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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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든지 자기 의지로 하면 참 좋으련만, 작은 것 하나도 구속력이 가해지지 않으면 시작조차 안 하는 게 일쑤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키는대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건 아닌데- 가끔은 강제로 뭘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 이전에는 해 보지 않았던 걸 시도하게 돼서 '의외의 순기능'이 생기는 것 같다. 시집 읽기도 마찬가지다. 이번 학기 듣는 수업이 아니었다면 아마 2012년이 가기 전에 시집을 펴 볼 시늉마저 안 했겠지. 시 낭송하는 시간이 있어서 도서관 시집 코너에 가서 시집을 한아름 들고 왔다. 희망버스로 알게 된 송경동 시인의 시집을 우연히 발견했다. 대출 권수가 다 차서 빌리진 못했지만, 유려하기만 한 시가 아니라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그의 시는 몹시 생경하면서 신선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참여시가 도처에 있었는데도 내가 시집을 펴 보질 않으니 맛보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각설하고, 나는 그 시간에 낭송할 시로 '수선화에게'를 택했다. 제목이 '수선화에게'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문장이 아마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 인상적인 문장이 들어 있는 시였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외로움을 품고 산다, 그러니 너무 외로움에 사무쳐 하지 마라-고 나직이 속삭이는 듯한 시였다. 감정을 담아 시를 읊는 게 어떤 것인지 몰라 분명한 정서가 나타나는 걸 고르다 보니 우연히 걸렸다. 우연히 마주친 것 치고는 시가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로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듬뿍 사랑받는 것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인생이 불행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예상치 못한 무겁고 거대한 외로움이 밀려올 때가 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긴 외로움의 시간에서, 결국은 스스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했기에 그 시간이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다. 누군가 인생을 불공평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했다. 외로움도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아닐까. 한 순간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 우리는 모두 외롭기 때문에 공평하다. 그래서 서로가 곧 위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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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펭귄클래식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마이클 헐스 작품해설,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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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 읽은 날짜 : 5월 6일 일요일

 

 

 

 베르테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 정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을까. 냉정하게 보면 그를 파멸로 이끈 원인은 그의 충만한 감수성과 변덕스러운 기분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은 또 얼마나 진부한가. 우리가 보고 있는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베르테르는 로테를 보자마자 강렬한 사랑을 느낀다. 첫눈에 누굴 보고 반해버린 적이 없어서인지, 100% 공감은 하지 못했다. 누군가 외모가 내 취향이어서, 나와 비슷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말투가 좋아서, 목소리가 매력적이어서 가벼운 '호감' 정도는 생길 수 있지만, '오오, 드디어 내 운명의 짝을 찾았구나! 그는 나의 운명이야, 나 역시 그의 운명이고!' 이 정도로 가진 않기 때문이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확실히 지나치게 뜨거운 불덩이였다. 또, 이미 약혼자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어쩜 이렇게 고난은 세트로 밀려온단 말인가. 베르테르는 왜 하필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사람이었나. 그래도 베르테르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다 자살을 했으리라고는 쉽게 예상할 수 없다. 베르테르도 마음만 달리 먹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괴로운 사랑 이야기를 꼬박꼬박 들어주는 빌헬름이란 친구의 조언을 듣고, 가슴아픈 사랑을 포기한 후 재기를 위해 끈덕지게 노력할 수 있었다. 그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도 있었으니 로테와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새 생활을 시작했을 수도 있었다. 로테를 닮았다는 B양과 사귀며 다른 국면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결국 모자란 독자는, 로테를 향한 마음이 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대단히 귀중한 것이었구나- 하고 말 뿐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비참해지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 짧게나마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을 때 나도 그랬다. 몸을 누여 잠을 잘 적이 가장 행복했고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끔찍했다. 그래봤자 나는 변함없이 형편없는 인간일 텐데, 내 엿 같은 인생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텐데- 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걸 극복해 냈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기분이 엉망진창이어도, 영영 이어지리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결국에 이 모두 지나가는 일이리- 하고 여겼던 까닭이다. 안타깝게도 베르테르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희망과 기쁨이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모든 사랑은 존중받을 수 있을까? 자살은 존중받을 수 있을까?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르는 두 가지 의문에 여전히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사실 정답이 없다고 믿고 있다. 어떤 입장이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니까. 상황과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인간의 삶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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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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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0년대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참 영민하고 지혜로웠다. 2010년대의 우리나라 국민들이 멍청하고 지혜롭지 못하단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때 사람들은 적어도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람을 질색했다. 똑똑한 줄 아는 권력자가 뒤에서 별의별 수를 쓰고 있어도,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어떤 것이 맞고 옳은 길인지를.

