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그녀의 무엇이 부러웠을까.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부러웠을까? 지금도 나는 정확히 그 기분을 내 언어의 범위에서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아이한테는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느낌?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 그러면서 불안 한 자락이 나를 휩싸오는 것을 느꼈던 것은,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이 최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기 때문 일거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일도 없었다.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는 집에서 혼자 책을 읽는 쪽을 알아서 택하는 아이였으니 늘 칭찬과 기대를 받았다. 그런 칭찬과 기대는 어느 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보다는 무엇을 해야 하나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열 살 갓 넘은 나는 이미 열 살 갓 넘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전학 오고 나서 첫 학기는 그래도 내가 일등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그녀와 별로 큰 점수 차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주위엔 늘 친구들이 따랐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힘들이지 않고도 옆에 있는 사람을 재미있게 했다. 일부러 웃기는 말이나 행동을 지어내서가 아니라 그녀는 그녀 자신을 결코 심심하게 두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 10분동안 필통 속의 연필이라도 꺼내어 사람을 대신해 놀고는 했다. 연필 사람을 손에 쥔 그녀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즉흥적인 대사가 흘러나왔고 그럴 때 그녀는 무대 위 연극 배우 같았다. 자신의 놀이에 몰입해있는 그녀의 모습은, 경이로왔다.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마포지방법원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박계현 검사님과 통화하고 싶은데 구내전화 몇 번으로 걸어야 하나요?”
일단 대표 전화 번호로 건 후 교환원에게 물어보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곧 통화 연결음 신호가 들려 왔다.
“박계현 검사님 사무실 김OO입니다.”
웬 남자의 음성이다.
“아, 여보세요? 박계현 검사님, 자리에 계신가요?”
막상 전화를 걸고 나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었다. 누구시냐, 무슨 일로 그러시냐는 의례적인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이러다가 내가 제발 그냥 끊어버리게 되지만 않기를 바라고 있을 때 수화기 저편에서 웬 씩씩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박계현입니다.”
낯선 음성이었다. 하긴 20년도 더 전의 목소리가 그대로이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
“저, 안녕하세요? 저는 김나영이라고 하는데요. 친구를 찾고 있어요. 혹시 3,4학년을 서울 OO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았나요? 제가 아는 친구가 맞나 해서 그러는데요.”
“서울 OO 초등학교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나왔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말투에서 부산 억양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니구나. 내가 찾는 그 박계현이 아니었어.’
실망했던가? 아니면 안도의 한숨이었던가. 나는 실례했다는 말로 황급히 전화를 끊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