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새로 당선된 서울시 교육감의 체벌 전면 금지와 관련되어 말들이 많다. 교육적인 문제에 또다시 좌와 우가 나오고 이데올로기적인 공격들을 해대고 있다. 한심하다. 내 하는 일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보니, 참 쓸쓸하다. 솔직히 난 체벌 반대도 찬성도 아니다. 애매모호하지만 애매모호하지 않다.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원론적인 의견(체벌을 하지 않고 교육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교사들은 사표를 내야한다는 의견), 체벌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의견(체벌이 없으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고 요즘 아이들 말을 듣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교실당 20명 정도의 아이들과 수업을 한다면 체벌 없이도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 있지만 40명이나 되는 교실에서 솔직히 난 원론적인 교육적 방법과 마음만 가지고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 솔직히 그렇다)도 다 동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견과 충돌은 필요하다고 본다. 언젠가는 실현돼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만들어야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정규교육과정 초중고 12년동안 학교에서의 체벌로 인한 아주 좋지 않은 기억(추억ㅋ)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초등학교 2학년인가 담임(내 기억으로는 40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이었다)선생님에에 아침 운동장 조회시간에 떠든다고 구둣발로 쪼인트(ㅋ) 까인 기억이 아직도 선선하다. 그때 어찌나 아팠던지. 물론 내가 초,중학교까지는 좀 많이 까불긴 했다. 하여튼 잊혀지지 않는다. 나하고 비슷한 기억을 가진 이들 많을 것이다. ㅋㅋ 

하지만 내가 학교에 와서 교사란 직업을 가지고 길지 않은 6년 동안 학교에 있어본 현재 나름의 생각은 체벌뿐만 아닌 대한민국 학교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체벌 금지로도 논술교육 강화로도 허울좋은 공교육 정상화로도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난 사람들이 조금더 고민하고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생각과 균형적인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최대한 그런 자세는 버릴려고 한다. 학교에서도 주위에서 동료 교사분들이 체벌 금지에 대한 성토아닌 성토를 날릴때 난 대꾸하지 않는다. 왜 대꾸할 정도의 대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벌 금지에 대해 "그럼 니네가 와서 수업해봐", "체벌 금지되면 교사의 교권은 어떻게"라는 식의 말에 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감 한명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올바른 생각과 균형적인 감각을 가졌다고 기대는 해볼란다. 기대는...뭐 기대가 실망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기사를 몇개 스크랩해본다.(개인적으로 김규항씨의 글을 좋아하는 편이다. 근데 이 글은 불편한 글이다. 뭐 틀린 내용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틀린 글이 또 많을 수도 있는 글이다. 두번째 서울신문의 칼럼도 김규항씨의 글과 비슷한 맥락의 글이다. ㅋㅋ 세번째 매일경제의 글이 중립적이면서 현실적인 글 같다. 마지막 네번째 글은 나 개인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글이다)

  

경향신문 2010.7.26  김규항 시론  체벌이라는 야만

사회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그 의견들이 오가다보면 가끔은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한다. 민주주의란 그런 소란스러움을 기꺼이 함께 겪는 사회원리다. 그러나 그런 논란이 있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경우도 있다. 근래 서울시 교육청의 체벌 금지 조처로 인한 논란이 바로 그런 경우다. 지구상에서 나라꼴을 갖춘 사회에선 이미 다 금지하고, 나라 안에서도 군대나 교도소에서조차 엄격히 금지하는 체벌을, 학교에서 그것도 자라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허용하는 야만을, 이제라도 끝내자는 이야기가 어떻게 논란거리일 수 있는가.

