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8월호  ‘복원’의 과시욕과 ‘보존’의 겸허함  

문화재란 과거의 인류가 남긴 모든 유·무형의 문화적·자연적 유산을 일컫는다. 그러나 넓게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또는 미래에까지 우리 후손에게 남겨야 할 모든 것이 그 대상에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남아 있는 모든 유산을 안전하게 ‘보존’해서 후손에게 넘겨줘야 할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

 

▲ 1968년 12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참관한 광화문 현판 제막식. <정부기록사진집>.

오늘의 우리는 문화재 보존을 위한 차선책으로서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이뤄진 불가항력적 훼손에 대처하기 위해 ‘복원’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복원 자체가 원형을 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최선의 복원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온전한 보존이 수반돼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서는 땅속에 묻힌 문화재 보존은 외면한 채 지상의 문화재 복원 작업에만 치중하는 파행적 국면이 일어나고 있다.

복원은 하되 보존하지 않는 파행

지금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는 두 곳의 귀중한 국보급 문화재의 복원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두 곳 모두 조선왕조(1392~1910) 개국과 함께 지은, 숭례문과 광화문이다. 한성의 주작로(朱雀路)랄 수 있는 지금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이어지는 대로의 남쪽과 북쪽 끝에 자리잡은 고도 서울의 상징물 같은 곳이다. 이 양 대문이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가설 덧집에 가린 채 안에서 한창 복원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숭례문은 18.7km에 이르는 서울 성곽을 따라 세운 사대문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대문이고, 광화문은 조선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두 건물은 우리 민족의 다사다난한 역사처럼 기구한 역경 속에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간신히 이어왔다.

우선 숭례문은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서 6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몇 차례 보수가 있었지만 잦은 외침과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별 탈 없이 최근까지 무사히 건재해왔다. 그러나 2008년 2월, 한 방화범에 의해 목조로 된 중층 문루(門樓)의 반 이상이 소실돼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사건 이후 곧장 복구 작업에 들어가 2012년 12월 준공 예정으로 공사 중이다.

한편 광화문은 조선 초기 숭례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졌지만 숭례문과는 달리 많은 시련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1592~98) 때 경복궁과 함께 소진된 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270년 만인 고종 2년(1865)에 착수된 경복궁 중건 공사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건물이다. 경복궁은 이후 고종 25년(1888)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에 걸쳐 대원군에 의해 꾸준히 공사가 진행돼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경복궁 내의 근정전과 경회루 등 몇몇 주요 건물을 제외하고 나머지 건물을 철거했고, 광화문도 일제의 무자비한 훼손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18년에 착공된 조선총독부 신축 부지가 근정전의 남쪽 정면으로 확정되면서 바로 정면에 있던 광화문을 해체시켜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文) 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쪽으로 옮겨버렸다.

그 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채 한동안 방치되던 것을 1968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던 중앙청 정면의 원위치에 가까운 곳을 찾아 다시 복원을 했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만 비슷할 뿐 우리의 전통 건축과는 거리가 먼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더구나 위치도 원래보다 북쪽으로 물러나 있었고, 좌향(坐向)도 경복궁보다 중앙청 건물에 주축(主軸)을 맞추다 보니 한쪽으로 비스듬히 틀어졌다.

현재 광화문 복원 공사는 경복궁 복원 계획의 일환이다. 콘크리트 건물을 모두 헐어내고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역사적 고증 자료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얻은 충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원위치에 원래 모습을 찾아 공사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한 조선왕조의 5대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서 규모가 가장 큰 정궁인 경복궁의 대대적인 복원 공사에 착수한 것은 1990년이었다. 당초 20년의 장기 계획으로 시작한 복원 공사는 지금까지 건물 93채가 완공됐고, 2006년에 시작돼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는 광화문 복원은 그 마지막 사업이다.

서울은 고도(古都)이다. 암사동과 같은, 한반도 내에서도 굴지의 신석기시대 취락 유적이 서울의 한강 유역에 형성되었다.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1천여 년 뒤에는 고대 백제 왕국이 개국해 500여 년 동안 도읍을 이룬 곳이다. 그 뒤 고려왕조에 이르러서도 남경(南京)으로 건재하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드디어 왕도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 이후 고도 서울

1394년(태조 3년) 개경 천도와 함께 국기(國基)의 주축이 될 한성에 성곽을 쌓고 그 안에 궁궐이 들어서면서 점차 국도(國都)로서 기틀이 잡혔다.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주작대로 양쪽으로는 국정을 총괄해나가는 육조(六曹) 거리가 자리잡고, 그 주변으로는 중요 관가가 세워졌다. 이 밖에 사대문 안에는 민가와 상가 등이 밀집한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점차 도읍의 면모를 갖추었다.

1840년대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首善全圖) 등 서울의 옛 지도에서 당시 시가지 모습을 살필 수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서도 지도와 부합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서울 성곽 내부, 즉 사대문 안에서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친 갖가지 유구(遺構)들이 드러나 당시 이곳에서 이룬 풍성한 삶의 흔적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최근까지 서울 도심의 지하에 남아 있는 유적은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개발 논리에 밀려 무방비 상태로 파괴돼왔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학계를 중심으로 지하 유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는데, 그 결정적 계기는 청계천의 복원·정비 공사에서 비롯됐다.

그나마 복원도 아닌 정비 수준

공사에 앞서 작업한 구제(救濟) 발굴(2003년 9~12월)에서 얻은 결과는 학계로부터 ‘졸속’ 발굴이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많은 국민과 행정 당국자에게 서울 도심에 묻힌 매장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식을 심어주었다. 물론 발굴 결과가 청계천 복원 사업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도심 속 생태하천’이란 미명하에 복원이 아닌 정비 수준에 그치고 말았지만, 서울의 땅 속에서는 아직도 고도의 흔적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서울 동대문운동장 터에 건립하기 위한 ‘디자인 플라자’ 부지 조성 중에 드러난 지하 유구 발굴(2008년 1월~2009년 5월)을 통해 조선 전기에 축성된 서울 성곽과 함께 수문(水門)이 나타났고, 많은 건물터가 확인됐다. 이 건물들은 조선시대의 도성 방어와 관련된 관청과, 화약 제조와 철 생산을 담당한 부속 군사시설로 밝혀졌다. 발굴 뒤 성벽과 수문이 복원됐고, 발굴 유적의 극히 일부가 형식적으로 이전 복원돼 주변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미화되고 있다. 그러나 원래 현지에 보존돼야 했던 대부분의 유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밖에 ‘서울의 심장부’인 서울시청 신청사 예정 부지와 종로의 청진동 개발지구, 그리고 경복궁 옆 옛 종친부(宗親府) 터 일대의 발굴을 통해 조선시대의 중요한 유적을 조사하고 있다. 반경 1km 이내에 있는 이 유적들은 일반 민가가 아닌 조선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형성된 공공시설지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굴된 유적에 대해서는 극히 부분적인 현지 보존 전시라는 미온적 대처 방안이 마련되고 있지만, 이는 이 도심 지역이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현실적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임기응변식 대응에 불과하다. 하루빨리 지하에 매장된 고도의 보존을 위한 항구적 정책이 수립돼야 한다.

