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전라도 배낭여행을 하며 망월동 5.18 묘역을 가보았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숙연해졌다. 그리고 전시관에 있는 그날의 참상을 알려주는 사진들을 보며 눈물이 나왔다. 그 사진속의 잔인한 화면때문이 아닌, 그 사람들의 아픔과 억울함 그리고 그 사건의 원흉이 아직도 멀쩡히 떵떵거리며 살고있다는 불의 때문에. 조정환씨는 최근에 광주민주항쟁의 코뮤니즘적 성격에 대해 광주 민중이 광주를 해방도시로 창조했다는 내용의 <공통도시>를 출간했다. 읽을 책이 많기에 다음에 시간되면 읽어보고 싶다. 나에게 광주는 아무런 연결선.점이 없지만 그런 나에게도 광주는 하나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도종환씨의 그 아픔, 상흔을 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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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3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⑩
 
  

»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여수-순천 간 17번 국도에서
난 소총 실탄을 거꾸로 끼우고
총알이 나가지 않게 했습니다
시민이 적인가?
광주라는 갈림길에서
내 인생은 그 이전과 이후로
갈렸습니다  

쫓겨 간 학교에서 석 달을 근무하고 난 오월 하순,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군에 가려고 했었는데 하필 아버지가 담석증을 앓으셔서 군 입대를 연기해야 했습니다. 집안의 경제적인 문제를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해서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대학원 진학을 사유로 군 입대를 연기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스물여섯 살이었고, 아까시 꽃이 하얗게 핀 오월이었습니다.

떠나오면서 아이들에게 “아까시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선생님을 생각하다 그 꽃이 지거든 나를 잊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논산훈련소 연병장 가에는 아까시나무가 많았습니다. 훈련을 받다 잠시 쉬는 동안 황토에 누워 아까시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까시 꽃잎이 눈발처럼 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저 꽃이 지거든 나를 잊으라고 말하고 왔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없이 군홧발에 차일 때도, 서른여섯 종류의 기합에 시달릴 때도, 장대비에 젖은 채 구보를 하며 눈물고개를 돌아올 때도, 각개전투 훈련장에서 철조망 밑을 기어갈 때도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티 없이 환한 얼굴로 웃던 여학생들의 얼굴과 천진난만하던 남학생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황토와 자갈밭에 몸을 던지며 훈련을 이겨냈습니다.

한번은 저녁을 먹고 식판을 씻으러 갔다가 우리 소대원의 식판을 훔쳐 달아나는 이웃 소대 훈련병 때문에 식판 하나 잃어버렸다고 소대 전체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차이고 내무반 침상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자리가 이층 내무반 창가였는데, 그 와중에도 눈동자를 약간 옆으로 돌리니 이층까지 올라온 침엽수가 바람에 한가하게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조주 선사의 선문답이 떠올랐습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

눈 깜짝 할 사이에 훔쳐 가고, 빼앗기고, 치고 박고, 도망치고, 폭력과 욕설과 명령과 통제의 언어가 난무하는 아수라의 한복판에서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익명의 존재로 사육당하는 나 자신과 훈련소 귀퉁이에 한 그루 나무로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비교되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허정무위(虛靜無爲)의 상태에 이르러 있는 것, 도란 바로 그런 상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평상심으로 갖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논산훈련소 전후반기 교육을 끝낼 때까지는 그런 생각으로 잘 견디고 지내왔는데 여천으로 자대 배치를 받고 중대본부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중에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늦게 중대본부에 온 어린 상급자 한 사람이 “야, 담배 한 대 주라”고 한 말을 참지 못하고 그만 욕설이 오고가고 몸싸움을 하는 바람에 부대원 전체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과 산기슭을 돌면서 하루 종일 기합을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잘 참아왔는데, 더 참았어야 했는데 제 실수, 제 잘못이었습니다. 완전군장에 오리걸음으로 능선을 오르내리던 상급자들은 내 곁을 스칠 때마다 낮은 소리로 쌍욕을 하거나 겁박의 말을 해댔습니다. 