이런저런 궤변들을 늘어놓지만 체벌금지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유는 하나다. 체벌을 통해 아이들을 지도하던 교사가 체벌 없이 지도하려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부당한 불편함’이 아니라 ‘교사의 임무’다. 교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지도할 임무가 있다. (---'교사의 임무'를 방기하겠다는 애기는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학교 현실의 문제, 학생수, 잡무, 적합한 처우 등 왜 '임무'는 그렇게 쉽게 애기하면서 '현실'은 '합당한 처우'는 왜 애기하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꽤 많은 교사들이 그 임무를 방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해 온 것이다. 봉급을 주는 국민들 앞에 엎드려 사과하고 반성할 일이다.

“교사의 교육 포기라든지 교수권 침해, 여타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우려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대변인의 말이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말도 안 되는 짓도 자꾸 하면 익숙해지고, 심지어 그걸 못하는 걸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교총 대변인의 말은 체벌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있음을 ‘생태 다큐’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말은 상식의 이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교육도 교수권도 수행할 수 없는 교사는 교사직을 포기해야 한다.’

체벌 금지가 ‘진보 교육감’을 위시한 빨갱이들의 도발이라며 보수·진보의 문제로 몰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망막에 빨간 매직을 칠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만 물어보자. ‘당신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폭력으로 해결한다는 명제가 들어 있는가?’ 체벌 금지는 애당초 보수·진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이다.

우리 사회는 엊그제만 해도 가정과 군대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야만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금지되는 과정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마땅치 않아 했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지금 ‘여자는 사흘에 한번은 패야 해!’라든가 ‘군대는 빠따를 쳐야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순간 체벌 금지에 대해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도 머지않아 지금 제 모습이 기억될까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야만은 ‘인간의 사회’에서 늘 그렇게 하나씩 사라져가는 법이니.

덧붙이는 말: 체벌 금지는 오늘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이나 인권의식에 비추어 이상하리만치 늦게 제기되었고, 이상하리만치 손쉬운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체벌이 그것을 대놓고 찬성하는 사람들 외에 어떤 광범위한 암묵적 지지를 가진다는 걸 뜻한다. 지지의 정체는 바로 아이들의 성적, 즉 시장에서 경쟁력을 둘러싼 부모들의 욕망이다.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이 교사가 ‘좀 강하게’ 지도하는 게 아이의 성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체벌이라는 야만은 그런 욕망에 힘입어 존속되고 있다.
 


서울신문 2010.7.30 [데스크 시각] 체벌의 변증법

당신은 학교 체벌과 관련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습니까? 그 기억 속의 체벌이 자신의 과실에 대한 징계였든, 아니면 단체 규율 차원이었든 다 좋습니다. 그 체벌은 당신에게 아름다움입니까, 아니면 모욕스럽거나 혐오스럽도록 잔혹하고 일방적인 그 무엇입니까.  

효율만 따지자면 체벌은 여전히 효과적인 리더십의 비밀병기일 수 있습니다. 또 학교라는 갇힌 공간에서 작위적으로 권위를 급조해 내는 요술방망이일 수도 있지요. 여러분이 체험했던 군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까요. 사실,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거나, 현실 너머의 이상에 눈길을 주지 못하는, 그래서 하찮은 절차적 문제 때문에 효율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체벌은 여전히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가의 보도’입니다. 단시간에, 군더더기 없이 지시나 명령을 수행하게 하는 마력, 그런 가학의 관습이 만든 무한한 권능의 단맛은 마약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는 대부분 이런 폭력과 체벌을 체화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체벌로 집체적응력을 키웠고, 사회에서는 음험한 폭력의 위협 때문에 일사불란한 복종과 순응의 미덕을 자기 내면에 이식해야 했습니다. 그런 기성세대에서 체벌옹호론이 불거집니다. ‘교권의 위기’라는 그럴 듯한 수사로 포장된 체벌옹호론은 본질적으로 목표에 집착하는 성과주의의 부산물이자 본질을 배제한 효율지상주의적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정체된 가치로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정체되지 않도록 시스템적으로 재교육이 강화되야 할 것이고 변화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실도 콩나물 교실이 아닌 학급당 정적 학생수와 법정 교사수를 확보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은 안하는지....)