서울은 조선왕조 500년 도읍지로서, 서울 성곽 사대문 안은 오랜 세월을 꾸준히 왕도로서의 기능을 계속해온 곳이다. 그만큼 서울의 지상과 지하에는 엄청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경주나 부여, 공주, 익산 같은 고도와 달리 지금껏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시가지 개발이 자행돼왔다. 기껏해야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 성곽이나 5대궁, 종묘 주변의 신축 빌딩에 대한 고도 제한 말고는 지하 유구에 대해 아무런 제재 조치도 없었다.

땅 속의 옛 도시 보존 시급

지금까지 행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과오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더 이상 ‘한성 옛터’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서울을, 최소한 사대문 안만이라도 고도 차원의 도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옛 도시의 보존을 위해 진행해온 외국의 도시 정책 사례를 들어왔다. 인도의 ‘올드델리’와 ‘뉴델리’, ‘로마’와 ‘신로마’(EUR), ‘파리’와 ‘라데팡스’ 등 옛 도시 보존 정책을 통해 보존과 개발의 한계를 현명하게 극복해온 사례 말이다.

우리에게도 자구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어나는 강북 도시 팽창의 한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착수했으나, 강북은 강북대로 여전히 별다른 보존 대책 없이 재개발이 계속돼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지하에 묻힌 문화재가 개발을 위한 하등의 저해 요인이 되지 않았기에 강남처럼 강북의 도심 개발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만시지탄의 감이 절실하지만 지금이라도 ‘고도 서울’이 더는 훼손되지 않게 범국가적 홍보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아울러 서울시와 문화재 관리 당국은 지하의 고도 보존에 더 적극적인 시책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살아 숨쉬는 도시 전체를 현상 그대로 보존만 하자는 말은 아니다. 부분적인 개발은 허용하되, 지역에 따라 선별적 차등화 작업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지도 등 문헌 자료와 지표 조사를 통해 중요 문화재가 매장된 것이 분명한 5대궁 주변의 일정 범위 등 한성 도심지구는 ‘절대보존지구’로 고시해 일체의 지하 굴착 행위를 제한해야 한다. 그 밖에 절대보존지구를 벗어난 주변과 일반 주거지역은 ‘보존지구’로 구획해 발굴로 확인된 지하 유구의 성격에 따라 개발 제한 정도를 명시하는 게 절실하다.

광화문과 숭례문을 새로이 복원하는 사업도 중요하지만 지하에 매장된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4년 가까운 공사 끝에 광화문의 가설 덧집이 제거되고 복원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어서 곧 웅장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문화 외적인 정책적 여건에 따라 준공 시기가 앞당겨지고, 현판의 글씨 내용으로 일각에서 왈가왈부가 이는 듯하지만, 우선 오랜 공기를 거쳐 이뤄진 대역사(大役事)의 마무리는 높이 평가할 일이다.

글•지건길
프랑스 렌대학교대학원 박사.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장과 국립경주박물관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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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르디에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문제에 대한 통창력있는 글이 두편 실렸기에 스크랩한다. 얼마전 부터 무상급식, 무상교육과 같은 복지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부류들은 선별적 복지를 또 어떤 부류들은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것이 우리에게 올바른 문제해결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고 있는 상태에서 아래 글은 많은 도움을 준다. 내용이 길지만 우리나라 학자가 쓴 글이라 어렵지 않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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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8월호  오래된 미래, ‘기본소득’의 꿈 
[Corée 특집] 소득보장제도의 새 패러다임 
 

노동 유무와 무관하게 유아부터 노령자까지 모든 사회 성원에게 무조건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사실 어제오늘 제기된 주장이나 제도가 아니다.

기본소득의 주장은,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의 지도자인 토머스 페인의 <농업의 정의>(1796)에서 발견된다. 그는 국가 기금을 조성해 남녀를 불문하고 21살이 되는 국민에게 15파운드를 지급하며, 나아가 50살이 넘은 모든 국민에게는 매년 10파운드를 지급할 것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상실된 자연법적 권리에 대한 보상이며, 선조에게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모두의 동등한 권리다. 당시 아동 및 청소년, 그리고 여성의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감안할 때, 이는 파격적 주장이었다.

토머스 페인에서 프리드먼까지

토머스 페인의 주장은 1797년 토머스 스펜스의 <아동의 권리>를 거쳐, 19세기에는 샤를 푸리에와 조세프 샤를리에,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에게서 더욱 구체화된다. 마르크스의 ‘필요에 따른 분배’도 이를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서 버트런드 러셀은 노동과 무관한 사회소득이 모두에게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클리퍼드 H. 더글러스는 1924년 사회신용제도를 통해 모든 가족에게 국가 배당금을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틴버겐과 제임스 미드는 기본소득을 적극 주장했고, 제임스 토빈과 밀턴 프리드먼도 기본소득과 유사한 최소보장소득 내지 마이너스 소득세를 제안했다. 토빈은 처음에는 마이너스 소득세와 같은 최소보장소득을 주장했고, 신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를 수용해 구체화했다. 그러나 이후, 토빈은 사회복지국가를 급격히 단순화하며 마침내 절멸시키려는 미미한 최소보장소득과 마이너스 소득세의 구상에 반대해 ‘데모그랜트’(Demogrant)라고 부르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옹호했다.

