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2학기가 훌쩍 지나가고 4학년이 되었다. 그 해는 무슨 이유인지 따로 반 편성이 되지 않고 3학년 반 그대로 다음 학년 같은 반으로 올라가게 되어 우리 반 아이들 모두 함께 4학년 같은 반, 같은 담임선생님 밑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3학년 때의 할머니 선생님 대신 4학년 담임선생님은 교대를 갓 졸업하신 여자 선생님이었다. 화장기도 없는 앳된 모습은 선생님이라기보다 언니 같고 누나 같아서 이제부터 시작되는 4학년에는 어떤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을 두배, 세배로 부풀게 하였다. 의례적으로 학년 초에 행해지는 가정환경 조사서가 돌고, 학급 임원 선출이 있고, 나는 또 반장이 되었다. 아마 3학년 때 임원을 해봤던 경험, 그리고 눈에 띄는 개성은 없으나 아이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던 나의 무난한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이 반장인 나보다 그녀에게 더 관심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어떤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기분으로 느껴져 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받는 어떤 한 순간의 횟수가 늘어가고,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게까지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나보다 그녀를 더 챙기는 듯 했고 더 아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자매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가끔 수업 끝나고 남으라고 하는 사람은 반장인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남아서 무엇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본 적은 없다.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그러나 드러나지 않고 있던 열등감이 드디어 표면화 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급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던 관심 이상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 나는 화가 나기도 했고 동시에 침울해져갔다.
여름 방학을 맞았고 나는 그녀와 여전히 가깝게 지냈다. 부모님께서 모두 일하러 나가시는 것은 우리 집과 같았으나 동생들, 할머니, 도우미 아주머니까지 있었던 우리 집과 달리 그녀 집은 우리들 세상이었으니까. 함께 방학 숙제도 하고 책도 읽었다. 나 말고 다른 친구들이 더 있을 때면 그녀는 마당에 나가 수영을 하자고 했다. 마당이 수영장이 되는 것이다. 그녀가 수영장이라고 하면 물 한 방울 없는 마당이 그 순간부터 수영장이 되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서 그런 재주를 배웠단 말인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학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그런 재주를.
그날도 놀다보니 끼니 때가 지난지도 몰랐다.
“우리 짜장면 먹으러 가자.”
놀던 자리에서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는 계현이를 나는 무슨 소리인가 해서 쳐다보았다. 중국집 놀이를 하자는건가?
놀이가 아니었다. 지갑을 챙기더니 계현이는 나를 데리고 시장 통에 있는 허름한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옆으로 드르륵 미는 문. 유리문엔 빨간 글씨로 짜장면, 짬뽕, 탕수육 이라고, 메뉴가 쓰여 있었다. 이런 중국집에 와보는 것도 처음이고, 어른 없이 이렇게 뭘 먹으러 식당에 와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간짜장을 시켜서 먹었고, 애들끼리 왔다고 이상하게 보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이는 나와 달리 계현이는 마치 자기 집 방에서 먹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짜장면을 먹었다.
그 다음 들른 곳은 더 어이가 없었다. 그 건물 2층의 다방이었으니까. 요즘 말하는 아저씨 다방 같은 곳인데, 거침없이 들어가 앉더니 생각할 것도 없이 쌍화차를 먹겠다는 것이다. 쥬스나 우유, 코코아도 아니고, 이름도 이상한 쌍화차를, 나도 따라 시켰다. 그 순간엔 그냥 따라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래서 짜장면 먹고 나면 우리 아빠는 꼭 여기 들러서 쌍화차 마셔.”
과연 그녀 말대로 그곳에 여러 번 와보았는지, 계산할 때보니 다방 주인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도대체가 이 세상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 같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겨우 엽서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