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집은 우리 집에서 가까워서 등하굣길에 자주 마주쳤다. 그러다가 같이 숙제할래? 그럴까? 이렇게 되어 학교 끝나고 숙제도 같이 하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우리 집 보다는 그녀 집으로 갈 때가 많았는데 우리 집엔 할머니도 계시고 동생들까지 북적거린 반면 그녀 집은 항상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주인집이 아닌 셋방이었던 그 녀의 집. 엄마 아빠 모두 일하러 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으니 학교 끝난 후 오후 시간을 그녀는 친구를 불러 함께 놀거나 그렇지 않은 날은 화실에 다녔다.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면 누가 나와 대문을 열어주는 대신, 직접 열쇠로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은 새로웠다. 마치 우리들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자유의 맛이랄까. 우리는 숙제를 후다닥 마치고 참으로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놀았다. 그 나이 때 여자 아이들처럼 인형을 가지고 놀긴 했으나 그녀가 제안하는 방법은 그때까지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던 방법이 아니었다. 즉, 이 옷 입혔다 저 옷 입혔다,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꾸며주면서 누구 인형이 더 예쁜가, 공주 목소리 흉내 내어 몇 마디 주고받는, 그런 놀이가 아니라 인형은 우리가 만든 세상의 한 구성원일 뿐이었다. 그 방에 있던 모든 물건이 우리의 놀이, 우리가 만드는 마을에 포함되었다. 책상은 회사 건물이 되었고, 옷장 속은 숲 속이 되었다. TV위에 놓여있던 곰 인형은 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되어 인형들이 타고 다녔다.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면 그 위에 올라 앉아 구름 위를 타고 나는 양탄자가 되었으며, 천장 형광등은 갑자기 나타난 외계물체가 되기도 했다. 불을 켰다 껐다 하며 외계인들의 신호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엔 그녀가 있었다. 무얼 해도 새로웠고 빠져들게 만드는 그녀를 나는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어둑어둑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더 놀고 싶어 서운했다. 그녀와 함께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급기야 나는 아침에 학교 갈 때 집에서 일부러 좀 일찍 나왔고, 그녀 집에 들러 그녀가 아침 먹고, 옷 입고,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기다렸다. 그녀 집의 아침 풍경은 우리 집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녀는 엄마보다는 아빠와 더 친한 듯 보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아빠랑 꼭 몇 분이라도 수학 문제를 함께 푼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아빠가 가방도 함께 챙겨 주고 준비물도 챙겨 주어 학교를 보내는 것을, 새벽 일찍 나가시고 밤늦게 들어오시는, 얼굴 보기도 힘든 나의 아빠, 그리고 엄한 우리 집 분위기를 떠올리며 그저 멍한 눈으로 그 애의 아침 동선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글픔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