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헤르_문명의 교차로 

p.72-78 

p.72 탕헤르의 도로표지판에는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위아래로 적혀있었다. 이 도싱서 프랑스어가 두루 쓰인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랬다. 선착장에 늘어서서 호객 행위를 하는 자칭 '공식' 가이드들은 프랑스어로 말을 건네왔다. 

p.75 이 지역을 유럽인들은 흔히 마그레브(또는 마그리브)라 부른다.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같은 나라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짜' 아프리카가 아니라 마그레브에 발을 들어놓은 것 뿐이다. 그러나 고대 유럽인들이 아시아라고 부른 지역이 지금의 서남아시아였듯, 그들이 아프리카라고 부른 지역도 지금의 북아프리카, 곧 마그레브였다. 마그레브는 아랍어로 '해가 지는 땅' 곧 서쪽을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 그 동서를 나누는 기준은 나일강이다. 나일강 서쪽, 사하라 이북을 마그레브라 부르는 것이다. 반면에 그 동쪽 지역은 마슈리크(또는 마슈레크)라 부른다. '해 뜨는 땅' 곧 동쪽이라는 뜻이다.  

p.76 탕헤르는 19세기 국제 스파이들이 암약하는 도시로도 이름을 얻었다. 영국인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주인고으로 한 007시리즈의 몇몇 영화가 탕헤르를 부분적으로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의 예로는, 멧데이먼이 주연한 <본 얼티메이텀>이 탕헤르 시가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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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홈페이지를 오랜만에 서핑하다 후마니타스(내가 좋아하는 출판사 중 하나이다) 게시판에서 아주 좋은 글을 하나 발견해서 스크랩한다. 두 강남에 관한. 이 글을 쓴 박상훈 대표가 쓰고 번역한 책으로는 '미국의 헌법과 민주주의'와 '어떤 민주주의인가', '만들어진 현실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는 내가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솔직히 대한민국 헌법도 잘 모르는데 무신놈의 미국 헌법이야 할수도 있지만, 원채 대한민국의 그 민주주의, 헌법이라는 것도 미국것을 많이 참고했기때문에 어찌보면 미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는 우리것의 '원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번 읽어보았는데 제법 재미있게 읽었다. 덕분에 미국과 한국의 헌법 전문도 찾아서 읽어보는 재미도 누렸다.(헌법 전문이라는게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나온다)  

  

하여튼 그 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 '만들어진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지역주의'문제에 대한 책인데,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지리교사로써 읽어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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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2009.7.19 지역주의를 만들어내는 한국정치…만들어진 현실

"문제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지역주의를 만들어내는 한국정치다."
정치학자이자 출판사 '후마니타스' 대표인 박상훈은 '만들어진 현실'에서 한국의 지역주의가 갖는 '이데올로기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사실의 차원보다는 해석과 인식의 차원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 문제 혹은 상부 구조적 문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두들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간의 논의에서 지역주의를 가리키는 객관적 사실만 따로 분리해 본다면, 그 내용의 빈약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박상훈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 이슈 가운데 이데올로기성이 가장 심한 주제를 꼽으라면 단연코 지역주의라 말하고 싶다. 지역주의를 주제로 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사실'과 '사실이 아닌 주장'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설명한다.

'만들어진 현실'은 두 개의 초점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면서 사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거리를 탐색한다. 하나는 지역 차별, 지역 소외, 지역감정 등으로 포착될 수 있는 '지역주의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패권주의, 3김 청산론 등으로 나타나는 '지역주의를 둘러싼 해석의 차원'이다.

'한국에서 지역을 둘러싼 갈등의 구조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 '망국적 지역주의론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고 어떻게 해석의 차원을 지배하는 담론이 되었을까'하는 질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 주목하다 보면, 한국과 같이 세계에서 지역 간 인종, 문화, 종교, 언어 격차가 가장 작은 동질적 사회에서 선거 결과가 뚜렷한 지역 대결 구조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또,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지역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민사회에서 지역 간 대립과 폭력적 갈등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역주의 때문에 나라 망하게 생겼다는 해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등의 의문도 품게 된다.

책은 인과적 틈새 내지 불일치의 문제를 파고든다. 한국 정치가 안고 있는 어떠한 것들이 지역문제를 끊임없이 불거지게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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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적인 부유층 지역이역으로 알려진 강남구
강남구는 대학이상 학력 소지자가 많고, 직업 분포에서도 사업주와 전문직 비중이 높으며, 고가의 대형주택과 자가용 소유자도 많은 게 사실

그러나 주택 소유 현황을 보면 전세 사는 사람의 비중이 서울 평균보다 높고 (반)지하나 비닐집에 사는 극빈층도 상당수 존재. 나 홀로 사는 가구 비중도 서울시 평균보다 높고, 강남 사람 절반이 소형 공공 임대주택을 공급받아야 할 대상. 전국에서 비닐집・판잣집・움막 거주 가구 수가 가장 많은 곳도 강남

