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시대의 우리 사회에서 차이는 곧 차별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커다란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차이에 대한 차별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차별들은 실상 사회의 근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우리 사회와 그 성원들의 근본적인 반성과 대책이 없으면 사라지기 힘든 것이었다. 당연하면서도 또 다행스럽게 민주화 이후 우리의 시민사회에서, 주변의 현실에서 새로운 이슈로 떠오른 것이 이같은 ‘차별’과 차별받는 이의 ‘인권’이며, 그에 따라 ‘차별’과 ‘인권’의 내용도 새로이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도, 수적인 다수와 소수의 문제도 아닌 여러 층위를 지니는 현재 우리 사회의 ‘차별’과 ‘인권’의 문제를 일반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창비가 펴내는 두번째 인권만화책

그리하여 ‘차별’과 ‘인권’의 문제를 일반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면서도,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줄 수 있는 형태로 다루어보고자 한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하고 창비에서 편집·출간한 인권만화책 『사이시옷』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인권영화, 인권동화, 인권사진집 등과 함께 인권만화 콘텐츠 사업을 진행해온바, 이 책에 실린 여덟 명의 작가의 작품들은 워크숍에서부터 창작에 이르기까지 1년여에 걸친 두번째 인권만화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첫번째 인권만화는 역시 창비에서 2003년에 출간해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십시일反』이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차별을 뒤집어보는 ‘만화 인권교과서’

두 낱말이 어울려 한 낱말을 이룰 때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사이시옷’. 여덟 편의 만화들에는 이 책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줄 ‘시옷’과 같은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시옷’(ㅅ)이 사람(人)에 대한 진정어린 생각, 편견 없는 생각이라면, 그리하여 이름에 담긴 뜻처럼 이 책이 사람들 사이를 이으면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권의 문제를 생각하게 해주길 기대하는 마음도 더불어 담겨 있다. 『십시일反』과 더불어 일반 성인독자들은 물론이고 청소년도 볼 수 있는 ‘만화 인권교과서’라 해도 무방하다. 이번 책에서는 『십시일反』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은 비정규직, 학력사회, 학생, 비혼모, 군대를 비롯해 동성애자, 장애인, 여성 등 차별과 관련된 다양한 모습을 때로는 재치 넘친 한컷짜리 풍자만화로, 때로는 사실적인 단편만화로 그려냈다.

우리 안의 그들, 그들 안의 우리

여타의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없지만 늘 다르게 살아가야만 하는 비정규직, 동성애자, 장애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손문상은 우리 일상의 단면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을 촌철살인의 필치로 풍자하는 한편, 「완전한 만남」에서는 병원 파업 현장에서 일어난 비정규직 어머니와 용역업체 직원 아들 간의 기막힌 만남을 포착했다. 이애림은 「그는」에서 동성애자들은 특별하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동성애자인 ‘그’는 게으르면서 외로움도 타고 노는 걸 좋아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여타의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건실한 젊은이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배우 은혜」에서 장차현실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딸 은혜’가 긍정적이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여배우’로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동정 어린 시선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믿음임을 그리고 있다.

아찔한 상상, 어찔한 현실

갖가지 차별로 얼룩진 지금의 현실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비틀었다. 홍윤표는 「이상한 나라의 홍대리」에서 우리 사회의 도처에 존재하는, 성차별을 비롯한 다양한 차별들을 호명해낸다. 그리하여 온갖 차별이 시스템으로 공고화된 가상의 미래사회는 다름아닌 현재의 뒷모습이라고 가볍지만 신랄하게 야유한다. 오영진과 정훈이는 학력사회와 학생들의 인권문제를 다룬다. 오영진은 「새대가리」에서 우리 모두 새였음에도 하늘을 날 수 없는 날개 꺾인 새들만을 양산해내며 ‘대학’만을 목적으로 하는 학력사회의 병폐를 질타한다. 정훈이는 「해리포터와 호구왔다 마법학교」에서 입시라는 마법이 지배하는 교육현장과, 거기서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빈부간의 차별 속에서 신음하는 학생들의 인권문제를 특유의 패러디로 묘사했다.