 

2. 2010년대에 이승만, 박정희가 없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거에 나온 사람들의 질이 높아진 것만도 아니다. 그 시절에는 조봉암도 있었고 장준하도 있었다. 너무 동떨어진 위인들이라고? 정치판에 오래 몸을 담궈서 신선미가 떨어진지 한참 됐다 뿐이지, 김영삼도 당시에는 주목받는 재기발랄한 정치인이었다. 오히려 지금이 정치판으로 향하는 더 많은 길이 열린 듯한데도, 참신한 인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비극이다.

 

3.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넘어갈 때, 이승만이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한국 정치의 판도는 지금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양당이 모두 보수당으로 몸집을 불려가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겪었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달랐을까? 1950년대에 진보당이 여당 못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다는 건 꿈 같은 일로만 느껴진다. 얼마 전 치렀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3%를 얻지 못해 해산되었고, 통합진보당도 야권연대를 통해 열 몇 석의 자리를 겨우 차지했는데.

 

4. 내가 알 만한 이야기는 박정희 때부터겠군, 하고 지레짐작했던 건 착각이었다. 이걸 보면 저절로 외치게 된다. 이승만 개객끼. 왜 공영방송 KBS에서 이승만 다큐가 방영되면 안 되는지 똑똑히 알았다.

 

5. 권력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나도 권력을 한 번 잡게 되면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되려나. 컴퓨터를 향한 무한애정처럼. 그러나 잦은 웹서핑으로 해치는 건 내 삶의 치열함일 테지만, 그들이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저지른 일들은 너무나 큰 희생을 불러왔다. 적어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살아야지. 폐로 치면 서로 甲을 다툴 인간들이 정치판에만도 잔뜩이다.

 

6. 삼성은 그때도 똑같았다. 한국비료가 삼성 쪽이었구나. 실망스러운 맘조차 안 들었다. 역시나.

 

7. 선거에서 승리하는 경험은 중요하다. 지지하는 사람, 정당에 따라 누군가에겐 쓰디쓴 패배가 되겠지만. 젊은 세대가 꼬박꼬박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한 표 가치가 너무나 미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미약이 아니라 아예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고 믿으니까(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 굳이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20대인 우리는 그래봤자 10번의 선거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번 정국이 워낙 특이해 이런 저런 투표를 많이 하게 된 거다. 애초에 선거 참여 기회가 훨씬 적었는데, 두세 번 시도하다 안 된다고 좌절하는 건 너무 이른 선택이 아닐까. 특히나 지금 패권을 잡고 있는 세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판도가 영화처럼 한번에 바뀔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듯하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다. 작은 승리의 경험이라도, 선거 참여 의욕을 돋운다. 내 한 표가 가치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해봐야 안다. 선거에 참여하는 짜릿함을. 좌절해봐야 소용없다. 그렇다고 누가 나서서 내 삶을, 내 미래를 챙겨주지 않는다. 내가 야물딱지게 알아서 잘해야 한다. 정치와 이어지지 않는 일상은 거의 없다. 그 중요한 선택을 하도록 왜 남들에게만 맡겨둘까.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무관심하게 되는 것. 그게 못된 정치인들이 바라는 모습이다. 왜 그들에게 놀아나나.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도 모자랄 판에. 신경을 안 쓰니까 이상한 법안도 제멋대로 통과시키고 너희들을 따라오라며 윽박지르는 것 아닌가. 머슴들을 잘 뽑아야 한다. 자칫하면 내가 머슴이 된다.

 

8. 다음 선거에서는 진보신당이 해산되지 않기를..

