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로’가 남해안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간 7일 오전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서울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하늘이 드러났다.(왼쪽사진) 하지만 이날 오전 태풍을 피해 어선들이 정박한 경남 통영 인평동 포구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 있다. 김태형 기자, 통영/신소영 기자 xogud555@hani.co.kr 

한겨레신문 2010.9.8  극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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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4  한국 영화 ‘잔혹함’보다 중요한 문제

최근 일주일 사이에 일간지 영화담당 기자들한테서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최근 한국 영화가 잔혹해지는 경향의 이유’를 묻는 전화였다. 영화계의 흐름을 단기적으로 정리해야 하는 저널리즘 종사자들의 직업적 속성을 십분 이해한다. <추격자> 이후 일어난 잔혹스릴러 영화의 유행이 올여름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로 이어졌을 거라는 하나마나한 답을 그들 기자들이 각자 갖고 있었다. 나도 그것 외에 첨언할 말이 없었다.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에는 모두 잔혹한 폭력 묘사가 나오지만 그 효과는 전혀 다르다. <아저씨>는 원빈이라는, 하늘이 내려준 미모를 지닌 스타의 자기동일시적 매혹이 주는 기묘한 최면효과가 있다. 이 영화에서 폭력 묘사는 아름다운 그가 집행하는 악의 단죄 과정에 강세를 주는 아주 센 조미료와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폭력 묘사는, 비록 감독이 우왕좌왕하는 측면이 있지만, 실제 폭력이 주는 불쾌와 공포를 가감없이 제시하려 한 쪽에 가깝다.

나는 ‘한국 영화의 잔혹화 경향’이라는 흐름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다고 본다. <악마를 보았다>는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악마를 보았다>는 개봉 전날까지 완성된 필름의 부분삭제 작업을 해야 했다. 출판으로 치면 문제가 된 소설 페이지 일부를 찢어내고 유통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한상영가 전문극장이 없는 상황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을 내리는 것은 삭제하라는 것과 같고 이는 본질적으로 검열이다. 한국 영화계가 이뤄내기 위해 오랜 세월 애써온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받은 사건이지만 언론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려고 애쓴 것 같지는 않다. 이 경우에 <악마를 보았다>가 과연 좋은 영화냐, 나쁜 영화냐라는 논쟁은 하등 쓸모가 없다.

밀로시 포르만의 <래리 플린트>란 영화에서 도색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는 법정에서 “나는 삼류 미국시민이고 삼류 시민인 나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받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의 자유도 보장받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이 정도의 생각은 수용이 되는 사회라야 영화에서의 잔혹성에 관한 논란도 시작될 수 있다. 영화 검열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고 오늘날의 영화심의제도가 정착한 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삭제된 필름을 갖고 잔혹성 경향 운운하는 현실에서 검열이라는 칼에 깊이 내면화된 우리의 흔적을 느낀다. 한국 영화가 어렵다고 해서 말들이 많지만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은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또 하나, 투자자들의 보수성도 지적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추격자>도 제작 당시에는 돈이 모자라 쩔쩔맨 영화라는 사실이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대다수의 영화 관계자들도 과연 대중적 소통이 되겠느냐고 회의적이었다. 영화 유행의 흐름이란 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부분이 있다. 모험적으로 특정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 건 어렵지만 그 이후로는 대개 비슷한 아이템만 찾는다. 하나의 특정 장르 작품이 성공하면 그것으로 대중적 취향이 검증됐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추격자>의 성공 이후 한국에선 통하기 어렵다고 하는 스릴러도 하나의 장르로 정착했다. 그런데 또 모두 우르르 그쪽으로만 몰려가버렸다. 얼마 전 꽤 괜찮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든 영화사의 대표를 만났더니 투자자들이나 영화인들 모두 로맨틱 코미디를 꺼리는 풍토를 한탄하고 있었다. 되살아나려는 검열, 보수적인 투자자들의 성향에 대해서 올여름 극장가의 현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뮤지컬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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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집시)에 대한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의 추방 정책은 최근의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되었다. '톨레랑스'의 국가로 불린 프랑스마저도 이제 그 말의 상징성을 포기하려 하나 보다. 프랑스에 국한된 일은 아니니 그 한 나라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노포비아로 검색을 해보니 책이 하나 나온다. 김세균, 김수행 교수 등이 쓴 <유럽의 제노포비아>. 6명의 저자가 각각 유럽의 제노포비아 현상이나 독일,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제노포비아에 대해 분석해 놓고 있다. 2006년에 출간된 책이기는 하지만 '제노포비아'에 대한 개론적인 이해를 도와 줄 수 있을 듯 하다.

