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다 읽은 날짜 : 1월 31일 화요일

 

 

 나는 의뭉스런 인간이다. 입에 발린 말은 잘 못하여도, 그럭저럭 기분 상하지 않게 하는 적정선의 말을 할 줄 안다. 하지만 정말로 격찬하고 찬사해 마지 않는 것은 의외로 별로 없다. 무언가를 그렇게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스스로가 아직 덜 여문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방어 기질이 그때그때 작동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나는 이 책에 과감히 별점 5점을 매긴다. 성실'하고 싶은' 게으른 독자의 손을 바삐 움직이게 했고, 안 좋은 머리나마 굴리게 했고, 애타고 속상해하며 혹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표현에 열광하며 책에 빠져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자 정희진은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설명하고, 읽는 이를 긴장시키며, 기존 언어를 붕괴시켜 독자를 현실로부터 되도록 먼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글, '대중'적인 글과 '학술' 논문의 경계를 부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히며 겸손하게도 본인의 글은 그렇지 못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은 저자가 지향하는 글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간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페미니즘이 가리키는 곳

 

 페미니즘이란 말은 여전히 보통 사람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솔직히 말하면 '대체 왜 페미니즘을 내가 이해해야 하나?' 하는 물음표를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다. 나 역시 페미니즘을 단순히 여성주의의 다른 말로 여겼다. 그렇다면 내가 여성주의의 개념을 잘 알고 있는가? 하면 그에 대한 대답도 분명치 않았다. 이 책을 탐독하여 읽었다 하나 아직도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순 없다. 다만 너무나 막연해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페미니즘이 폭력을 배제하고,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만은 알게 되었다. 페미니즘이 여성주의라는 말로도 많이 쓰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남성'을 고려하지 않은 배타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혹여나 상처받을 누군가를 애초에 배려한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페미니즘이 으레 더 공평해 보이는 절대적 평등에 끊임없이 반기를 드는 이유다. 따라서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어떤 사안을 바라보면 때로 불편하기도 하고 피곤해지기도 한다.

 

 풍부한 실례와 가려운 곳을 긁는 글솜씨 

 

 정희진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통계를 들어 독자들에게 신뢰감과 재미를 주었다. 성폭력, 성추행 문제에서도 여전히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말로 '진위 여부를 판단하려 들기 때문에' 적반하장 격으로 벌어진 명예훼손, 무고죄 소송 등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폈다.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문제도 끄집어냈다. 믿고 싶진 않지만 '있는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 당해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당내 성폭력 문제를 '조개줍기'에, 본인들의 정치활동을 '해일'에 비유한 유시민 의원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 뉴라이트는 적어도 주요 사안을 이야기할 때 나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답 없는 부류'로 생각했던 것도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물론 역사, 정치, 사회적인 다양한 이슈를 다룰 때 뉴라이트의 말에 딱히 귀 기울이고 싶진 않다. 다만, 사상적으로 나와 평행선에 달리는 사람도 페미니즘적인 사고, 딱 부러지는 1, 2가 아닌 제 3의 사고를 할 수 있으며 공개석상에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랐고 감탄했다. 당시의 백분토론에 출연했던 이영훈 교수의 발언만 보자면 말이다. 진보라는 기치를 내걸면서도 여성주의 쪽으로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마초란 훈장을 자랑으로 여기는 몇몇 꼴통들과는 달랐다.

 

 가려운 곳을 긁는 듯한 그녀의 글솜씨도 책을 읽으면서 자주 느낀 즐거움 중 하나였다. 어쩜 그렇게 속 시원히 표현을 하는지, 매년 시상하는 나만의 어워드에서 상이라도 하나 안겨주고 싶을 정도였다. "자궁이 있어서 모든 여자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들은 다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하나?" 이 비유는 두고두고 써 먹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것은 상처 받는 것, 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책을 읽으며 많이 알게 되었고 또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났다. 또 생소한 용어와 내용에 조금씩 주춤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미와 어려움은 연속선상의 있는 감정이라는 그녀의 말을 되새겨보니, 예기치 않게 찾아올 '앎의 순간' 때문에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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