복장불량 자세불량

비혼모, 군인 등 우리 사회의 주변에 서 있는 젊은 세대들의 고민과 갈등을 스케치했다. 유승하는 「축복」에서 비혼모 문제를 사실적으로 묘파하면서,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이 비혼모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경계한다. 최규석은 「창」에서 가해자의 시선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의 극적 반전을 통해 군대 내 인권문제의 미묘한 지점을 짚어낸다. 현재 군대 내의 인권상황과 그에 대한 시선 등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한편으로 우리 사회 인권문제의 축도를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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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가 큰사람을 만든다! 큰사람, 큰사회를 만드는 선비의 바른소리!
유교적 휴머니즘과 실학을 결합한 이덕무 사상의 정수가 사람답게 살기 위한 현대적 생활지침으로 부활한다!
어지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조상들의 귀한 가르침을 되새겨주는 21세기 修身書!


타임머신을 타고 온 선비가 들려주는 ‘사람이 지켜야 할 모든 것’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연암 박지원에 버금가는 대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박지원의 명성에 가려 있던 이덕무의 문학과 사상에 관한 재평가가 요즈음 여러 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는 당시 도덕과 예절이 무너져 사회 전체가 피폐해져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작은 예절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사소절(士小節)』을 집필했다. ‘사소절’은 선비의 작은 예절이란 뜻이지만, 당시 ‘선비’란 이상적인 인간의 전형이었던 만큼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덕무는 『사소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를 지켜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유교적 휴머니즘이라는 철학에 입각,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들을 자세하게 규정했다. 그래서 『사소절』은 단순히 예절을 나열한 책도 아니고, 사상을 장황하게 설명한 책도 아닌, 문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실용적인 수신서가 되었다.

작가 조성기는 이덕무가 그 시대에 고민하며 세우고자 했던 작은 예절들의 성격을 살펴보고 그 뜻을 우리 시대에 적용해보고자 『사소절』을 새롭게 풀어쓴 『양반가문의 쓴소리』를 집필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이 우리 사회에서 ‘작은 예절 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어지러운 이 시대를 바로잡는 작은 불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작업을 거쳐 이덕무의 『사소절』은 이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몸가짐, 인간관계, 생각과 태도 등 모든 면에서 올바르게 이끌어 줄 현대의 수신서로 다시 부활했다.


생활 속 작은 예절들을 통해 되살아나는 선비들의 흥미진진한 생활풍속

우리는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때로는 자상하고 때로는 근엄했던 선비의 참모습과 만나게 된다. 그 시대의 이상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존재였던 ‘선비’. 그들은 현대의 우리들과 똑같이 고상함과 비속함, 빈한한 현실과 높은 이상, 체면과 실리 사이에서 고뇌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덕무는 잔소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시콜콜하게 느껴지는 부분까지 지적한다. 예를 들어 남의 집에서는 요강을 사용하지 말라거나(268쪽), 남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나 벼룩을 잡지 말고 손으로 때를 밀지 말라(284쪽)고 충고하는 부분에서 위생상태가 좋지 않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갖추지 못했던 시절에도 선비의 품위를 잃지 말기를 바랐던 그의 뜻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스스로도 과하다 느꼈던지, 잔소리가 아니라 다만 사람이 추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부득이 그런 말을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남자는 옷과 관을 바르게 하고, 바라보는 태도를 존엄하게 하기 위한 두 가지 경우에만 거울을 본다고 한 부분(238쪽)에서는 당시 남자가 거울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덕무는 또한 거울을 보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한 표정을 연습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구역질이 난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가 아름다운 표정을 자신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삼는 현대인들을 보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남녀관계를 정리할 때는 단호하게 하라(261쪽), 과거시험(대학입시 또는 고시) 보는 사람을 들뜨게 하거나 겁주지 말라(156쪽), 관직을 받은 사람을 축하할 때(입사나 승진을 축하할 때) 월급을 물어보지 말라(170쪽) 등에서는 사람 사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신랑을 거꾸로 매달지 말라(265쪽), 술을 마실 때는 이전의 실수를 기억하고 과하게 마시지 말며, 단번에 마시거나 남에게 강권하지 말라(209쪽)는 부분에서는 그러한 풍속이 전통이라기보다는 예전부터 경계했던 악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말을 타고 가다가 농부들이 새참 먹는 곳을 지나칠 때는 말에서 내려라(319쪽), 친척의 부인을 대할 때에도 정중한 예로 대하라(317쪽)는 부분에서는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하던 ‘선비’가 아닌 인간으로서 성숙을 추구했던 ‘선비’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자가용을 운전할 때, 길에서 걷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흙먼지를 일으키거나 비오는 날 속도를 올리며 물을 튀기는 현대인이라면, 마땅히 선비의 ‘하마(下馬)의 예(禮)’(말에서 내리는 예절)를 배워야 할 것이다.