 

한겨레신문 2010.9.4  점점 강해지는 '제노포비아' 

 

지금 나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와 있다. 유럽을 처음 여행한 지 약 27년, 잘츠부르크에 다니기 시작한 지 11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최근에 느낀 변화를 두 가지만 들어보자면, 하나는 중국인 관광객의 극적인 증가이고 또 하나는 공공장소에서 ‘로마’(roma)의 모습을 볼 기회가 줄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예전에 흔히 ‘집시’로 불렸으나 이는 다수자 쪽에서 붙인 일방적인 호칭이어서 요즘엔 공식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인구는 유럽 전역에서 1천만쯤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동유럽권에서는 정주하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역사적으로는 계절노동이나 일용직 노동으로 품삯을 받는 한편 마구 수리, 음악이나 춤, 점 등을 생업으로 삼아 방랑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런 전통적인 생활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가 유럽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파리, 로마, 바르셀로나, 베를린 등의 대도시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로마의 테르미니 역에서 경험한 것인데, 오른쪽에서 아이를 안은 여성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순간 왼쪽에 있던 다른 여성이 내 바지 왼편 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내 달아났다. 바로 뒤쫓았으나 한패가 된 여성 몇 명이 차단하듯 가로막아서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경찰에 가서 신고하니 젊은 여성 경관이 “휴~, 당신이 처음이 아니에요” 하고 지겨운 듯 투덜거리며 금방 도난신고서를 작성해 주었다.

혹시나 해서 밝혀두는 바이지만, 로마가 모두 소매치기라거나 소매치기는 모두 로마라는 말을 하려고 이 얘길 쓰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 중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다. 다른 생활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생활습관이 다르다면 저지르지 않을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고위관리가 되는 경우가 드문 로마족들이 뇌물 증여나 수뢰 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기업 간부가 될 기회가 적으면 배임횡령죄 따위를 저지를 가능성도 적을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국가권력을 손에 쥘 가능성이 없는 그들은 전쟁을 주도하는 것과 같은 대형범죄와는 인연이 없을 것이다.

나는 로마 범죄자를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내 지갑을 소매치기한 사람은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소매치기가 죄지 로마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건 아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전쟁범죄자라고 해서 미국인 모두가 처벌받는 일이 없듯이, 로마 중에 소매치기가 있다고 해서 그들 전부가 처벌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민족과 같은 집단 전체가 ‘범죄자’로 낙인찍혀서는 안 된다.

로마에서의 경험 때문에 나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철도나 버스 역, 대형 성당, 번화가, 지하철 역 등 그들이 모여 있을 법한 장소에 접근할 때는 잔뜩 긴장하거나 경계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잘츠부르크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나도 모르게 긴장에서 해방됐다.

