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었나 싶었는데 어느 새 겨울 방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문제의 엽서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매일 계현이와 어울려 무얼 해도 함께 하던 여름방학 때와 달리, 그해 겨울방학은 좀 특별했다. 이모 가족이 곧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하셨는데 아직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이모 아들, 즉 나에게는 이종사촌 승원이가 우리 아빠에게 영어를 배우러 우리 집에 매일 오기 시작한 것이다. 승원이는 나와 동갑이었고, 아빠는 이왕 승원이를 가리키는 김에 나도 함께 앉혀 놓고 배우게 하셨다. 그때만 해도 영어는 중학교에 가서야 처음 학교에서 과목으로 배울 때였으니, 나처럼 4학년 겨울방학 때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은 조기 교육도 한참 조기 교육인 셈이었다.
계현이가 말하는 것, 계현이가 공부하는 것, 계현이가 그리는 것, 계현이가 입은 옷, 계현이가 어울리는 사람. 겉으로는 냉담했지만, 무엇을 하든 그것과 계현이를 연관시키며 혼자 마음 속 탑을 쌓고 허무는 일이 일상이던 한 학기 동안 나도 모르게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은 안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우쭐함, 새로운 언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승원이와 함께 하는 공부에 쉽게 빠져 들었다.
이모 가족의 출국 예정일이 가까워오고, 개학도 가까워 오고, 봄도 가까워지고 있었겠지만, 봄은 그중 제일 천천히 오는 듯 했다. 개학날도 겨울 옷 꽁꽁 여미고 장갑까지 끼고 학교에 갔고, 개학식만 하고 금방 집에 갈 것이라며 난방이 되지 않는 교실에서 몸을 움츠리고 입만 움직여 반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자연스럽게 내 눈은 계현이를 찾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빨리 계현이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 나인데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좀 늦나?’
그러면서 교실 문소리가 날 때마다 내 고개는 그쪽으로 자동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앞문으로 선생님이 들어오실 때까지 계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예감이라는 게 있는 것인지, 어쩐지 마음 위로 검은 구름이 한 자락 둘러쳐지는 것을 느꼈다.
조회를 끝내시며 마지막에 담임선생님이 덧붙이신 말씀, 박계현은 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교로 전학을 오기 전에도 이미 두어 학교를 거쳤다고 들었는데 이제 일 년 만에 또 전학을 간다는 것이다. 저 변두리의 어느 초등학교라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학교였다. 어느 학교라는 것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건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일 아닌가? 무슨 이유로 또 전학을 가는 것인지. 이제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냥 멍할 뿐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계현이가 살던 집 앞을 지나서 왔다. 대문이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계현아~’ 불러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앞을 왔다 갔다, 기웃거리기만 하다가 발길을 돌릴 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나에게 즐거운 일이란 영영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그녀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일단 하고 나니,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이번 전화 시도야 우연히 신문에서 같은 이름을 발견하고 해본 것이었지만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 찾아봐야 하나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의 동창 찾기 사이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사이트에 접속하여 나의 초등학교 이름을 입력하고 그녀의 이름을 입력하였다. 하지만 그 학교에서 졸업하지 않는 그녀의 이름은 검색되지 않았다. 그녀가 전학간 학교가 어디였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동창 찾기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우연히 얻은 소득이라면 초등학교 3학년때 짝꿍이던 나은경을 만났다는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지만 제 할 일 착실히 하는 아이였던 그녀는 지금쯤 그야말로 올망졸망 아이들 거느리고 아늑한 가정을 이끄는 현모양처 샘플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은 아이였다. 그런 나의 상상을 무너뜨리고 ㅍ대학 건축공학과를 나와 설게 사무소에서 하루가 멀게 야근을 해가며 바쁘게 살고 있다고 했다. 현모양처는커녕 아직 결혼도 못했다고 엄살을 떠는 그녀는 예전의 그녀인가 싶을 정도로 말수가 늘어 있었다. 전화기를 통해 내 이름을 듣고 별로 어렵지 않게 기억해내는 그녀가 신기할 만큼의 세월이 어느새 흘러 있던 것인가. 동창 찾기 사이트에 들어오게 된 이유를 얘기하면서 계현이 이야기가 나왔다.
“계현이? 박계현?”
“응, 기억하니? 왜 우리 3학년 때 전학 왔다가 4학년때 또 어딘가로 전학 갔잖아. 안경 쓰고, 공부 정말 잘 했지. 그림도 잘 그렸던 애. 처음에 선생님이 걔가 여름 방학 숙제로 그려온 그림 보시고, 이건 3학년짜리 그림이 아니라고, 아는 어른이 그려 주었을 거라면서 방학 과제물 대회에서 떨어뜨린 일도 있었지. 생각나니?”
“그래 알아. 옷도 특이한 거 많이 입고 다녔지. 어른 스타일 원피스 같은 거. 어딘지 우리 또래 같지 않았어. 나 알아 걔. 지금 xx동에 살아.”
별로 기대하지 않던 은경의 입을 통해 내가 궁금해 하던 것들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이어지는 은경의 소식에 의하면 계현이는 지금 검사도 아니고 화가도 아닌, 남편과 딸 하나 있는 가정의 주부로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이가 중학교에 올라간 작년부터인가 낮 시간 동안 집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의 방과 후 공부방인가를 조그맣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계현이는 왜 찾는데?”
“어, 뭐 그냥 어쩌다 보니 생각이 나서......”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정말 나는 왜 계현이를 찾으려고 하는가 나 자신에게 되묻고 싶어졌다. 평범한 주부, 딸 하나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방과 후 공부방? 내가 오히려 은경에게서 예상하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 선생님들도 안 믿던 그녀의 그림 실력은 어떻게 하고. 쉬는 시간만 되면 반 아이들을 자기 자리로 끌어 모으던 그 톡톡 튀는 이야기꾼 기질은 어떻게 하고. 힘들이지 않고 시험만 보면 당연히 따라오던 1등이라는 자리가 항상 내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 그녀는 중 고등학교에서도 계속 그 실력은 유지하여 서울의 명문대를 무난히 합격, 지금쯤 아무나 못한 어떤 일을 하고 있어야 했다. 촉망받는 화가가 되어 있던지, 잘 나가는 작가가 되어 있던지, 아니면 강단에 서는 교수가 되어 있던지. 평범한 주부라니? 남들 다 하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시간 맞춰 아이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려 오고, 이제 겨우 시작한 일이 초등학생 방과 후 공부방? 겨우? 다른 사람이 아닌 박계현이?
뭐가 이런가. 내가 생각하던 그녀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실망스럽기도 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안도감 같은 것도 슬쩍 지나가는 것은 또 뭔지.
그래, 인생 뭐 별거야 하는 통속적인 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인. 생. 뭐. 별. 거.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