 

9. 조만간 이 책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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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tetic 2012-06-23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찬찬히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문득 이 포스팅의 8번에서 멈춰서게 되네요...
기독당과 한나라당의 지지율과 경쟁해야 했던 지난 4.11 총선이 생각나서 일까요... 2%에도 못 미쳤던 지지율...
여담이지만 <건축학 개론> 감상평 정말 재밌게 보고 간답니다.~~~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신걸요? 조만간 <씨네21> 지면에서 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론지 기자가 꿈이시라면 저도 어쭙잖지만, 리영희, 송건호 선생의 저작들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책들 소개 많이 해주셔요~ 저도 따라 읽게요~~~

들꽃 2012-06-30 23:28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 보고 의기소침해져있던 제가 기운을 차렸던 기억이 나요ㅠㅠ 사실 같이 글을 썼던 분들께서도 저한테 글을 잘 쓴다고 칭찬해준 적이 몇 번 있지만, 확실히 논리적이거나 그런 부분은 모자람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건축학 개론 리뷰도 공들여서 쓰긴 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해서 조금 아쉬웠었어요. 하지만 격려어린 말씀 덕분에 뿌듯해졌어요 ㅋㅋ 리영희 선생님 글 읽어보려고 했는데 게을러서ㅠㅠ 이번 방학에는 읽기 쓰기에 전념하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D
 

 

 

 

 52쪽

 마치 고장 난 제품을 앞에 두고 수리 기사 둘이 떠드는 것 같았다. 제품에 대한 예의를 갖출 생각은 없는 듯했다. 철수는 그때만 해도 엄마와 누나에게 예의 기능이 전혀 없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68쪽

 이제는 선택 받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사용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드라이어가 "이 사용자는 머리가 너무 거칠고 뻣뻣해서 싫어요, 차라리 저분이 저를 사용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품이 뛰어나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게 사용자를 가린다면 당장 폐기 처분감이다.

 

 

 


106쪽
 딱히 어떤 기능을 바라고 산 게 아니라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죠. 어린 남자친구까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안은 거짓말로 다 채워 줄 수 있었어요. 학벌, 나이, 연봉, 재산까지 다.

 


113쪽 
 마치 마지막 회에 더 극적으로 행복해지려고 일부러 고난을 겪고 심하게 다투었던 것처럼. 마지막에 세계 최고의 제품이 되기 위해 그동안 잦은 고장을 일으키고 서비스 센터를 몇 번씩이나 들락날락했던 것처럼.

 


119쪽
  졸업하고 뭐 하느냐는 말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하면 누구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미 훌륭한 완제품으로 분류된 이상, 테스트를 계속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127쪽

 철수는 결혼이 가능한 모델이긴 하지만, 결혼의 표준 조건 101가지 중 74가지에서 조금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수의 사고력에 이상이 있거나 고장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 둡니다. 표준이 언제나 정상인 것은 아닙니다. 사용자의 기대와 예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불량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이 제품의 특성이라는 점을 숙지한 후에 사용하는 것이 사용자의 의무일 것입니다.

 


143쪽 
 그러고 보면 불량품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오직 그것을 불량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166쪽

 같은 음식을 고르는 것으로 친밀도를 판단하는 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르다는 걸 인정해 줄 때 관계는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사용자의 입맛을 강요하기보다는 철수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186쪽

 잘하는 걸 하나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철수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취미와 특기는 엄연히 달랐다. 뭘 잘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쉬웠지만, 그걸 갖추는 일은 어려웠다. 몇 개의 특기를 더 갖춰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196쪽

 어딘가에 맞춰 개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새롭게 개조해야 하는 상황이 등장하곤 했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라디오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개조하다 보니, 나중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처럼. 처음에 발견된 문제점은 사용 설명서를 한번 읽어 보는 걸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버튼 하나만 제대로 눌러 주면 되는 문제였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고치면 고칠수록 라디오는 점점 라디오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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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책이다 - 시간과 연민, 사랑에 대하여 이동진과 함께 읽는 책들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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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날짜 : 4월 28일 오후 4시 경

 

 

 

 밤은 책이다. 얼핏 들으면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솔직히 다 읽고 나서도 밤이 책인지 책이 밤인지 잘 모르겠다. 비루한 깜냥으로 속의미를 파고든다면, 밤은 책읽기에 적당한 때이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다. 밤은 책읽기와 잘 어울리는 시간이다. 책을 읽겠다는 마음만 있다면야, 밤이든 낮이든 무어 대수겠느냐 하겠지만 분명 다르다. 특히 잠들기 전 늦은 밤이나 새벽녘에 읽는 책맛은, 시험 기간 나를 달래주는 초콜릿마냥 달콤하다. 어서 눈감고 잠드는 일이 시급한데도, 굳이 책장을 넘기는 것은 실은 허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너시간 컴퓨터 앞에서 부질없이 시간을 보냈는데도, 침대에서 책 몇 쪽 읽고 하루를 마무리하면 몹시 뿌듯하다. 하루의 끝을 책과 함께 했다는 보람에.

