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이는 떠났다.
이모네 가족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며칠 전, 그날도 일요일이었고, 헤어짐의 인사를 나눌 겸 성운이를 데리러 오신 이모를 따라, 우리 집에 오던 날 처럼 커다란 가방을 들고 우리 집을 떠났다.
며칠 전 부터 뭐라고 헤어짐의 인사를 할까 궁리하던 내 머리 속을 지나간 문장은 아마 수십 개도 더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운한 내색을 안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왜일까? 나는 늘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내 마음을 들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었으니까.
딱히 뭐라고 인사를 해야할지 정하지도 못했지만, 말할 기회도 못찾고 있던 나는 결국 성운이가 이모와 함께 우리 집 현관을 나설 때에서야 가까스로 인사를 했다.
"잘 가. 공부 열심히 해."
마치 우리 집에 잠깐 놀다 가는 친구에게 인사하듯이, 아무 감정도 싣지 않으려 애쓰며 그저 잘가라고만 했다. 공부 열심히 해야하는 것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냥 자동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한동안 함께 공부를 했었으니까.
"그래, 잘 있어 겨운아."
활짝 웃던 성운이.
'넌 서운하지도 않아?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흥분되어서 서운하지도 않지? 그렇지?'
난 속으로 원망의 대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성운이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대사를.
바람이 빠진 공은 튕겨지지도 않는다. 다시 바람이 팽팽하게 채워질 때를 기다리며 그냥 한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 내가 바로 그 바람빠진 공이 된 기분이었다. 뭘 해도 신나질 않았다.
오늘은 성운이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몇시 비행기라고 했더라? 학교에서 공부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창문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기를 몇번.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일하시는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성운이 학생이 아까 오전에 잠깐 다녀갔어. 뭔가 전해줄게 있다고. 거기 책상위에 올려 놓고 간다고 하데. 급히 그것만 놓고 바로 가더구먼."
책가방을 던지다시피 하고 방으로 달려가 책상 위를 보았다. 반투명 종이에 잘 싸여진 뭔가가 책상 위에 있었다.
'이게 뭐지?'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종이를 풀러내니 그 안에서 우표들이 나왔다. 내가 가지고 싶어하던 나비 우표들. 성운이가 있는 동안 성운이의 영향으로 내가 시작한 것 중에 우표 수집이 있었다. 성운이는 우표 수집광이었는데, 자기가 모은 우표 책 한권을 가져와 내게 보여주면서 이건 무슨 우표, 저건 무슨 우표, 이건 얼마나 값어치가 나가고, 저건 우표의 도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등등, 우표는 편지를 보낼 때만 사용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던 나를 앉혀 놓고 신이 나서 설명해주곤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도 한번 해보라고 했다가 내가 시큰둥하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우표 중에서 어떤 우표가 제일 맘에 드냐고 물었다. 마침 펼쳐진 페이지에 나비 우표가 보이길래 그것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거."
"아, 이 우표. 예쁘지? 이거 지금 이 우표책에는 한장만 꽂혀 있지만 이거 시리즈 우표거든. 집에 가면 다 있어. 내가 나중에 그것들 다 너 줄께."
성운이가 그랬던 기억이 난다.
그 약속을 지키려고 성운이는 떠나는 오늘, 우리 집을 들렸던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성운이가 우리집에서 떠나던 날도 안 흘린 눈물을, 나비 우표들을 들여다보며 흘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