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다 읽은 날짜 : 2012년 1월 12일 목요일

 

 

 신영복이란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였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알아서 읽으려고 읽고 싶은 책 목록에 두기도 했는데, 내가 맡았던 인터뷰이가 추천한 책이라 조금 더 강제성을 띠고 읽게 되었다. 하지만 의무감 있는 책읽기가 으레 '완독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데 반해, 책 내용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고개를 파묻고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오랜 수감생활 중에 남긴 그의 보석 같고 칼날 같은 글들은 뇌리와 가슴에 와 콕콕 박혔다.

 

 50쇄 이상 나올 정도로 꾸준히 사랑받는 이 책뿐 아니라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나 『더불어 숲』도 읽으려고 했는데 막상 읽게 된 다음 책은 『처음처럼』이었다. 다른 말인데 흔들고 쪼개고 돌리고 라랄랄라♬가 자동으로 떠오르는 그 인기 소주의 글씨를 쓴 사람이 바로 신영복이기도 하다. 흥이 있는 떠들썩한 분위기가 떠오르는 소주와는 달리, 본디 신영복이 쓴 처음처럼이라는 짤막한 글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거칠고 상스러운 단어나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오히려 차분하게 '할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도 참 내공이 깊다는 느낌이 든다.

 

 장르가 서화 에세이니만큼 어느 면을 펼쳐도 곧바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을 오물오물 천천히 음미하기보다는, 요즘 들어 시간에 쫓겨 빨리빨리 해치워버리려는 '탐욕스러운 먹성'을 보이는 나는- 어리석게도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이 책을 체할 듯이 삼키고야 말았다. 물론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나오면 나만의 방법으로 표시를 해 두긴 했지만, 그건 따로 설명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일상적인 일일 뿐이었다. 스스로 공격성이나 정복 욕구가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편인데, 의외로 책읽기에서만은 예외였다. 예전에도 친구와 담소를 나누다가 '나는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으면 기분이 좋아. 끝 페이지를 읽으면 이 책을 정복했다는 기분이 들거든.' 이라고 패기 넘치게 말한 적이 있다. 고작 1번 읽었다고 그 책을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거나, 책읽기의 목적을 '정복'에 두고 있다는 그 자체나 지금 돌아보면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니듯, 여전히 그 생각에 조금은 동의한다. 문제는 그래도 꼬박꼬박 책을 읽어오며 스스로의 독법을 익힌 내가, 그저 책을 빨리 읽겠다는 넘치는 의욕 때문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으로 책을 소홀히 봤다는 거다.

 

 사실 한 글자도 놓치지는 않았다. 다소 서두르며 읽었지만 독특한 풍의 그림도 하나하나 기억하려고 애썼다. 할 일이 많았는데 책을 보며 도피하려고 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불량한 책읽기 습관이 여럿 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애용하는 게 바로 '도피성 책읽기'다. 하필 그 희생양이 된 것이 『처음처럼』이었던 것.

 

 자꾸만 자기변명의 시간이 되어 리뷰가 산으로 가는 것 같으니 이제 책 이야기를 조금 하겠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도 저자가 서예를 배우는 부분이 나왔는데, 그저 취미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실력이었다. 그러면서도 늘 잃지 않는 겸손한 자세.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겸손해 오히려 보기 안 좋다고도 하는데, 신영복의 자세는 전혀 밉지 않게 보였다. 늘 부족함을 느끼며 더 정진하고자 하는 진정성이 느껴져서였을까. 여튼 이 책에서 그의 '글씨'를 보는 재미가 컸다. 서예라고 하면 주로 한자쓰기를 떠올리는 내게 한글 서예도 대단한 매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흡사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워 보이는 그의 필치는 때로 시원하기도 했고 다소곳하기도 했으며 단단하기도 부드럽기도 했다. 글자 하나하나에 그 글자를 쓸 때의 마음가짐이 잘 배어든 듯했다.

 

 '~습니다'의 존대어투 책을 워낙 오랜만에 읽어서 동화책을 읽는 일곱 살 어린이가 된 것마냥 어린시절 생각이 났다. 원래부터 반말체를 좋아하는 탓에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도 있었지만 무리없이 잘 적응해냈다. 내가 알기로 불교 신자가 아닌 걸로 아는데 신영복의 글은 언뜻 아름다운 말을 전하는 부처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맑고 고우면서도 은연중에 오염된 생각을 정화시키게끔 하는 그런 글들. 마음 수련하기에 적합한 느낌이었다. 별 세 개를 준 것은 책 내용이 나빴다기보다, 처음 읽었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너무나 훌륭했던 데에 그 원인이 있다.

 

 항상 가득한 긍정의 에너지에 차 있던 수만 번의 '처음'(물론 알라딘 서재를 만들던 며칠 전 그때도 마찬가지로 두근거리는 처음이었다) 그 순간을 잊지도 잃지도 않길 바라며 글을 맺는다. 아, 처음처럼 글도 덧붙인다.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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