“작은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큰 덕을 허물게 된다”

이덕무는 자신이 『사소절』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책머리에 밝히면서 『서경(書經)』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불긍세행, 종루대덕 不矜細行, 終累大德 (작은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큰 덕을 허물게 될 것이다)

◇ 말을 할 때는 몸을 흔들지 말고, 물건을 만지작거리지 말라(230쪽)
이덕무는 ‘말을 할 때 해서는 안 되는 동작들’을 상세하게 규정해 놓았다. 말할 때 무의식 중에 산만한 동작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현대에도 유용한 지침인지 알 수 있다.

◇ 음식이 차려지면 지체하지 말라(199쪽)
아마도 가정주부가 가족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사소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예절 하나에도 음식을 차린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함께 식사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음식과 관련, 너무 커서 한입에 다 안 들어가는 김치는 베어먹은 후 원래 접시에 놓지 말라(217쪽)는 부분에서도 섬세하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 아는 이야기라도 상대방이 신나게 이야기하면 끝까지 들어준다(148쪽)
이덕무는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장황하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지침을 제시하는 한편, 경청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다소 사려 깊지 않더라도 이해하며 포용하라고 충고한다.

◇ 절대로 대답해서는 안 되는 말들(140P)
이덕무는 음란하거나 남을 비난하는 말 등에는 대답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대화를 단절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깨지 않게 슬그머니 물러나거나 못 들은 척하라고 권하고 있어, 어디까지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입장을 보여준다.

◇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약점(75쪽)
이덕무는 강한 자는 스스로 거룩한 체하다가 넘어지고 약한 자는 스스로 포기하기를 잘한다고 지적하며 독선과 나약함을 동시에 경계한다.

◇ 여름에 질병 때문에 긴소매 옷을 입은 사람 앞에서 더위를 불평하지 말라(172쪽)
겨울에 얇은 옷을 입은 사람 앞에서 춥다고 하지 말며, 굶는 사람 옆에서 음식을 불평하지 말 것 등, 어려운 이웃이 옆에 있을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 관대함과 게으름, 강직함과 과격함, 좀스러움과 치밀함, 줏대 없이 뒤섞이는 것과 화합하는 것을 구별하라(27쪽)
이덕무는 사람의 성품에서 혼동하기 쉬운 6가지를 지적하며 이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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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에 빠진 서구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과 원대한 희망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사가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학문적 탐구의 체계성이나 현기증 나는 정합성을 보여주기보다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종교사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이미 국내에도 엘리아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저작이 많이 출간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은 완전한 인간, 그 총체성의 신비를 꿈꾸었던 엘리아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저작이다. 또한 문학동네로서는 『대장장이와 연금술사』(1999)에 이은 엘리아데의 두 번째 저작인 셈이다.
『성과 속』『종교형태론』『세계종교사상사』 등의 저작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들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인간 존재의 무한성과 사유의 신비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밀도를 자랑한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에세이 중 앞의 네 편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아스코나에서 에라노스 연감을 위해 발표한 것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인도, 이탈리아, 말년에는 현대사상의 용광로 미국에서 생을 마친 종교학의 오디세우스 엘리아데. 그는 성스러움과 비속함, 숨겨진 것의 드러남, 중심의 상징, 반대의 일치와 같은 기본 개념들을 이용해 샤머니즘, 요가, 신화, 의례 등의 종교적 주제를 살핀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이 작은 책에 모은 연구들은 몇몇 비유럽적인 종교적 행동양식과 정신적 가치관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려고 근심하는 한 종교사학자의 행보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구태에 빠진 서구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과 원대한 희망을 불어넣으려 했던 완숙기에 접어든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은 동서양의 구분을 떠나 인간의 신화와 역사, 상징과 상상력의 광활함을 접한다는 데 있다.

