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10.9.4 한국 영화 ‘잔혹함’보다 중요한 문제
최근 일주일 사이에 일간지 영화담당 기자들한테서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최근 한국 영화가 잔혹해지는 경향의 이유’를 묻는 전화였다. 영화계의 흐름을 단기적으로 정리해야 하는 저널리즘 종사자들의 직업적 속성을 십분 이해한다. <추격자> 이후 일어난 잔혹스릴러 영화의 유행이 올여름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로 이어졌을 거라는 하나마나한 답을 그들 기자들이 각자 갖고 있었다. 나도 그것 외에 첨언할 말이 없었다.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에는 모두 잔혹한 폭력 묘사가 나오지만 그 효과는 전혀 다르다. <아저씨>는 원빈이라는, 하늘이 내려준 미모를 지닌 스타의 자기동일시적 매혹이 주는 기묘한 최면효과가 있다. 이 영화에서 폭력 묘사는 아름다운 그가 집행하는 악의 단죄 과정에 강세를 주는 아주 센 조미료와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폭력 묘사는, 비록 감독이 우왕좌왕하는 측면이 있지만, 실제 폭력이 주는 불쾌와 공포를 가감없이 제시하려 한 쪽에 가깝다.
나는 ‘한국 영화의 잔혹화 경향’이라는 흐름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다고 본다. <악마를 보았다>는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악마를 보았다>는 개봉 전날까지 완성된 필름의 부분삭제 작업을 해야 했다. 출판으로 치면 문제가 된 소설 페이지 일부를 찢어내고 유통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한상영가 전문극장이 없는 상황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을 내리는 것은 삭제하라는 것과 같고 이는 본질적으로 검열이다. 한국 영화계가 이뤄내기 위해 오랜 세월 애써온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받은 사건이지만 언론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려고 애쓴 것 같지는 않다. 이 경우에 <악마를 보았다>가 과연 좋은 영화냐, 나쁜 영화냐라는 논쟁은 하등 쓸모가 없다.
밀로시 포르만의 <래리 플린트>란 영화에서 도색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는 법정에서 “나는 삼류 미국시민이고 삼류 시민인 나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받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의 자유도 보장받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이 정도의 생각은 수용이 되는 사회라야 영화에서의 잔혹성에 관한 논란도 시작될 수 있다. 영화 검열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고 오늘날의 영화심의제도가 정착한 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삭제된 필름을 갖고 잔혹성 경향 운운하는 현실에서 검열이라는 칼에 깊이 내면화된 우리의 흔적을 느낀다. 한국 영화가 어렵다고 해서 말들이 많지만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은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또 하나, 투자자들의 보수성도 지적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추격자>도 제작 당시에는 돈이 모자라 쩔쩔맨 영화라는 사실이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대다수의 영화 관계자들도 과연 대중적 소통이 되겠느냐고 회의적이었다. 영화 유행의 흐름이란 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부분이 있다. 모험적으로 특정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 건 어렵지만 그 이후로는 대개 비슷한 아이템만 찾는다. 하나의 특정 장르 작품이 성공하면 그것으로 대중적 취향이 검증됐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추격자>의 성공 이후 한국에선 통하기 어렵다고 하는 스릴러도 하나의 장르로 정착했다. 그런데 또 모두 우르르 그쪽으로만 몰려가버렸다. 얼마 전 꽤 괜찮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든 영화사의 대표를 만났더니 투자자들이나 영화인들 모두 로맨틱 코미디를 꺼리는 풍토를 한탄하고 있었다. 되살아나려는 검열, 보수적인 투자자들의 성향에 대해서 올여름 극장가의 현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뮤지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