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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언니가 없는 내가 어릴 때부터 무척 따르던 사촌 언니가 있다. 내가 아직 학교도 들어가기 전 스물 몇살이었던 언니가 가끔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으면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자고 가곤 했는데 나는 어떡하면 그 언니가 우리집에서 좀 더 오래 있다 가게 할 수 있나 머리를 굴리곤 했다. 오자 마자 언니 몇 밤 자고 갈거냐고 물으면 할머니께서는 집에 온 손님에게 오자마자 언제 가는지 묻는거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일종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던거다. 그만큼 그 언니가 왔다 가고 나면 나는 오랫동안 울적했다.

언니가 내일 간다, 모레 간다, 하고 드디어 돌아갈 날을 알게 되면 나는 언니 며칠만 더 있다 가라고 조르기도 하고 사정도 하면서 매달렸다. 그럴때면 언니는 항상 웃으면서 금방 또 올거라고 나를 달래주었다. 그럼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 언니의 소지품을 몰래 숨겨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언니의 머리빗, 칫솔, 손수건, 이런 것을 몰래 숨겨두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없어진 걸 알면 찾을 때까지 언니가 우리집을 못떠날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번도 찡그린 얼굴을 본적이 없다. 푸근하고 넉넉하고 어른들에게도 칭찬받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기 때문인지 나 같은 꼬마들하고도 얘기를 잘 주고받았다. 우리 집에 오면 내 머리도 빗겨주고 그림도 그려주고 옛날 얘기도 잘 해주었다. 늘 언니 노릇을 해야했던 나에게도 언니라고 부를 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었다.

그 언니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잠시 전주에 내려가 살던 시기가 있었다.  마침 전주 출장을 갈 일이 있으셨던 엄마께서 그 언니 집에 가서 하루 주무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아침 식사는 물론이고 엄마에게 앉으시라고 하고는 직접 머리 드라이까지 정성껏 해주더라고 엄마는 지금도 그때 말씀을 해주신다.

결혼 후 따로 일을 안한 대신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형부와 두 아들까지 얼마나 정성껏 뒷바라지 하는지, 형부는 지금까지 아침에 옷을 스스로 꺼내 입은 적이 없다고 하신다. 언니가 그날 날씨에 맞게 상의부터 양말까지 다 꺼내서 준비해준다는 것이다. 형부가 그렇게 해달라고 한적도 없는데 언니가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다고 한다.

독실한 크리스찬이라서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는 언니는 말도 잘하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큰집의 장녀이기 때문에 집안의 대소사 일에도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늘 웃는 얼굴. 아주 오랜만에 만나도 지금도 그 언니를 보면 그냥 안기고 싶어지고 나의 닫혔던 입이 절로 열리게 한다.

그런 언니가 아주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엄마로부터 들었다.

"그 언니가 왜?"

아들들도 잘 키워 모두 출가시키고 얼마전엔 회갑을 맞은 언니이다.

나름대로 고민이 있겠지 라고 엄마는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언니에게 고민이 있는게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초긍정, 항상 스마일, 사교적이고, 사람 좋아하는 언니가. 형부가 언니를 힘들게 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단촐하게 형부랑 둘이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언니는 다른 사람들의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들어주는 일은 잘 하고 있지만 막상 언니의 고민을 얘기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이 아프거나 힘들다고 하면 발벗고 달려가는 언니, 막상 자신이 힘들땐 쉽게 털어놓고 공감을 구할, 그럴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언니, 언니도 불평도 좀 하고 투정도 부리고 그래 언니. 그래도 되는거야."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단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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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05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레 사람들이 언니한테서 '받아먹기'에 익숙해졌을 뿐,
언니하고 나긋나긋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은 없었으리라 느껴요.

'받는' 사람들은 으레 '받는 줄 못 느끼며 아주 마땅하다'는 투로
받아들이곤 하잖아요. 이러다 보면, 서로 같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삶동무인 줄 잊기 일쑤예요.

서로 같은 자리에 있을 때에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만큼,
'받들리'거나 '떠받드는' 사이가 되고 말면,
'사랑으로 베푸는 사이'에서 자꾸 멀어지겠지요..

hnine 2012-10-05 18:24   좋아요 0 | URL
'삶동무'라는 말, 참 좋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얘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다른 사람 얘기 듣는 건 잘 못하더라고요.

saint236 2012-10-0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속에는 제각각의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의 상처가 이제야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최근에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상 불평도 하고 투정도 하는 것이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따지는 것도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그냥 대화해주는 거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들, 쓸데 없는 신변잡기들도, 그리고 옛날 추억들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힘내세요.