강남구를 하나로 보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 현상, 동네별로 나눠봐야만 보이는 특징들 많아
통계 몇 개만 조합해도 강남 속 실제 동네의 모습은 밖에서 보는 것과 너무 달라


강남 중의 강남 : 압구정1동, 2동, 대치1동, 2동, 도곡2동, 청담1동, 일원본동
         부자 중의 부자가 사는 동네, 뭘 해도 한나라당 지지가 압도적 다수일 수밖에 없는 동네

강북 같은 강남 : 역삼1동, 논현1동, 대치4동, 일원1동, 수서동
         강북 평균의 삶보다 못한 동네들, 강남이라는 범주에 가려 보이지 않는 동네의 모습,
         이들 동네를 하나의 선거구로 하면 한나라당 당선 어려울 정도
     
 

ps : 글을 쓰고 보니 최근에 황석영씨의 신간소설 '강남몽'이 '강남'이더라...난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고보니 내가 읽어볼만하겠다는 생각이든다.(참 읽을 책도 많다....큰일이다.) 책 본김에 서평기사 하나 스크랩한다.

 

 

오마이뉴스 2010.7.20 황석영이 쓴 부자동네 '강남'에 관한 보고서  

장편소설 <강남몽>... 거대한 거품처럼 들끓었던 '강남의 꿈' 
 

소설가 황석영은 '강남형성사'에 관한 소설을 쓰겠다고 말했었다. '강남'이라는 특수한 지역에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욕망을 그려보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책으로 쓴다는 것이 가능할까? 분량만 따진다면 조정래의 <한강>에 버금가는 대하소설이 되지 않을까? 많은 생각이 들 때, 황석영은 '강남형성사'에 관한 소설을 인터넷 서점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설이 책으로 나왔다. <강남몽>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이다.

<강남몽>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 등장하는 이들은 성장배경도 다르고 사는 환경도 다르고 원하는 바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을 연결하는 것이 몇 개 있으니 그중에 하나가 '강남'이라는 지역이다. 소설은 '박선녀'라는 여자가 대성백화점에 쇼핑을 갔다가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갑자기 무너졌던 삼풍백화점을 연상시키는 대성백화점이 숱한 위기신호를 보내더니 그것처럼 기어코 붕괴된 것이다. 강남에서 돈 꽤나 있다고 하는 박선녀는 졸지에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박선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곳은 한때 그녀의 팔자를 바꿔준 곳이었고 또한 돈을 벌게 해준 곳이었다. 술집을 운영하면서 돈을 벌고 깡패들을 고용해 돈을 지키고 고급 정보를 얻어 돈을 불릴 수 있었던, 이제는 재벌가의 가족이 된, 비록 그것이 후처일지라도 엄연히 가족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 것은 오롯이 강남이라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곳에 깔려 있다. 사람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덧없는 것일까? "거기 누가 있어요?"라고 묻는 그 목소리에서 그런 인상이 묻어난다.

박선녀와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간 백화점, 그걸 만든 이는 누구였던가? 백화점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접하고서도 끝끝내 모른 척 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백화점으로 상징되는 '강남의 꿈'을 좇아 이곳에 달려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돈을 벌겠다는 욕망과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은 물론이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했던 이들은 누구였을까? 강남의 꿈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사람들은 이곳을 향해 몰려들었던 것일까?

황석영은 박선녀를 시작으로 일본군의 앞잡이 역할을 하다가 해방 직후 미군의 앞잡이가 되어 한국 근현대사의 그늘에서 건설업 등으로 돈과 권력을 취했던 김진, 얼치기 부동산업자가 된 후 청와대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부동산 투기를 했던 심남수, 광주 충장로파의 전설적인 주먹 홍양태, 백화점 지하 아동복 매장에서 일하는 임정아 등을 통해 '강남의 꿈'을 이야기하는데 그 솜씨가 '황석영의 것'답다. 단 한 권의 소설로, 강남으로 상징되는 한국 자본주의 형성과정과 숨겨진 오점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황석영이 아니라면 이렇게 큰 스케일의 소설을 누가 한 권으로 담아낼 수 있었을까? 거장의 노력이 엿보인다.