본부 인사계를 하겠느냐는 제의도 완곡하게 거절하고 산악초소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더 빡빡 기는 곳으로 나를 하방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거기서 졸병 없는 취사병 노릇을 9개월이 될 때까지 하였습니다. 그해 시월, 아침에 휴가를 나갔던 고참이 급히 되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잘 때도 군화를 벗지 않고 누워 대기해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죽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취사병이었습니다. 얼어서 갈라터진 손, 때를 제대로 닦지 못해 검고 가늘게 갈라진 손으로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 사월이 되어서야 첫 휴가를 갈 수 있었습니다. 휴가를 나와서 대학에 간 제자들을 만났다가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학내시위, 시내진출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귀대를 하고 나서도 오월은 뒤숭숭했습니다. 하루는 근무를 서고 있는데 무전기로 급한 전언통신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9733, 9335, 7535, 7549, 9547… 이런 네 자리 숫자로 된 암호들이었는데 다 받아 적은 뒤 암호해독판을 가져다 전통문을 풀어보니 제목은 ‘사격명령’이었습니다. 1. 먼저 쏘지 말 것. 2. 신체 하부 쪽을 쏠 것. 등등이 차례차례 풀어져 나왔습니다. 부대에 있는 모든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대대본부에 집결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이동했습니다. 트럭이 부족해서인지 민간차량을 징발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고향이 광주인 군인 둘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 정말 총 쏠 거니?”

“그러게…”

고향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총을 쏘아야 하느냐는 말이었습니다.

고향이 광주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쏘아야 하는가? 그게 군복을 입은 우리들이 할 일인가? 저들이 적인가? 저 역시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상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배치받아 내린 곳은 광주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여수-순천 간 십칠 번 국도의 어느 고갯길이었습니다. 여수 한국화약에 있는 무기와 탄약을 가지러 오는 차량을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광주 전남 지역의 예비군 무기고가 열리고 칼빈총으로 무장한 시민군 차량이 내려오는데 그걸 차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삼중으로 설치한 바리케이드 앞에 M16A1 소총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오월인데도 밤에는 무척 추웠습니다. ‘총을 쏘아야 할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저는 소총의 탄창버튼을 눌러 탄창을 분리해냈습니다. 그리고 자동으로 발사하게 되어 있는 탄창 맨 위 실탄을 손으로 눌러 빼내어 거꾸로 끼워 넣었습니다. 맨 위에 있는 탄알을 거꾸로 장착해 놓으면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탄창을 밀어 넣었습니다. 탄창이 밀려들어가며 ‘철커덕’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철커덕’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잘못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은 생각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상태로 오월의 밤을 견디었습니다. 며칠 뒤 군복 윗주머니에 있는 군용수첩에다 시 한 편을 썼습니다. 
 
»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사격명령이 떨어지던 날
탄창 속의 M16A1 신형 탄알처럼
징발된 민간차량에 가지런히 탑승되어
비포장도로를 달려갔다.
정갈한 저녁 바람은 예년처럼
보리수염을 쓸어가고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은 우리 앞에
인도지나의 풍문으로 듣던 안개가
호남평야를 기어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몰래 탄창 제일번 실탄을
거꾸로 장전하는 짧은 순간
가장 깊은 밤의 이슬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그 밤 터무니없는 죽음의 가도에서
고려중기의 젊은 농군을 만나고
亡伊(망이)와 亡所伊(망소이)를 만나고
정중부의 다듬어진 칼과 보현원의 차디찬
화강암에 이마를 부딪고 쓰러진
그 흔한 죽음의 기록도 없는 한 야사의
문신들을 만났다.
십칠번 국도 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
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 피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
부대끼는 밤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이제 나의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역사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구름 그림자에 눌리운 이 깜깜한 오월의 국도 위에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당신도 헤아리고 있는가.

- 졸시 <삼대 8. 사격명령> 전문  

그렇게 요행히 그 오월을 넘겼지만 제가 군복을 입고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부끄러움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참담함이 지금까지 저를 밀고 왔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광주 장면을 볼 때도 펑펑 울었고, <화려한 휴가>를 볼 때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이 되는 올해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조촐한 자리에서 광주항쟁에 관한 판소리를 듣다가도 울었습니다. 광주라는 갈림길에서 제 인생은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로 갈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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