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고도 끌렸다. '부끄럽지 않은 밥상'이라니.

 

 

 

 

 

 

 

 

 

 

 

 

 

 

 

흙냄새 나는 동시를 쓰는 시인으로 알고 있고, 그의 시 몇편은 여기에도 올린 기억이 있는 서정홍 시인의 에세이인데, 오늘 오후 손에 들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손에서 놓지를 못하고 읽고 있다.

 

포스트잇을 가장 처음 붙친 곳은 38쪽. 이 시가 나와있는 쪽이다.

 

이른 아침에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중에서

 

 

무릎 수술을 받느라 농사 짓던 것 뒤로 하고 병원에 입원해있으려니 마음이 오죽 어지러웠으랴. 마음이 잔뜩 약해져 있다가, '그래도 살아야지요, 이 악물고 살아야 합니다.' 라고 마음을 추스린다. 그 이유란,

얼른 돌아가서 감자밭도 일구어야 하고, 감나무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옮겨 심은 매실나무랑 무화과나무도 잘 자라도록 돌보아야 하니까요. (94쪽)

이 악물고 살아야 하는 이 이유가 거창하지 않다는 것 역시 너무 맘에 들어, 설거지도 미루고 지금 이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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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6-2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악물면 살기 힘든 세상이긴 하지만 너무 이를 꽉 물면 결국에는 비싼 임플란트 비용만 발생하는 서글픈 세상입니당ㅜ.ㅜ

hnine 2012-06-22 05:30   좋아요 0 | URL
임플란트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 과정이 참 힘든 과정이더군요.
이 악물땐 이제부터 손수건이라도 물고 악물어야하는지...^^

비로그인 2012-06-21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하다, 이 말 밖에 안 나오네요 ( '')...

hnine 2012-06-22 05:32   좋아요 0 | URL
사람 마음이 잠깐이라도 이렇게 착해지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나의 괭이질에 신체가 절단난 장면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시인의 마음. 저는 이런 글을 읽을 때가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마음이 착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착한 사람은 못됩니다만~ ^^

파란놀 2012-06-21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거지도 즐겁게 하셔요.. 삶은 아주 즐거운 선물이니까요..

hnine 2012-06-22 05:35   좋아요 0 | URL
청소에 비하면 설거지는 즐겁게 하는 편인데 어제는 아니더군요 ㅠㅠ
삶은 아주 즐거운 선물이기도 하고 넘어야할 산이기도 하고 숙제이기도 하고...현재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이 책 읽으며 된장님 생각도 했어요 ^^

책읽는나무 2012-06-22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이런 글 읽으면 읽는 순간 착해지는 기분이 잠깐이라도 생겨나는 것에 공감해요.^^
시인의 삶에 갑자기 경건해짐이 전해오네요.
우리 잠시라도 착해져 보아요.^^

hnine 2012-06-22 12:21   좋아요 0 | URL
착한 마음에 공감하는 순간 나도 잠시 그것에 물드는 느낌...나쁘지 않지요.
이 책 결국 다 읽었어요. 곧 리뷰 올리겠지만, 요즘은 사람 이야기보다 이렇게 자연과 어우러지는 이야기에 마음이 쏠리네요.
어제 한참 햇볕 쨍쨍할 때 도서관 다느라 기진맥진한 보람이 있었어요.
오늘도 날씨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늘바람 2012-06-2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텃밭을 가꾸고 싶은 생각이 굴뚝입니다
고구마 감자 참외 다 기르고 싶네요 토마토랑 고추 상추도요.
설걷이를 늘 미루는 전 ~
게르음의 극치를 살고 있어서 이 악물고 살고 있지는 않은 듯한데 시간은 참 빠른듯 합니다.

hnine 2012-06-22 12:23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옥상에 미니텃밭 있지 않던가요? 손수 꾸미신...
이사가시면 또 한번 예쁘게 꾸며보세요.
이 책 읽고 제일 크게 느낀 것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생명체를 직접 손으로 가꾸고 키워보는 일의 의의, 중요성, 교훈, 이런거랍니다.

Arch 2012-06-2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시가 참 좋았어요. 서정홍 농부 시인이 속한 공동체의 효소도 먹어봤어요.(자랑중 ^^)

hnine 2012-06-22 19:42   좋아요 0 | URL
송화차 말씀하시나요? 저도 지금 막 검색해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

Arch 2012-07-05 14:23   좋아요 0 | URL
아, 너무 늦은 댓글이죠..
열매지기 공동체에서 나온 산야초 효소에요. 인터넷에서도 판매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한살림에서 나온 것보다 맛이 더 복합적이던데.

프레이야 2012-06-2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이 악물고 살아야 할 이유에 숙연해지네요.^^
좀 극단적으로 말해, 나를 위해 살지말고 다른 생명을 위해 산다면 더 만족한 삶이겠군요.
불평불만은 나를 위한 기도에서 비롯된다는 글귀가 떠오릅니다.
책 표지의 장독대 장독들이 두런두런 이야기꽃 피우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표지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hnine 2012-06-23 05:06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내가 되고 싶은 어떤 목표를 꼭 이루어내야겠다는 투철한 정신, 뭐 이런 것을 좇아 열심히 사는 것을 추구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나를 위해서라기 보다 다른 어떤 것, 특히 자연을 돌보며 사는 삶에 더 공감이 되는군요.
리뷰에 다시 쓰겠지만, 사람이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직접 키워보게 하는 것, 즉 농사를 경험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이분 생각인데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농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땅에서 자라는 풀 한포기라도 직접 내 손으로 돌보고 키워보는 경험을 어른이나 애들이나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생명'의 소중함을 경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야클 2012-06-2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찡하게 하는 좋은 시네요. 여러번 읽고 갑니다.

hnine 2012-06-23 05:09   좋아요 0 | URL
얼마전에 읽은 '시인의 서랍'이라는 책도 단숨에 읽히더니 이 책도 그렇더군요. 시인들은 저렇게 남들이 지나치는 장면에도 열배로 더 크게 마음의 물결이 생기나봐요. 그 물결에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도 일렁이게 하고요.
야클님, 오랜만에 뵈니 좋으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