이런 논란에 대해 변증법은 아주 간명한 이해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변증법적 진보의 핵심 개념인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상이나 가치는 결국 모순을 노정하게 되고, 이 모순에 대한 반동이 새로운 진보의 촉매가 됩니다. 이를 변증법론자들은 ‘정·반·합’으로 정리합니다. 그런 점에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전격적인 체벌금지 선언은 일부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인 셈이지요. 

지금도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습관화된 폭력’에 노출돼 있으며, 그들이 학교라는 닫힌 공간에서 구호나 변론의 여지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체벌은 ‘아주 오래, 그리고 공공연히 지속돼 온 응급상황’이며,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절차적 문제는 오히려 하찮습니다. 때리면 얼마나 때리겠느냐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고 방종한 상황인식입니다. 국내 중·고교생의 70%가 교사 체벌을 경험했으며, 이 중에 매주 3회 이상 체벌을 받는 학생도 7.4%나 된답니다. 스웨덴의 중·고교생 98.6%가 체벌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과 견줘보면 참혹하고 부끄럽습니다.

혹자들은 체벌 금지가 교사의 교육권을 위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체벌을 통한 통솔이 오히려 교육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문제를 갖습니다. 교육권의 훼손이 비본질적이라면 교육의 가치 훼손은 본질의 문제입니다. 교육의 가치는 지식의 습득이나 군대식 규율 주입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이 사회에 기여하게 하고, 윤택한 삶을 꾸리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체벌 옹호론자들은 체벌을 통해 완성하는 집체화가 바로 사회생활의 기본이고, 우수한 시민의 조건이라고 우깁니다.

프랑스에서 이런 인지행동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개에게는 체벌 없이 음식을 제공했고, 다른 개에게는 매질을 한 뒤 음식을 먹도록 했습니다. 4주 후 매를 맞지 않은 개는 매우 창의적으로 감춰진 음식을 찾아내는 반면 매에 길들여진 개는 음식을 찾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기를 망설였으며, 누군가 매질을 하자 그제야 편하게 음식을 먹더랍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매질에 길들여진 타율의 객체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모든 체벌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의 주체로 자라기를 바라십니까. 

 
  

매일경제 2010.7.26 [데스크 칼럼] 체벌금지보다 교실정상화가 더 급하다 
 
"체벌은 비인간적 금지에 공감하지만 궤도 이탈한 교사, 통제 안되는 학생에 대한 대책이 우선돼야"

학생들이 대들었다.
"선생님! 새 교육감이 금지한다는데 왜 체벌하세요!"
선생님도 만만찮다.
"2학기부터 못하니까 미리 (체벌)한다. 이놈들아."

최근 한 중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오간 대화다. 신임 서울시교육감의 체벌금지 방침이 전해진 이후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체벌은 비인간적이다. 그런데 체벌금지를 일률적으로 시행한다고 상정해 보니 상황이 복잡해진다. 교사들은 90% 이상이 반대한다고 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 학부모들은 헷갈린다.

최근 공개수업에 다녀온 한 학부모는 체벌금지가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 회의하게 됐다고 한다.

학부모들이 참관하는 공개수업에서 아이들 몇 명이 수업 중에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나 다른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게임을 하더니 마침내 벌칙까지 주고받는다. 선생님은 이 `문제아`들을 교실 뒤에 가서 서 있으라고 했다. 정상적인 아이들이라면 창피해서 고개를 못들 만한 벌칙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물론이고 수업을 참관하는 학부모도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 이 애기는 난 직접 들었다. 몇몇 부모님들이 그리고 수업하는 교사분들이 애기하더라 도리어 내가 창피하다고. 어쩜 그렇게 뻔뻔한지, 창피해할 줄 알고 뒤에 가서 서있으라고 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 가서도 떠들더라고...)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학급에서 체벌금지는 옳은가, 옳지 않은가, 헷갈린다.