하나의 다큐멘터리 같다고 할까? 거대한 거품처럼 들끓는 사람들의 '솔직'한 욕망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한국 근현대사의 장면들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강남몽>은 소설이면서 또 하나의 다큐멘터리같다. 이 다큐멘터리 같은 소설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누군가는 배가 아프고 누군가는 속이 쓰리겠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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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서 8월1일 부터 서평 코너가 생겼다. 항상 서평글들은 챙겨보는 나에게 아주 유용할 듯하다. 그중에서 서해문집에서 출판한 전지모 선생님들이 쓰신 '지리, 세상을 날다' 편집자의 글이 있어 스크랩해 놓는다. 생각보다 아주 내용이 길다는 느낌이 우선 들었다. 편집자분이 책에 대한 애착이 있는 듯 하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 주문하고 대충 읽어는 보았는데 구입은 안한 듯하다. ㅋㅋ 얼른 구입해야지. 글 중에서 "'지리'의 시장성이 낮다고 판단해서인지 근래 나온 지리 관련 책은 '세계사' 등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출간되고"라는 부분을 읽고 현재의 교육과정 및 수능 선택 과목 축소 논란과 관련하여 참으로 씁쓸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물론 좀 전에 먹은 '필스너 우르켈'때문일수도) '지리'란 이름을 달고 나오면 팔리지 않는 더러운 세상. 솔직히 얼마전에 나온 '르몽드 세계사'같은 경우도 전에 나온 1권도 원래 제목은 '르몽드 아틀라스'였다. 원래 르몽드에 실렸던 책의 기사들도 내용은 세계사적인 것보다는 '아틀라스'적인 '지리'적인 내용들이 훨씬 많고 그게 주였다. 근데 제목은 세계사이다. XX...세상 인심이 흉흉하다. 비록 8월10일 있을 공청회는 수능 선택과목 관련 공청회는 가지 못하지만(물론 답사때문이라는 핑계) 우리 전국의 모든 지리인들이 모여서 지리인들의 깡따구를 보여줘야 할 때일듯하다. 남들이 과목이기주의다 뭐다 해도 그거 다 X소리이다. 이건 이기주의고 뭐고 다 필요없다. '상식'이다. 이정도 대우에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웃긴거지. 우리가 정당히 받아야 할 처우와 대가를 주지 않을때, 가만히 있느냐, 일어나느냐 그런 선택이 아니라 역사의 필연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리'과목도 예전의 프랑스어, 독일어교육과나 최근의 가정교육과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올 12월에 교육부 고시가 되기 전에 바꿔야 할 것이다.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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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유세윤을 수식할 때 '뼛속까지 개그맨'이란 뜻의 '뼈그맨'이란 말을 쓰고는 한다. 다른 이들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그처럼 '뼛속까지 편집자(혹은 에디터)'가 되는 날을 꿈꾼다. 내 일을 사랑하고, 즐기고, 잘할 수 있는 날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이 책 <지리, 세상을 날다>(전국지리교사모임 지음, 서해문집 펴냄)를 만들 때의 각오와 결심을 늘 간직할 것이다.

마케터로 1년을 일하다가, 책을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편집자로 자리를 옮긴 지 1년 정도 됐을 때였다. (고작 1년 해 본) '마케팅 경험을 더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책을 내겠다'는 거창한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꿈을 갖고 편집 일을 시작했지만, 생각만큼 일이 쉽지는 않았다. 스스로 책 좀 읽는다 생각했지만, 출판 편집자는 책 좀 읽는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맡겨진 원고들을 아무리 읽어도 어떻게 책으로 내야 할지 쉽게 감을 잡기 힘들었고, 하루하루 실무를 하면서 실수와 오류를 반복했다. '처음이라 그렇다'는 이유가 통할 시기도 지나가고 있었다. 나 때문에 일이 많아진 선배들 보기가 민망했고, 애써 부서를 옮겨준 회사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답답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돌파구를 찾기 위한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보고 있을 때였다.

 
▲ <지리, 세상을 날다>(전국지리교사모임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지리 교양서가 내게 맡겨졌다. 청소년부터 읽을 수 있는 쉬운 내용에 우리나라와 세계의 뜨끈뜨끈한 이슈들을 다룬 원고였다. 전국지리교사모임의 현직 지리 선생님이 모여 쓴 이 원고는 회사에 들어온 지 1년도 넘은 상태였다. 저자가 여럿이었던 탓에 각 원고가 개성은 있었지만, 그만큼 스타일과 주제를 다루는 정도에 편차가 있었다. 관련 시장은 이미 중견 출판사가 오래 전에 낸 책이 장기간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지리 관련 책을 내온 출판사가 탄탄한 자기 리스트를 갖고 있었다.

또 '지리'의 시장성이 낮다고 판단해서인지 근래 나온 지리 관련 책은 '세계사' 등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출간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회사에서는 그래도 원고의 가능성이 있다고 봤고, 내게서 어떤 가능성을 봤는지 '구원 투수'라는 막중한 임무를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회사가 고맙기도 하지만, '그때는 뭘 믿고 그런 무모한 결정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출간 일정을 어느 정도 세운 뒤, 당시 새로 부임한 편집장과 함께 대표 저자를 만나러 갔다. 저자를 만나는 데 익숙지 않은 초보 편집자는 선배 편집자와 저자의 입만 바라볼 수밖에…. 예상했던 대로 저자들은 출간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답답해하고 있었고, 처음에 가졌던 기대감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출판사 측이 한껏 고개를 수그리거나 양쪽의 팽팽한 기 싸움이 있을 것만 같은 자리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의 원고가 한 권의 훌륭한 책으로 만들어지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편집장은 과거의 오류를 인정하면서 제대로 된 책이 나올 것이란 확신을 저자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원고가 책이 되기까지 생길 수 있는 어려움과 앞으로 저자와 편집자 사이에 필요한 것들을 얘기하며, 오해의 싹을 자르고 실질적인 논의의 틀을 마련했다.

