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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ㅣ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평점 :
죽음은 해답이 아니라 주제다.
그것은 소란의 실마리가 되리라.
·- 티머시 스나이더,『피에 젖은 땅』중에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하면 불편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체 살아있는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사람들. 그들의 핏빛 없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분노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죽음을 비참하게 만들었을까요?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정체불명의 죽음을 굳이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가장 알려진 ‘악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죽음을 나체화(裸體化)했습니다.
그런데 티머시 스나이더의『피에 젖은 땅』을 읽으면서 홀로코스트를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처참한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홀로코스트는 죽음의 해답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동안 홀로코스트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만으로도 삶의 무게를 버텨내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이런 침묵의 상태에서『피에 젖은 땅』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폭로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을수록 거의 탈진의 감각에 빠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무적으로 폭로를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20세기 가슴 아픈 대량살인의 현장으로 기억되는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지형학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앙부입니다.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에 이릅니다. 정치적으로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941), 독소전쟁(1941~1945)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의 최악의 살육전이 펼쳐진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933부터 1945년까지 1400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학살되었습니다.
도대체 12년 동안 블러드랜드에서 왜 그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미국 예일대 홀로코스트의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는『피에 젖은 땅』에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1400만 명의 죽음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습니다. 학살의 숫자가 1400만 명으로 늘어날수록 인간성 말살의 무게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읽는 내내 학살의 숫자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 정체는 바로 “서로 다른 두 철학”(248p)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끈 악명 높은 독재자는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였습니다.
스탈린의 공산주의(계급)과 히틀러의 나치주의(인종)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유토피아였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해내야 했는데 농업이 핵심적인 무제였습니다. 농업 문제를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스탈린은 농업을 집단화했으며 많은 농민들이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습니다. 반면에 농업 문제를 외부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히틀러는 제국의 곡창지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동유럽의 곡창지대로 불리며 젖과 꿀이 흐르던 우크라이나는 스탈린과 히틀러 때문에 ‘피에 젖은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식량 문제 때문에 피에 젖은 땅이 되었다면 폴란드는 전혀 상황이 달랐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폴란드에게 방아쇠를 당겨 피에 젖은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그 출발점은 블러드랜드에서 일어난 비극과 관련이 있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블러드랜드의 공범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의 체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를 박멸하려는 ‘극좌’였다면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배격한 ‘극우’였습니다. 더구나 공산주의를 유대인의 음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소련을 제국의 식민지로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피에 젖은 땅』으로 찬찬히 들어가면 그들의 동맹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프랑수아 퓌레가 말한 ‘적대적 공모(belligerent complicity)’입니다. 그들의 동맹이 필연적이며 정상적이었던 것은 공통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전체주의는 국가의 권력으로 개인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개인이나 민족은 곧 국가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체주의 최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히틀러는 국가의 적을 인간이하 이거나 노예로 생각한 나머지 예외 없는 죽음으로 학살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숨겨진 역사인 블러드랜드에서 살육이 일상화되었던 것을 보면서 절반의 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절반의 진실은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는 것은 목적의 정당성이 수단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희생자의 규모가 클수록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그들의 유토피아가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절반의 진실은 한나 아렌트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입니다. 아이히만처럼 멀쩡한 정신을 가진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절반의 진실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도덕적 덫”(704p)에 걸리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저자는 공포정치의 주역인 스탈린과 히틀러를 “고결한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에 심취한 범죄자”라고 하면서 “악마의 다른 이름”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악마의 정체를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로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705p)
우리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살인마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끔찍한 살인기계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비인간이며 인간 이하라는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분명 양심이라는 게 있었는데 문제는 양심의 방향이 크게 어긋나면서 인간 이하가 되었고 그렇게 살인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심신미약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인간 이하의 여부를 다른 맥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인간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최선의 이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블러드랜드의 주제는 선과 악의 양심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생긴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핏빛에 불과한 것일까요? 블러드랜드의 모습은 참혹한 학살이 반복되고 있으며 무려 1400 만 명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림자의 정체는 유령에 가까우며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숫자에 가려진 개인의 죽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피에 젖은 땅이라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살아남으려는 생존의지도 있으며 오히려 죽음으로써 강요된 폭력을 거부하거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묵직한 슬픔이 흐릅니다. 어느 순간 슬픔 때문에 숨이 막힙니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타인의 고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대담한 정신을 통해 블러드랜드에 대한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읽는 내내 소름이 돋으며 무겁게 진실을 따라가는 동안 비윤리적인 악마 때문에 비윤리적인 죽음이 일어났다는 불편한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일어났다, 라는 목소리의 무게감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불편한 역사를 외면하면 어떻게 될까요? 기어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피에 젖은 땅이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의 가슴은 바보가 될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닌, 죄책감이나 괴로움도 모르는, 바보는 기계처럼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바보에 가려지는 진실. 그러니 진실에 다가서려는 사람이라면 바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