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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바닥의 달콤함 ㅣ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 1
앨런 브래들리 지음, 성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플라비아 들루스 미스터리의 첫 권인 <파이 바닥의 달콤함>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나 스웬슨 시리즈였다. 코지 미스터리로 장르도 같은데다가 제목에 음식명이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이 바닥의 달콤함>을 열 장도 채 읽기 전에 같은 코지 미스터리일지는 몰라도 한나 스웬슨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나 스웬슨 시리즈는 작은 마을에서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하는 삼십대 미혼녀 한나의 연애담과 살인사건 그리고 특제 레시피가 어우러져 진행된다면 플라비아 들루스 시리즈는 화학 덕후인 십대 소녀의 재기발랄한 모험담에 곁가지로 파이가 곁들여진다. 성격은 전혀 다르다 하여도 오랜만에 읽는 코지 미스터리. <파이 바닥의 달콤함>은 먹는 위치에 따라 맛이 제각각인 파이처럼 페이지마다 제각각 다른 맛으로 다가왔다.
외모에만 관심을 쏟는 첫째 언니 오필리어와 늘 책에 몰입해 대사를 따라하기 일쑤인 둘째 언니 대프니, 아내가 떠난 후 가족에게 심드렁하지만 우표수집광인 아버지, 어딘가 모자라지만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정원사 도거, 너무나 맛이 없어 아무도 손대지 않는 파이를 만드는 가정부 멀릿 부인. 그리고 이들과 함께 벅쇼 저택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 플라비아 들루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뭔가 건수를 찾아 돌아다니고, 운명처럼 만난 화학 공식 속에서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괴짜 소녀 플라비아.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언니에게 립스틱에 독소를 집어넣어 입술이 부풀어오르게 하는 식의 복수로 일상의 무료함과 반항심을 달랜다. 그렇게 별 일 없는 일상을 보내던 플라비아의 집 문앞에서 부리에 우표가 꽂힌 채로 죽어 있는 꼬마도요새가 발견된다. 그냥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인가 싶지만, 새의 시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새를 본 아버지는 뭔가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날 밤, 플라비아는 아버지가 서재에서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 다음 날 새벽에는 아버지를 협박한 남자가 오이밭에서 죽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대체 이 정체 모를 남자는 누구인가. 아버지가 그를 죽인 것인가 등 정답을 알 수 없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플라비아는 본격적인 조사에 나서게 되는데……
독자와 작가의 두뇌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 정교한 트릭이 등장하는 정통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코지 미스터리를 읽는 것은 정통 미스터리에서 만날 수 없었던(혹은 정통 미스터리와는 다른 매력의)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대개 추리소설 하면 먼저 떠올릴 피가 난자하는 현장이라던지,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번뜩이는 트릭 그리고 그것을 간파해내는 탐정은 코지 미스터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정통 미스터리 속의 주인공이 어깨에 힘이 들어간 '프로'라면 코지 미스터리 속의 주인공들은 '아마추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숙한 면도 보이고, 사건을 해결해가며 실수도 하지만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매력으로 다가온다. 독자와는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아마추어'기 때문에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플라비아도 그렇다. 화학 실험, 그 중에서도 독극물에 열중하지만 살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화학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 그리고 두 언니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행하는 작은 장난 수준이다. 화학을 가장 좋아하지만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플라비아는 그저 자리에서 회색 뇌세포를 이용해 사건을 풀어가는 타입이 아니라 마치 사냥개처럼 여기저기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발랄한 소녀다. 때로는 서슴없이 독설을 날리는 이 앙큼한 소녀가 돋보이는 순간은 역시 그래도 열한 살짜리 꼬마다움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살인범으로 체포되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피해자를 죽였다고 터무니 없는 고백을 하는 장면에서 암만 쎈 척하고 똑똑한 척하는 꼬마지만 역시 아직 애구나 하는 생각에 슬몃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플라비아가 매력적인 이유는 때로는 오싹할 정도로 영리한 아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다운 매력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플라비아가 조금 더 어리바리했더라면 그저 꼬마 소녀의 모험담 정도에서 그쳤을 테고,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뭐 이런 징그러운 애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정 떨어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그 미묘한 균형을 잘 맞춰 '이런 사촌동생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동생일 경우 당할 숱한 복수는 바라지 않는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감 있는 책이지만 플라비아의 좌충우돌 모험을 따라가다보면 지루할 새가 없다. 아직 열한 살이니만큼 앞날이 창창한 플라비아.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는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 그리고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오랜만에 만난 앙큼한 소녀탐정, 그녀의 대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아주 딱 미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