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집시)에 대한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의 추방 정책은 최근의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되었다. '톨레랑스'의 국가로 불린 프랑스마저도 이제 그 말의 상징성을 포기하려 하나 보다. 프랑스에 국한된 일은 아니니 그 한 나라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노포비아로 검색을 해보니 책이 하나 나온다. 김세균, 김수행 교수 등이 쓴 <유럽의 제노포비아>. 6명의 저자가 각각 유럽의 제노포비아 현상이나 독일,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제노포비아에 대해 분석해 놓고 있다. 2006년에 출간된 책이기는 하지만 '제노포비아'에 대한 개론적인 이해를 도와 줄 수 있을 듯 하다.

 

한겨레신문 2010.9.4  점점 강해지는 '제노포비아' 

 

지금 나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와 있다. 유럽을 처음 여행한 지 약 27년, 잘츠부르크에 다니기 시작한 지 11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최근에 느낀 변화를 두 가지만 들어보자면, 하나는 중국인 관광객의 극적인 증가이고 또 하나는 공공장소에서 ‘로마’(roma)의 모습을 볼 기회가 줄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예전에 흔히 ‘집시’로 불렸으나 이는 다수자 쪽에서 붙인 일방적인 호칭이어서 요즘엔 공식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인구는 유럽 전역에서 1천만쯤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동유럽권에서는 정주하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역사적으로는 계절노동이나 일용직 노동으로 품삯을 받는 한편 마구 수리, 음악이나 춤, 점 등을 생업으로 삼아 방랑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런 전통적인 생활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가 유럽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파리, 로마, 바르셀로나, 베를린 등의 대도시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로마의 테르미니 역에서 경험한 것인데, 오른쪽에서 아이를 안은 여성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순간 왼쪽에 있던 다른 여성이 내 바지 왼편 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내 달아났다. 바로 뒤쫓았으나 한패가 된 여성 몇 명이 차단하듯 가로막아서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경찰에 가서 신고하니 젊은 여성 경관이 “휴~, 당신이 처음이 아니에요” 하고 지겨운 듯 투덜거리며 금방 도난신고서를 작성해 주었다.

혹시나 해서 밝혀두는 바이지만, 로마가 모두 소매치기라거나 소매치기는 모두 로마라는 말을 하려고 이 얘길 쓰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 중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다. 다른 생활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생활습관이 다르다면 저지르지 않을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고위관리가 되는 경우가 드문 로마족들이 뇌물 증여나 수뢰 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기업 간부가 될 기회가 적으면 배임횡령죄 따위를 저지를 가능성도 적을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국가권력을 손에 쥘 가능성이 없는 그들은 전쟁을 주도하는 것과 같은 대형범죄와는 인연이 없을 것이다.

나는 로마 범죄자를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내 지갑을 소매치기한 사람은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소매치기가 죄지 로마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건 아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전쟁범죄자라고 해서 미국인 모두가 처벌받는 일이 없듯이, 로마 중에 소매치기가 있다고 해서 그들 전부가 처벌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민족과 같은 집단 전체가 ‘범죄자’로 낙인찍혀서는 안 된다.

로마에서의 경험 때문에 나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철도나 버스 역, 대형 성당, 번화가, 지하철 역 등 그들이 모여 있을 법한 장소에 접근할 때는 잔뜩 긴장하거나 경계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잘츠부르크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나도 모르게 긴장에서 해방됐다.

최근 공공장소에서 ‘로마’(집시)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들 중엔 소매치기도 있지만, 전부가 범죄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선 이들 캠프가 불탔고 사르코지 정권은 강경책을 내놓았다. 우울한 건 프랑스 국민 80%가 이를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나치를 지지했던 다수의 독일 국민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근래에 그 일을 상기시키는 뉴스들이 잇따라 내 귀에 들어왔다. 이탈리아에서 로마들의 캠프가 불탔다는 뉴스를 몇 개월 전에 들었는데, 이번에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로마에 대한 강경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사르코지 정권은 8월6일 “로마 등의 불법 캠프 300개를 철거하기 시작”했으며 “체류허가 등을 받지 않은 로마 약 50명에게 국외퇴거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7월에 검문을 무시하고 달아나는 비정주자 남성(22)을 경관이 사살한 것을 기화로 비정주자 폭동이 일어났다. 사르코지 정권은 이에 대해 불법 캠프 철거, 외국에서 온 로마가 죄를 저지를 경우 즉시 강제송환, 비정주자 납세상황 조사 등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정주자’와 ‘로마’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사르코지 정권은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혼동시키면서 ‘비정주자’에 대한 압박과 외국 국적 로마의 추방을 동시에 추진할 모양이다.

이 문제는 유럽연합(EU) 외무장관회의에서도 논의됐으나 로마 인구가 많은 루마니아는 “로마를 범죄집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며 반발한다. ‘유럽회의’(47개국) 간부도 “프랑스는 비정주자와 시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모두 당연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르코지 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정책이 일련의 이민배척 정책과 함께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우파 표 획득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분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국민의 80%가 이 로마에 대한 강경책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보도다. 나치스가 정권 탈취에 성공한 이유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연구가 진행돼 종래의 통념과는 달리 당시 독일 국민 다수가 초기 단계부터 나치스에 호감을 갖고 지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고용상태를 호전시킨 것이고, 두번째는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청결과 규율을 좋아하는 국민의 다수는 내심 로마, 동유럽 유대인 난민, 상습 범죄자, 매춘부 등에 대한 혐오감과 적의를 키우고 있었다. 그 속내를 대변해주고 거리에서 불순한 것을 일소해준 것이 나치스였다. 그 완력을 통한 대청소의 대가가 전쟁과 대학살이었다.

내가 요즘 볼 수 없었던 로마는 생활조건이 개선돼 안정된 직장에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점점 보이지 않는 장소로 내쫓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지 않게 돼 마음 한구석에선 다행이라 여기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예전의 독일 국민과 같은 심성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일부의 소매치기가 아니다. 사르코지의 강경책을 지지하는 80%의 국민이다. 전세계에서 제노포비아(외국인이나 타자 혐오와 적대시)가 강해지고 있으며, 세계는 점점 더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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