저자는 원고의 의미와 장단점에 대한 의견을 편집장과 나누며, '지리'라는 학문의 가치와 의의를 얘기했다. 특히 학생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사람의 모든 생활이 '공간'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이야기할 때는 열정이 넘쳐 눈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일상과 세계,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저자의 '지리' 이야기 속에서, 지도와 기호 속에만 갇혀 있던 우리 마음속의 '지리'가 편견의 벽을 깨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저자에게 신뢰를 주고 그가 가진 능력을 더 발휘하도록 해주는 편집장, 원고에 대한 확신과 함께 자신이 갖고 있는 고민과 비전을 보여주는 저자를 보며, 적어도 이 둘을 믿으면 나도 조금은 잘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지리는 우리 각자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위치한 공간, 환경, 세계와의 얽힘 속에 공존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지리는 단순한 '물산의 지리'나 '지명의 지리'를 넘어 우리 삶에 새로운 시각과 시선을 던져주는 하나의 패러다임입니다."

저자와의 신나고 알찬 만남을 하고 온 다음날, 편집 작업을 하면서 관련 파일을 모아놓는 작업 폴더를 나는 그렇게 이름 붙였다. '지리' 하면 떠오르는 학창 시절의 무시무시한 암기-각종 도시와 나라 이름, 기후와 특산품, 지도와 도표 등을 벗어나, 그날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지리가 가진 무한한 재미와 가치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어야겠다는 작은 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희망과 결심만으로 사고뭉치 초보 편집자의 능력이 하루아침에 일취월장할 수는 없는 일. 작업 시작부터 끝까지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사건의 연속이었다. 특히 아홉 명의 저자와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원고를 수정·보완하는 과정에서 저자들과 크고 작은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의욕이 너무 넘친 나머지 저자의 원고에 너무 많은 수정을 가해 저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도 있었다.

지리를 다루고 있는 원고의 특성상 책에 많은 이미지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해 담당 디자이너의 일이 두 배 세 배 늘어났고, 이 때문에 다른 책들의 출간까지 미루어지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처음으로 책을 만드는 일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다양한 사람들의 손길 속에서 하나의 원고가 책의 모양을 갖춰 가는 모습은 재미를 넘어 감동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스물 한 편이나 되는 원고들을 주위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네 개의 장으로 정리를 하고 저마다 특색 있게 제목을 붙인 뒤, 책의 제목을 "지리, 세상을 날다"로, 부제를 "Cool 한 신세대 지리 선생님들의 Hot한 21세기 이슈 읽기"로 확정했을 때는 짜릿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그러고도 책을 더 잘 만들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내 영혼까지 몽땅 팔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일이 재미있으면 약간의 뻔뻔함도 생기나 보다. 책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위해 저자들에게 추가 원고를 부탁하기도 하고, 필요한 이미지를 구하기 위해 생전 연락 안 하던 군 시절 간부와 옛 여자 친구에게까지 연락을 했다. 다른 책 출간 일정까지 잡아먹는 이 뻔뻔한 책을 위해 회사에 추가 비용을 청구하기도 하고, 이미 확정된 디자인을 바꿔 달라고 디자이너를 조르고 또 졸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힘과 지혜가 모였고 장장 8개월을 작업한 끝에 책은 세상에 나왔다.

책의 출간 뒷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지만, <지리, 세상을 날다>를 고작 한 초보 편집자의 성장기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입시 교육은 지리 과목을 교과서와 교실 안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나 그런 답답한 구조를 그저 지켜만 보기에는 지리가 가진 중요성이 너무 크다. 최근 각 나라가 세계화, 환경문제, 다문화주의 등 21세기 주요 이슈를 가르치고자 지리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지리 과목이 사회 과목에 통합되어 있으며, 일부 교육 현장에서는 지리를 전공하지 않은 교사가 지리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지리를 독립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고, 일본도 1989년부터 지리와 사회를 분리시켰다. 우리가 교과 과정 개편의 모델로 삼은 미국도 초등학교 5학년부터 지리를 독립된 과목으로 가르친다.

