의 공격을 피해 도망다니기에 바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다섯 사람은 결연히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일대 반격을 하기 위해 '앨버트로스 작전'을 계획한다.   

  '사채' 때문에 인생이 말린 주인공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얼핏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같은 사회파 미스터리로 흘러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디까지는 이는 주인공들을 하나로 묶는 소재로 등장할 뿐 전형적인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할 정도로 이 책은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그동안 사채업자들의 괴롭힘에 피하기만 한 주인공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사채업자들에게 복수를 계획한다. 소매치기, 열쇠공, 마술사, 미녀 등 따로 행동했다면 감히 어깨 형님들에게 덤비지 못했을 이들이 하나로 뭉쳐 저마다의 장기를 살려 일대 사기극을 벌인다는 내용은 한 편의 익살극을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하지만 이야기가 단순히 앨버트로스 작전의 수행으로만 끝났다면 『까마귀의 엄지』는 고만고만한 사기극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앞의 사기극은 마지막 한 방을 위한 소극(笑劇)이라고 할 정도로 마지막 반전이 이 책의 압권이다.

  우타노 쇼고는 이 책을 두고 "일급 엔터테인먼트"라고 평했다고 하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마치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물, 박진감 넘치는 전개, 그리고 반전. 뭐 하나 뒤지지 않는 일급 엔터테인먼트 소설! 미치오 슈스케에 대해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치오 슈스케를 잘 모르는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기존에 그의 작품에 거부감을 느꼈던 독자라도 빠져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과연 다음 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팔색조 같은 미치오 슈스케의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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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2011-08-17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읽고 욕을 하면서 책을 집어던지시든지, 감탄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매지 2011-08-17 22:34   좋아요 0 | URL
해바라기가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인 것 같더라구요. ㅎㅎ
조만간 집어 던지든 감탄하든 해야겠네요 :)
 
파이 바닥의 달콤함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1
앨런 브래들리 지음, 성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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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의 첫 권인 <파이 바닥의 달콤함>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나 스웬슨 시리즈였다. 코지 미스터리로 장르도 같은데다가 제목에 음식명이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이 바닥의 달콤함>을 열 장도 채 읽기 전에 같은 코지 미스터리일지는 몰라도 한나 스웬슨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나 스웬슨 시리즈는 작은 마을에서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하는 삼십대 미혼녀 한나의 연애담과 살인사건 그리고 특제 레시피가 어우러져 진행된다면 플라비아 들루스 시리즈는 화학 덕후인 십대 소녀의 재기발랄한 모험담에 곁가지로 파이가 곁들여진다. 성격은 전혀 다르다 하여도 오랜만에 읽는 코지 미스터리. <파이 바닥의 달콤함>은 먹는 위치에 따라 맛이 제각각인 파이처럼 페이지마다 제각각 다른 맛으로 다가왔다.

  외모에만 관심을 쏟는 첫째 언니 오필리어와 늘 책에 몰입해 대사를 따라하기 일쑤인 둘째 언니 대프니, 아내가 떠난 후 가족에게 심드렁하지만 우표수집광인 아버지, 어딘가 모자라지만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정원사 도거, 너무나 맛이 없어 아무도 손대지 않는 파이를 만드는 가정부 멀릿 부인. 그리고 이들과 함께 벅쇼 저택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 플라비아 들루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뭔가 건수를 찾아 돌아다니고, 운명처럼 만난 화학 공식 속에서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괴짜 소녀 플라비아.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언니에게 립스틱에 독소를 집어넣어 입술이 부풀어오르게 하는 식의 복수로 일상의 무료함과 반항심을 달랜다. 그렇게 별 일 없는 일상을 보내던 플라비아의 집 문앞에서 부리에 우표가 꽂힌 채로 죽어 있는 꼬마도요새가 발견된다. 그냥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인가 싶지만, 새의 시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새를 본 아버지는 뭔가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날 밤, 플라비아는 아버지가 서재에서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 다음 날 새벽에는 아버지를 협박한 남자가 오이밭에서 죽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대체 이 정체 모를 남자는 누구인가. 아버지가 그를 죽인 것인가 등 정답을 알 수 없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플라비아는 본격적인 조사에 나서게 되는데……

