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回頭一笑百媚生(회두일소백미생)
六宮粉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고개를 돌려 한 번 웃으면 백가지 아름다움이 생기니
육궁의 미녀들 낯빛을 잃고 마네.

위 시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일부분이다. 여기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양귀비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지그시 바라보는 사람은 당(唐) 현종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고 보면 지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가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름다움 앞에서 때로는 모든 것이 안개에 가려져 정작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리라.

우리가 1,500년 전 김대문이 지었다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미실’이라는 신비스러운 여인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하지만 그녀의 에피소드적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처음의 설렘과 달리 그녀를 마주하기가 사뭇 거북살스러웠다. 단지 1,500년 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야 하는 부담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당돌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마치 색공지신(色供之臣)이라는 성(性)의 정체성에 파란을 일으키는 듯 했다.

사실 성만큼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소재는 드물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성을 자유롭게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성을 말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리라. 그런데도 저자는 거침없이 성을 드러내면서 오히려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있다. 1,500년 전 남녀 간의 사랑은 말초신경을 건드리면서도 당당했다.

그런데 저자는 왜 미실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것일까? 미실이란 여인은 다소 상투적일 수 있다. 사랑으로 천하를 얻었으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밖에 없는 여인의 일생은 신선한 충격이라고 하기에는 그리 좋아할 만한 사람이 몇 명 없을 것이다. 즉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잣대의 희생양을 보면서 쓸데없이 부풀어 오른 감각에 만족했던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실을 다르게 본다. 결론적으로 미실을 한탄하지 않는다. 다시 ‘장한가(長恨歌)’의 또 다른 부분을 보면,

遂令天下父母心(수령천하부모심)
不重生男重生女(부중생남중생녀)

마침내 천하의 부모들 마음이
아들 낳는 것 중히 중히 여기지 않고, 딸 낳기를 중히 여기네.

이와 같이 백거이는 양귀비를 한탄하고 있다. 사랑으로 권력을 이랬다 저랬다 주무르는 모양새는 이처럼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별아(저자)는 미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본능을 찾아 나선다. 아름다움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 노래 가락이 남녀 간의 사랑, 즉 음과 양이 만나는 소통의 길목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부드러워지리라. 그것은 수치심이 아니다. 살아가는 자 혹은 살려고 하는 자 이 모두에게 기쁨이리라.

이 책을 읽고 보니 숨이 가쁘다. 미실이라는 신라의 여인은 분명 강했다. 이는 저자가 이미 이 책의 서두에서 밝혀 듯이 미실은 ‘자신이 보여주는 시대를 가장 충실하게 살아가는 배덕자’ 이기 때문이리라. ‘배덕자’ 라고 해서 거부감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허울뿐인 도덕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신비스러운 몸을 지닌 미실은 아름다움의 힘이 만들어 낸 미인이다.

그래서 저자가 오늘날 미실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혹 ‘장탄가(長歎歌)’를 부르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앞선다. 이는 충분히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답고도 새로운 모색 때문이리라. 사랑이 남녀 간의 애증에 따른 줄다리기를 부인하기는 힘들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항상 밀리는 식의 상투적인 사랑 타령은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여자의 사랑이 꼭 남자와의 몸짓에서 좌지우지 된다는 것은 모순의 멍에가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여자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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