한때 1930년 이후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더글러스의 영향을 받은 사회신용당이 집권해 ‘국가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소득과 유사한 정책을 실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다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1977년에는 네덜란드의 급진당이 기본소득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어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덴마크,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더불어 1986년 판 파레이스를 포함한 샤를 푸리에 서클의 주도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2004년부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로 개칭됨)가 탄생하면서, 기본소득은 국제적으로 새로운 담론과 정책의 지평을 열었다. 이후 2009년에는 독일 총선에서 약 10%의  지역구 의원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당선되었고, 몽골의 대선에서도 최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한 후보가 당선되었다. 현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한국을 포함해 미국,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 비유럽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미국의 알래스카주에서는 석유 배당금 형태로 기본소득이 실시되며,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에서는 2008년부터 기본소득이 실험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2010년 들어서는 브라질의 산토 안토니오 도 핀할 지방에서 기본소득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브라질은 이미 2004년 전국적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실행 시기는 차후에 결정될 예정이다. 몽골 신정부는 2014년부터 기본소득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

한국에서는 2007년 대선 당시 사회당의 금민 후보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했으나, 본격적인 담론과 운동은 2009년 초 ‘기본소득네트워크’가 출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는 2010년 초에는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해 진보학계와 다양한 사회운동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이끌어냈으며, 7월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 참가해 17번째 가맹 단체로 인준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서울 은평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진보 단일 후보로 출마한 사회당의 금민 후보는 다시 한번 기본소득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기본소득이 무상급식과 더불어 한국에서 언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아직 알 수 없다.

캐나다에서 몽골, 알래스카까지

기본소득은 오래된 미래지만, 앞으로는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브라질에서 그리고 독일과 몽골에서 갑자기 기본소득이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 것처럼, 그리고 한국의 무상급식이 순식간에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면서 대대적인 성공의 전망을 만들어낸 것처럼, 기본소득의 미래는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빠른 속도로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와 진보뿐만 아니라, 케인스주의자나 심지어 자유주의자 중에도 기본 소득 내지 이와 유사한 제도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자본주의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며 지속 가능한 대안경제 체제를 새롭게 기획하고 실현할 수 있다면, 기본소득은 그 사회에서 더 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누구도 현재 자본주의에서 가처분 국내총샌산(GDP)의 60~70%를 차지하는 비노동소득(투기·불로소득)에 대한 독점권을 갖지 못하며, 대신 노동소득 이외의 모든 소득에 대해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안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물론 여기에 앞서 기본소득의 정당성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리는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인류를 지배해온 오래된 이데올로기다. 보수와 가진 자들은 자신은 노동하지 않거나 노동한 이상으로 향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꼴은 못 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왔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투기·불로소득을 향유하며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해왔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강조되는 이데올로기며 현실이기도 하다. 실업급여나 연금 같은 사회복지도 노동할 의지 내지 과거의 노동과 연계되어 있으며, ‘무노동·무임금’도 최근 한국의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담대한, 그리고 정당한 제도

통계로 확인된 것만 해도 한국의 가처분 GDP 중 40% 수준은 불로소득(이자, 배당, 임대료)이다. 그리고 GDP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이자·임대료소득 과 부동산·증권양도차익 등 투기소득을 감안하면 가처분 GDP의 70% 내외는 투기·불로소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소득은 사실상 가처분 GDP의 30% 안팎에 불과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인구의 5%도 안 되는 극소수 자본가와 부자에게 최대한의 투기·불로소득을 보장하는 체제인 셈이다. 곧 ‘무노동·무임금’을 근본 원리로 한다는 현대 자본주의는 ‘무노동의 투기·불로소득을 극대화’하는 체제다. 어쨌든 ‘무노동·무임금’이라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원리에 따를 때조차, 기본소득은 현재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더 정당하다.  

그렇다고 전통적 진보가 주장하는 ‘노동에 따른 소득’을 미래 사회의 근본 원리로 하기에는 문제가 따른다. 가처분 GDP 중 임금노동 소득 및 노동계급의 권리 극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지향하는 전통적 진보의 원칙은, 임금노동자가 전체 인구의 30~40%밖에 되지 않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정치적으로 거의 실현 불가능한 기획이다. 자본가를 제외한 55~65%의 비임금노동자(자영업자, 실업자,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노령인구, 가정주부, 노숙자)가 그런 원칙을 소극적으로라도 지지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21세기 진보는 정규직과 프레카리아트(Precariat·소득이 없거나 불안정한 사람들)(1) 모두가 상생하는 새로운 원칙과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프레카리아트는 비정규직과 가난한 비임금노동자 모두를 포함한 새로운 개념어이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을 통해 더 많은 소득과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럴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과 조상, 그리고 자신의 연합 지성과 후세대 양성을 통해 만들어진 전 사회적인 부와 소득에 대해 정규직이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평등한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더 많은 소득과 더 많은 자유를

이런 새로운 원칙에 따르면, 미래 사회의 가처분소득은 ‘노동소득의 상승 +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의 극대화 + 투기·불로소득의 극소화’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소득의 증가와  추가로 지급받는 기본소득으로 인해 노동자의 총소득은 급증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불안정한 소득으로 고통받는 과반수 인구에게도 어느 체제보다 많은 현금 및 현물 소득을 보장한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소수에게 독점되었던 투기·불로소득은 급격히 또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노동소득과 모두가 향유하는 기본소득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은 정규직 노동자와 프레카리아트의 연대 가능성을 크게 증진시킬 것이다. 

기본소득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최대한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 수준이 경제적으로 최대한 지속 가능한 수준을 밑돌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기본소득이 실현된 직후의 삶은 지금의 고통을 천천히 완화하는 수준에 머물 수 있다. 물론 무상급식처럼 낮은 수준의 부분 기본소득이라도 예상보다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가난한 학생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친환경 무상급식으로 농촌의 소득이 안정되고, 학생들은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충분한 기본소득조차, 충분한 기본소득을 열망하는 능력과 더 많은 평등에 대한 열망을 배가할 것이다.

무상급식은 부분적 기본소득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한 기본소득이 점차적인 기본소득보다 오히려 더 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은 세계사적 정황과 각 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어쨌든 충분한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우리 삶은 지금과는 판이해질 것이다. 양성의 경제적 평등이 앞당겨지고,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병원비나 생활비가 부족해 치료를 못 받는 사람도 없어지고,  장애인은 적어지고 경제적·육체적 고통에서 획기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노인은 손자뿐 아니라 자식과 이웃에게도 맛있는 식사 한번 대접하는 인심을 쓸 수 있다. 대학생은 먹고살기 위해 공부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는 좀더 원하는 노동을 하며, 더욱 짧은 시간만 노동할 것이다. 예체능 인구와 사회운동가들이 폭증할 것이다. 노숙자와 거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들이 싸우는 일도 줄어들며, 자살률도 급감할 것이다. 사회는 활기차고 다채로워지며,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자유로운 연합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 이후의 이런 삶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기본소득은 그만큼 우리의 미래 사회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그 간결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이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글•곽노완 
한국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이며, 2006년 이후 기본소득에 관한 논문을 10편 발표하는 등 한국의 기본소득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각주>
(1)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프레카리(precari)와 ‘노동자 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이다. 시간강사처럼 고학력자인 경우 등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통틀어 프레카리아트라고 한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8월호  기본소득,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Corée 특집] 소득보장제도의 새 패러다임 
 