완전한 인간, 안팎이 균형 잡힌 인간을 향한 종교적 탐색

이 책의 압권은 단연 표제작인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이지만 다른 에세이들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럼 간략하게나마 각 에세이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신비한 빛의 경험」에서 엘리아데는 서양의 기독교적인 빛의 체험을 시작으로, 유대교와 에스키모 샤먼, 동양의 여러 종교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빛의 체험을 바탕으로 초자연적인 빛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 속성과 강도가 어떠하든 간에 빛의 체험은 언제나 종교적인 체험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 경험들은 인간을 속된 세계나 역사적 상황에서 끌어내어 질적으로 다른 우주에 던져놓는데, 이는 신성하고 초월적이며 전혀 다른 세계다. 이 같은 빛과의 대면에 따라 발견되는 우주는 정신적인 본질을 가진 것, 즉 정신을 가진 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속된 우주와 대립하거나 이를 초월한다. 빛과의 만남은 이처럼 주체의 실존에 단절을 야기하는데, 이 만남은 인간에게 신의 작품으로서의 실존 또는 신의 현존에 의해 신성화한 세계를 밝혀주거나 이전보다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인도나 페르시아, 아시아 여러 지역의 다양한 농경 축제는 결국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역사적으로 한정된 특정한 상황을 초월함으로써 초인간적이며 근원적인 상황을 되찾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농작물을 수확했을 때나 새해를 맞았을 때 통음난무가 벌어지는 이유는 첫번째의 경우 농사의 풍성함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며, 두번째 경우에는 천지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힘, 우주를 탄생시킨 그 무한한 힘을 얻어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상징한다. 새로 시작하는 한 해는 창조의 과정에 있는 세계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또는 총체성의 신비」에서는 샤머니즘의 일부 의례에서 나타나는 무성이나 양성의 최종 목적 또는 신화적 당위성은 바로 인간의 변화에 있다는 점을 말한다. 즉 양성적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대립적인 요소들을 현실의 상호보완적인 다양한 측면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통일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욕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고대의 주제와 모티프들이 오늘날의 민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총체성의 신비가 인간 드라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신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인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신화와 민속, 현대인의 꿈과 환상 그리고 예술적 창작물 등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우주의 갱신과 종말론」은 멜라네시아의 ‘화물 숭배’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적 천년주의 사고를 토대로, 우주의 종말론과 우주의 주기적인 탄생의 의미를 조명한다. 이른바 ‘원시종교’에서는 새해에 첫날이 시작되는 것은 우주의 탄생을 재현하는 것으로 여긴다. 즉 우주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가 재현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과거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종교적인 욕망과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그 근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따라서 ‘처음으로’라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하겠으니, 세상의 개혁을 추구하는 수많은 제의와 의식, 반복적인 우주 생성의 열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벌써 오래 전에 육체적 노동의 종교적인 의미와 그 유기적인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종교적인 의미가 아직 살아 있는 곳조차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술과 유럽적인 이념들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전통적인 인간은 입문의 경험이 주었던 그 충격을 주기적으로 다시 느낄 필요성을 중시해야만 종교적인 의미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밧줄과 마술」에서도 엘리아데는 석가모니의 일화라든가 고대 인도, 이븐 바투타가 목격한 중국의 밧줄 묘기, 심지어 비동양(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밧줄 묘기에 관한 풍부한 사례를 근거로 그 의미를 밝혀나가고 있다. 여기서 줄이라든가 밧줄, 엮기, 짜기 따위의 이미지들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 이미지들은 선택받은 특별한 상황, 곧 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든가 우주적인 근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속적이고 구속되어 있으며 미리 운명지어져 있는 불쌍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표현하기도 한다. 엘리아데는 이 두 경우에 공통적으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전제하지만, 첫번째 경우 인간은 그의 조물주 또는 그의 우주적 근원과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을, 두번째 경우에는 반대로 ‘마술’에 의해 또는 자신의 과거에 속박당한 채 운명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한다.