hnine 2012-10-05 22:36   좋아요 0 | URL
우울증의 원인부터 제대로 알아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들 보통 말하는데 saint님 말씀 듣고 보니 원인을 아는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일 같네요. 이런 저런 이야기, 쓸데 없어보이는 신변잡기, 하다 못해 드라마를 같이 보면서 나누는 이야기, 그러면서 자기의 본심을 슬쩍슬쩍 드러내게 되니까요. 옛날 추억 이야기를 하게 되면 풀리지 않은 앙금 같은게 드러나기도 하고 말로 표현하고 나면 조금씩 그 맺힘이 풀려가기도 하겠지요.
이런 얘기하면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여 자신의 고민이나 걱정은 혼자의 마음 속에 다 쌓아놓고 있는 것도 문제이고, 상대방이 그렇게 어렵게 대화의 문을 열었는데 시큰둥하게 흘려듣고 마는 실수도 하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도움 말씀, 감사드립니다.

saint236 2012-10-07 16:33   좋아요 0 | URL
원인을 아는 것보다 먼저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고요. 다음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진단하고 원인을 발견해서 치유하는 것은 지인들이 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냉철하지 못하고 개인의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요. 심리적인 문제들은 이래저래 힘든 것 같네요.

hnine 2012-10-07 21:57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병원에서 의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주변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해줄 수 있는 방법은 다르겠지요. 두가지 모두 필요할 것이고요.
평소에 특정 종교에 대해 특별히 호, 불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요즘은 종교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머님께서도 조금씩 조금씩 호전되셨으면 좋겠어요.

마녀고양이 2012-10-0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
저는 자주 그런 실수를 해요. ㅠㅠ.

어쩌다 좀 힘이 있어보이는 분이 들어오시는거예요, 그래서
아 오늘은 좀 괜찮겠구나 하는데, 아이고, 이야기 듣다보면 제가 울고 있어요.
상대가 못 울고 방긋방긋 웃으면, 대신 제가 울더라구요. ㅠ

hnine 2012-10-05 22:28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요즘 본격적으로 상담 시작하신거예요?
상대방이 하는 얘기에 공감해서 함께 울고 웃어주는 편과, 아니면 끝까지 객관성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는 편.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상담자일지 저는 그게 늘 궁금했어요.
예전에 제 친구 하나가, 자기를 비난조로 말하는 상대에게, 다른 말 필요없이 딱 한마디만 던지더군요. "네가 날 알아?"
위에 말한 제 사촌언니는 그 언니를 잘 아는 사람이 보아도 남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해결해줄 사람으로 보이지 결코 우울증에 걸릴 사람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휴...

비로그인 2012-10-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네요...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건, 스스로에게 부담이 적어서 더 위험한 것 같아요. 사람이 제일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에요. 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 모두가 어려울 거란 생각을 하면 위로도 되고, 또 더욱 아득해지고 그러네요. 마음이 동글동글한 사람이 쓴 글을 읽고 싶어서 요즘 찾고 있답니다. 박완서 작가님 책을 읽으면 어떨까 싶구요. 주말, 잘 보내세요 hnine님!

hnine 2012-10-05 22:34   좋아요 0 | URL
마음이 동글동글한 사람이 쓴 글이라...글쎄요, 찾으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모름지기 작가란, 다른 사람보다 감수성이 몇배 더 높을테니 동글동글하기보다는 뾰족뾰족 더 예민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남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것을 포착해낼 수 있으려면 그래야할거라고...
저는 박완서님의 책을 대부분 대학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다 찾아 읽었는데 소설보다 수필로 시작했어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수필을 읽으면서 이분 상당히 예리하고 냉철하신 분이로구나 생각했거든요. 첫인상이 그렇게 딱 박혀버렸답니다.
제 마음을 동글동글하게 만들고 싶을 때 저는 어린이책을 봐요. 그림책이요. 이제 아이도 다 컸는데도 그림책을 한질 구입을 할까도 생각한답니다. 저를 위해서요 ㅋㅋ
주말 잘 보내라는 수다쟁이님 끝인사가 오늘따라 따뜻하게 들리네요 ^^

희망찬샘 2012-10-06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싸한대요. 제 사는 것이 힘든 시절, 남의 아픔은 안중에 없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픈 사연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제가 많이 행복해졌나 하는 생각을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참 좋은 언니 분이, 위로받을 무엇인가, 아니면 누구인가를 만나 어려움을 극복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ㅜㅜ

hnine 2012-10-06 22:38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의 얘기가 다른 사람의 얘기로 들리지가 않지요.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고요. 생활은 더 풍요로와졌는데 심리적으로는 더 빈곤해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언니는 그래도 신앙이 돈독하니 그것이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와요.

프레이야 2012-10-06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같은 그런 분들이 더 위험하다고 들었어요.
투덜대고 풀어내기라도 하면 오히려 낫다고...
가까운 사람들이 힘이 되어 드려야할 시기 같네요. 짠해요.

hnine 2012-10-07 08:23   좋아요 0 | URL
'기발한 자살여행'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첫 페이지에 그런 말이 나오네요. 핀란드 사람들의 가장 고약한 적은 우울증이라고요. 많은 핀란드 사람들이 이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심신을 갉아먹는 이 우울증을 물리치려고 하는 치열한 전투를 해내야 된다고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계산하고 혼자 삭히지 말고 좀 주책맞더라도 말씀하신것처럼 투덜대고 풀어내면서 사는게 백배 나은것 같아요.
멀리서 그냥 걱정만 하고 있을 뿐 언니에게 별 도움이 못 되고 있네요.
 

