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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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해답이 아니라 주제다.

그것은 소란의 실마리가 되리라.

·- 티머시 스나이더,『피에 젖은 땅』중에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하면 불편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체 살아있는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사람들. 그들의 핏빛 없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분노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죽음을 비참하게 만들었을까요?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정체불명의 죽음을 굳이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가장 알려진 ‘악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죽음을 나체화(裸體化)했습니다.


그런데 티머시 스나이더의『피에 젖은 땅』을 읽으면서 홀로코스트를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처참한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홀로코스트는 죽음의 해답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동안 홀로코스트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만으로도 삶의 무게를 버텨내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이런 침묵의 상태에서『피에 젖은 땅』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폭로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을수록 거의 탈진의 감각에 빠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무적으로 폭로를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20세기 가슴 아픈 대량살인의 현장으로 기억되는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지형학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앙부입니다.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에 이릅니다. 정치적으로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941), 독소전쟁(1941~1945)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의 최악의 살육전이 펼쳐진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933부터 1945년까지 1400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학살되었습니다.


도대체 12년 동안 블러드랜드에서 왜 그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미국 예일대 홀로코스트의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는『피에 젖은 땅』에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1400만 명의 죽음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습니다. 학살의 숫자가 1400만 명으로 늘어날수록 인간성 말살의 무게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읽는 내내 학살의 숫자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 정체는 바로 “서로 다른 두 철학”(248p)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끈 악명 높은 독재자는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였습니다. 


스탈린의 공산주의(계급)과 히틀러의 나치주의(인종)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유토피아였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해내야 했는데 농업이 핵심적인 무제였습니다. 농업 문제를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스탈린은 농업을 집단화했으며 많은 농민들이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습니다. 반면에 농업 문제를 외부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히틀러는 제국의 곡창지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동유럽의 곡창지대로 불리며 젖과 꿀이 흐르던 우크라이나는 스탈린과 히틀러 때문에 ‘피에 젖은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식량 문제 때문에 피에 젖은 땅이 되었다면 폴란드는 전혀 상황이 달랐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폴란드에게 방아쇠를 당겨 피에 젖은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그 출발점은 블러드랜드에서 일어난 비극과 관련이 있습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블러드랜드의 공범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의 체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를 박멸하려는 ‘극좌’였다면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배격한 ‘극우’였습니다. 더구나 공산주의를 유대인의 음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소련을 제국의 식민지로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피에 젖은 땅』으로 찬찬히 들어가면 그들의 동맹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프랑수아 퓌레가 말한 ‘적대적 공모(belligerent complicity)’입니다. 그들의 동맹이 필연적이며 정상적이었던 것은 공통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전체주의는 국가의 권력으로 개인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개인이나 민족은 곧 국가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체주의 최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히틀러는 국가의 적을 인간이하 이거나 노예로 생각한 나머지 예외 없는 죽음으로 학살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숨겨진 역사인 블러드랜드에서 살육이 일상화되었던 것을 보면서 절반의 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절반의 진실은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는 것은 목적의 정당성이 수단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희생자의 규모가 클수록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그들의 유토피아가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절반의 진실은 한나 아렌트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입니다. 아이히만처럼 멀쩡한 정신을 가진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절반의 진실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도덕적 덫”(704p)에 걸리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저자는 공포정치의 주역인 스탈린과 히틀러를 “고결한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에 심취한 범죄자”라고 하면서 “악마의 다른 이름”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악마의 정체를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로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705p)


우리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살인마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끔찍한 살인기계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비인간이며 인간 이하라는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분명 양심이라는 게 있었는데 문제는 양심의 방향이 크게 어긋나면서 인간 이하가 되었고 그렇게 살인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심신미약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인간 이하의 여부를 다른 맥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인간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최선의 이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블러드랜드의 주제는 선과 악의 양심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생긴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핏빛에 불과한 것일까요? 블러드랜드의 모습은 참혹한 학살이 반복되고 있으며 무려 1400 만 명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림자의 정체는 유령에 가까우며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숫자에 가려진 개인의 죽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피에 젖은 땅이라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살아남으려는 생존의지도 있으며 오히려 죽음으로써 강요된 폭력을 거부하거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묵직한 슬픔이 흐릅니다. 어느 순간 슬픔 때문에 숨이 막힙니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타인의 고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대담한 정신을 통해 블러드랜드에 대한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읽는 내내 소름이 돋으며 무겁게 진실을 따라가는 동안 비윤리적인 악마 때문에 비윤리적인 죽음이 일어났다는 불편한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일어났다, 라는 목소리의 무게감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불편한 역사를 외면하면 어떻게 될까요? 기어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피에 젖은 땅이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의 가슴은 바보가 될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닌, 죄책감이나 괴로움도 모르는, 바보는 기계처럼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바보에 가려지는 진실. 그러니 진실에 다가서려는 사람이라면 바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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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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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기묘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면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상의 파편적인 이야기들은 울분을 자극한다. 사랑, 광기, 죽음이 서로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감정은 몹시 서글프다. 이미 지나간 순수한 추억들, 그래서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시절에 대한 북받치는 눈물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백일몽처럼 이어졌다. 작가는 백일몽에다 죽음과 공포의 분자들을 흩어지게 하며 삶의 비밀을 혼란스럽게 한다. 한편으로 비극적 결말은 진실을 위태롭게 한다