「종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앞의 네 편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 글에서 엘리아데는 종교적 상징을 대하는 기본 관점과 함께 종교사학자들의 의무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뿐만 아니라 아직도 편협하고 폐쇄적인 종교관이 널리 퍼져 있는 우리 종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엘리아데는 문헌학, 역사학, 고고학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인 동료들의 연구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연구 결과를 이해하거나 반박하고, 그리하여 그러한 자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을 종합해야 하는 것을 종교사학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또한 엘리아데는 종교적 주제에 대한 모든 연구는 종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며, 종교적 상징의 존재론적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종교적 상징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우주적인 어휘로 해석하지만, 반대로 우주적인 상황을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기도 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상징은 인간 존재의 구조와 우주적인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관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상징으로 인하여 ‘친근하게’ 느껴지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성의 우주적 가치는 인간으로 하여금 주관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객관적인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상징을 이해하는 인간은 객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이해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눈, 그리고 나 자신을 보는 새로운 눈
서글프게도 서양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발견한 우리에게, 비서양인이면서 어설프게나마 합리성의 세례를 받은 현대의 우리에게 이 책은 동양적이며 친숙하다고 믿었던 불교와 샤머니즘의 변화무쌍하고 낯선 면면을 보여준다. 또한 합리성의 고향인 그리스나 선악의 종교인 기독교의 세계도 마치 인도의 신화만큼이나 다채로운 모순과 ‘대립의 합일’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냉전이 종식되고 전쟁은 국지화되며, 종교가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21세기 초엽에 “문화들간의 만남 또는 충돌은 결국 정신성의, 그리고 종교들간의 만남”이라는 엘리아데의 명제는 마치 고대의 신탁이나 선지자들의 예언처럼 다가온다. 그의 말대로 ‘이방 세계’를 잘 분석하기 위해 종교적 행위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면, 종교학은 경제학자와 정치학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아데가 추구하는 것은 이처럼 눈에 쉽게 드러나는 실용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의식과 이방과 고대의 세계까지 탐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현대인들에게 이미 낯설 만큼 동떨어진 것이지만 인간이 자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인간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문화도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에스키모의 샤머니즘도 불교나 기독교 못지않게 존중되어야 하며, 성적 소수자를 포함한 고정관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낯선 이들도 진지한 이해와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서론을 제외한 책의 본문은 따로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시론마다 잘 정리된 결론이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엘리아데가 보여주는 황홀한 정신의 빛을 따라 초월의 세계를 맛보거나 ‘완전히 다른 것’과의 만남을 통해 ‘막연한 종교적 경험들’에 빠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노장철학에서나 만날 법한 ‘대립의 합일’이라는 개념이 세계의 문화 풍경을 관통하며 다채로운 파노라마를 그려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1907∼1986)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종교사가인 엘리아데는 190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 연구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인도 캘커타 대학에서 3년간 산스크리트와 인도 철학을 공부했으며, 1933년 부쿠레슈티 대학으로 돌아와 요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부쿠레슈티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5년 파리 소르본 대학 종교학 객원교수가 되었고, 1956년 시카고 대학 종교사 교수로 부임하여 1986년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30년 이상을 가르쳤다. 주요 저서로『세계종교사상사』『영원한 회귀의 신화』『샤머니즘』『우주와 역사』『이미지와 상징』『종교형태론』『성과 속』 『요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등이 있다.

옮긴이 최건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불문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파리 8대학 불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SBS, MBC, EBS, Q채널 번역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말라르메와 노장」 등이 있다.


옮긴이 임왕준
연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파리 4대학에서 「앙드레 말로에 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옮긴 책으로 『로라, 내 아름다운 파출부』 『사랑』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삶과 죽음의 명장면』 『이별의 기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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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많은 번역 책을 출간한 국가는 독일(21만8277회)이며, 일본은 5위(9만194회) , 미국 13위(3만9580회), 한국은 19위(2만1489회)인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별로는 영어가 총 86만회로 1위를 차지해 2위인 프랑스(약 16만회)보다 무려 약 5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일보》 2006년 1월 9일자 기사에서

이 책은...
/ 서양사 교수이자 인문학술 분야 번역가인 저자가 수 년 동안 번역 작업을 해오면서 몸소 체험한 한국 번역 문화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진단한 책. 저자는 일반적으로 번역의 불완전성,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담론을 부정하고, 오히려 우리 문화의 질적․양적 확장을 꾀할 수 있는 번역 작업을 기피하고 대학원생들에게 떠넘기는 저질 교수의 행태야말로 반역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논문 쓰기만이 교수의 주요 업적으로 인정하는 대학 연구 풍토, 저자에 비해 번역가를 대우해주지 않는 출판 시장 구조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번역 문화의 부실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서유럽, 이슬람, 일본, 중국의 역사를 번역을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한 점은 색다른 시도라고 평가할 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그들이 선진 문화의 꽃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 작업을 주도했기 때문이라는 것. 반면 우리 사회는 모국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최근에 와서야 번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번역 사업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지원은 미비하다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번역가로서 현장에서 체험한 경험을 토대로 실제 번역 작업을 할 때에 부닥치는 현실적 문제들과 한계,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대안, 미래의 번역가들을 위한 실무적 조언 등을 모두 털어놓는다. /