 

이번에는 조각 번역물이 아니고 내 이름자 들어가는 단행본 번역의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어제 출판사의 연락 받고 오늘 갔다가, 결국 어정쩡한 답변만 듣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오고 있는 길. 나도 모르게 그 발걸음은 내 집이 아닌, 얼마 전 나은경으로부터 알아낸 계현의 집 주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냥, 은경으로부터 들은 그런 모습의 계현이가 머릿속에서 얼른 그려지지가 않기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할까. 아니, 이것도 핑계일지 모른다. 그냥,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하자.

지금 만약 다시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계현이는 나를 기억할까? 그것과 함께 궁금했던 것은, 지금 이렇게 별 볼일 없이 살고 있는 나를 보면 그녀는 무어라 할까.

아파트 단위의 주거 형태는 집 찾기를 수월하게 해준다. 그녀의 아파트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01동, 102동...저기다 103동. 갑자기 빨라지는 발걸음. 출판사에서 나올 때 발걸음보다 오히려 힘이 실어졌다. 1층 그녀의 집을 기웃기웃했다. 그 옛날 그녀의 집 대문 밖에서 그랬던 것처럼. 열 몇 살 적 어느 시기, 그녀의 인생을 기웃기웃 했던 것처럼.

그러면서 조금 있노라니 가방을 멘 한 꼬마 아이가 그 아파트 입구로 쪼르르 들어가더니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보였다. 금방 문이 열리면서 그 아이를 맞이하느라 나온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다 박계현. 문을 열고 아이를 들이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웃는 모습 어딘가에 예전의 그 날카롭던 인상이 남아있는 듯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그 몇 분. 머릿속에 내 멋대로 짓고 있던 시나리오 뭉치가 바람 속으로 날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퍼드덕.

여기 저기 흩어져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바라만 보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너랑 이렇게 다시 연락이 될 줄 누가 알았겠니. 그것도 계현이 때문에.”

그 후 다시 통화하면서 은경이가 하는 말을 그냥 흘려들을 뻔했다.

“계현이 때문에 연락이 된 게 뭐 안 될 거라도 있니?”

“그게......”

은경이가 얼른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나에게 되물었다.

“나영이 너 계현이 소식이 왜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얘기했잖아. 신문에서 우연히 이름이 똑같은 다른 사람 기사를 보고 생각났다고.”

“그날, 내가 뒤에서 봤어…….”

은경이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쓰레기 버리고 교실로 돌아가다가 네가 가던 길을 멈추고 봉투에서 그림들을 꺼내보는 걸 봤어. 네 표정이 이상하기에 나도 금방 아는 척을 못하고 좀 떨어져서 네가 뭘 하나 보고 있었지…….”

아, 그렇구나. 본 사람이 있었어.

“계현이가 그림 그릴 때 나도 옆에서 봤기 때문에 멀리서도 네가 봉투에서 꺼내는 그림이 계현이 그림인 걸 알겠더라고.”

“......”

얼굴이 화끈거렸다.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전화로 듣는다는 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담임선생님에게 방금 눈으로 본 것을 말씀드렸어.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전화기를 내려놓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니. 그러니까 담임선생님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계셨던 거다.

“나영아, 계현이네 집은 그때 부모님이 빚을 많이 지고 빚쟁이들을 피해 거의 도망 다니다시피 하는 중이었대. 그래서 그렇게 전학도 자주 다니던거고. 그런 걸 알고 선생님이 계현이에게 더 잘해주려고 하셨던 모양이야.”

나는 금시초문인 사실들이다. 머리가 띵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컴컴한게 낮인지 밤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지상의 모든 것을 바삭하게 말려버릴 듯 작렬하던 햇살이, 이번 주가 시작되면서 거짓말처럼 한풀 꺾였다.

일의 진도는 그럭저럭.