모두에게 아무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 집안에 어려운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므로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몇 가지 우려스러운 질문을 하게 된다. 이 글은 대표적인 네 가지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질문 1.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노동유인이 사라져 아무도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 국민의 총소득이 1천조원 정도니까, 스웨덴처럼 50%를 세금으로 낸다면 500조원의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이 중에서 정부의 일반예산으로 200조 원을 쓴다면, 300조 원 정도를 기본소득으로 나눠가질 수 있다. 좀더 현실적으로 35%를 세금으로 걷는다면, 1인당 월 25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할 수 있다. 이 정도의 돈을 받는다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 선별해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선별복지 정책을 쓰고 있다. 선별복지는 사람들을 ‘복지의 함정’에 빠뜨리는 경향이 있다. 복지 함정이란 한번 복지 혜택으로 살되면, 계속 복지에 의존해 살아가려는 경향을 말한다. 복지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저생계비 100만원을 보조받던 사람에게 100만원짜리 일자리가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이 일을 안 할 것이다. 일을 하면 월급 100만원을 받는 대신 최저생계비 100만원을 못 받으니까 소득은 100만원 그대로다. 괜히 일하느라 힘만 들게 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보편복지에 속한다. 기본소득에는 이런 복지 함정이 없다. 4인 가족이 기본소득 100만원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아빠에게 100만원짜리 일자리가 생기면 아빠는 당연히 그 일을 할 것이다. 일을 하면 힘들겠지만 소득이 200만원이 되기 때문이다.
 
질문 2.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 부자를 이롭게 할 뿐이며, 사회적 낭비다.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모든 국민에게 인간답게 사는 헌법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는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부자가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만드는 것이다(표 참조).

어떤 나라에 모두 5명이 있고 소득은 0원, 200만원, 400만원 등이다. 사람 1에게 90만원의 소득을 보장하는 선별복지 정책을 실시하려면 세금을 90만원 걷으면 된다. 비례세를 가정할 때 3%의 세율이 된다. 3%의 세금을 내고 복지를 받고 나면 사람들의 소득은 90만원, 194만원, 388만원 등으로 바뀐다. 사람 1 외에 모든 사람의 소득이 줄어든다.

이제 모든 사람에게 90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실시하려면 세금 450만원을 걷어야 하고 세율은 15%가 된다. 세금을 내고 기본소득을 받고 나면 사람들의 소득은 90만원, 260만원, 430만원 등으로 바뀐다. 제일 부자인 사람 5를 생각해보자. 선별복지일 때에는 소득이 1552만원이었는데, 기본소득일 때에는 1450만원이 되었다. 이와 같이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부자에게 유리하지 않고 불리하다. 기본소득 정책을 쓸 때 부자는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된다.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숨은 의도는 부자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다.

이 표는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더 보여준다.

첫째, 노동유인을 비교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 1과 일하는 사람 2의 세후소득 차이를 보자. 선별복지 아래에서는 104만원이었는데, 기본소득 아래에서는 170만원으로 벌어진다. 기본소득이 일을 하는 사람에게 훨씬 유리한 것이다.

둘째로 선별복지 정책은 사람 1만 이득을 보지만, 기본소득은 사람 3까지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인구의 대다수를 이롭게 하는 정책이다. 소득 격차가 클수록, 그리고 누진 세율로 과세할수록 전체 국민 중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의 비율은 더 커진다.
 
질문 3. 기본소득보다 완전고용이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에서 모든 정부가 고용 창출을 목표로 해왔지만 완전고용은 한 번도 달성된 적이 없었다.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완전고용이라는 목표를 포기하고 고용 창출이라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지금까지 완전고용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현대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기술(IT) 혁명이다. IT 혁명으로 산업혁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고용 없는 성장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항구적 추세가 되었다. 노동이 불필요해지니까 노동자를 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으로 고용해 저임금을 주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는 정규직  800만 명과 비정규직 800만 명으로 구성됐는데,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다. 영세자영업자가 400만 명이고, 사실상의 실업자가 100만 명이다. 청년의 체감실업률은 25%나 된다. 청년 4명 중 1명이 백수인 셈이다.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은 일류 대학에 진학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게 되었다.

정부가 나서서 아무리 채용하라고 외쳐도 기업은 더 이상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실제로 다른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태에서 불필요한 고용을 늘릴 여력이 없다. 청년은 ‘88만원 세대’로 전락해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고 있다. 30살에 결혼하면 빨리 결혼한다고 축하를 받게 되었다. 이제 유토피아 사회에서나 완전고용을 꿈꿀 수 있을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미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쓴 마지막 저작들(대표적으로 1995년의 <완전고용 다시 회복?>)에서 현재의 조건에서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본소득은 다음과 같은 여러 경로로 완전고용의 길을 열어준다.

첫째, 기본소득은 노동시간 단축을 가능하게 해준다. 현대자본주의에서 노동시간 단축 없이 완전고용은 불가능하다. 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잔업의 필요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힘들게 잔업하는 대신 여가를 활용하고 싶은 노동자가 생겨날 것이다.

둘째로, 기본소득은 비자본주의적 노동을 증가시켜 노동시장에 공급 압력을 줄인다. 우리 사회에는 돈을 많이 버는 노동보다 보람 있는 노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친환경 농부,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등 비영리단체 활동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종사자, 예술가, 비인기 학문 전공자, 정치가, 지역 운동가, 발명가, 환경운동가, 고아원·양로원 복지가, 언론인, 사회복지 노동자 등 수많은 사람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생계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노동에 종사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임금노동자가 되어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이런 사람들을 비자본주의적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해준다.