번역이 반역이라고?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모든 번역은 오역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그만큼 번역의 어려움, 더 나아가 불가능성을 언급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번역은 오히려 눈에 거슬린다. 저자와 일대일로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번역가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번역은 반역이다’라고 외친다. 설마 그래서 그런 것일까? 한국 사회에 번역서가 부족하다. ‘번역은 반역’이기에 우리네 지식인들은 번역 작업에 뛰어들지 않는 것일까. 더 심각한 현상은 오역 시비에 휘말리는 번역서는 많아도 잘된 번역서를 만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근원적 차원에서 ‘번역은 오역이다’가 아니라 번역자가 제대로 번역하지 못해 ‘오역’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볼테르나 해럴드 블룸의 말처럼 번역은 반역이 될 수도 있다. 번역을 둘러싼 논의는 이렇게 번역의 근본적 문제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번역 수준, 환경, 문화가 튼실하지 않는 우리네 출판 구조 속에서 번역의 근원적 문제를 먼저 논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지금까지 번역한 책의 양이 세계 19위(21,489회)에 불과한 국내 번역 상황을 놓고 보면 우리에게 더 시급한 문제는 번역의 중요성, 필요성을 깨닫는 게 아닐까. 더군다나 엉터리로 번역된 책이 서점에 버젓이 얼굴을 내미는 상황이라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그저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번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더디지만 꾸준히 그리고 정확히 번역을 하고자 노력해온 저자 박상익은 ‘번역은 반역이 아닐 뿐더러, 우리는 그들처럼 번역의 근원적 문제를 따지고 있을 팔자가 아니다’고 꼬집는다.


한국의 번역 문화, 무엇이 문제인가
대체 한국의 번역 문화와 수준이 어떻기에 저자는 번역의 원론적 이야기에 손사래를 치는 것일까. 물론 저자는 번역은 가능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그동안 여러 언론 지상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한국 번역 문화를 직접 체험한 경험을 총동원해 이 책을 사뭇 ‘조심스럽게’ 내놓은 것이다. 본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그동안 관행처럼 여겨온 우리 사회의 번역 실태를 미천한 번역자가 건드리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독자(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 덕에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가 우리 번역 문화를 개선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날카로운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먼저 대학 교수직이라는 거미줄에 안주하며 대학원생을 시켜 수준 이하의 번역서를 자랑스럽게 출간해온 이른바 ‘매춘교수’를 겨냥한다. 교수 신분인 저자가 교수를 상대로 신랄한 비판적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교수 문화의 경직성을 생각한다면 자못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지식인의 침묵이야말로 반역이다.
황우석 사건에서도 여러 차례 문제화된 교수와 대학원생 간의 종속적 관계가 번역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수가 대학원생들에게 번역거리를 던져주면 학생들은 그걸 거절하지 못하고 밤을 새워 번역 작업에 매달린다. 교수는 그렇게 어설프게 번역된 결과물을 가져다가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떡하니 번역서를 출판한다. 그러니 아무리 출판사에서 원고를 가다듬는다 해도 원서보다 더 어려운 번역서가 탄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행이 그동안 번역서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되어 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물론 여기에는 더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 대학의 연구 풍토 탓에 교수들은 번역을 그저 소일거리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번역을 중요한 연구 과제의 하나로 삼고, 각종 고전을 충실히 번역하는 것도 논문의 일종으로 여기는 일본․미국․독일 대학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른바 잘 팔리는 책만 골라 단기간에 번역․출판하는 능력은 비범해도 십 년, 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힐 고전을 번역하는 데는 인색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이미 1백 년 전에 번역된 버크와 몽테스키외의 저작 등은 아직도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고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말 할 것도 없다.
인기 있는 외국 책이라도 제대로 번역해서 출간하면 그나마 낫다고 말한다. 상당한 자본력과 인력을 갖추고 있는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백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번역서에서도 숱한 오역, 비문 등이 지적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저자는 그 사례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지적한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우리 사회는 지금도 번역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고, 번역 작업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는 것일까. 그래서 저자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의 주요 문명권에서 일찍부터 행해져온 번역의 역사를 살펴보고 우리의 그것과 어떻게 달랐는지 따져본다.


