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에 빠진 서구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과 원대한 희망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사가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학문적 탐구의 체계성이나 현기증 나는 정합성을 보여주기보다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종교사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이미 국내에도 엘리아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저작이 많이 출간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은 완전한 인간, 그 총체성의 신비를 꿈꾸었던 엘리아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저작이다. 또한 문학동네로서는 『대장장이와 연금술사』(1999)에 이은 엘리아데의 두 번째 저작인 셈이다.
『성과 속』『종교형태론』『세계종교사상사』 등의 저작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들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인간 존재의 무한성과 사유의 신비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밀도를 자랑한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에세이 중 앞의 네 편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아스코나에서 에라노스 연감을 위해 발표한 것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인도, 이탈리아, 말년에는 현대사상의 용광로 미국에서 생을 마친 종교학의 오디세우스 엘리아데. 그는 성스러움과 비속함, 숨겨진 것의 드러남, 중심의 상징, 반대의 일치와 같은 기본 개념들을 이용해 샤머니즘, 요가, 신화, 의례 등의 종교적 주제를 살핀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이 작은 책에 모은 연구들은 몇몇 비유럽적인 종교적 행동양식과 정신적 가치관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려고 근심하는 한 종교사학자의 행보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구태에 빠진 서구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과 원대한 희망을 불어넣으려 했던 완숙기에 접어든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은 동서양의 구분을 떠나 인간의 신화와 역사, 상징과 상상력의 광활함을 접한다는 데 있다.

완전한 인간, 안팎이 균형 잡힌 인간을 향한 종교적 탐색

이 책의 압권은 단연 표제작인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이지만 다른 에세이들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럼 간략하게나마 각 에세이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신비한 빛의 경험」에서 엘리아데는 서양의 기독교적인 빛의 체험을 시작으로, 유대교와 에스키모 샤먼, 동양의 여러 종교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빛의 체험을 바탕으로 초자연적인 빛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 속성과 강도가 어떠하든 간에 빛의 체험은 언제나 종교적인 체험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 경험들은 인간을 속된 세계나 역사적 상황에서 끌어내어 질적으로 다른 우주에 던져놓는데, 이는 신성하고 초월적이며 전혀 다른 세계다. 이 같은 빛과의 대면에 따라 발견되는 우주는 정신적인 본질을 가진 것, 즉 정신을 가진 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속된 우주와 대립하거나 이를 초월한다. 빛과의 만남은 이처럼 주체의 실존에 단절을 야기하는데, 이 만남은 인간에게 신의 작품으로서의 실존 또는 신의 현존에 의해 신성화한 세계를 밝혀주거나 이전보다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인도나 페르시아, 아시아 여러 지역의 다양한 농경 축제는 결국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역사적으로 한정된 특정한 상황을 초월함으로써 초인간적이며 근원적인 상황을 되찾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농작물을 수확했을 때나 새해를 맞았을 때 통음난무가 벌어지는 이유는 첫번째의 경우 농사의 풍성함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며, 두번째 경우에는 천지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힘, 우주를 탄생시킨 그 무한한 힘을 얻어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상징한다. 새로 시작하는 한 해는 창조의 과정에 있는 세계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또는 총체성의 신비」에서는 샤머니즘의 일부 의례에서 나타나는 무성이나 양성의 최종 목적 또는 신화적 당위성은 바로 인간의 변화에 있다는 점을 말한다. 즉 양성적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대립적인 요소들을 현실의 상호보완적인 다양한 측면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통일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욕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고대의 주제와 모티프들이 오늘날의 민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총체성의 신비가 인간 드라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신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인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신화와 민속, 현대인의 꿈과 환상 그리고 예술적 창작물 등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우주의 갱신과 종말론」은 멜라네시아의 ‘화물 숭배’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적 천년주의 사고를 토대로, 우주의 종말론과 우주의 주기적인 탄생의 의미를 조명한다. 이른바 ‘원시종교’에서는 새해에 첫날이 시작되는 것은 우주의 탄생을 재현하는 것으로 여긴다. 즉 우주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가 재현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과거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종교적인 욕망과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그 근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따라서 ‘처음으로’라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하겠으니, 세상의 개혁을 추구하는 수많은 제의와 의식, 반복적인 우주 생성의 열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벌써 오래 전에 육체적 노동의 종교적인 의미와 그 유기적인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종교적인 의미가 아직 살아 있는 곳조차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술과 유럽적인 이념들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전통적인 인간은 입문의 경험이 주었던 그 충격을 주기적으로 다시 느낄 필요성을 중시해야만 종교적인 의미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밧줄과 마술」에서도 엘리아데는 석가모니의 일화라든가 고대 인도, 이븐 바투타가 목격한 중국의 밧줄 묘기, 심지어 비동양(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밧줄 묘기에 관한 풍부한 사례를 근거로 그 의미를 밝혀나가고 있다. 여기서 줄이라든가 밧줄, 엮기, 짜기 따위의 이미지들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 이미지들은 선택받은 특별한 상황, 곧 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든가 우주적인 근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속적이고 구속되어 있으며 미리 운명지어져 있는 불쌍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표현하기도 한다. 엘리아데는 이 두 경우에 공통적으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전제하지만, 첫번째 경우 인간은 그의 조물주 또는 그의 우주적 근원과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을, 두번째 경우에는 반대로 ‘마술’에 의해 또는 자신의 과거에 속박당한 채 운명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한다.

