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물을 파라'는 옛말에서 부터,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노력해야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좀 더 구체적인 최근의 말에 이르기까지, 이것 저것 건드리는 것 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우직하게 한가지 일에 전념하는 것이 성공의 근본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일까. 언제부터인가 개인적으로 한 우물을 계속 파지 못한 것에 대하여 지레 실패감 비숫한 것을 마음 한 귀퉁이에 안고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며칠 전, 전공을 살려 학교에 남은 친구와 오랜 만에 전화를 하게 되어 안부를 묻다가 어떻게 지내느냐는 그 친구의 물음에 우스개 소리로 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 대해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친구: "그래, 집에서 뭐하며 지내니?"
나: " 뭐하긴, 학교에서 연구하는 것만 빼놓고는 다 하지. 넌 연구 한가지 하느라 다른 일 아무것도 못하잖아. 난 한가지 안 하는 덕분에 다른 것 다 하고 살아."
나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주고 폭소를 터뜨려주는 친구가 고맙다.
한 우물을 파고 싶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사람 일이 꼭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란 말이다. 나름대로 몇 년 동안 몸 담고 있던 일을 접기 까지의 과정도 힘들었지만, 그렇게 결정하는 일 자체도 쉽지 않았다. 당장 내 인생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배운 것도 많다. 내가 겪어 보지 않았더라면 이해하는데 훨씬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일들을 내가 겪어 보아 알게 된 것들,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는 것들.
며칠 전에 남편이 하는 말, 요즘 동네 주택가에도 까페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그 주 고객들이 집에서 살림하는 아줌마들이란다. 나도 까페를 그리 자주 애용하는 사람은 아니고, 더구나 아이를 키우고 빠듯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는 보통 아줌마이다보니 요원하게만 들리는 얘기이지만 남편에게 대답했다.
"집에서만 있는 주부들일수록 그렇게 일부러라도 바깥 바람을 쐬어 주어야 한다구. 집에만 있어봐.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우울증도 오기 쉽고, 식구들과 대화도 쉽게 막히고. 집에 있는 주부들도 그렇게 까페에 나가 차도 마시고, 친구들과 얘기도 하는것, 나는 참 필요하다고 봐."
진심이다.
내가 대학생일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앞 까페에 나와 친구들을 만나는 아줌마들을 이해 못했었다. 아이 키우랴, 직장 생활 하랴, 지각, 조퇴 잦고, 그러면서 미안해하지도 않는 직장내 아줌마 동료들을 보며 또 잘난 척 했었다. '아니,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걸 모르고 결혼하고 아이 낳았나? 대책도 없이...'
나의 에너지를 한군데 집중시켜 일하고 있는 생활을 내 자의에 의해 그만 두고, 이것 저것 여러 가지 일에 그 에너지를 분산시켜야 하는 지금, 나처럼 multi-tasking 인간이 못되는 사람은 늘 머리 속이 복잡하지만, 그래서 예전에 눈도 돌리지 않은 곳들에 눈길이 간다. 대형 마트 대신 매일 장바구니 들고 장 보러 다니면서 길가의 채소 파는 할머니들과 얘기도 나누고, 반찬 만드는 방법을 요리책이 아닌 그 할머니들에게 물어서 해보기도 하며, 전혀 관심도 없던 떡이니 빵을 만들기도 한다. 영어, 수학 배우느라 학원 보내는 것은 최대한 미루자는 생각으로 내가 직접 아이에게 이것 저것 가르치느라 나름 공부도 한다. 대신 일주일에 한번 아이가 배우고 싶다는 중국어 선생님이 오시는 날은 나도 방문 너머로 들으며 중국어를 배워보기도 한다. 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나도 새로 배우는 것들이 많아졌다. 읽고 싶던 책을 맘껏 읽고 있다. 이게 웬 생각지도 못했던 여유란 말이냐. 그러고도 너 실패감이니 어쩌니 하면서 불평할래?
내 맘속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실패감이 조금씩 극복되어 가는 것 같아 기쁘다. 아니, 내가 특별히 노력한 것이 없으니 '극복'이라는 말 보다는 그저 나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여전히 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 분들이라고 중간에 위기의 순간들이 없었으랴.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 인생의 어떤 결점으로 볼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대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는 편이 우리 자신에게도 훨씬 좋다. 그리고, 지금 그 우물 파던 삽을 놓았다고 해서, 영영 놓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 다시, 더 굳건한 손으로 놓았던 삽을 다시 잡을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인생은 그래서, 그런 예측불허성때문에 힘들기도 하고 신도 나고 하는 것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