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도 나는 숙제 할 것을 챙겨 그녀 집으로 갔다. 방학 중 나의 일과나 다름 없었다.
여름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엔 더위도 추위도, 견디지 못할 게 없었다. 없던 생기가 그녀로부터 나에게까지 전해져왔다. 기분은 두 배쯤 더 좋아지고 세 배쯤 더 행복했으며 세상의 명도는 상향 조정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때 이후로 내가 또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그녀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우연히 책상 위에 엽서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 사용되던 보통의 관제 엽서였지만 사인펜으로 색색의 하트가 여러 개 겹쳐 그려져 있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각각의 하트 속에는 작은 글씨로 내용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궁금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엽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받는 사람 칸에는 그녀 이름이 쓰여 있는데 보낸 사람 이름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잠시 멈추는 줄 알았다. 그 엽서는 다름 아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으니까.
나 역시 방학 하고 며칠 안되어 숙제를 하듯이 담임 선생님께 정성스럽게 안부 편지를 보냈고, 한참 후이긴 하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을 받긴 받았다. 바로 이것과 같은 관제엽서에.
하지만 이런 하트 그림은 없었다. 내용도 이렇게 빼곡하지 않았다. 편지 보내주어 고맙고, 너도 방학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나 아니라 그 누구에게 보내도 무난할만한, 고작 대 여섯 줄이 전부인 답장이었다. 그런데 이건 뭔가? 눈으로 내용을 훑어 내리고 있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겨우 시선이 멈춘 곳은 엽서의 마지막 줄. 그런데 그 마지막 줄 내용이란 게.
‘너의 언니가 되어 줄게.’
이게 무슨 말인가.
‘언니? 언니가 되어 준다고?’
나는 그 자리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담임선생님과 계현이는 얼마나 친해져 있던 것인지.
‘선생님이 아니라 언니란 말이지?’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게 선생님이 아무 학생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내가 받은 엽서, 그리고 그녀가 받은 엽서.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질투, 배신감, 속았다는 생각, 뭐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불길이 온통 나를 태우더니, 어느 새 그 활활 타오르는 것 같던 마음은 눈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계현이가 보면 안되니까.
그날 나는 그녀에게 끝내 엽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본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마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밤 잠도 잘 이루지 못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그건 자존심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또래 아이답지 않기는 그녀보다 내가 더 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