입장을 바꿔서 학생이나 학부모의 눈으로 보면 극히 일부의 교사에게 해당되지만, 교사 쪽에도 문제가 많다. 과도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이유로 체벌에 나서는 교사에 관한 뉴스가 줄지어 나오고 있다. 체벌금지론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가 된 `오장풍` 선생 동영상은 체벌의 비인간성을 보여준다. 학생의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등 뒷골목에서나 일어날 일이 신성한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실 어떤 집단이건 구성원은 정규분포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우수한 사람으로 구성된 집단이라도 모든 점에서 우수한 소수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소수가 있다. (--- 난 이렇기 때문에 제3자적 입장에서 쉽게 말을 하는 또는 요즘 젊은 교사들이 애기하는 교원평가제 찬성입장에 대해선 상당히 회의적이다.)
교사들 가운데서도 교직생활을 하면서 임용 때의 초심을 잃은 교사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이들은 사생활에 기인하건, 성격적 결함 때문이건 간에 적어도 그 시기에서만큼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교단에 오를 자격을 잃은 사람들이다. 극히 일부 교사에 해당되지만 이들을 사전에 걸러내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시스템은 그래서 중요하다. 체벌을 받는 학생들은 정확하게 체감한다. 애정을 갖고 훈육 목적으로 때리는지, 자기 감정을 발산하고 있는지 말이다.

교실에서 암암리에 문제를 일으키다가 결국 사회문제가 된 다음에야 걸러지는 시스템 아래서 시달려야 하는 불쌍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일탈한 교사들을 교육현장에서 사전에 떼어내 자질을 재정립하게 만드는 제도 마련은 시급하다.

마찬가지로 교권에 도전하고 교실의 질서를 파괴하는 학생들을 제대로 훈육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교실에서 배제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도 나와야 한다.

지난달 수원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평소 행실이 불량하다며 꾸짖던 담임교사가 학생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해당 여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 학생은 선생님에게 욕설을 퍼붓고 뺨까지 때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비정상적인 아이들을 바로잡을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채 체벌금지를 일률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이상의 불빛에 눈이 부셔 현실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다.

체벌금지에 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교실 정상화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페스탈로치도 매를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받은 모욕적 체벌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내가 고려대 김정환 교수(현재 정년퇴임)의 ‘전인교육론’이라는 강의를 듣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 분의 ‘체벌 교육론’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많은 교육학자들의 체벌 찬반론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음미해 보아야할 사람으로 페스탈로찌가 있다. 사랑의 교사로 알려져 있는 페스탈로찌는 매를 들지 못하는 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을 가꾸는 어버이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사라고 했다. 체벌이 좋은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는 ①학생이 교사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을 때 ②학생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응분의 벌을 받음으로써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는 경우 ③아이를 고무해 주는 경우이다. 페스탈로찌의 체벌론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어버이는 매를 들 수 있으며 어버이를 대신하는 교사도 매를 들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의 확인이다. 체벌은 경우에 따라 매우 교육적인데, 문제는 어떤 방법과 종류의 체벌을 가하느냐에 있다. 체벌은 어떤 경우에나 충동적인 감정이나 보복적인 인상을 풍겨서는 안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①그 방법과 종류를 사전에 정하여 알리고 ②체벌을 공개적, 이성적으로 집행하고 ③그 사실을 학부모나 교장에게 알리는 방식이다.  

정의를 가르치는 매와 아이를 감싸는 자애는 교육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다. 정의와 자애가 동시에 발동되어야만 교육이 산다는 귀한 진리를 체벌론의 결론으로 삼고 싶다.
이 강의 내용처럼 체벌은 극약과 같으니, 학생의 인격을 파괴하는 독약이 아니라 영혼을 각성케 하는 귀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도록 각별히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욱경/경기도 광주종합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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