최근 공공장소에서 ‘로마’(집시)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들 중엔 소매치기도 있지만, 전부가 범죄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선 이들 캠프가 불탔고 사르코지 정권은 강경책을 내놓았다. 우울한 건 프랑스 국민 80%가 이를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나치를 지지했던 다수의 독일 국민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근래에 그 일을 상기시키는 뉴스들이 잇따라 내 귀에 들어왔다. 이탈리아에서 로마들의 캠프가 불탔다는 뉴스를 몇 개월 전에 들었는데, 이번에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로마에 대한 강경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사르코지 정권은 8월6일 “로마 등의 불법 캠프 300개를 철거하기 시작”했으며 “체류허가 등을 받지 않은 로마 약 50명에게 국외퇴거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7월에 검문을 무시하고 달아나는 비정주자 남성(22)을 경관이 사살한 것을 기화로 비정주자 폭동이 일어났다. 사르코지 정권은 이에 대해 불법 캠프 철거, 외국에서 온 로마가 죄를 저지를 경우 즉시 강제송환, 비정주자 납세상황 조사 등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정주자’와 ‘로마’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사르코지 정권은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혼동시키면서 ‘비정주자’에 대한 압박과 외국 국적 로마의 추방을 동시에 추진할 모양이다.

이 문제는 유럽연합(EU) 외무장관회의에서도 논의됐으나 로마 인구가 많은 루마니아는 “로마를 범죄집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며 반발한다. ‘유럽회의’(47개국) 간부도 “프랑스는 비정주자와 시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모두 당연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르코지 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정책이 일련의 이민배척 정책과 함께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우파 표 획득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분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국민의 80%가 이 로마에 대한 강경책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보도다. 나치스가 정권 탈취에 성공한 이유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연구가 진행돼 종래의 통념과는 달리 당시 독일 국민 다수가 초기 단계부터 나치스에 호감을 갖고 지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고용상태를 호전시킨 것이고, 두번째는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청결과 규율을 좋아하는 국민의 다수는 내심 로마, 동유럽 유대인 난민, 상습 범죄자, 매춘부 등에 대한 혐오감과 적의를 키우고 있었다. 그 속내를 대변해주고 거리에서 불순한 것을 일소해준 것이 나치스였다. 그 완력을 통한 대청소의 대가가 전쟁과 대학살이었다.

내가 요즘 볼 수 없었던 로마는 생활조건이 개선돼 안정된 직장에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점점 보이지 않는 장소로 내쫓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지 않게 돼 마음 한구석에선 다행이라 여기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예전의 독일 국민과 같은 심성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일부의 소매치기가 아니다. 사르코지의 강경책을 지지하는 80%의 국민이다. 전세계에서 제노포비아(외국인이나 타자 혐오와 적대시)가 강해지고 있으며, 세계는 점점 더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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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에 연재되는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의 글이 상당히 맘에 든다. 내용도 좋고 쉽다. "상대방의 진정한 장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과 상대방의 나쁜 첫인상을 결코 수정하지 않으려는 ‘편견’ 말이다." <오만과 편견>일 읽고 싶다. 나의 '오만'과 '편견'은 무엇일까? 아마도 나의 '오만'은 나의 느낌을 특히 상대방의 단점의 경우 너무 쉽게 고착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편견'그렇게 고착화된 느낌에 의해 그 이후에 그 상대방에 대한 느낌을 바꿀수 있는 기회조차 나에게 제공하지 않으려 하는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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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4  '마음의 주판알'을 버리는 지혜 

“사랑은 종교 이후의 종교이며, 모든 믿음의 종말 이후의 궁극적 믿음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적하듯이 현대인에게 사랑은 종교의 힘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어루만지는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그만큼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손쉽게 위협당하는 ‘위험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일까. 사랑마저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각박할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이렇듯 사랑의 인류학적 가치를 되새길 때마다 어김없이 호출되는 고전이다. 제인 오스틴은 로맨틱 코미디의 문학적 시조로 추앙받는 작가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는 영화들은 흔히 ‘결국 해피 엔딩이 빤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닌가’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는 그리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남성과 동등하게 논쟁할 수 있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고 나서야 가능했던 장르다.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에서처럼 알파걸들이 기를 쓰고 명문대 졸업장을 따도 여전히 여성의 가치는 ‘현모양처’에 제한되던 시대가 끝난 지는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오만과 편견>은 낭만적 사랑보다 합리적 결혼이 추앙받던 시대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투명하게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오만과 편견을 통쾌하게 그려낸다. 제인 오스틴의 시대는 철없는 여주인공이 현명한 남성의 도움으로 순종적이고 우아한 여성으로 ‘교화’되는 이야기의 전통이 막강하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는 남성에게 계몽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오만을 폭로하고 자신의 편견 또한 스스로 무너뜨리는 강력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를 탄생시켰다. 18세기 영국 남녀뿐 아니라 오늘날의 남녀에게도 오만과 편견은 유쾌한 사랑을 가로막는 고질적 장애물이 아닐까. 상대방의 진정한 장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과 상대방의 나쁜 첫인상을 결코 수정하지 않으려는 ‘편견’ 말이다. <오만과 편견>은 가난하지만 똑똑한 아가씨가 전략적 기지로 백마 탄 왕자와 결혼에 골인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이 그 누구의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여전히 혁명적으로 읽힌다.