「종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앞의 네 편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 글에서 엘리아데는 종교적 상징을 대하는 기본 관점과 함께 종교사학자들의 의무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뿐만 아니라 아직도 편협하고 폐쇄적인 종교관이 널리 퍼져 있는 우리 종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엘리아데는 문헌학, 역사학, 고고학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인 동료들의 연구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연구 결과를 이해하거나 반박하고, 그리하여 그러한 자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을 종합해야 하는 것을 종교사학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또한 엘리아데는 종교적 주제에 대한 모든 연구는 종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며, 종교적 상징의 존재론적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종교적 상징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우주적인 어휘로 해석하지만, 반대로 우주적인 상황을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기도 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상징은 인간 존재의 구조와 우주적인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관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상징으로 인하여 ‘친근하게’ 느껴지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성의 우주적 가치는 인간으로 하여금 주관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객관적인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상징을 이해하는 인간은 객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이해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눈, 그리고 나 자신을 보는 새로운 눈
서글프게도 서양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발견한 우리에게, 비서양인이면서 어설프게나마 합리성의 세례를 받은 현대의 우리에게 이 책은 동양적이며 친숙하다고 믿었던 불교와 샤머니즘의 변화무쌍하고 낯선 면면을 보여준다. 또한 합리성의 고향인 그리스나 선악의 종교인 기독교의 세계도 마치 인도의 신화만큼이나 다채로운 모순과 ‘대립의 합일’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냉전이 종식되고 전쟁은 국지화되며, 종교가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21세기 초엽에 “문화들간의 만남 또는 충돌은 결국 정신성의, 그리고 종교들간의 만남”이라는 엘리아데의 명제는 마치 고대의 신탁이나 선지자들의 예언처럼 다가온다. 그의 말대로 ‘이방 세계’를 잘 분석하기 위해 종교적 행위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면, 종교학은 경제학자와 정치학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아데가 추구하는 것은 이처럼 눈에 쉽게 드러나는 실용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의식과 이방과 고대의 세계까지 탐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현대인들에게 이미 낯설 만큼 동떨어진 것이지만 인간이 자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인간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문화도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에스키모의 샤머니즘도 불교나 기독교 못지않게 존중되어야 하며, 성적 소수자를 포함한 고정관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낯선 이들도 진지한 이해와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서론을 제외한 책의 본문은 따로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시론마다 잘 정리된 결론이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엘리아데가 보여주는 황홀한 정신의 빛을 따라 초월의 세계를 맛보거나 ‘완전히 다른 것’과의 만남을 통해 ‘막연한 종교적 경험들’에 빠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노장철학에서나 만날 법한 ‘대립의 합일’이라는 개념이 세계의 문화 풍경을 관통하며 다채로운 파노라마를 그려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1907∼1986)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종교사가인 엘리아데는 190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 연구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인도 캘커타 대학에서 3년간 산스크리트와 인도 철학을 공부했으며, 1933년 부쿠레슈티 대학으로 돌아와 요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부쿠레슈티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5년 파리 소르본 대학 종교학 객원교수가 되었고, 1956년 시카고 대학 종교사 교수로 부임하여 1986년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30년 이상을 가르쳤다. 주요 저서로『세계종교사상사』『영원한 회귀의 신화』『샤머니즘』『우주와 역사』『이미지와 상징』『종교형태론』『성과 속』 『요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등이 있다.

옮긴이 최건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불문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파리 8대학 불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SBS, MBC, EBS, Q채널 번역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말라르메와 노장」 등이 있다.


옮긴이 임왕준
연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파리 4대학에서 「앙드레 말로에 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옮긴 책으로 『로라, 내 아름다운 파출부』 『사랑』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삶과 죽음의 명장면』 『이별의 기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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