 

사랑의 계절의 남자에게 사랑은 제목 그대로다. 첫사랑에 대한 불안한 내면이 사계의 선율을 타고 흐른다. 오로지 그녀만을 사랑하고픈 마음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사랑은 핏줄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랑은 사회적 통념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과 동시에 환상이 깨졌을 때 생겨나는 동정에서 눈물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사랑에 대한 변명이 아닌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터뜨릴 만한 열정이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을 때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결코 단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허무함이 전부가 아니다. 저 멀리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는 눈물샘이 미칠 듯이 쏟아졌다. 뇌막염에 걸려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그들의 관계는 모호하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 불분명한 작은 기억밖에 없다. 문제는 작은 기억이더라도 뇌막염에 걸리면 큰 기억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되고 만다. 어쩌면 뇌막염에 걸린 여자의 병은 사랑의 온도가 41도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남들은 사랑 때문에 가슴이 타들어간다고 하는데 여자는 놀랍게도 뇌가 타들어갔다. 뇌막염 때문에 사랑이 변했다. 남자는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는 사랑을 묻는다. “더 이상 착란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도지금처럼 절 사랑하실 건가요?”

 

한편 사랑의 마지막 반전은 사랑의 가능성에 있다. 가능성을 자꾸만 돌아본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사랑의 균형이 깨지고 어느 순간 광기에 휩싸인 무서운 존재가 된다. 엘 솔리타리오에 나오는 보석세공사 카심에게 보석은 사치스러운 몸을 장식하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보석에 투사된 아내의 욕망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욕망을 죽여 가며 사랑을 쓸쓸하게 마무리 한다. 목 잘린 닭에서 백치로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은 애정이 식어버린 부모에 대한 반발력으로 그들의 여동생을 마치 닭의 목을 잘라 죽이는 듯 하면서 잔인한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깃털 베게에서는 신혼의 꿈이 사라진 여자는 상실감이 증폭되면서 끝내는 괴물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 괴물은 정체가 불문명한 흡혈귀이다. 여자가 사랑을 소화하지 못할수록 인생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작가의 열여덟 편의 단편 소설집에는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이 복잡한 사슬로 이어져 있다. 죽음은 때때로 일사병, 가시철초망, 야구아이에서 보듯 동물의 몸을 통해서 전달된다. 이런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적인 죽음이라고 할까? 죽음의 애잔함이 없지 않으나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의 죽음은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에서 보듯 허풍에 가깝거나 내 손으로 만드는 지옥에서 보듯 뼛속까지 마약에 중독된다. 이러한 죽음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으면 약간은 불쾌하면서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은 두렵게 느낀다. 비록 죽음 그 너머의 이야기에 대해 알 수 없어도 말이다.

 

돌이켜보면 사랑, 광기, 죽음의 경계선은 없다. 모두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존심이 걸린 문제"(245쪽)여서 그런지 모른다. 사랑이든 광기든 죽음이든 자존심 때문에 아프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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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에 대한 생각 - 세계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우리의 식탁은 왜 갈수록 가난해지는가
비 윌슨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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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낵화된 일상을 경고한다. 그래서 현명하고 건강한 식사에 대한 13가지 생각은 영양가 높은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그 비결은 휴머니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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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에 대한 생각 - 세계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우리의 식탁은 왜 갈수록 가난해지는가
비 윌슨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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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윌슨이 예측한 진실이 도래하였다. 스낵화된 일상을 경고한다. 그래서 현명하고 건강한 식사에 대한 13가지 생각은 영양가 높은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궁극적으로 좋은 음식이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그 비결은 휴머니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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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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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하지 말고 분노하라.