이 소설은 단지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타인의 진심보다 타인의 ‘조건’을 향해 눈을 흘기던 마을 사람들이 그동안 겹겹이 껴입은 ‘에티켓의 의상’과 ‘자존심의 액세서리’를 집어던지고 인생의 진정한 희로애락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육중한 감정의 의상과 치렁치렁한 체면의 액세서리 중 가장 벗겨내기 힘든 것이 바로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었다. 이 소설은 여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웃음과 풍자, 재치와 유머가 바꾸어낸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계급을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감정의 폭탄이 유머임을 일찍이 간파한다. 쩨쩨하고 옹졸하게 타인의 ‘조건’만을 따지며 마음의 주판알을 튕기던 사람들은, 이제 좀처럼 꺼내 보일 수도 없는 ‘속마음’이 아니라 ‘대화’와 ‘소통’만이 진정 갈등을 푸는 열쇠임을 깨닫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훌륭한 결혼 조건을 갖춘 콜린스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측천무후 못지않은 독설을 뽐내는 캐서린 부인의 결혼 반대 협박을 오직 ‘세 치 혀’로 물리쳐낸다. 그녀의 당돌한 거절은 계급과 에티켓의 철옹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보수성을 향해 날린 직격탄이었다. 불합리에 대한 당찬 저항이야말로 다아시를 매혹시킨 그녀의 진정한 매력이었던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저마다의 ‘혼사 장애’로 괴로워하던 마을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의 편견과 다아시의 오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카니발적 이야기다. 엘리자베스의 신념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남성에게 ‘우리의 권리를 달라’고 윽박지르는, 남성을 ‘그들’로 여성을 ‘우리’로 선 긋는 페미니즘이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웃음과 풍자로 모든 이의 마음속에 웅크린 차별과 갈등의 씨앗을 날려버리는 ‘웃는 페미니즘’의 전도사다. 사랑과 결혼을 위해 너무 많은 조건들을 따져보며 고민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표정을 본다면 아마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당신은 내 철학을 배워야 한다니까요. 즐거운 것만 기억하도록 하세요!’ 엘리자베스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행복을 미뤄야 할 타당한 이유는 전혀 없음을,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결격사유는 누구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음을 발견하는 능력이었다. ‘결혼이 가난을 피하는 가장 쾌적한 방법’이라는 믿음이 팽배하던 시대에 엘리자베스는 당돌하게도 여성의 ‘행복 추구권’을 주장했다. 명랑소녀 엘리자베스가 발명해낸 최고의 호신술은 ‘불행을 피하는 기교’가 아니라 ‘행복을 창조하는 지혜’였던 것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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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전라도 배낭여행을 하며 망월동 5.18 묘역을 가보았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숙연해졌다. 그리고 전시관에 있는 그날의 참상을 알려주는 사진들을 보며 눈물이 나왔다. 그 사진속의 잔인한 화면때문이 아닌, 그 사람들의 아픔과 억울함 그리고 그 사건의 원흉이 아직도 멀쩡히 떵떵거리며 살고있다는 불의 때문에. 조정환씨는 최근에 광주민주항쟁의 코뮤니즘적 성격에 대해 광주 민중이 광주를 해방도시로 창조했다는 내용의 <공통도시>를 출간했다. 읽을 책이 많기에 다음에 시간되면 읽어보고 싶다. 나에게 광주는 아무런 연결선.점이 없지만 그런 나에게도 광주는 하나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도종환씨의 그 아픔, 상흔을 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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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3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⑩
 
