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많은 번역 책을 출간한 국가는 독일(21만8277회)이며, 일본은 5위(9만194회) , 미국 13위(3만9580회), 한국은 19위(2만1489회)인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별로는 영어가 총 86만회로 1위를 차지해 2위인 프랑스(약 16만회)보다 무려 약 5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일보》 2006년 1월 9일자 기사에서

이 책은...
/ 서양사 교수이자 인문학술 분야 번역가인 저자가 수 년 동안 번역 작업을 해오면서 몸소 체험한 한국 번역 문화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진단한 책. 저자는 일반적으로 번역의 불완전성,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담론을 부정하고, 오히려 우리 문화의 질적․양적 확장을 꾀할 수 있는 번역 작업을 기피하고 대학원생들에게 떠넘기는 저질 교수의 행태야말로 반역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논문 쓰기만이 교수의 주요 업적으로 인정하는 대학 연구 풍토, 저자에 비해 번역가를 대우해주지 않는 출판 시장 구조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번역 문화의 부실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서유럽, 이슬람, 일본, 중국의 역사를 번역을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한 점은 색다른 시도라고 평가할 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그들이 선진 문화의 꽃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 작업을 주도했기 때문이라는 것. 반면 우리 사회는 모국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최근에 와서야 번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번역 사업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지원은 미비하다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번역가로서 현장에서 체험한 경험을 토대로 실제 번역 작업을 할 때에 부닥치는 현실적 문제들과 한계,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대안, 미래의 번역가들을 위한 실무적 조언 등을 모두 털어놓는다. /




번역이 반역이라고?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모든 번역은 오역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그만큼 번역의 어려움, 더 나아가 불가능성을 언급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번역은 오히려 눈에 거슬린다. 저자와 일대일로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번역가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번역은 반역이다’라고 외친다. 설마 그래서 그런 것일까? 한국 사회에 번역서가 부족하다. ‘번역은 반역’이기에 우리네 지식인들은 번역 작업에 뛰어들지 않는 것일까. 더 심각한 현상은 오역 시비에 휘말리는 번역서는 많아도 잘된 번역서를 만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근원적 차원에서 ‘번역은 오역이다’가 아니라 번역자가 제대로 번역하지 못해 ‘오역’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볼테르나 해럴드 블룸의 말처럼 번역은 반역이 될 수도 있다. 번역을 둘러싼 논의는 이렇게 번역의 근본적 문제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번역 수준, 환경, 문화가 튼실하지 않는 우리네 출판 구조 속에서 번역의 근원적 문제를 먼저 논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지금까지 번역한 책의 양이 세계 19위(21,489회)에 불과한 국내 번역 상황을 놓고 보면 우리에게 더 시급한 문제는 번역의 중요성, 필요성을 깨닫는 게 아닐까. 더군다나 엉터리로 번역된 책이 서점에 버젓이 얼굴을 내미는 상황이라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그저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번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더디지만 꾸준히 그리고 정확히 번역을 하고자 노력해온 저자 박상익은 ‘번역은 반역이 아닐 뿐더러, 우리는 그들처럼 번역의 근원적 문제를 따지고 있을 팔자가 아니다’고 꼬집는다.


한국의 번역 문화, 무엇이 문제인가
대체 한국의 번역 문화와 수준이 어떻기에 저자는 번역의 원론적 이야기에 손사래를 치는 것일까. 물론 저자는 번역은 가능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그동안 여러 언론 지상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한국 번역 문화를 직접 체험한 경험을 총동원해 이 책을 사뭇 ‘조심스럽게’ 내놓은 것이다. 본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그동안 관행처럼 여겨온 우리 사회의 번역 실태를 미천한 번역자가 건드리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독자(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 덕에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가 우리 번역 문화를 개선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날카로운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먼저 대학 교수직이라는 거미줄에 안주하며 대학원생을 시켜 수준 이하의 번역서를 자랑스럽게 출간해온 이른바 ‘매춘교수’를 겨냥한다. 교수 신분인 저자가 교수를 상대로 신랄한 비판적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교수 문화의 경직성을 생각한다면 자못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지식인의 침묵이야말로 반역이다.
황우석 사건에서도 여러 차례 문제화된 교수와 대학원생 간의 종속적 관계가 번역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수가 대학원생들에게 번역거리를 던져주면 학생들은 그걸 거절하지 못하고 밤을 새워 번역 작업에 매달린다. 교수는 그렇게 어설프게 번역된 결과물을 가져다가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떡하니 번역서를 출판한다. 그러니 아무리 출판사에서 원고를 가다듬는다 해도 원서보다 더 어려운 번역서가 탄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행이 그동안 번역서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되어 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물론 여기에는 더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 대학의 연구 풍토 탓에 교수들은 번역을 그저 소일거리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번역을 중요한 연구 과제의 하나로 삼고, 각종 고전을 충실히 번역하는 것도 논문의 일종으로 여기는 일본․미국․독일 대학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른바 잘 팔리는 책만 골라 단기간에 번역․출판하는 능력은 비범해도 십 년, 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힐 고전을 번역하는 데는 인색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이미 1백 년 전에 번역된 버크와 몽테스키외의 저작 등은 아직도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고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말 할 것도 없다.
인기 있는 외국 책이라도 제대로 번역해서 출간하면 그나마 낫다고 말한다. 상당한 자본력과 인력을 갖추고 있는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백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번역서에서도 숱한 오역, 비문 등이 지적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저자는 그 사례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지적한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우리 사회는 지금도 번역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고, 번역 작업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는 것일까. 그래서 저자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의 주요 문명권에서 일찍부터 행해져온 번역의 역사를 살펴보고 우리의 그것과 어떻게 달랐는지 따져본다.