번역은 왜 중요한가
십자군 원정을 통해 ‘야만족’ 이슬람을 정복한 서유럽은 오히려 자신들이 ‘야만족’이었음을 이슬람 문명의 심장부에서 절감해야 했다. 자신들이 계승하지 못한 그리스․로마 철학을 이슬람 사회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의 힘이었다. 아랍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모든 저술을 아랍어로 완벽히 번역했고, 그것을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기까지 했다. 자극을 받은 서유럽도 번역에 빠져 들었다.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른바 ‘12세기의 르네상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기간이 ‘번역의 시대Age of Translation’라고 불리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결국 번역이 있었기에 그리스․로마 문명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서유럽 문명으로 이식될 수 있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번역국이라는 정부 기구를 설치해 외국 서적을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 대대적으로 번역했다. 수많은 번역서의 홍수 속에서 번역서를 안내하는 책이 출간되어야만 할 정도였다. 오늘의 일본은 메이지 시대 번역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술 용어들(사회, 자유, 평등, 권리, 인권, 정의, 시간, 공간……)은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 문화를 수용․번역하면서 탄생시킨 단어들이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일본의 이러한 번역 노력에 많은 빚을 진 셈이다.
우리의 번역사는 어떠한가.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칭송 받는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글로 된 텍스트, 콘텐츠 축적을 외면한 게 사실이다.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한글을 천시하고 한자 공부에만 매달렸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모국어는 더 심한 천대를 받아야 했다.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다. 일본어에 능통한 당시 지식인은 한글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기나 했을까. 해방 후 한글세대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번역의 필요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부터라도 번역이 제대로 되었을까. 일본책을 중역한 책이 쏟아지면서 왜색이 그대로 드러난 출판물이 서점가를 점령한 사태는 먼 나라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화의 바람은 번역 문화에도 들이쳤다. 영어공용화론이 고개를 들었고, 심지어 한국어는 국제 경쟁력이 없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다고 단언하는 주장이 솔솔 풍기기까지 했다. 한글보다 영어를 먼저 깨치는 세대가 도래하면 번역은 자연스레 도태할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모국어의 이런 처지를 두고 ‘슬픈 모국어’라 했다.
그러나 모국어는 영혼과 맞닿아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슬람이 아랍어를 버리고 로마․그리스어를 받아들였다면, 서유럽이 라틴어를 버리고 아랍어를 수용했다면, 그들의 문명이 그토록 발전할 수 있었을까. 철저히 서구를 배우고자 했던 일본이 일본어를 버리기는커녕 모든 문화를 일본화하려 했다는 점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요컨대 번역은 단순히 한 문자가 다른 문자로 일대일 대치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의 사상이, 한 나라의 문화가, 한 시대의 철학이 다른 민족, 다른 나라, 다른 시대로 전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고로 문화의 확장은 바로 번역에서부터 시작한다.


지식인의 반역과 대중의 반란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번역은 반역’이라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이야말로 반역이다. 논문 쓰기에만 매진하면서 번역은 학자가 할 일이 아니라며 고상함을 떠는, 그래서 대학원생들에게 번역을 떠넘기는 일부 교수들이야말로 반역이다. 잘못된 번역 문화가 반역인 것인지 번역 그 자체가 반역은 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번역 문화가 잘못되어 있다고, 그래서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은 오히려 독자다. 권위와 자존심으로 무장한 대학 교수를 포함한 지식인층을 질타하는 것은 종속적인 학제관계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대학 밖으로 뛰쳐나온 이른바 독립연구학자들이다. 비도덕적 출판사를 감시하고, 번역서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개개인이 모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단은 다름 아닌 네티즌이다. 독자와 네티즌의 눈이 높아가면서, 학연에 연연하지 않는 실력파 연구자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고질적인 번역 문화가 개선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 한 가지
번역가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출판사가 번역서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해도 독서 문화의 근본적인 개선이 없다면, 그것을 위한 사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는다면, 번역을 통한 문화 확장은 외연에 그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 도서관다운 도서관이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번역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좋은 책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출판 시장이 건강하지 않으면 출판사가 허덕이고, 책은 당연히 병에 걸린 채 나올 수밖에 없다. 번역가와 편집자에 대한 대우도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돈 되는 책은 쏟아져 나오지만, 정신과 문화를 살찌우는 책은 빛을 보기 어렵다. 메이지 시대 일본, 중세 이슬람, 서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고전 번역 사업에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밖에 되지 않는 예산을 책정하는 우리 정부의 쫀쫀함으로는 그들이 누린 찬란한 문명을 쉽게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http://www.bluehisto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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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경제학>처럼 생활 속의 문제를 갖고 경제학에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책.
let's look을 통해서 스타벅스 커피는 왜 비싼 가격에도 잘 팔리는 것인가에 대해서
잠깐 엿보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통해서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이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지 보여주는 것도
아무래도 이해하는 데 좀 더 쉽게 다가오기도 하고.
스타벅스, 슈퍼마켓, 출퇴근과 같은 생활과 관련된 요소들을 통해서 본 경제학.
재미있을 것 같다.