집중이 잘 안될 때에는 오히려 일거리를 들고 TV앞에 앉았다. 하던 일 팽개치고 뛰쳐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하다 막히면 고개 들어 TV 잠시 쳐다보고, 다시 일로 돌아오고, 그러다 다시 TV 한번 쳐다보기를 반복하며 어쨌든 진득하니 앉아 있어 보자는 전략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 나의 남은 인생은 이렇게 반복만으로 채워질 것인가. 무한반복으로?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시선은 책상위도 아니고, 앞의 TV도 아닌 곳, 아무 곳도 아닌 공간을 맴돌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혹은 하지 않는 것. 다 소용없을지 모른다. 어차피 짜인 시나리오란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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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8-01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게도 끝이 났군요.ㅠ
그림을 몰래 버렸던 그사건을 누군가 목격한 자가 있었다니~~
정말 통화를 하면서 얼굴 화끈했겠어요.
초등시절 선생님들은 좀 뭐랄까? 신과 같은 동격이랄까요?
반아이들의 행동을 다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내색 않고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
내가 아이를 여럿 키워보니 아이들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는지 다 알겠더라구요.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뭐 그런~~ㅋㅋ
그래서 어린시절 엄마도 내가 거짓말할때 다 알고 있었겠구나!
선생님도 다 알고 계셨겠구나! 그런생각들을 하면서 참 공감가기도 하고,엄마는 괜찮은데,선생님까지 생각이 미치면 문득 소름이 돋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꼭 죄지은 사람처럼요.^^;;

님덕분에 어린시절을 떠올려 보는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갑자기 친구들 생각도 나고 선생님도 보고 싶고 그러네요.^^
친구중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생머리에 눈이 정말 크고 예뻤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친구가 대전에서 전학을 와서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 윗쪽말을 쓰니 간드러지는 말투에 얼굴도 예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특히 남자애들이 완전 좋아~ 연발이었어요.ㅋㅋ
헌데...그친구가 몇 달 전 뇌종양으로...ㅠ
문득 어린시절을 떠올리다 그친구도 함께 기억되어지네요.

또다른 시나리오는 없나요?
바쁘신 일들이 다 끝나시면 또다른 이야기 기대할께요.^^
피서(?) 조심해서 잘 다니시구요.실은 저도 어제 택시타고 애들 셋 데리고 도서관으로 피서 다녀왔어요.피서온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도서관이 시끌벅적했어요.^^;;

hnine 2012-08-02 07:57   좋아요 0 | URL
끝난게 아쉽다기 보다, 결말이 좀 아쉽다고 해야겠지요 ^^
하지만 제가 뭐 작가도 아니고..., 아주 예전부터 제가 풀어놓고 싶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오히려 읽어주신 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지요.
저도 쓰면서 저 계현이란 친구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다시 궁금해지더군요. 예전엔 더 많이 궁금했는데 나이를 좀 더 먹으면서(^^) 어떻게 살고 있든 그건 어차피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모습일뿐 그거 별로 궁금해할 일도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알아보려는 마음도 수그러들었거든요.

책읽는나무님 친구분이시라면 아직 많이 젊으신 분인데 뇌종양으로 세상을 뜨셨다니 정말 안타깝네요.
전 어제 남편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태안 바닷가 가서 하루 바닷바람 쐬고 왔습니다. 같은 충청도인데 (저는 대전 살아요)태안까지 2시간 넘게 걸리더라고요. 저야 물에도 안 들어가고 그늘에서 책만 읽다 왔지만 그래도 한나절 더운 줄 모르고 잘 쉬다 왔네요. 뭐니뭐니 해도 더울 땐 도서관 만한데가 없어요. 택시비 아끼지 마시고 아이들 데리고 피서 계속 즐기시기 바랍니다.
책읽는나무님 저의 졸작을 그동안 읽어주셔서 많이 감사드려요, 꾸벅~

순오기 2012-08-0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빼놓지 않고 읽었는데 댓글이 늦었네요.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이렇게 글로 풀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동화를 쓰셔도 될 것 같아요.
난,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언행에 신중해야 겠단 생각을 다시 하네요.^^

hnine 2012-08-02 12:5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감사합니다.어차피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건 아니다, 예상대로 되는건 아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이 전달되게 쓰는 것은 주관의 범위에서 객관의 눈을 뜨고 있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더라는 것을, 겨우 10회 연재하는 동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만 저의 실제 경험담에서 출발했을뿐, 이후는 다 허구라는 걸 순오기님은 아시지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가족에게도 보이지 않은 글인데 말이어요 ^^
 

여름 방학이었나 싶었는데 어느 새 겨울 방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문제의 엽서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매일 계현이와 어울려 무얼 해도 함께 하던 여름방학 때와 달리, 그해 겨울방학은 좀 특별했다. 이모 가족이 곧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하셨는데 아직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이모 아들, 즉 나에게는 이종사촌 승원이가 우리 아빠에게 영어를 배우러 우리 집에 매일 오기 시작한 것이다. 승원이는 나와 동갑이었고, 아빠는 이왕 승원이를 가리키는 김에 나도 함께 앉혀 놓고 배우게 하셨다. 그때만 해도 영어는 중학교에 가서야 처음 학교에서 과목으로 배울 때였으니, 나처럼 4학년 겨울방학 때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은 조기 교육도 한참 조기 교육인 셈이었다.

계현이가 말하는 것, 계현이가 공부하는 것, 계현이가 그리는 것, 계현이가 입은 옷, 계현이가 어울리는 사람. 겉으로는 냉담했지만, 무엇을 하든 그것과 계현이를 연관시키며 혼자 마음 속 탑을 쌓고 허무는 일이 일상이던 한 학기 동안 나도 모르게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은 안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우쭐함, 새로운 언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승원이와 함께 하는 공부에 쉽게 빠져 들었다.