번역은 왜 중요한가
십자군 원정을 통해 ‘야만족’ 이슬람을 정복한 서유럽은 오히려 자신들이 ‘야만족’이었음을 이슬람 문명의 심장부에서 절감해야 했다. 자신들이 계승하지 못한 그리스․로마 철학을 이슬람 사회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의 힘이었다. 아랍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모든 저술을 아랍어로 완벽히 번역했고, 그것을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기까지 했다. 자극을 받은 서유럽도 번역에 빠져 들었다.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른바 ‘12세기의 르네상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기간이 ‘번역의 시대Age of Translation’라고 불리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결국 번역이 있었기에 그리스․로마 문명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서유럽 문명으로 이식될 수 있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번역국이라는 정부 기구를 설치해 외국 서적을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 대대적으로 번역했다. 수많은 번역서의 홍수 속에서 번역서를 안내하는 책이 출간되어야만 할 정도였다. 오늘의 일본은 메이지 시대 번역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술 용어들(사회, 자유, 평등, 권리, 인권, 정의, 시간, 공간……)은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 문화를 수용․번역하면서 탄생시킨 단어들이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일본의 이러한 번역 노력에 많은 빚을 진 셈이다.
우리의 번역사는 어떠한가.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칭송 받는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글로 된 텍스트, 콘텐츠 축적을 외면한 게 사실이다.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한글을 천시하고 한자 공부에만 매달렸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모국어는 더 심한 천대를 받아야 했다.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다. 일본어에 능통한 당시 지식인은 한글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기나 했을까. 해방 후 한글세대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번역의 필요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부터라도 번역이 제대로 되었을까. 일본책을 중역한 책이 쏟아지면서 왜색이 그대로 드러난 출판물이 서점가를 점령한 사태는 먼 나라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화의 바람은 번역 문화에도 들이쳤다. 영어공용화론이 고개를 들었고, 심지어 한국어는 국제 경쟁력이 없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다고 단언하는 주장이 솔솔 풍기기까지 했다. 한글보다 영어를 먼저 깨치는 세대가 도래하면 번역은 자연스레 도태할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모국어의 이런 처지를 두고 ‘슬픈 모국어’라 했다.
그러나 모국어는 영혼과 맞닿아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슬람이 아랍어를 버리고 로마․그리스어를 받아들였다면, 서유럽이 라틴어를 버리고 아랍어를 수용했다면, 그들의 문명이 그토록 발전할 수 있었을까. 철저히 서구를 배우고자 했던 일본이 일본어를 버리기는커녕 모든 문화를 일본화하려 했다는 점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요컨대 번역은 단순히 한 문자가 다른 문자로 일대일 대치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의 사상이, 한 나라의 문화가, 한 시대의 철학이 다른 민족, 다른 나라, 다른 시대로 전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고로 문화의 확장은 바로 번역에서부터 시작한다.


지식인의 반역과 대중의 반란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번역은 반역’이라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이야말로 반역이다. 논문 쓰기에만 매진하면서 번역은 학자가 할 일이 아니라며 고상함을 떠는, 그래서 대학원생들에게 번역을 떠넘기는 일부 교수들이야말로 반역이다. 잘못된 번역 문화가 반역인 것인지 번역 그 자체가 반역은 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번역 문화가 잘못되어 있다고, 그래서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은 오히려 독자다. 권위와 자존심으로 무장한 대학 교수를 포함한 지식인층을 질타하는 것은 종속적인 학제관계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대학 밖으로 뛰쳐나온 이른바 독립연구학자들이다. 비도덕적 출판사를 감시하고, 번역서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개개인이 모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단은 다름 아닌 네티즌이다. 독자와 네티즌의 눈이 높아가면서, 학연에 연연하지 않는 실력파 연구자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고질적인 번역 문화가 개선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 한 가지
번역가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출판사가 번역서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해도 독서 문화의 근본적인 개선이 없다면, 그것을 위한 사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는다면, 번역을 통한 문화 확장은 외연에 그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 도서관다운 도서관이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번역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좋은 책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출판 시장이 건강하지 않으면 출판사가 허덕이고, 책은 당연히 병에 걸린 채 나올 수밖에 없다. 번역가와 편집자에 대한 대우도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돈 되는 책은 쏟아져 나오지만, 정신과 문화를 살찌우는 책은 빛을 보기 어렵다. 메이지 시대 일본, 중세 이슬람, 서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고전 번역 사업에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밖에 되지 않는 예산을 책정하는 우리 정부의 쫀쫀함으로는 그들이 누린 찬란한 문명을 쉽게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http://www.bluehisto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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