셋째로,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일자리를 증가시킨다. 기본소득은 내수시장을 키운다. 서민 지출이 늘기 때문에, 서민이 소비하는 상품과 서비스 시장이 커진다. 내수 서민 부문은 수출 부문이나 사치품 부문에 비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이 존속할 수 있는 여지가 크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증가하게 된다. 노동자가 중소기업에 취업하려는 의사도 커지게 된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더라도 중소기업에서 받는 임금과 기본소득을 합치면 생활이 보장될 뿐 아니라, 중소기업이 실패하더라도 기본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 이와 같이 기본소득은 중소기업의 구인난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질문 4. 기본소득은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경제는 기본소득에 대한 재정 부담을 질 여력이 충분히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세금을 적게 내는 나라에 속한다. 2008년 총조세부담률은 26.6%에 불과하다. 우리나라가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가  되려면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세금을 더 내지 않으면서 복지국가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흔히 세금을 많이 내면 경제성장을 못하게 될까 걱정하는데,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는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기본소득 도입을 위해서는 총조세부담률을 35~40%로 늘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세금을 너무 적게 내고 있어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 부동산세를 토지세로 단일화하고 3% 세율을 매기면 30조원이 마련된다. 증권양도소득세를 신설하고 배당, 이자소득세율을 30%로 인상하면 적어도 60조원이 생긴다. 탄소세 같은 환경세를 매겨 30조원을 마련할 수 있다. 앞으로 환경세는 더 늘려가야 할 것이다. IT 기술을 활용하면 250조원의 지하경제에서 세원을 포착해 30조원을 더 걷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를 인상하지 않고도 1인당 연간 300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경제력에 비춰보면 기본소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정치적 의지다. 기본소득은 실제로 상당히 가까이 와 있다. 몽골·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독일에서 대다수가 찬성하고 있고, 나미비아의 실험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알래스카주에서는 이미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노인의 70%는 기초노령연금을 받고 있다. 이것을 100%로 늘리고 증액하면 된다. 아동수당법은 올해 발의됐다. 증액을 하고 시기를 앞당겨서 법을 통과시키면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청장년에게도 기본소득을 지급하기로 합의하면 된다.

기본소득은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이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복지 수준이 낮고, 경쟁력을 중시하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큰 나라에 적합한 복지정책이다.

글•강남훈 
한국 기본소득네트워크 대표, 전국교수노조 부위원장. 주요 저서로 <정보혁명의 정치경제학>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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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와 관련된 논란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대해 인간의 탓이라는 사람과 역사적으로 일어났었던 자연스런 일이다고 보는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런 입장을 대변하는 책들도 현재 서점에 많이 깔려있다. 하지만 전자도 후자도 모두 전제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기후가 인간에게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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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15  “기후예측 불확실…온난화는 현재 최선의 결론” 

‘이상기후’라는 말이 이젠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자주 들린다. 올해만 해도 ‘추운 봄’에 이어 ‘가을장마’가 화제다. 들쭉날쭉한 기상 현상을 겪다 보니 일반인 사이에선 일관된 경향을 얘기하는 ‘지구온난화’라는 말도 의심을 받곤 한다. 게다가 지난해 말 기후변화정부간위원회(IPCC)의 코펜하겐 총회를 앞두고 터진 이른바 ‘기후게이트’ 파문으로 기후과학의 신뢰도 흔들렸다. 지구 기후 모델을 연구하는 강인식 서울대 교수(기후역학)를 만나 심층인터뷰를 하기로 한 것은 최근 회의론의 공격 대상이 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연구에 관해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던 중 지난 7월에 잠시 귀국한 강 교수를 서울대 연구실에서 세 차례 만나고, 이달 7일 그의 연구실과 협력연구를 하는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대기연구소에서 네번째 만나 얘기를 나눴다.
기후과학의 많은 부분은 미래 기후를 예측하는 데 쓰인다. 강 교수는 “더 정확한 예측을 위해 더 정확한 관측값, 더 세밀한 방정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완벽한 모델이 개발된다 해도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순 없을 것”이라면서도 “지구온난화의 결론은 현재 과학이 내놓은 최선, 최고의 결과이며 의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 강인식 교수는 누구

엘니뇨·몬순 등 기후의 예측과 지구온난화의 메커니즘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지구 기후 모델(SNUGCM)을 개발했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예측 자료들을 아펙기후센터(APCC), 국제기후예측연구소(뉴욕) 등에 제공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일본·중국·오스트레일리아 등 21개국이 참여한 아펙기후센터(부산)의 설립을 주도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연구팀과 함께 고해상도의 차세대 지구 기후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아펙기후센터 과학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 △세계기상기구(WMO) 몬순·기후예측 전문가위원. 
 
강인식 교수에게 듣는 기후역학·지구온난화

“저 구름과 숲도 방정식으로”

강이 흐르고 풀과 나무들이 자라며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 있다. 자연 풍광이 화가에겐 멋진 그림의 모티프가 되겠지만 기후역학자한테는 복잡한 방정식들로 풀어야 할 숙제다. 강 교수나 다른 기후연구자들을 만나면서 든 생각이다. 연구자들은 고전역학의 기본 방정식(지배 방정식)을 출발점으로 삼고, 거기에 대입할 꼬마 방정식(매개변수)들을 개발한다. 구름이 생기고 비가 내릴 때 열과 에너지는 어떻게 뭉치고 흩어지며, 이산화탄소나 메탄 기체들은 대기 순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무수한 방정식들은 컴퓨터 모델의 논리회로 안에서 작동해 ‘기후예측’이라는 결과값을 토해낸다. 예측은 기후역학자의 작품이다.

- 기후역학이란 말이 낯서네요. 과거 관측값의 통계 분석이 기후과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기후과학의 역학이나 물리학의 역학이나 기본은 마찬가지입니다. 쓰는 방정식이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우리가 쓰는 방정식계는 뉴턴역학에 기초한 유체역학이니까요. 운동량보존, 질량보존, 에너지보존법칙이 다 통합니다. 다른 게 있다면 기후역학은 자전을 포함해 지구 현상을 묘사하는 방정식계를 쓴다는 점이고, 또 기후에 영향을 끼치는 지표면의 생태계, 생태계와 대기의 상호작용, 태양열의 복사, 구름의 생성 등을 다룬다는 점이죠. 오랜 관측에서 얻은 경험식도 쓰이죠.”

열흐름 막히는 온실효과
수증기와 이산화탄소 탓
질소·산소는 상관없어요

- 여기에서 지구는 ‘닫힌 계’로 다뤄지는 거고요?

“그렇죠. 태양에서 지구로 에너지가 들어오고, 그 에너지는 지구 안에서 대기와 바다 등의 순환을 일으키고, 나중엔 지구가 뿜어내는 복사열로 빠져나가죠. 들어오는 에너지와 나가는 에너지가 평형을 이룰 때 지구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죠.”

- 지구온난화는 지구에서 빠져나가야 할 에너지가 제대로 나가지 못해 생기는 거네요?

“지구 온도는 주로 대기와 해양에 의해 조절됩니다. 태양 에너지가 지구 적도엔 상당히 많이 들어오는데 그렇다고 온도가 계속 오르진 않아요. 에너지가 극 지역으로 이동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갖가지 순환이 일어나죠. 그러면서 지구 자체의 열은 지구 밖으로 나가는데, 온실효과가 생기면 빠져나가야 할 에너지의 흐름이 막히는 거죠. 온실의 비닐에 해당하는 게 수증기(구름)와 이산화탄소입니다. 지구 밖으로 나가는 긴 파장의 복사열을 흡수해요. 대기엔 질소·산소 같은 기체가 99%를 차지하지만 온도 조절엔 역할을 하지 않아요.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는 적은 양이지만 지구 온도를 조절하는 데 중요하죠.” 
  