솔직히 가격은 비싸다.
31500원이란 가격은 학생에게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전에 두 권으로 출간된 것을 한 권으로 묶어서 낸 개정판인데.
700페이지가 넘는 두께이긴 하지만 가격은 확실히 부담.
삼국유사의 무대를 HD 동영상으로 재현한 DVD를 준다는데.
그거때문에 가격이 꽤 쎄진 건가.
표지디자인도 참 맘에 드는데. 고민 좀 해봐야겠다.



며칠 전 읽은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라는 책에서
유독 이덕무의 <사소절>에서 인용한 부분이 많아서 관심이 갔는데.
마침 그와 관련된 책이 새로 나왔다.
사소절. 즉 선비의 작은 예절.
어떤 것들이 있는지 현대 생활에 비추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이 두 권이나 새로 나왔다.
정확한 책 정보가 없어서 열린책들 홈페이지에 가봤는데.
거기에도 아직 업데이트가 안 되어 있다.
하기사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면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좀 있다가 정확한 정보가 올라오면 사야겠다.
그나저나, 사랑을 생각하다의 노란표지 참 맘에 든다.



예전에 열림원에서 나왔던 <렉싱턴의 유령>이
문학사상사에서 새로 나왔다.
기왕에 새로 출간할꺼였으면,
얼마 전에 토니 타키타니가 개봉했을 때 나오면 좋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이. 
표지도 예전에 하루키 사진으로 된 표지가 더 마음에 들고..
괜히 불만만 많다.
난 그냥 헌책방 뒤져서라도 예전판으로 살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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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08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는 사랑의 축구와 발견, 이라고 읽으면서, 책 제목 진짜 특이하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민망.

Kitty 2006-02-08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짜경제학은 지금 읽고있는데 꽤 재미있네요
저 책도 잼있으려나..

짱구아빠 2006-02-0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학 콘서트는 저도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박노자 선생의 최근 신작<당신들의 대한민국2>를 읽고 있습니다.

이매지 2006-02-0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 아하하.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또 그렇게 보이는 ^-^;
키티님 / 괴짜경제학. 좀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부분도 있었지만 쉽고 재미있어서 좋았는데. 저 책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짱구아빠님 / 당신들의 대한민국 2 저도 읽어야 할텐데. 개강하거들랑 ㅠ_ㅠ

stella.K 2006-02-0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스킨트가 시나리오 작법에 관한 책도 썼구만요. 괜찮을 것같은데요?^^

이매지 2006-02-0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이 시나리오 작법에 관한 책이었군요. 앗. 그냥 시나리오 같기도. 유일하게 쥐스킨트 책 중에서 로시니 혹은.. 만 안 읽어봐서 그거부터 읽어야겠어요.

사자는살아있다 2006-02-09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의 책고르기는 명쾌해요~

사자는살아있다 2006-02-09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의 책고르기는 명쾌해요~

이매지 2006-02-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자는 살아있다 / 앗. 처음뵙는군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__)

가넷 2006-02-1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년만인가요... 쥐스킨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콘트라베이스를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나저나 풍문에 폐암으로 죽은 줄 알아서 슬퍼 했는데 아닌 모양이군요...-.-
역시 지식in은 믿을께 못되나 봐요..

이매지 2006-02-10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스킨트 요새도 은둔자의 생활을 하고 있나보군요 ㅋㅋ 폐암으로 죽었다는 소문도 돌고 ㅋ

2006-02-20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매지 2006-02-20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무슨 책을 주문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