<지리, 세상을 날다>는 이렇게 중요한 지리의 참모습과 가능성을 폭넓게 보여준다. 유럽의 통합 과정을 통해 한국의 분단 상황을 돌아보고, 평양의 도시 구조를 보며 사회주의 사회를 이해하려고 한다. 전통 마을의 환경 친화적 구조를 통해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서울 방배동 서래 마을과 안산 원곡동을 비교하며 우리가 가진, 외국인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단순히 일상생활과 지리 지식을 연결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저자들의 목소리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지리는 공간과 공간의 차이를 규명해 사회 구성원 간의 이해와 소통의 폭을 넓히는 학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이해와 소통을 가로막아온 개발 지상주의와 제국주의, 편견과 이기심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지속 가능한 개발과 민주주의가 중심이 되고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사라지며 각 개인과 사회의 차이가 존중받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지리, 세상을 날다>는 편집자 본인에게는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면서 지리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가치를 널리 알려 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리와 <지리, 세상을 날다>는 더 높이 더 멀리 세상을 날아야 한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이 '4대강 삽질'과 '천안함'과 '아파트값'의 망령이 지배하는 곳이기에 더 그렇다.
 
/임경훈 서해문집 편집자

 

ps : "지리는 우리 각자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위치한 공간, 환경, 세계와의 얽힘 속에 공존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지리는 단순한 '물산의 지리'나 '지명의 지리'를 넘어 우리 삶에 새로운 시각과 시선을 던져주는 하나의 패러다임입니다." 감명 깊은 말이다. 아이들에게 지리란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니, 이해시킬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공부 좀 많이 해야겠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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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위키리크스(WikiLeaks)가 미국의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전쟁 관련 기밀문서들을 공개해 파문이 일고 있다. 공개한 문건이 9만여 건이고 공개하지 않은 문건은 2차로 추가 공개한다고 하니 정보력도 대단한 듯하다. 난 처음 이 사건 기사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궁금증은 이런 정보를 어떻게 모았을까하는 정보원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라 어떻게 이런 정보를 공개할 생각을 할까? 그리고 어떻게 실행에 옮길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과연 가능이나 할까? 삼성관련 X-file사건을 보면 그러지는 못할거 같다. 일개 대기업에 관련된(물론 대기업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었지만) 정보도 공개하면 그지경인데 국가 대사(?)에 관하여 반하는 정보를 공개했다가는 정보를 제공해준 사람이건 공개한 사이트건 사람이건 무사하지 못 할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키리크스'라는 단체가 있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그나마 미국이라는 나라의 힘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한다. 선진국이라면 최소한 필요한 '성숙'함이라고나 할까?  

기사를 읽다 궁금해서 유투브에서 동영상을 하나 찾아 봤다. 제목은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 충격이다. 부상자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나, 부상자를 도우러 오는 사람과 차량에 대한 총격. 그리고 무선 교신에서 계속 반복해서 들리는 'clear'.....우리에게는 아주 유명한 모 CF의 "자신있게 맑고 깨끗하게.."라는 멘트 속의 깨끗하게도 사전적 의미에서는 'clear'이겠다. 하지만 내가 보고 들은 'clear'는 'murder'일 뿐이었다. 전쟁이라는 피,아 구분이 있는 살인이 합법적으로 용인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murder'일뿐이다. 동영상 링크 주소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byU_92NcN8 

 

ps :  위키리크스 처음 만든 줄이앤 어샌지 사진이다. 생긴건 샌님처럼 생겼는데, ㅋㅋ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돼나 보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앤 어샌지는 호주 출신의 컴퓨터 해커였다. 그는 정부나 기업, 각종 기관의 부패를 내부고발자들이 일반인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6년 위키리크스를 만들었다. 그는 6월 1일 위키리크스 사이트에 실은 인터뷰에서 “사회의 모든 정보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특정 정부와 정당, 정치지도자 가운데 누구를 지지할지와 관련이 있다”면서 “시민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사이트의 존재 이유”라고 밝혔다. 위크리크스의 운영 철칙은 내부고발자의 신원 확인보다 자료의 신뢰성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실제 운영자는 5명이지만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소송이 제기될 경우 변호사의 도움도 받는다. 서버는 익명성이 법으로 보장된 스웨덴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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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로 당선된 서울시 교육감의 체벌 전면 금지와 관련되어 말들이 많다. 교육적인 문제에 또다시 좌와 우가 나오고 이데올로기적인 공격들을 해대고 있다. 한심하다. 내 하는 일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보니, 참 쓸쓸하다. 솔직히 난 체벌 반대도 찬성도 아니다. 애매모호하지만 애매모호하지 않다.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원론적인 의견(체벌을 하지 않고 교육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교사들은 사표를 내야한다는 의견), 체벌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의견(체벌이 없으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고 요즘 아이들 말을 듣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교실당 20명 정도의 아이들과 수업을 한다면 체벌 없이도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 있지만 40명이나 되는 교실에서 솔직히 난 원론적인 교육적 방법과 마음만 가지고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 솔직히 그렇다)도 다 동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견과 충돌은 필요하다고 본다. 언젠가는 실현돼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만들어야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정규교육과정 초중고 12년동안 학교에서의 체벌로 인한 아주 좋지 않은 기억(추억ㅋ)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초등학교 2학년인가 담임(내 기억으로는 40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이었다)선생님에에 아침 운동장 조회시간에 떠든다고 구둣발로 쪼인트(ㅋ) 까인 기억이 아직도 선선하다. 그때 어찌나 아팠던지. 물론 내가 초,중학교까지는 좀 많이 까불긴 했다. 하여튼 잊혀지지 않는다. 나하고 비슷한 기억을 가진 이들 많을 것이다. ㅋㅋ 