  독자와 작가의 두뇌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 정교한 트릭이 등장하는 정통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코지 미스터리를 읽는 것은 정통 미스터리에서 만날 수 없었던(혹은 정통 미스터리와는 다른 매력의)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대개 추리소설 하면 먼저 떠올릴 피가 난자하는 현장이라던지,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번뜩이는 트릭 그리고 그것을 간파해내는 탐정은 코지 미스터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정통 미스터리 속의 주인공이 어깨에 힘이 들어간 '프로'라면 코지 미스터리 속의 주인공들은 '아마추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숙한 면도 보이고, 사건을 해결해가며 실수도 하지만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매력으로 다가온다. 독자와는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아마추어'기 때문에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플라비아도 그렇다. 화학 실험, 그 중에서도 독극물에 열중하지만 살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화학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 그리고 두 언니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행하는 작은 장난 수준이다. 화학을 가장 좋아하지만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플라비아는 그저 자리에서 회색 뇌세포를 이용해 사건을 풀어가는 타입이 아니라 마치 사냥개처럼 여기저기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발랄한 소녀다. 때로는 서슴없이 독설을 날리는 이 앙큼한 소녀가 돋보이는 순간은 역시 그래도 열한 살짜리 꼬마다움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살인범으로 체포되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피해자를 죽였다고 터무니 없는 고백을 하는 장면에서 암만 쎈 척하고 똑똑한 척하는 꼬마지만 역시 아직 애구나 하는 생각에 슬몃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플라비아가 매력적인 이유는 때로는 오싹할 정도로 영리한 아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다운 매력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플라비아가 조금 더 어리바리했더라면 그저 꼬마 소녀의 모험담 정도에서 그쳤을 테고,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뭐 이런 징그러운 애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정 떨어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그 미묘한 균형을 잘 맞춰 '이런 사촌동생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동생일 경우 당할 숱한 복수는 바라지 않는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감 있는 책이지만 플라비아의 좌충우돌 모험을 따라가다보면 지루할 새가 없다. 아직 열한 살이니만큼 앞날이 창창한 플라비아.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는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 그리고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오랜만에 만난 앙큼한 소녀탐정, 그녀의 대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아주 딱 미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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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0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지 미스터리 친곤 500페이지면 상당히 두껍네요.저도 한나 스웬슨 시리즈를 9권(뭐 한권사면 수집벽상 멈출수가 없네용ㅜ.ㅜ)를 갖고 있지만 읽을때 마다 2%로 부족하단 생각을 갔는데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시리즈는 과연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이매지님의 리뷰를 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이매지 2011-08-09 22:59   좋아요 0 | URL
한나 스웨슨 시리즈는 전 당췌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ㅠㅠ
한나 시리즈가 뒤로 갈수록 연애담에 무게가 쏠리는데 반해서(어느 순간 그 맛에 읽게 되더군요)
이 꼬맹이는 탐정 놀이를 제대로 해요 ㅎㅎ
귀여운 꼬마 탐정이니 한번 만나보셔요~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 매드 픽션 클럽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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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쏟아지는 비, 거세게 부는 바람, 태풍은 그것을 접한 사람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가 쏟아지던 날 읽으면 더 실감났었을 이야기, 미치오 슈스케의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이다. 원제는 <용신의 비>지만 한국어판은 그보다 더 시적이고 내용과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워낙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라 과연 어떤 작품부터 읽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그중에 가장 '무난'하다는 평을 받은 이 작품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미치오 슈스케란 작가의 성향을 파악하기에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해 엄마를 잃은 렌과 가에다. 새아버지가 일은 하지 않고 빈둥대는데다가 폭력을 일삼고, 동생 가에다를 성추행까지 해서 렌은 새아버지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한편, 아빠를 병으로 잃고 새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다쓰야와 게이스케 형제. 다쓰야는 사실은 새엄마가 엄마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였다고 생각하며 늘 새엄마를 괴롭히고, 그런 형과 새엄마 사이에서 동생 케이스케는 우왕좌왕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부모와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는 이들의 운명은 어느 비오는 날 얽히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의 가정 환경 때문인지 어딘가 사회파 추리소설 같은 느낌도 들면서 긴장감 있는 전개가 돋보였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부모에 대해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살인사건에 얽히면서 가족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지만 그 속에 잔가지들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반전처럼 등장하는 이야기가 다소 뜸금없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의외의 결말이 이어지는 데에는 가벼운 충격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설정 때문에 맥이 빠지는 듯했다. 비 갠 후의 하늘이 더 맑은 것처럼 고생 끝에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이들이 살아갈 날들은 더 맑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미치오 슈스케.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는 다소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일단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들어 많은 작품이 번역되고 있는 작가니만큼 앞으로 만나게 될 작품이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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