이모 가족의 출국 예정일이 가까워오고, 개학도 가까워 오고, 봄도 가까워지고 있었겠지만, 봄은 그중 제일 천천히 오는 듯 했다. 개학날도 겨울 옷 꽁꽁 여미고 장갑까지 끼고 학교에 갔고, 개학식만 하고 금방 집에 갈 것이라며 난방이 되지 않는 교실에서 몸을 움츠리고 입만 움직여 반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자연스럽게 내 눈은 계현이를 찾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빨리 계현이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 나인데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좀 늦나?’

그러면서 교실 문소리가 날 때마다 내 고개는 그쪽으로 자동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앞문으로 선생님이 들어오실 때까지 계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예감이라는 게 있는 것인지, 어쩐지 마음 위로 검은 구름이 한 자락 둘러쳐지는 것을 느꼈다.

조회를 끝내시며 마지막에 담임선생님이 덧붙이신 말씀, 박계현은 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교로 전학을 오기 전에도 이미 두어 학교를 거쳤다고 들었는데 이제 일 년 만에 또 전학을 간다는 것이다. 저 변두리의 어느 초등학교라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학교였다. 어느 학교라는 것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건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일 아닌가? 무슨 이유로 또 전학을 가는 것인지. 이제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냥 멍할 뿐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계현이가 살던 집 앞을 지나서 왔다. 대문이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계현아~’ 불러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앞을 왔다 갔다, 기웃거리기만 하다가 발길을 돌릴 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나에게 즐거운 일이란 영영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그녀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일단 하고 나니,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이번 전화 시도야 우연히 신문에서 같은 이름을 발견하고 해본 것이었지만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 찾아봐야 하나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의 동창 찾기 사이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사이트에 접속하여 나의 초등학교 이름을 입력하고 그녀의 이름을 입력하였다. 하지만 그 학교에서 졸업하지 않는 그녀의 이름은 검색되지 않았다. 그녀가 전학간 학교가 어디였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동창 찾기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우연히 얻은 소득이라면 초등학교 3학년때 짝꿍이던 나은경을 만났다는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지만 제 할 일 착실히 하는 아이였던 그녀는 지금쯤 그야말로 올망졸망 아이들 거느리고 아늑한 가정을 이끄는 현모양처 샘플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은 아이였다. 그런 나의 상상을 무너뜨리고 ㅍ대학 건축공학과를 나와 설게 사무소에서 하루가 멀게 야근을 해가며 바쁘게 살고 있다고 했다. 현모양처는커녕 아직 결혼도 못했다고 엄살을 떠는 그녀는 예전의 그녀인가 싶을 정도로 말수가 늘어 있었다. 전화기를 통해 내 이름을 듣고 별로 어렵지 않게 기억해내는 그녀가 신기할 만큼의 세월이 어느새 흘러 있던 것인가. 동창 찾기 사이트에 들어오게 된 이유를 얘기하면서 계현이 이야기가 나왔다.

“계현이? 박계현?”

“응, 기억하니? 왜 우리 3학년 때 전학 왔다가 4학년때 또 어딘가로 전학 갔잖아. 안경 쓰고, 공부 정말 잘 했지. 그림도 잘 그렸던 애. 처음에 선생님이 걔가 여름 방학 숙제로 그려온 그림 보시고, 이건 3학년짜리 그림이 아니라고, 아는 어른이 그려 주었을 거라면서 방학 과제물 대회에서 떨어뜨린 일도 있었지. 생각나니?”

“그래 알아. 옷도 특이한 거 많이 입고 다녔지. 어른 스타일 원피스 같은 거. 어딘지 우리 또래 같지 않았어. 나 알아 걔. 지금 xx동에 살아.”

별로 기대하지 않던 은경의 입을 통해 내가 궁금해 하던 것들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이어지는 은경의 소식에 의하면 계현이는 지금 검사도 아니고 화가도 아닌, 남편과 딸 하나 있는 가정의 주부로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이가 중학교에 올라간 작년부터인가 낮 시간 동안 집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의 방과 후 공부방인가를 조그맣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계현이는 왜 찾는데?”

“어, 뭐 그냥 어쩌다 보니 생각이 나서......”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정말 나는 왜 계현이를 찾으려고 하는가 나 자신에게 되묻고 싶어졌다. 평범한 주부, 딸 하나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방과 후 공부방? 내가 오히려 은경에게서 예상하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 선생님들도 안 믿던 그녀의 그림 실력은 어떻게 하고. 쉬는 시간만 되면 반 아이들을 자기 자리로 끌어 모으던 그 톡톡 튀는 이야기꾼 기질은 어떻게 하고. 힘들이지 않고 시험만 보면 당연히 따라오던 1등이라는 자리가 항상 내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 그녀는 중 고등학교에서도 계속 그 실력은 유지하여 서울의 명문대를 무난히 합격, 지금쯤 아무나 못한 어떤 일을 하고 있어야 했다. 촉망받는 화가가 되어 있던지, 잘 나가는 작가가 되어 있던지, 아니면 강단에 서는 교수가 되어 있던지. 평범한 주부라니? 남들 다 하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시간 맞춰 아이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려 오고, 이제 겨우 시작한 일이 초등학생 방과 후 공부방? 겨우? 다른 사람이 아닌 박계현이?