하지만 내가 학교에 와서 교사란 직업을 가지고 길지 않은 6년 동안 학교에 있어본 현재 나름의 생각은 체벌뿐만 아닌 대한민국 학교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체벌 금지로도 논술교육 강화로도 허울좋은 공교육 정상화로도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난 사람들이 조금더 고민하고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생각과 균형적인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최대한 그런 자세는 버릴려고 한다. 학교에서도 주위에서 동료 교사분들이 체벌 금지에 대한 성토아닌 성토를 날릴때 난 대꾸하지 않는다. 왜 대꾸할 정도의 대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벌 금지에 대해 "그럼 니네가 와서 수업해봐", "체벌 금지되면 교사의 교권은 어떻게"라는 식의 말에 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감 한명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올바른 생각과 균형적인 감각을 가졌다고 기대는 해볼란다. 기대는...뭐 기대가 실망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기사를 몇개 스크랩해본다.(개인적으로 김규항씨의 글을 좋아하는 편이다. 근데 이 글은 불편한 글이다. 뭐 틀린 내용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틀린 글이 또 많을 수도 있는 글이다. 두번째 서울신문의 칼럼도 김규항씨의 글과 비슷한 맥락의 글이다. ㅋㅋ 세번째 매일경제의 글이 중립적이면서 현실적인 글 같다. 마지막 네번째 글은 나 개인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글이다)

  

경향신문 2010.7.26  김규항 시론  체벌이라는 야만

사회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그 의견들이 오가다보면 가끔은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한다. 민주주의란 그런 소란스러움을 기꺼이 함께 겪는 사회원리다. 그러나 그런 논란이 있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경우도 있다. 근래 서울시 교육청의 체벌 금지 조처로 인한 논란이 바로 그런 경우다. 지구상에서 나라꼴을 갖춘 사회에선 이미 다 금지하고, 나라 안에서도 군대나 교도소에서조차 엄격히 금지하는 체벌을, 학교에서 그것도 자라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허용하는 야만을, 이제라도 끝내자는 이야기가 어떻게 논란거리일 수 있는가.

이런저런 궤변들을 늘어놓지만 체벌금지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유는 하나다. 체벌을 통해 아이들을 지도하던 교사가 체벌 없이 지도하려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부당한 불편함’이 아니라 ‘교사의 임무’다. 교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지도할 임무가 있다. (---'교사의 임무'를 방기하겠다는 애기는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학교 현실의 문제, 학생수, 잡무, 적합한 처우 등 왜 '임무'는 그렇게 쉽게 애기하면서 '현실'은 '합당한 처우'는 왜 애기하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꽤 많은 교사들이 그 임무를 방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해 온 것이다. 봉급을 주는 국민들 앞에 엎드려 사과하고 반성할 일이다.

“교사의 교육 포기라든지 교수권 침해, 여타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우려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대변인의 말이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말도 안 되는 짓도 자꾸 하면 익숙해지고, 심지어 그걸 못하는 걸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교총 대변인의 말은 체벌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있음을 ‘생태 다큐’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말은 상식의 이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교육도 교수권도 수행할 수 없는 교사는 교사직을 포기해야 한다.’

체벌 금지가 ‘진보 교육감’을 위시한 빨갱이들의 도발이라며 보수·진보의 문제로 몰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망막에 빨간 매직을 칠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만 물어보자. ‘당신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폭력으로 해결한다는 명제가 들어 있는가?’ 체벌 금지는 애당초 보수·진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이다.

우리 사회는 엊그제만 해도 가정과 군대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야만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금지되는 과정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마땅치 않아 했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지금 ‘여자는 사흘에 한번은 패야 해!’라든가 ‘군대는 빠따를 쳐야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순간 체벌 금지에 대해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도 머지않아 지금 제 모습이 기억될까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야만은 ‘인간의 사회’에서 늘 그렇게 하나씩 사라져가는 법이니.

덧붙이는 말: 체벌 금지는 오늘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이나 인권의식에 비추어 이상하리만치 늦게 제기되었고, 이상하리만치 손쉬운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체벌이 그것을 대놓고 찬성하는 사람들 외에 어떤 광범위한 암묵적 지지를 가진다는 걸 뜻한다. 지지의 정체는 바로 아이들의 성적, 즉 시장에서 경쟁력을 둘러싼 부모들의 욕망이다.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이 교사가 ‘좀 강하게’ 지도하는 게 아이의 성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체벌이라는 야만은 그런 욕망에 힘입어 존속되고 있다.
 


