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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구역
이영수(듀나) 지음 / 국민서관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배명훈, 김보영 등의 작가들을 알게 되면서 한국SF 소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영수라는 이 작가의 이름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금방 알기 어려운 두리뭉실한 이름, 책의 어디를 봐도 작가 소개따위는 없다.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작품의 성격을 더 강조하는 효과를 의도해서인지. 한가지 확실한 건, 그녀 (이제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은 안다)의 이름과 작품이 더 많이 알려질 수 있을 기회를 차단시킨 결과에 한몫 하지 않았나 생각되어 안타깝다.
이 책을 구입하려고 봤더니 '절판'이란다. 물론 다른 책들도 있고, 최근 작품으론 2008년에 나온 <브로콜리 평원의 결투>라는 중편집도 있지만 웬지 꼭 이 책 부터 읽어보고 싶었는데 낭패였다. 중고책으로도 나와있는 것이 없다니. 그러다 지난 주 우연히 동네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어찌나 반갑던지.
'면세구역'을 첫 단편으로 시작해서 이 책에는 모두 열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 끝에는 기존의 어느 작품을 모티브로 해서 이 작품을 쓰게 되었고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차별화되는지에 대한 작가의 짧은 노트가 달려있다. 예를 들어 <면세구역>이라는 작품은 G.K. 체스터튼과 H.G.웰즈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도깨비 같은 장소들의 존재를 나름대로 설명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 전에 이런 짧은 해설에 대한 작가의 의견이 재미있다.
작가가 자기 글에 해설을 붙이는 건 꼴사나운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표절범으로 몰리기 전에 자기 패를 미리 펴보이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독자들의 시선이 아이디어의 신빙성과 독창성에 가장 먼저 떨어지는 우리 장르에서는 그렇다. (21쪽)
이 작가에 대해 점점 더 궁금해진다.
<스핑크스 아래서>라는 단편은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해설이 달려있는가 하면,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나는 너의 엄마와 결혼하지 않읐을 것이다.'로 시작하는 <나비전쟁>은 가볍지만 기발하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하던 '그녀'가 어느 부분에서 '나'가 되는 작품 <낡은 꿈의 잔해들>은 오싹하기까지 하다.
<펜타곤>같이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작품들도 있다. 그렇다고 다시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시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이해 못했다는 것이 별로 기분이 안 좋아서.
<그 크고 검은 눈>, <비잔티움>, <숲의 제단>, <로렐라이> 등의 작품에서는 이제 무대는 지구가 아니라 우주, 혹은 그 이상의 세계이다. 특히 주목해서 읽은 것은 <비잔티움>이라는 작품인데 여기에 창조론과 진화론 외에 제3의 가설, 지적 조절자의 개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 이 지적 존재는 '지적 생물들'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우주를 돌아다니며 적절한 행성을 발견하면 그곳에 생명을 심는다. 제국주의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창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도 그럴 것이 이 창조자들은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진화 초기의 생물을을 더럽고 추잡한 동물들이라고 표현한 것도 독특하고.
마지막 작품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는 그중 제목이 비교적 편안해 보이지만 결코 받아들이기 편안한 내용이 아니다. 고치를 남기고 사라진 아이들의 정체를 생각하면 끔찍하기조차 하다.
작가는 상당히 예리하고 기발하며, 일단 누군가의 입이나 글을 통해 나와있는 이야기는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비숫해지기를 혐오하고 있지 않을까 혼자 추측해본다. 그래서 더 다른 작품들의 바다를 열심히 헤엄치고 다니고 있다면 아이러니일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 자체가 마치 현재 한국 문단에서 <면세구역>같은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음의 대사를 보면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 선택받은 사람들의 눈에만 들어오는 작품.
"...... 그러니까 면세구역의 존재는 일정 수준으로 커진 도시에서는 자연발생적이지요. 그 곳을 선택받은 사람들이 발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어떤 사람들이 선택받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유전적인 요소를 고려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20쪽)
언젠가 어린이용으로 미래 생명공학 관련 이야기를 재미로 써본 적이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했음에도 읽어본 모든 어른들은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해서 절망했던 경험이...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을 또 읽게 될까?
나도 모르겠다.
▶ 다음은 내가 즐겨 보는 한국과학창의재단의 The Science Times 사이트에 실려있는 이영수 작가 작품에 대한 기사이다.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61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