  

»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여수-순천 간 17번 국도에서
난 소총 실탄을 거꾸로 끼우고
총알이 나가지 않게 했습니다
시민이 적인가?
광주라는 갈림길에서
내 인생은 그 이전과 이후로
갈렸습니다  

쫓겨 간 학교에서 석 달을 근무하고 난 오월 하순,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군에 가려고 했었는데 하필 아버지가 담석증을 앓으셔서 군 입대를 연기해야 했습니다. 집안의 경제적인 문제를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해서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대학원 진학을 사유로 군 입대를 연기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스물여섯 살이었고, 아까시 꽃이 하얗게 핀 오월이었습니다.

떠나오면서 아이들에게 “아까시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선생님을 생각하다 그 꽃이 지거든 나를 잊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논산훈련소 연병장 가에는 아까시나무가 많았습니다. 훈련을 받다 잠시 쉬는 동안 황토에 누워 아까시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까시 꽃잎이 눈발처럼 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저 꽃이 지거든 나를 잊으라고 말하고 왔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없이 군홧발에 차일 때도, 서른여섯 종류의 기합에 시달릴 때도, 장대비에 젖은 채 구보를 하며 눈물고개를 돌아올 때도, 각개전투 훈련장에서 철조망 밑을 기어갈 때도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티 없이 환한 얼굴로 웃던 여학생들의 얼굴과 천진난만하던 남학생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황토와 자갈밭에 몸을 던지며 훈련을 이겨냈습니다.

한번은 저녁을 먹고 식판을 씻으러 갔다가 우리 소대원의 식판을 훔쳐 달아나는 이웃 소대 훈련병 때문에 식판 하나 잃어버렸다고 소대 전체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차이고 내무반 침상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자리가 이층 내무반 창가였는데, 그 와중에도 눈동자를 약간 옆으로 돌리니 이층까지 올라온 침엽수가 바람에 한가하게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조주 선사의 선문답이 떠올랐습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

눈 깜짝 할 사이에 훔쳐 가고, 빼앗기고, 치고 박고, 도망치고, 폭력과 욕설과 명령과 통제의 언어가 난무하는 아수라의 한복판에서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익명의 존재로 사육당하는 나 자신과 훈련소 귀퉁이에 한 그루 나무로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비교되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허정무위(虛靜無爲)의 상태에 이르러 있는 것, 도란 바로 그런 상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평상심으로 갖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논산훈련소 전후반기 교육을 끝낼 때까지는 그런 생각으로 잘 견디고 지내왔는데 여천으로 자대 배치를 받고 중대본부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중에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늦게 중대본부에 온 어린 상급자 한 사람이 “야, 담배 한 대 주라”고 한 말을 참지 못하고 그만 욕설이 오고가고 몸싸움을 하는 바람에 부대원 전체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과 산기슭을 돌면서 하루 종일 기합을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잘 참아왔는데, 더 참았어야 했는데 제 실수, 제 잘못이었습니다. 완전군장에 오리걸음으로 능선을 오르내리던 상급자들은 내 곁을 스칠 때마다 낮은 소리로 쌍욕을 하거나 겁박의 말을 해댔습니다. 