-누스바움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를 알리는 포스터에 나오는 말이다. 1960년대 우주선을 쏘아 올린 나사(NASA)의 숨은 인물을 그린 영화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숨은 인물들이 캐서린, 도로시, 메리라는 세 명의 흑인이라는 것. 이들이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나사, 아니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 ()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일까? 이 영화에서 캐서린이 흑인 여성 전용 화장실을 가기 위해 다른 건물을 향해 비를 맞으며 800미터를 달려가는 장면이 애틋하게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방 안에 코끼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면 여러모로 불편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방 밖으로 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쫒을 방법이 없을 때 뜻밖에도 가장 좋은 방법을 김지윤의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치 코끼리는 존재하지 않은 듯 살아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이렇듯 방 안의 코끼리는 누구에게나 뚜렷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커다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모른 척 외면하는 상황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두 가지 계층으로 나뉜다.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류(主流)이며 반대로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비주류(非主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통해 정체성을 모색한다.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내 안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부자(富者)의 경우 그 사람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주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가 성소수자라고 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별과 혐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주류 사회에서 멀어지면서 비주류가 되고 만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에게 주류와 비주류라는 권리의 사각지대가 있다. 주류의 권리는 눈에 잘 보이는 반면에 비주류의 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설령 보인다고 해도 애써 외면하기 일쑤다. 하지만 주류의 권리는 어떤가? 오죽했으면 주류의 권리는 특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특권이라고 해서 뭔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너무나 평범한 나머지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며 무시할 수 있다는 건 만큼 안전한 것은 없다. 제도적으로도 주류는 평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평등은 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차별을 덜 인식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주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의 권리가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절반이라는 물리적인 숫자로 보면 여성은 당연히 소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성이라는 이름만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으며 사회적인 소수자가 되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보다 여성의 권리는 발전했다. 투표도 할 수 있고 능력만 되면 얼마든지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만큼 성평등의 지표도 높아지는 게 이상적인 사회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하다. 사회적인 차별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만큼 참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점차로 성차별이 사회 문제로 가시화되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구체척인 감각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권리라고 하면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회적인 약자이며 비주류인 사람들에게 권리는 희망사항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힘들더라도 희망을 가져보라는 것이다. 듣기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격려하는 메시지 같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희망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빼앗긴 권리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를 찾아 나서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불행을 당연시하는 것은 공정할까? 차별일까? 저자는 오에 겐자브로의 개인적인 체험에 나오는 중증 장애아를 책임져야 할 버드의 생각과는 달랐다. 이 소설에서 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

 

사회적인 약자의 문제는 어렵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사회적인 약자는 괴롭힘, 왕따, 성폭력 등 수많은 사건들에서 보듯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공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불편한 방향으로 사건의 진실을 왜곡한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사건의 원인을 따지고 묻는다. 사회적인 약자들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라는 의심을 먼저 하면서 말이다. 침묵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침묵은 또 다른 침묵을 만들어낸다. 그럴수록 차별이 당연시되는 불합리한 세상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선량한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약자의 불행을 불행의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인 약자를 다시 한 번 차별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사회적 약자들이 물리적으로 사회 안에 있다고 해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거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권이라는 영역에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들 같다. 인간으로서 권리를 잃어버려 투명인간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사회적인 약자의 권리가 더 이상 희생되지 않아야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들이 안전하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사회적 체험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생활이 가능하도록 사회적인 인식이 필요하며 사회는 공정한 세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차별을 없애자는 기본원칙을 제정했다고 해서 그 결과로 차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간에 동등한 권리를 희생하지 않아야 우리가 바라는 차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차별은 전염병이 강한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를 대응하기 위해 예전에 없던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전염병의 결과로 보면 사람이 바이러스의 전파자 되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당연시함을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를 통해 의심해보는 것도 좋은 예방법이 될 것이다. 차별이 전염병이라면 권리는 면역력이기 때문이다. 면역력이 취약한 원인은 놔두고 전염병의 결과만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게 되면 사회적 고립이라는 불치병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늘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동안 외면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이슈화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약자들의 무력해 보이는 현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사회적 연결 고리가 얼마가 느슨하며 허약한지 깨닫게 된다. 침묵은 차별이며 또 다른 침묵을 불러일으킨다. 침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정의로운 세상이다. 그리고 침묵에 맞서 사회적 연결이 강할수록 면역력이 좋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가 권리를 희생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방 안에 어슬렁거리는 코끼리를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공정한 세상은 서로가 차별하지 말고 연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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