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쪽

 마치 고장 난 제품을 앞에 두고 수리 기사 둘이 떠드는 것 같았다. 제품에 대한 예의를 갖출 생각은 없는 듯했다. 철수는 그때만 해도 엄마와 누나에게 예의 기능이 전혀 없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68쪽

 이제는 선택 받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사용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드라이어가 "이 사용자는 머리가 너무 거칠고 뻣뻣해서 싫어요, 차라리 저분이 저를 사용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품이 뛰어나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게 사용자를 가린다면 당장 폐기 처분감이다.

 

 

 


106쪽
 딱히 어떤 기능을 바라고 산 게 아니라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죠. 어린 남자친구까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안은 거짓말로 다 채워 줄 수 있었어요. 학벌, 나이, 연봉, 재산까지 다.

 


113쪽 
 마치 마지막 회에 더 극적으로 행복해지려고 일부러 고난을 겪고 심하게 다투었던 것처럼. 마지막에 세계 최고의 제품이 되기 위해 그동안 잦은 고장을 일으키고 서비스 센터를 몇 번씩이나 들락날락했던 것처럼.

 


119쪽
  졸업하고 뭐 하느냐는 말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하면 누구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미 훌륭한 완제품으로 분류된 이상, 테스트를 계속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127쪽

 철수는 결혼이 가능한 모델이긴 하지만, 결혼의 표준 조건 101가지 중 74가지에서 조금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수의 사고력에 이상이 있거나 고장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 둡니다. 표준이 언제나 정상인 것은 아닙니다. 사용자의 기대와 예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불량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이 제품의 특성이라는 점을 숙지한 후에 사용하는 것이 사용자의 의무일 것입니다.

 


143쪽 
 그러고 보면 불량품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오직 그것을 불량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166쪽

 같은 음식을 고르는 것으로 친밀도를 판단하는 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르다는 걸 인정해 줄 때 관계는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사용자의 입맛을 강요하기보다는 철수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186쪽

 잘하는 걸 하나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철수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취미와 특기는 엄연히 달랐다. 뭘 잘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쉬웠지만, 그걸 갖추는 일은 어려웠다. 몇 개의 특기를 더 갖춰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196쪽

 어딘가에 맞춰 개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새롭게 개조해야 하는 상황이 등장하곤 했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라디오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개조하다 보니, 나중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처럼. 처음에 발견된 문제점은 사용 설명서를 한번 읽어 보는 걸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버튼 하나만 제대로 눌러 주면 되는 문제였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고치면 고칠수록 라디오는 점점 라디오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