본부 인사계를 하겠느냐는 제의도 완곡하게 거절하고 산악초소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더 빡빡 기는 곳으로 나를 하방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거기서 졸병 없는 취사병 노릇을 9개월이 될 때까지 하였습니다. 그해 시월, 아침에 휴가를 나갔던 고참이 급히 되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잘 때도 군화를 벗지 않고 누워 대기해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죽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취사병이었습니다. 얼어서 갈라터진 손, 때를 제대로 닦지 못해 검고 가늘게 갈라진 손으로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 사월이 되어서야 첫 휴가를 갈 수 있었습니다. 휴가를 나와서 대학에 간 제자들을 만났다가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학내시위, 시내진출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귀대를 하고 나서도 오월은 뒤숭숭했습니다. 하루는 근무를 서고 있는데 무전기로 급한 전언통신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9733, 9335, 7535, 7549, 9547… 이런 네 자리 숫자로 된 암호들이었는데 다 받아 적은 뒤 암호해독판을 가져다 전통문을 풀어보니 제목은 ‘사격명령’이었습니다. 1. 먼저 쏘지 말 것. 2. 신체 하부 쪽을 쏠 것. 등등이 차례차례 풀어져 나왔습니다. 부대에 있는 모든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대대본부에 집결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이동했습니다. 트럭이 부족해서인지 민간차량을 징발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고향이 광주인 군인 둘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 정말 총 쏠 거니?”

“그러게…”

고향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총을 쏘아야 하느냐는 말이었습니다.

고향이 광주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쏘아야 하는가? 그게 군복을 입은 우리들이 할 일인가? 저들이 적인가? 저 역시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상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배치받아 내린 곳은 광주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여수-순천 간 십칠 번 국도의 어느 고갯길이었습니다. 여수 한국화약에 있는 무기와 탄약을 가지러 오는 차량을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광주 전남 지역의 예비군 무기고가 열리고 칼빈총으로 무장한 시민군 차량이 내려오는데 그걸 차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삼중으로 설치한 바리케이드 앞에 M16A1 소총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오월인데도 밤에는 무척 추웠습니다. ‘총을 쏘아야 할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저는 소총의 탄창버튼을 눌러 탄창을 분리해냈습니다. 그리고 자동으로 발사하게 되어 있는 탄창 맨 위 실탄을 손으로 눌러 빼내어 거꾸로 끼워 넣었습니다. 맨 위에 있는 탄알을 거꾸로 장착해 놓으면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탄창을 밀어 넣었습니다. 탄창이 밀려들어가며 ‘철커덕’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철커덕’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잘못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은 생각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상태로 오월의 밤을 견디었습니다. 며칠 뒤 군복 윗주머니에 있는 군용수첩에다 시 한 편을 썼습니다. 
 
»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사격명령이 떨어지던 날
탄창 속의 M16A1 신형 탄알처럼
징발된 민간차량에 가지런히 탑승되어
비포장도로를 달려갔다.
정갈한 저녁 바람은 예년처럼
보리수염을 쓸어가고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은 우리 앞에
인도지나의 풍문으로 듣던 안개가
호남평야를 기어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몰래 탄창 제일번 실탄을
거꾸로 장전하는 짧은 순간
가장 깊은 밤의 이슬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그 밤 터무니없는 죽음의 가도에서
고려중기의 젊은 농군을 만나고
亡伊(망이)와 亡所伊(망소이)를 만나고
정중부의 다듬어진 칼과 보현원의 차디찬
화강암에 이마를 부딪고 쓰러진
그 흔한 죽음의 기록도 없는 한 야사의
문신들을 만났다.
십칠번 국도 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
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 피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
부대끼는 밤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이제 나의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역사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구름 그림자에 눌리운 이 깜깜한 오월의 국도 위에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당신도 헤아리고 있는가.

- 졸시 <삼대 8. 사격명령> 전문  

그렇게 요행히 그 오월을 넘겼지만 제가 군복을 입고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부끄러움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참담함이 지금까지 저를 밀고 왔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광주 장면을 볼 때도 펑펑 울었고, <화려한 휴가>를 볼 때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이 되는 올해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조촐한 자리에서 광주항쟁에 관한 판소리를 듣다가도 울었습니다. 광주라는 갈림길에서 제 인생은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로 갈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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