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에 연재되는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의 글이 상당히 맘에 든다. 내용도 좋고 쉽다. "상대방의 진정한 장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과 상대방의 나쁜 첫인상을 결코 수정하지 않으려는 ‘편견’ 말이다." <오만과 편견>일 읽고 싶다. 나의 '오만'과 '편견'은 무엇일까? 아마도 나의 '오만'은 나의 느낌을 특히 상대방의 단점의 경우 너무 쉽게 고착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편견'그렇게 고착화된 느낌에 의해 그 이후에 그 상대방에 대한 느낌을 바꿀수 있는 기회조차 나에게 제공하지 않으려 하는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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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4 '마음의 주판알'을 버리는 지혜
“사랑은 종교 이후의 종교이며, 모든 믿음의 종말 이후의 궁극적 믿음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적하듯이 현대인에게 사랑은 종교의 힘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어루만지는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그만큼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손쉽게 위협당하는 ‘위험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일까. 사랑마저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각박할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이렇듯 사랑의 인류학적 가치를 되새길 때마다 어김없이 호출되는 고전이다. 제인 오스틴은 로맨틱 코미디의 문학적 시조로 추앙받는 작가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는 영화들은 흔히 ‘결국 해피 엔딩이 빤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닌가’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는 그리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남성과 동등하게 논쟁할 수 있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고 나서야 가능했던 장르다.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에서처럼 알파걸들이 기를 쓰고 명문대 졸업장을 따도 여전히 여성의 가치는 ‘현모양처’에 제한되던 시대가 끝난 지는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오만과 편견>은 낭만적 사랑보다 합리적 결혼이 추앙받던 시대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투명하게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오만과 편견을 통쾌하게 그려낸다. 제인 오스틴의 시대는 철없는 여주인공이 현명한 남성의 도움으로 순종적이고 우아한 여성으로 ‘교화’되는 이야기의 전통이 막강하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는 남성에게 계몽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오만을 폭로하고 자신의 편견 또한 스스로 무너뜨리는 강력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를 탄생시켰다. 18세기 영국 남녀뿐 아니라 오늘날의 남녀에게도 오만과 편견은 유쾌한 사랑을 가로막는 고질적 장애물이 아닐까. 상대방의 진정한 장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과 상대방의 나쁜 첫인상을 결코 수정하지 않으려는 ‘편견’ 말이다. <오만과 편견>은 가난하지만 똑똑한 아가씨가 전략적 기지로 백마 탄 왕자와 결혼에 골인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이 그 누구의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여전히 혁명적으로 읽힌다.
이 소설은 단지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타인의 진심보다 타인의 ‘조건’을 향해 눈을 흘기던 마을 사람들이 그동안 겹겹이 껴입은 ‘에티켓의 의상’과 ‘자존심의 액세서리’를 집어던지고 인생의 진정한 희로애락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육중한 감정의 의상과 치렁치렁한 체면의 액세서리 중 가장 벗겨내기 힘든 것이 바로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었다. 이 소설은 여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웃음과 풍자, 재치와 유머가 바꾸어낸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계급을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감정의 폭탄이 유머임을 일찍이 간파한다. 쩨쩨하고 옹졸하게 타인의 ‘조건’만을 따지며 마음의 주판알을 튕기던 사람들은, 이제 좀처럼 꺼내 보일 수도 없는 ‘속마음’이 아니라 ‘대화’와 ‘소통’만이 진정 갈등을 푸는 열쇠임을 깨닫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훌륭한 결혼 조건을 갖춘 콜린스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측천무후 못지않은 독설을 뽐내는 캐서린 부인의 결혼 반대 협박을 오직 ‘세 치 혀’로 물리쳐낸다. 그녀의 당돌한 거절은 계급과 에티켓의 철옹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보수성을 향해 날린 직격탄이었다. 불합리에 대한 당찬 저항이야말로 다아시를 매혹시킨 그녀의 진정한 매력이었던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저마다의 ‘혼사 장애’로 괴로워하던 마을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의 편견과 다아시의 오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카니발적 이야기다. 엘리자베스의 신념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남성에게 ‘우리의 권리를 달라’고 윽박지르는, 남성을 ‘그들’로 여성을 ‘우리’로 선 긋는 페미니즘이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웃음과 풍자로 모든 이의 마음속에 웅크린 차별과 갈등의 씨앗을 날려버리는 ‘웃는 페미니즘’의 전도사다. 사랑과 결혼을 위해 너무 많은 조건들을 따져보며 고민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표정을 본다면 아마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당신은 내 철학을 배워야 한다니까요. 즐거운 것만 기억하도록 하세요!’ 엘리자베스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행복을 미뤄야 할 타당한 이유는 전혀 없음을,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결격사유는 누구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음을 발견하는 능력이었다. ‘결혼이 가난을 피하는 가장 쾌적한 방법’이라는 믿음이 팽배하던 시대에 엘리자베스는 당돌하게도 여성의 ‘행복 추구권’을 주장했다. 명랑소녀 엘리자베스가 발명해낸 최고의 호신술은 ‘불행을 피하는 기교’가 아니라 ‘행복을 창조하는 지혜’였던 것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