 

 블로그에 '책을 말하는 책'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든 것은 너무나 뒤늦은 일이었다. 원래도 책에 대한 책을 많이 봤고, 웬만하면 애정이 식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이 책 리뷰가 처음으로 올라가겠지만, 그동안 숱하게 거쳐온 '책을 말하는 책'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빌리는 책은 적어도 평타는 친다,는 나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이동진 기자가 쓴 『밤은 책이다』는 좋은 책이었다. 예전에 이병률씨가 쓴 『끌림』을 읽을 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만족도 자체는 『끌림』이 더 높지만, 문투에서 배어나오는 분위기가 흡사했다.

 

 라디오를 안 들은지 오래 되어서인지, 이동진 기자가 라디오 프로를 맡았었는지도 몰랐다. '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에 있던 '밤은 말한다' 코너의 이야기들을 엮어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러고 보면 밤, 라디오, 책은 서로 참 잘 어울린다. 이동진 기자가 꽤 유명한 영화 기자이긴 하지만, 라디오 프로까지 진행할 줄은 몰랐는데- 아마도 성시경 방송 같은 느낌이었을까? '-습니다'로 끝나는 글은 옆에서 누군가 읽어주는 것처럼 들렸다. 이름은 참 많이 들었는데 돌아보니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했다. 아무튼 조근조근 책 이야기를 꺼내는 이 사람의 글은 만만치 않다. 부드러운 와중에 핵심을 찌르기도 하고, 에둘러 말하는 데도 용하다. 지독한 책 애호가라 숱하게 책을 산다는 그가 읽어내린 책들이, 하나같이 흥미로워 보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랄까. 김혜리 기자가 쓴 『영화야 미안해』를 읽었을 때도, 그녀가 쓴 글 때문에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었다. 괜히 글 쓰는 자(=기자)들이 아니다.

 

 제목을 알고 있고 들어본 책이면 마치 내가 그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스물 다섯을 먹은 지금도 고쳐지지 않는다. 고작 어디서 한 번 마주쳤을 뿐이면서 '오, 이동진 기자와 내 책 취향이 비슷하군' 하며 섣불리 기뻐했다. 읽다 만『유혹하는 글쓰기』나 반납 기한 때문에 한 꼭지 읽고 돌려준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등 낯익은 책이 나오자 물 만난 고기 같은 심정이 됐다. 많은 책을 사 들이고, (자기는 아니라지만) 읽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그는 읽는 책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은 듯했다. 지금까지 읽은 과학책을 다 합쳐봐야 열 손가락 안에서 해결되는 주제에, 이따금 과학책 소개가 나올 때 무척 반가웠다.

 

 공감하는 말, 마음 속이든 머릿 속이든 확 와서 박히는 구절이 있을 때 늘 그러하듯, 책 끄트머리를 접었다. 그 접힌 페이지가 아마 50쪽 정도는 될 것 같다. 책을 꽤 오래 읽어왔는데도 이 부분은 여전히 해결이 안 난다. 결국 내 손으로 직접 책을 사야만, 안심하며 책장을 접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다음 사람의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히도록 그 접었던 부분을 펴는 것뿐이다.

 

 사족이 너무 길어 지겨웠나? 이제 이동진 기자와 나의 공통점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그와 나는 야행성 인간이며, 밤을 예찬하고, 책에 대한 애정과 약간의 허영심을 가지고 있다. 훗날 생기게 될 공통점이라면 '글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도 1등 신문사의 넓은 아량으로 필기시험도 보고 돌아왔다. 별 것 아니겠지만 조선일보 시험을 쳤다는 것도 우리 둘의 공통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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