뭐가 이런가. 내가 생각하던 그녀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실망스럽기도 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안도감 같은 것도 슬쩍 지나가는 것은 또 뭔지.

그래, 인생 뭐 별거야 하는 통속적인 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인. 생. 뭐. 별. 거.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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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7-31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제 슬슬 계현이를 만나볼 시도를 하겠군요?^^
재밌네요.
저도 기대를 마구 하다가 주인공처럼 조금 실망감이 크긴 했는데,
생각해보면 제주변에도 그렇게 공부 잘하고 전교 1,2등을 했던 친구들이 모두
개인과외를 하고 있거나 방과후 공부방을 하고 있더라구요.
지인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예전에 국어선생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요.
전교1,2등을 다투던 모범생들은 의외로 평범하게 살고 있고,
학창시절 평범하고 무난했던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살고 있더라고 여러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같더라구요.
그래서 전 아이들에게 그리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려구요.ㅋ
이거 완전 자기 합리화가 되어버렸군요.ㅋㅋ

어젠 하루종일 그런대로 시원하던데..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올 여름은 정말 덥긴 더운가봐요.결국 몸에 땀띠가 났네요.ㅠ
땀이 났다 하면 몸에 땀띠가 나는 체질인지라~~ 아기도 아니고..ㅠ
오늘 저도 애들 밥 잔뜩 먹여 에어컨 빵빵한 도서관에 피서 가려구요.^^

hnine 2012-07-31 09:20   좋아요 0 | URL
책읽는나무님, 전교1,2등을 다투던 모범생들은 다 어떻게 되어 있을거라는 시나리오는 꼭 맞지는 않는것 같지요? ^^ 제목도 그렇듯이 제가 이 이야기를 쓰게된 이유라고도 하겠네요. 이제 11회나 12회 정도에서 맺을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님의 느낌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답니다. 뭐라고 감사드려야할지...
책읽는나무님도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 같아요. 한번 해주시면 안되나요? ^^ 제가 부담을 갖지 않고 시작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저도 재미있기도 했고요.

으....결국 땀띠가! 저도 한때 땀띠 대장이었답니다. 저도 오늘 역시 도서관으로 피서가려고요. 가까이 있으니 참 좋아요. 제 집은 107동, 아파트 도서실은 110동 1층~ ^^
그럼 오늘 하루도 아이들과 행복하세요.
 

 

그림을 들고 교무실로 가다가 퍼뜩 며칠 전 선생님이 미술주임 선생님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이 그림들은 며칠 후 있을 지역 내 초등학교 미술대회 본선에 내보낼 사람을 뽑기 위한 거라는 걸.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 들고 있던 봉투를 열어 보았다.

세 사람의 그림이 들어있었는데 그 중엔 박계현이란 이름이 쓰인 그림도 들어있었다. 내 것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그림은 여기에 뽑힐 정도가 못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왜 그 순간 속에서 불길이 확 타올랐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대부분 집에 돌아갔을 시간이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매콤하게 났다. 교무실로 질러가느라고 그때 내가 막 쓰레기 소각장 옆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투를 열고 박계현 이름이 적힌 그림을 꺼냈다. 그리고 쓰레기가 타고 있는 소각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림에 불이 붙더니 금방 한쪽 끝부터 까맣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교무실로 향했다.

며칠 후 조회 시간. 선생님께서는 미술대회 본선에 학교 대표로 나갈 사람을 발표하셨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 반에서는 계현이가 뽑힌 것이다. 분명히 계현이 그림을 그날 내가 소각장에 던져 넣었고, 까맣게 타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았는데. 그러니까 미술 주임 선생님께서는 계현이 그림을 보지도 못하셨을텐데 어떻게 계현이가 뽑힐 수 있는 거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누구에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워낙 그림을 잘 그리는 계현이니까 우리 반 누구도 계현이가 뽑힌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계현이가 본선에 나가기로 다 정해져 있었던 건가? 나머지 아이들은 그냥 들러리로 그림을 그렸던 거야?’

혼자서 속이 바작바작 탔다.

계현이는 결국 학교 대표로 나간 본선 대회에서도 상을 받았고, 그때 그린 그림은 금빛 테두리의 커다란 액자에 넣어 교무실 바로 옆에 전시되었다.

미술뿐이 아니었다.

도형의 넓이에 대해 배우기로 한 수학 시간.