 
» 앞선 5년간(2001~2005) 1월의 평균기온에 견줘, 2006년 1월 기온은 아프리카 남부,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러시아 지역 등에서 떨어졌으나 미국 동부에선 올랐다. 지구 차원의 기후변화는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자료 미국항공우주국 위성 관측   
 
나비효과를 집어삼키는 평균예측

날씨예보의 역사는 19세기 중반 이래 오래됐지만 1~2주일 뒤 날씨를 예측하는 데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나비효과’라는 카오스이론으로 설명된다. 미국 기상학자 로렌츠 교수가 제시한 나비효과 이론은 컴퓨터에서 초기조건 값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도 계산이 진행될수록 불확실성은 증폭돼 어느 정도 뒤엔 큰 차이를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도 기후연구자는 어떻게 100년 뒤 기후를 예측하려고 할까?

- 기상학과 기후역학의 기초이론엔 ‘나비효과’가 있죠. 불확실성은 어떻게 다뤄집니까?

“나비효과는 초기조건이 아주 약간 달라도 큰 차이를 만든다는 거죠. 컴퓨터의 반올림 계산이 차이를 증폭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우리 과학은 불확실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을 갖춰왔습니다. 그래서 ‘이 모델은 얼마의 예측성을 지닌다’ 이렇게 말하죠. 약간씩 다른 초기조건을 주고서 모델을 돌립니다. 당연히 다른 결과들이 나오죠. 이런 차이들이 불확실성의 크기입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의 예측이 있는 거죠.”

완벽한 기후예측 못해도
‘평균’ 이용하면 가능해져
‘나비효과’ 잠재울 수 있죠

- 얼마큼 증가하느냐는 불확실하지만 증가 자체는 확실하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우리가 보려는 신호와 불확실성의 크기가 얼마인지 비교해 분석합니다. 이산화탄소가 ‘증가할 때’와 ‘증가하지 않을 때’ 두 가지 조건으로 나누어 시뮬레이션 하면, 1980년대 이후에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도 증가’ 신호가 불확실성보다 더 크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산화탄소가 온난화에 끼치는 영향이 뚜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델들마다 ‘얼마나’ 그런지는 다르지만 ‘온도 증가’의 신호만은 같습니다.”

- ‘불확실하다’면서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모순 같아 보입니다만.

“비유를 하면, 담배 연기의 입자 하나하나가 어떤 궤적을 그리며 퍼지는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누군가 담배를 피우며 머물렀던 방과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머물렀던 방은 연기 입자의 평균 밀도로 구별할 수 있죠. 평균 안에선 개별 사건의 불확실성은 사라집니다.” 
  
 
» 1979년 9월과 2007년 9월 북극 바다얼음의 면적과 농도 비교. 여름 극소기에 북극 바다얼음은 10년마다 평균 9~10%씩 줄어들었다. 자료 미국항공우주국 위성 관측 
 
기후게이트와 과학의 신뢰

지난해 말 IPCC 코펜하겐 총회가 열리기 직전에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 기후연구소에 있던 1천건 넘는 전자우편과 문서 파일이 해킹되면서 지구촌은 이른바 ‘기후게이트’ 파문으로 떠들썩했다. ‘지구온난화가 인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과장됐음이 드러났다’는 회의론의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이어 히말라야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고 있어 2035년이나 그 이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IPCC 보고서가 어느 잡지 기사를 인용한 것으로 드러나 ‘과학의 신뢰’ 논란은 커졌다.

- 기후 연구자로서 기후게이트를 어떻게 보십니까?

“회의론에 관해 먼저 말씀드리면, 우리 과학은 불확실성을 측정하고 평가할 줄 압니다. 과학의 관점에서 불확실성을 다루죠. 그런데 흔히 ‘불확실성이 있으니까 기후과학 전체가 다 불확실하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물론 과학엔 불확실성이 있고 시뮬레이션 모델이 완벽하진 않아요. 그러나 과학이 최선을 다하는 중에 생겨나는 불확실성과 일반적 의미의 불확실성은 다릅니다. IPCC 보고서의 결론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현재 과학의 최선이라고 보면 됩니다.”

‘기후게이트’ 회의론자들
대부분 단편적 주장 그쳐
불확실성만 강조 아쉬워

- 과학에 대한 신뢰는 과학자에 대한 신뢰에서 생기죠. 연구자의 윤리가 쟁점이 되면 과학 자체의 신뢰도 흔들릴 수 있죠.

“그래서 과학자들이 조심해야죠. 데이터 오용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 기후과학계 안의 문제제기는 없었나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의 린전(Lindzen) 교수라고, 저명한 기후역학자가 있어요. 이분은 불확실성을 강조해요. 지금의 지구온난화 주장이 과도한 시뮬레이션의 결과일 수 있고 구름을 다루는 방법론에서 이런저런 과학적 문제가 있다는 거였죠. 예측 값보다 실제 값이 더 적을 수 있다고 말하고요. 온난화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최근 연구들에서 린전 교수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아요. 과학적 주장은 정당하게 검증해야죠.”

- 회의론 주장 중에서 일리 있는 건 없습니까?

“회의론은 대부분 단편적인 주장들이라고 봐요. 그런데 이런 건 있어요. 지구 기후 시스템에는 내적 변동의 긴 주기로 바뀌는, 20~50년 주기의 변동이 있어요. 바다 순환이 대부분 그것을 제어하죠. 1980~2000년 기온이 가파르게 오른 데엔 이런 내부 변동과 지구온난화가 중첩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추정하는 사람도 많죠.”

완벽한 예측모델의 꿈과 한계

과학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재의 과학은 인류 지식이 지금 수준에서 빚은 최선과 최고의 결과이길 기대할 뿐이다. 당연히 IPCC의 기후 시뮬레이션 모델도 계속 발전해나갈 것이다. 강 교수는 현재 널리 쓰이는 기후 모델들은 해상도도 낮고 세밀한 방정식을 구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기후역학계에선 ‘차세대 기후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 현재 모델엔 어떤 한계가 있는지요?

