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날까지 넘겨야 하는 번역물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고 컴퓨터에 앉아 있던 나는, 아파트 현관 문 밖에 툭 신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새벽 5시가 되었음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다리뿐 아니라 온 몸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발 디딜 때마다 찌릿찌릿하는 것을 느끼며 신문을 집어 들고 와 마루의 어항 불빛 아래에서 신문을 펼쳐 놓고 무심히 지면을 넘기고 있었다. 기사를 눈으로 훑고 지나가다가 이번에 새로 탄생한 부부 법조인을 소개하는 제목을 보았는데 언뜻 ‘마포 지검의 박계현 검사와’ 라는 글자가 눈에 스치고 지나갔다. 기사 옆의 사진은 흑백인데다가 단체 사진이어서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나는 그 사진에서, 그리고 그 기사에서 한동안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박계현. 검사가 되었구나. 그래, 그럴 만 해. 뭔가 한 자리 할 거라 생각했어.’
그녀의 신분과 소재지를 알게 되자 전혀 생각지도 않던 마음의 움직임이 느닷없이 일어났다. 그녀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어떻게 그녀는 내가 취약했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수 있었는지. 아니, 그녀에게 뛰어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특히 그녀의 미술 실력은 그 당시 이미 초등학생의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나는 방과 후 일주일에 두 번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고 그녀는 화실엘 다니고 있었다.
“화실엔 일주일에 몇 번 가?”
나와 달리 매일 화실에 가는 것 같기에 물어보았다.
“매일”
“매일? 매일 가는 화실 많지 않은데. 나는 피아노 월요일이랑 목요일에만 가거든.”
“우리 화실도 원래 그럴 거야 아마. 일주일에 두 번인가, 한 번인가. 그런데 나는 매일 가고 싶어서 매일 가.”
내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한다는 그 자신감 역시 나에게는 없는 것 중 하나였다.
그녀 화실에 한번 따라 간 적이 있었다. 같이 숙제를 마치고 뭘 할까 하다가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는지 그녀는 갑자기 화실엘 가자고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화실은 보통의 가정집 같이 생긴 곳 2층에 있었다. 밖으로 통해 있는 계단을 올라가니 옥상이 나왔고 작은 간판이 붙어 있는 화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수업이 없는 날인지, 아직 문 열 시간이 아니었는지, 화실에 다니고 있는 계현이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좀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다시 돌아 나올 줄 알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그녀는 발길을 돌리는 대신 화실이 있는 옥상 마당에 가지고 간 화구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가 쓰는 것보다 두 배는 돼 보이는 커다란 스케치북과 물감, 팔레뜨, 붓통을 늘어놓고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림은 꼭 화실 안에서만 그리란 법 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초록색, 파란색, 붉은색, 서너 가지 물감들을 풀어놓고 물을 섞으니 모두 맑음이라는 새로운 색으로 변신한 것 같았다. 그 색들이 그녀의 붓을 따라 종이 위를 채워 나가는 동안 나는 잠자코 서서 그녀의 그림을, 그림 그리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없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