사각형, 삼각형의 넓이 구하는 방법에 이어 선생님은 이번엔 원의 정확한 넓이를 구할 수 있을까 물으셨다. 그 정도야 예습으로 이미 알고 있던 나는 반지름 곱하기 반지름, 그리고 곱하기 3.14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우와 하는 아이들의 작은 함성에 잠시 우쭐하고 있을 때였다.

“원의 정확한 넓이는 구할 수 없어요.”

카랑카랑, 똑부러짐. 뒤를 돌아다보지 않아도 그건 계현이였다.

아이들의 눈이 모두 계현이를 향했다.

“왜 그렇지?”

선생님 얼굴에 갑자기 더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인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원주율은 3.14라는 수로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난 계현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가슴 속에서 또,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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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7-3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현이는 못하는 것이 없네요?ㅎㅎ
더군다나 수학시간에 저렇게 똑부러지게 발표하다니~~
계현이는 영재끼가 있는 아이였군요.ㅋ
담임선생님과 과연 어떤 사이인지??

여긴 바람이 불어 좋긴 하지만,뜨끈한 바람이네요.ㅠ
더운 바람도 자꾸 쐬면 머리도 아프고 나른해지더라구요.
아~ 언제쯤 더위가 가실지?
더위 조심하세요.^^

hnine 2012-07-30 13:41   좋아요 0 | URL
지금이라면 담박에 영재로 발탁되어 따로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르지요.
글속의 내(나영)가 계현이와 좀 더 오래 관계를 지속했더라면 계현이의 또 어떤 면을 발견할지 모르는데, 그러질 못하지요.

저도 더위 무척 타거든요.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라서여. 요즘 너무 더워서 오늘은 아이 데리고 아파트 도서관 올라가 있다가 점심 먹으러 내려왔네요. 도서관은 시원하거든요. 이 더위 언제 가실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끝나긴 끝나겠지요? 책나무님도 오늘 하루 꿋꿋하게 잘 버티시길! ^^
 

 

학기초부터 반장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던 담임선생님. 지금까지의 그 어떤 친구와도 달라 나를 사로잡은,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안중에도 없게 한 계현이. 두 사람에게서 한꺼번에 느낀 것은, 지금도 아무리 다른 표현을 써보려고 해도 '배신감'이라는 말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말이 없다. 나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 남몰래 가지고 있던, 나만의 유리구슬이 일순간 산산조각이 났고, 깨진 조각들을 제대로 치우지 못해 그 이후로도 따끔따끔, 조각들이 내 마음을 찔러댔다.

 

그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잘 웃고 잘 떠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혼자 멍하니 있거나 혹은 골똘히 생각하거나.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일에 심드렁해졌다.

 

4학년 교과는 3학년 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별다른 준비 없이도 시험을 보면 되었던 3학년 때와는 달리, 4학년이 되자 시험을 대비한 공부라는 것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의 도 이름과 도청 소재지를 외우고 산맥 이름들을 외우고 강 이름, 평야 이름 등, 소위 외워야 할 것들이 생겨난 것이다. 시험을 위해 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내가 유지하고 있던 자리가 불안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나 스스로 알 것 같았다.  그나마 4학년 1학기 까지는 그래도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계현이가 아직 전학 온 후 적응 기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2학기 되고서 첫 시험에서 나는 1등 자리를 계현이에게 내주어야 했으니 말이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그녀에 대한 괜한 배신감 같은 것은 더욱 커져 갔다. 그 날 이후 반은 고의적이었던 나의 냉담함에 대해 그녀는 알아챘는지 아닌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여전히 그녀 자리에는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늘 인기 있는데 나 하나쯤 멀어진다고 신경도 안 쓰이겠지 생각하니 서글펐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속마음을 말하지 않은 채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 나는 많이 큰 것 같다. 키는 얼마나 컸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훌쩍 자랐다고 할까. 혼자 있는 시간을 나름대로 보낼 줄 알게 되었는데, 계현이가 있던 자리에 책읽기가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시험 때마다 나는 계현이를 이기기 위해 기를 썼다.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시험 보는 날은 그저 수업을 안 하는 날, 일찍 끝나는 날 정도였던 1년 전과 달랐다. 외우고, 또 외우고, 문제집을 몇 권씩 풀어보며 시험에 악착을 떨었다. 그것은 계현이를 이기기 위한 악착이었고, 산산조각난 내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은 악착이었다.

