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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자리 1, 2번 좌석에서 영화를 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남의 말에 귀 팔랑팔랑해서 영화보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여튼 다들 화제에 올리는 영화라서 내리기 전에 꼭 보고 싶었다. 이제훈이 나오건 수지가 나오건 무관심했다. 인터넷에서 봤던 납뜩이 플짤만으로도 숨 못 쉴 정도로 웃었는데 그걸 큰 화면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싶을 뿐이었다. 추억에 젖게 하는 아름다운 영화라는 극찬과 결국 개미남 개미녀의 얘기일 뿐이라는 비난이 공존하는, 정통 멜로인데 영화 밖 분위기는 어떤 영화보다 '시끌시끌한' 「건축학개론」을 보러 간 이유다.
명불허전이란 말이 딱 맞았다. 생각보다 일찍 등장한 납뜩이는 이미 수십 번을 본 얼굴이었는데도 웃겼다. 웃음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어떡하지 너?' 명대사를 영화관에서 직접 보다니 황송할 지경이었다. 재 보면 분명 몇 분 나오지 않았을 배역이었는데도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재밌고 욕 참 차지게(찰지게로 써야 맛이 더 살 것 같지만)해서 매력적이긴 한데, 순진한 승민을 어설픈 선수로 만들지 않을까 가슴 졸였는데 알고보니 좋은 친구였다. '썅년'이란 격한 표현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는데 역시 납뜩이의 작품이었다.
재수하면서 다니는 독서실에서 만난 예쁜이 둘을 각각 싱숭이 생숭이로 부르고, 중3인 생숭이를 소개해 줄까 하며 승민이에게 인심을 쓰려고도 하고, 고백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내로라하는 쑥맥이었던 승민이 용기를 짜내어 서연에게 뭔가 하려고 시도했던 건 아마 팔 할이 납뜩이 덕이었을 거다. 비록 납뜩이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유치한 애들 장난'에 불과할지라도. 자는 애한테 시도한 도둑키스도, 머뭇거리며 첫눈 오는 날 이야기를 어색하게 꺼냈던 것도. 건축학개론 수업 과제를 한다며 떠난 날 서연이 그렸던 미래의 집 설계도를 모형으로 만들어 집 앞에서 기다리던 승민. 추운 날씨에 꽁꽁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마셨던 소주팩 두 개와, 고백 멘트를 준비하던- 걱정과 설렘이 공존하는 얼굴이 여전히 생생하다. 진부한 듯한데도 참으로 신선한,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순수'랄까.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서연은 영화 속에서 내내 거슬렸던 강남에 작업실까지 둔 선배와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온다. 그 장면을 목격한 승민이 애써 만든 모형을 집어던지고 돌아올 때, 코끝을 에이게 만드는 추위보다 더 강력했을 마음의 한기가 내게도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 나 역시 짝사랑에 골골거리던 시절에는 우스우리만치 일희일비했었다. 문자메시지 하나에 두근거리고, 또 다른 문자메시지로 실망하고 자책하고. 나는 내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상대에게 나는 고작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모른다. 왜 내 사랑만 힘들까 하는 푸념과 절망이 구멍뚫린 내 마음 빈틈을 가득 메웠었다.
어떤 형태로든 삶 안에 흔적 남기고 있을 '첫사랑'을 끄집어내준 영화였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메인카피도 귀신같이 잘 뽑았다고 생각했다. 그랬지, 그랬겠지. 돌아보면 귀여운 호감 정도에 무리해서 앓았던 것 같은데도, 그땐 어찌나 간절했던지. 그래서 지금의 남자친구를 첫사랑이라고 자신있게 꼽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간절함의 정도의 마음고생의 크기, 짝사랑이 유지된 기간 등을 볼 때 물불 안가리고 흠뻑 빠졌던 첫 상대인 건 확실한 듯하다. 덕분에 '저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동네방네 티내고 다녔던 여리디여린 4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승민과 마찬가지로 달뜬 마음만 앞서고 실은 무척 서툴렀던, 풋내기 시절의 내가.
하지만 동시에 첫사랑은 잘 간직해두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거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는 지저분하고 찌질해질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뭘 어떻게 해 보려고가 아니라, 단지 첫사랑이었던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도- 현재의 서연은 그래선 안 됐었다. 넥타이 선물 정도야 호의로 옹호할 수 있더라도, 잔디밭에서 낮잠자는 승민 옆에 누웠어도 안 됐고, 결혼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더욱 경계했어야 했다. 옛 첫사랑을 따라 흐르는 자신의 마음을 통제했어야 맞다. 승민도 마찬가지다. 결혼 앞둔 여자가 있으면서 첫사랑의 집 짓기 때문에 결혼 일정에 차질을 빚게 해서는 안 됐다. 밤과 술이 있는 한 남녀 간 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말도 있는데, 서연이 고꾸라질 정도로 술에 취하게 두어서는 안 됐다. 맥주 한 캔을 따던 그 밤에도 괜히 짐 옮겨주겠다며 나서지 말고 곱게 돌아갔어야 맞다. 추억의 힘을 핑계로 입맞추는 일 같은 것도 만들어선 안 됐는데. 이러니 아름답게 포장한 개미남 개미녀 영화라는 혹평이 나오지.
서로 좋아하고 있었는데도 입을 떼 마음을 전하지 못해 헤어지게 됐던 그들에게 너무 가혹한 말을 내뱉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소심하지는 않나 보다. 그땐 정말 뵈는 게 없었던 것 같다. 진짜 사랑에 빠져들게 되면 다 그런 것 아닌가? 승민은 나만큼 간절하지 않았거나, 간절했어도 용기를 덜 냈거나 둘 중 하나겠다. 정말 붙잡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그게 삽질이 됐든 어쨌든 더 적극적으로 돌진했어야 했다.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는 현실을 무시한 채 과거 첫사랑을 좇기만 하는 건, 그럴싸한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까마득한 예전, 둘의 마음이 같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 하필 그때였다니. 현실은 참으로 잔인하다. 그러니 우리는 그때그때 마음껏 표현해야 하는 게 아닐까. 관심 있으면 관심 있다, 좋아하면 좋아한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고. 그걸 제때 못해 재회한 후 몹시 질척거렸던 승민과 서연을 돌아보면 말이다.
정통 멜로이면서도 사랑 이야기가 다가 아니어서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는데, 실망스럽게도 사랑타령만 잔뜩 적어두었다. 다음 편엔 좋았던 다른 것들을 엮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