“무엇보다 지구 기후 현상들에 나타나는 과정들을 더 잘 표현해야겠지요. 에어로솔 같은 미세 먼지가 대기순환에 끼치는 효과나 구름 안에서 이뤄지는 여러 화학적 메커니즘이 잘 표현돼야 하겠고요. 또 컴퓨터의 성능 문제가 있어요. 지금 과학이 제안하는 모델은 슈퍼컴퓨터가 다 감당할 수 없어요. 그걸 재현하려면 1천배 더 빠른 슈퍼컴퓨터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현재 IPCC가 다루는 기후 모델도 대체로 200, 300㎞ 거리 공간을 단위로 삼아 계산합니다. 앞으로 10㎞나 몇㎞ 수준까지 줄여 해상도를 높여야 합니다.”

- 지구촌의 공동연구 방안도 있잖을까요?

“과학계에선 국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지구온난화가 중요한 문제인데도 국제 공동연구 기관이 없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유엔과 모든 나라들이 투자해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를 대량으로 투입해야 합니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4398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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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가 좋은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기사들이다. 국내 언론사 기사에서는 볼 수 없는 세계 각 지역의 심층적인 분석 기사들. 살짝 어렵기는 하지만, 세계 국가, 도시들의 심층적인 이해를 도와주는 기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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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8월호  총질 난무하는 카라카스, 차베스는 과연 가해자인가?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는 ‘볼리바리안’ 베네수엘라에 적대감을 표명해 왔다. 미묘한 뉘앙스가 담긴 기사보다는 직설적 방식을 선호해왔다. 그러나 이번 기사는 좀 다르다. “카라카스는 피로 물든 도시다. 건물에서 피가 넘쳐 강이 된다. 산에서도 집에서도 피의 강이 흘러내린다.”(1)

“카라카스는 피로 물든 도시”

이 기사를 접한 카라카스 주민은 손으로 이마를 치며 폭소를 터뜨린다. 물론 정도 차이는 있지만 ‘문제가 심각하다’(국회 내무위원회 위원장 툴리오 지메네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저 다리 아래서 제 아내가 2년 사이 두 번이나 공격받았습니다.”(베네수엘라에 파견돼온 ‘토지 없는 농민 노동자 운동’(MST) 소속 브라질인) “바리오스(Barrios·빈민가)에 사는 사람에게 폭력은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광범위한 도시화가 진행 중인 페타레시) “방탄조끼를 입은 경찰도 총에 맞아 숨지는 마당에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겠어요? 디오스 미오!(오, 신이시여)”(카라카스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지역 오쿠마레 델 투이의 한 여성 노동자) “우리 지역 가톨릭 신자는 대부분 주변에 살해된 사람이 한 명 이상 있습니다. 매주 미사를 드릴 때마다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이번 주에도 누군지 잘 모르지만 죽은 사람이 또 있다고 들었습니다.”(페타레의 디디에르 에이라우드 신부)

2008년 인구 10만 명당 살해된 사람이 48명을 헤아리는 베네수엘라가 위험한 나라 명단에서 선두를 달리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가령 2009년 1월에서 9월까지 인구 315만 명인 카라카스에서만 살해된 사람이 1976명을 헤아린다. 10만 명 기준으로 127명이 살해된 셈이다.(2)

반정부 성향의 사람이 보기에 이 사태의 책임은 모두 차베스에게 있다. 언론도 책임 전가에 앞장서고 있다. “우고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 덕분에 베네수엘라의 수도는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도시가 되었다.”(3) 미구엘 앙헬 페레스 고등학술원(IDEA) 부원장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의 치안 불안이 ‘차베스주의’의 작품이라고 믿게 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치안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잊은 모양이다. 당시에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차베스가 집권하기 2년 전이던 1996년 12월, 한 전문 잡지에 실린 기사를 보자. “매주 평균 80명에 가까운 사람이 총에 맞아 숨지고, 대중교통에서 폭력이 일상화되고, 엄청난 속도로 가난이 확산되고, 15년이 넘게 경제 위기- 연간 인플레이션이 1천%를 넘는다- 가 나라 전체를 갉아먹는 상황에서 카라카스는 세계에서 위험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아니, 가장 위험한 도시가 되었다.”(4) 그러나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정치 투쟁에서 망각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는 없다. 페레스가 지적한다. “올해 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최근 치안 불안을 나타내는 지표가 상승하고 있다. 언론은 이 사실을 끝도 없이 부풀린다. 치안 문제는 항상 반대파가 즐겨 찾는 메뉴다.”(5) 매주 월요일 아침 벨로 몬테 시체 공시소에 가보면, 마이크와 카메라로 무장한 기자들이 희생자 가족에게 몰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터뷰 상대로는 울먹이는 노파가 안성맞춤이다. “세뇨라!(부인)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비공식’ 소식통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멋대로 부풀려진다. 가령 일간지 <엘 우니베르살> 지난 6월 3일자는 다음과 같은 거짓 기사를 내보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살인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70명을 넘어섰다.” 베네수엘라인은 이런 기사를 읽으며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알타미라, 팔로 그란데, 라 카스텔라나 같은 부유한 지역에 사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태의 책임은 정부에도 있다. 정부가 과학사법범죄수사단(CICPC) 기자실을 폐쇄한 뒤로 전국 차원에서 공식 기준에 의해 수집된 정보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살인발생률이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주장해도 반박할 근거가 없다. 결과에 대해서만 떠들 뿐 아무도 현 상황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차베스 이전엔 훨씬 심했다

20세기 초, 베네수엘라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안데스와 야노스(남미의 광활한 대초원)의 가난한 농민들이 마라카이, 발렌시아, 마라카이보, 카라카스 같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일자리가 있어 일하면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석유의 기적’ 덕분이었다. 카라카스를 둘러싼 언덕과 산은 이주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자재를 긁어모아 통로나 골목을 막거나 가파른 계단 밑에 집을 지었다. 물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카라카스 변두리에 가난의 긴 띠가 형성된 것이다. 지금의 치안 불안은 바로 이 사회적으로 배제된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그때의 치안 문제가 빈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범죄에 국한되었다고 회고한다. “단지 돈이 없어서, 굶어 죽지 않으려고 혹은 자신이 사용하려고 구두 한 켤레, 손목시계, 금목걸이 따위를 훔치는 식이었다. 지금 우리가 겪는 폭력 문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5월 25일 페타레에서 일어난 전형적인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한 젊은이가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아 숨졌다. 그는 말다툼을 벌이던 친구를 도와주려다 변을 당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복잡할 것도 없다. 불량배 간 충돌은 대부분 처음엔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한다. 한쪽이 따귀를 올려붙이면 다른 쪽에서 욕설을 내뱉고, 그러다 금세 전쟁이 되는 것이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누군가 쓰러진다. 쓰러진 사람은 엘 사포다. 범인은 엘 푸필로다. 엘 사포의 친구들이 엘 푸필로를 찾아다닌다. 엘 푸필로의 동생이 붙잡힌다. “형이 어디 있는지 사실대로 불어!” 동생이 잘 모르겠다고 우물쭈물 대답한다. 총 한 방으로 동생은 처단된다. 무지에 대한 대가 혹은 형을 비호한 죄다. 얼결에 근처에서 놀던 네 살배기 꼬마 가비클리까지 총에 맞아 숨진다.