서울신문 2010.7.30 [데스크 시각] 체벌의 변증법

당신은 학교 체벌과 관련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습니까? 그 기억 속의 체벌이 자신의 과실에 대한 징계였든, 아니면 단체 규율 차원이었든 다 좋습니다. 그 체벌은 당신에게 아름다움입니까, 아니면 모욕스럽거나 혐오스럽도록 잔혹하고 일방적인 그 무엇입니까.  

효율만 따지자면 체벌은 여전히 효과적인 리더십의 비밀병기일 수 있습니다. 또 학교라는 갇힌 공간에서 작위적으로 권위를 급조해 내는 요술방망이일 수도 있지요. 여러분이 체험했던 군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까요. 사실,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거나, 현실 너머의 이상에 눈길을 주지 못하는, 그래서 하찮은 절차적 문제 때문에 효율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체벌은 여전히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가의 보도’입니다. 단시간에, 군더더기 없이 지시나 명령을 수행하게 하는 마력, 그런 가학의 관습이 만든 무한한 권능의 단맛은 마약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는 대부분 이런 폭력과 체벌을 체화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체벌로 집체적응력을 키웠고, 사회에서는 음험한 폭력의 위협 때문에 일사불란한 복종과 순응의 미덕을 자기 내면에 이식해야 했습니다. 그런 기성세대에서 체벌옹호론이 불거집니다. ‘교권의 위기’라는 그럴 듯한 수사로 포장된 체벌옹호론은 본질적으로 목표에 집착하는 성과주의의 부산물이자 본질을 배제한 효율지상주의적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정체된 가치로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정체되지 않도록 시스템적으로 재교육이 강화되야 할 것이고 변화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실도 콩나물 교실이 아닌 학급당 정적 학생수와 법정 교사수를 확보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은 안하는지....)

이런 논란에 대해 변증법은 아주 간명한 이해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변증법적 진보의 핵심 개념인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상이나 가치는 결국 모순을 노정하게 되고, 이 모순에 대한 반동이 새로운 진보의 촉매가 됩니다. 이를 변증법론자들은 ‘정·반·합’으로 정리합니다. 그런 점에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전격적인 체벌금지 선언은 일부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인 셈이지요. 

지금도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습관화된 폭력’에 노출돼 있으며, 그들이 학교라는 닫힌 공간에서 구호나 변론의 여지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체벌은 ‘아주 오래, 그리고 공공연히 지속돼 온 응급상황’이며,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절차적 문제는 오히려 하찮습니다. 때리면 얼마나 때리겠느냐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고 방종한 상황인식입니다. 국내 중·고교생의 70%가 교사 체벌을 경험했으며, 이 중에 매주 3회 이상 체벌을 받는 학생도 7.4%나 된답니다. 스웨덴의 중·고교생 98.6%가 체벌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과 견줘보면 참혹하고 부끄럽습니다.

혹자들은 체벌 금지가 교사의 교육권을 위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체벌을 통한 통솔이 오히려 교육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문제를 갖습니다. 교육권의 훼손이 비본질적이라면 교육의 가치 훼손은 본질의 문제입니다. 교육의 가치는 지식의 습득이나 군대식 규율 주입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이 사회에 기여하게 하고, 윤택한 삶을 꾸리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체벌 옹호론자들은 체벌을 통해 완성하는 집체화가 바로 사회생활의 기본이고, 우수한 시민의 조건이라고 우깁니다.

프랑스에서 이런 인지행동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개에게는 체벌 없이 음식을 제공했고, 다른 개에게는 매질을 한 뒤 음식을 먹도록 했습니다. 4주 후 매를 맞지 않은 개는 매우 창의적으로 감춰진 음식을 찾아내는 반면 매에 길들여진 개는 음식을 찾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기를 망설였으며, 누군가 매질을 하자 그제야 편하게 음식을 먹더랍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매질에 길들여진 타율의 객체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모든 체벌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의 주체로 자라기를 바라십니까. 

 
  

매일경제 2010.7.26 [데스크 칼럼] 체벌금지보다 교실정상화가 더 급하다 
 
"체벌은 비인간적 금지에 공감하지만 궤도 이탈한 교사, 통제 안되는 학생에 대한 대책이 우선돼야"

학생들이 대들었다.
"선생님! 새 교육감이 금지한다는데 왜 체벌하세요!"
선생님도 만만찮다.
"2학기부터 못하니까 미리 (체벌)한다. 이놈들아."