내가 그렇게 기를 썼음에도, 한번 빼앗긴 1등 자리는 다시 찾기가 힘들었다. 늘 몇 점 차이로 1등은 계현이, 나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계현이가 나처럼 그렇게 악착을 떨면서 시험공부를 하느냐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세상엔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구나 하는 것을,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겪으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미술 시간.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물화를 그리게 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선생님에게는 휴식 시간, 우리들에게는 따분하기 짝이없는 시간. 그런데 그날따라 선생님은 교탁 위의 사과, 꽃병, 유리받침 등을 다른 때보다 좀 더 신경 써서 배치하신다 싶었다.  매번 그렇듯이 난 밑그림은 꼼꼼히 잘 그려놓고는, 막상 색칠을 급하게 하는 바람에 그저 그런 정도의 그림을 겨우 완성해서 낼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보니 담임 선생님은 우리가 낸 그림을 하나 하나 유심히 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옆에 골라놓으시는 걸 보았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을 빠져 나가고 있을 때였다. 아까 골라놓은 그림을 챙겨 교무실로 가시려다 말고 선생님께서 반장인 나를 부르셨다. 교무실의 미술주임 선생님께 가져다 드리라는 거였다. 선생님은 급히 다른 볼일이 있으셨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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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7-2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하라는 그 어떤 잔소리보다 경쟁자 하나가 최고였네요.
친구가 멀어짐을 느낄 때 그 쓸쓸한 뒷자리가 참 아프고 허전하지요.
그 느낌이 잘 살아나네요
계현이와의 관계가 계속 흥미진진 궁금해지네요

hnine 2012-07-26 10:12   좋아요 0 | URL
솔직히 저 자신은 경쟁상대가 생겼다고 저렇게 악착 떨며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아무튼 저 이야기 속 아이는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

날이 무척 더운데 더위 조심하시고, 냉방병도 조심하시고요. 저는 온몸에서 물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랄까, 얼굴이 오늘따라 조글조글해보입니다 ㅠㅠ

프레이야 2012-07-2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현이와 좋은 라이벌이 되었군요. 좋은 건가 아닌가는 좀 두고봐야 알려나요.^^
날씨가 굉장해요. 진짜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얼굴 피부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자외선차단제도 안 바르고 다녔더니 오늘따라 얼굴색이 이상해 보여요.ㅠㅠ
선풍기바람도 뜨듯하네요.ㅎㅎ

hnine 2012-07-26 20:25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 보는 프레이야님은 피부가 뽀샤시~하시길래 늘 화장 곱게 하고 다니시려니 했어요. 자외선차단제도 안 바르고 다니는 건 저 처럼 막나가는 (ㅋㅋ) 아줌마만 저지르는 일인줄 알았는데...^^
저는 지금 다린이 데리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려고요. 아이스크림보다 거기 가면 잠시나마 좀 시원하니까요.
오늘 밤은 편히 잘 주무세요.

책읽는나무 2012-07-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물화에 뭔 비밀이 있는 것인지??
흥미진진하네요.
친구와의 라이벌 관계는 참~~ㅋㅋ
저는 주인공아이처럼 문제집을 몇 권씩 풀면서 외울정도로 범생이는 아니었지만,
전학온 제단짝 친구와는 성적에서 약간 라이벌 관계가 있어서 완전 빠져들면서 읽었어요.
결국 제가 친구에게 무릎 꿇었지만요.ㅎㅎ
전교 1등하는 아이들은 이상하게 술렁술렁 노는 것같아 보이던데 성적이 잘 나와요.
저도 그걸 참 신기하게 생각했더랬죠.그리곤 그런 아이들은 시험을 볼적에 약간의 신기(지금 생각하니 신기란 일종의 찍기신..그러니까 찍신? 이겠죠?ㅋ)가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합리화를 시키니까 바로 이해가 되더라구요.ㅋ
헌데,정말 계현이의 정체가 궁금해 죽겠네요.
이런 것은 연결해서 읽어야 하는뎅~~ㅠ

썬크림 안바를 정도시라면 님이 진정한 말로만 듣던 피부미인이신게로군요?
저도 요몇년전부터 도저히 거울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썬크림 바르기 시작했어요.
정말 못봐주겠더라구요.ㅠ

hnine 2012-07-28 15:54   좋아요 0 | URL
계속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실제와 허구를 막 섞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재미가 나름 있네요.
그 친구가 그림을 정말 잘 그렸던건 사실이고요. 초등학생 그림솜씨라고 다른 선생님들이 믿어주지 않아서 뽑히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까요. 제가 그래서 지금도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예사로 안보여요.
정말 공부 잘 하는 애들은 노는 것 처럼 보이는거 맞아요 ㅋㅋ 그런 아이들은 몰입을 잘 하더라고요. 그리고 뭐가 중요한지를 잘 파악하고요.
'신기'라고 표현하신게 재미있어요. 정말 그런게 있어보이지요 ^^

화장을 안하면 이제 정말 정말 못봐줘요. 그리고 저는 얼굴에 뭘 바르면 아직도 답답해서 호흡도 제대로 안되는 느낌이 막 든답니다. 저는 아마도 피부호흡에 많이 의존하도록 태어났나봐요 ㅋㅋ 그래서 썬크림보다 차라리 무거워도 양산을 들고 다니지요. 그리고 썬크림은 어떤 성분이 들어있길래 바르면 얼굴이 허옇게 떠보이는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