최근 한 중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오간 대화다. 신임 서울시교육감의 체벌금지 방침이 전해진 이후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체벌은 비인간적이다. 그런데 체벌금지를 일률적으로 시행한다고 상정해 보니 상황이 복잡해진다. 교사들은 90% 이상이 반대한다고 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 학부모들은 헷갈린다.

최근 공개수업에 다녀온 한 학부모는 체벌금지가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 회의하게 됐다고 한다.

학부모들이 참관하는 공개수업에서 아이들 몇 명이 수업 중에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나 다른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게임을 하더니 마침내 벌칙까지 주고받는다. 선생님은 이 `문제아`들을 교실 뒤에 가서 서 있으라고 했다. 정상적인 아이들이라면 창피해서 고개를 못들 만한 벌칙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물론이고 수업을 참관하는 학부모도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 이 애기는 난 직접 들었다. 몇몇 부모님들이 그리고 수업하는 교사분들이 애기하더라 도리어 내가 창피하다고. 어쩜 그렇게 뻔뻔한지, 창피해할 줄 알고 뒤에 가서 서있으라고 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 가서도 떠들더라고...)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학급에서 체벌금지는 옳은가, 옳지 않은가, 헷갈린다.

입장을 바꿔서 학생이나 학부모의 눈으로 보면 극히 일부의 교사에게 해당되지만, 교사 쪽에도 문제가 많다. 과도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이유로 체벌에 나서는 교사에 관한 뉴스가 줄지어 나오고 있다. 체벌금지론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가 된 `오장풍` 선생 동영상은 체벌의 비인간성을 보여준다. 학생의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등 뒷골목에서나 일어날 일이 신성한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실 어떤 집단이건 구성원은 정규분포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우수한 사람으로 구성된 집단이라도 모든 점에서 우수한 소수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소수가 있다. (--- 난 이렇기 때문에 제3자적 입장에서 쉽게 말을 하는 또는 요즘 젊은 교사들이 애기하는 교원평가제 찬성입장에 대해선 상당히 회의적이다.)
교사들 가운데서도 교직생활을 하면서 임용 때의 초심을 잃은 교사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이들은 사생활에 기인하건, 성격적 결함 때문이건 간에 적어도 그 시기에서만큼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교단에 오를 자격을 잃은 사람들이다. 극히 일부 교사에 해당되지만 이들을 사전에 걸러내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시스템은 그래서 중요하다. 체벌을 받는 학생들은 정확하게 체감한다. 애정을 갖고 훈육 목적으로 때리는지, 자기 감정을 발산하고 있는지 말이다.

교실에서 암암리에 문제를 일으키다가 결국 사회문제가 된 다음에야 걸러지는 시스템 아래서 시달려야 하는 불쌍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일탈한 교사들을 교육현장에서 사전에 떼어내 자질을 재정립하게 만드는 제도 마련은 시급하다.

마찬가지로 교권에 도전하고 교실의 질서를 파괴하는 학생들을 제대로 훈육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교실에서 배제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도 나와야 한다.

지난달 수원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평소 행실이 불량하다며 꾸짖던 담임교사가 학생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해당 여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 학생은 선생님에게 욕설을 퍼붓고 뺨까지 때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비정상적인 아이들을 바로잡을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채 체벌금지를 일률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이상의 불빛에 눈이 부셔 현실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다.

체벌금지에 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교실 정상화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페스탈로치도 매를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받은 모욕적 체벌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내가 고려대 김정환 교수(현재 정년퇴임)의 ‘전인교육론’이라는 강의를 듣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 분의 ‘체벌 교육론’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많은 교육학자들의 체벌 찬반론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음미해 보아야할 사람으로 페스탈로찌가 있다. 사랑의 교사로 알려져 있는 페스탈로찌는 매를 들지 못하는 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을 가꾸는 어버이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사라고 했다. 체벌이 좋은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는 ①학생이 교사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을 때 ②학생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응분의 벌을 받음으로써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는 경우 ③아이를 고무해 주는 경우이다. 페스탈로찌의 체벌론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어버이는 매를 들 수 있으며 어버이를 대신하는 교사도 매를 들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의 확인이다. 체벌은 경우에 따라 매우 교육적인데, 문제는 어떤 방법과 종류의 체벌을 가하느냐에 있다. 체벌은 어떤 경우에나 충동적인 감정이나 보복적인 인상을 풍겨서는 안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①그 방법과 종류를 사전에 정하여 알리고 ②체벌을 공개적, 이성적으로 집행하고 ③그 사실을 학부모나 교장에게 알리는 방식이다.  

정의를 가르치는 매와 아이를 감싸는 자애는 교육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다. 정의와 자애가 동시에 발동되어야만 교육이 산다는 귀한 진리를 체벌론의 결론으로 삼고 싶다.
이 강의 내용처럼 체벌은 극약과 같으니, 학생의 인격을 파괴하는 독약이 아니라 영혼을 각성케 하는 귀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도록 각별히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욱경/경기도 광주종합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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