빈민가에서 살해당하는 사람은 주로 누구일까? 얼굴이 햇볕에 그을린 15~25살 가난한 젊은이들이다. 길에서 총격전이 벌어질 때 우연히 지나가다 재수없이 총에 맞는 사람도 있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반항하는 것은 저승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휴대전화 하나 때문에 총에 맞아 숨진 사람도 있다.

10년 만에 빈곤율이 60%에서 23%로 떨어지고 극빈율이 25%에서 5%까지 낮아진 나라에서 범죄율이 급증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정부는 그동안 폭력의 원인이 오직 ‘빈곤’이라는 식의 단순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부는 보건·교육·식량과 관련된 사회 프로그램을 급속히 추진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는지 모르지만, 이 분야에서의 진보가 자연스럽게 폭력을 해소할 것이라고 기대한 나머지 치안을 소홀히 했다.

그렇다면 경찰은 그 사이 뭘 하고 있었는가. 다른 중남미 국가에서처럼 이곳도 경찰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다. 소라야 엘 샤코르 경찰이사회(Cogepol) 사무총장은 “베네수엘라 경찰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135개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오래전부터 지방분권이 발달한 연방국가 베네수엘라에는 각각의 주와 시가 별도의 경찰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 전국적 차원의 통일된 규범이 없다 보니 군 출신이 경찰관 교육을 담당하는 경우도 많다. 경찰관은 전문적 교육보다는 군사훈련을 받는 셈이다.

    
▲ <에네로 23번지 거리>, 2005-조나스 벤디크센
 
빈곤율 급감, 범죄는 되레 급증

카라카스에만 5개 시 경찰과 메트로폴리탄 경찰이 있지만 공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정치적 이해관계로 충돌할 때도 있다. 가령 반정부파 시장의 손아귀에 넘어간 메트로폴리탄 경찰과 차카오시 경찰, 바루타시 경찰이 2002년 4월 반차베스 쿠데타에 협조했다.

친차베스 성향의 안소아테기 주지사는 지난 5월 25일 일간지 <울티마스 노티시아스>의 한 면을 통째로 빌려 안소아테기 주에서 추방될 공무원 명단을 세 번째로 공개했다. 이 중에는 경찰관 25명이 포함되었는데 죄목은 직무유기(15명), 성폭력(2명), 절도(5명), 살인(1명) 등이었다. 내무부 장관 타렉 엘 아사이미는 최근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20%가 경찰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엘 샤코르 사무총장은 “경찰이 사회에서 분리되어 관리·감독을 받지 않으면 폭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현재 추진 중인 근본적 개혁만이 치안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지적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차베스 대통령은 서둘러 대책을 마련했다. 5월 13일 볼리바르국립경찰(PNB) 창설을 목적으로 한 국립치안실험대학(UNES) 경찰양성센터(Cefopol)가 설립됐다. 이곳에서는 새로운 접근법과 방법론, 철학이 실험되고 있다. 기술적 훈련뿐 아니라 경찰과 시민의 관계에 필수인 인권의식 함양에도 주력한다. 메트로폴리탄 경찰에서 선발된 ‘청렴한’ 경찰관이 이미 교육을 이수하고 카티아 지역 빈민가에서 활동 중이다. 아직 판단하긴 이르지만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현재 1천 명이 추가로 교육 이수를 앞두고 있으며, 새로 창설되는 경찰은 고졸 이상의 지원자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3년 동안 3만1천 명을 모집할 예정이다.

오쿠마레 델 투이 지역위원회 소속 소니아 만리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아 입을 연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마약 때문에 살인을 합니다.” 옆에 앉아 있던 안드레아스 베탄쿠르가 분노에 찬 목소리를 억누르며 거든다. “청소년이 자기 몸집만 한 무기를 어디서 구하는지 아세요? 마피아 조직이 뒤를 봐주기 때문이죠!”

경찰은 해법이 아닌 원인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2007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 거주하는 콜롬비아인은 42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믿거나 말거나 최근 치안 관리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콜롬비아를 떠나왔다. 이들은 대부분 정직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베네수엘라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다.(6) 따라서 외국인 혐오 문제와는 다른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 카라카스의 폭력 문제는 성격이나 정도에서 예전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콜롬비아의 마약 거래 조직은 베네수엘라 경찰과 국가수비대를 매수해 카라카스와 주변 빈민가에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미국과 아프리카로 마약을 운반하기 위한 경유지 구실을 한다.(7) 지역 마피아 보스(Capo)를 중심으로 대규모 마약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젊은이에게 선심 쓰듯 싼 가격에 코카인을 제공한다. 국회의원 텔레스는 “마약 소비가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마약에 손대는 청소년 수가 크게 늘었다”고 지적한다.

청소년은 한번 마약에 빠지면 악순환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중독자는 마약 살 돈을 마련하려고 강도와 절도, 폭행뿐만 아니라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결국 이들은 마약 거래원으로 전락해 판매, 운송 등을 담당하게 된다. 때로는 자금을 제때 회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다. 이들이 속한 조직은 거래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잦다. 우리가 인터뷰한 사람 중 한 명은 상황을 이렇게 분석한다. “외부에서 조직망이 침투하면서 폭력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영역다툼’까지 벌어지면서 끊임없이 희생자가 생긴다. 언론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초국적 범죄 집단은 새로운 정세 속에서 개방과 그 결과로 드러난 허점을 이용해 브라질(‘파벨라’로 불리는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가)뿐 아니라 멕시코를 포함한 중미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상황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국과 콜롬비아가 얼굴과 이름조차 공개되지 않은 게릴라 출신의 의심스러운 증언을 토대로 “콜롬비아의 ‘나르코 게릴라’ 두목들이 베네수엘라에 은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베네수엘라를 비난할 때마다 반정부 세력과 언론은 기쁜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8) 반면 콜롬비아 비밀경찰, 보안행정국(DAS) 전산 책임자던 라파엘 가르시아가 얼굴까지 공개하면서 증언한 내용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현재 감옥에 수감 중인 그는 DAS와 극우파 군사조직(마약 거래의 주범) 간의 밀월관계를 폭로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2004년 DAS 책임자 호르헤 노구에라는 무장조직 리더들과 베네수엘라 반정부 세력 지도자들을 만나 베네수엘라 국내 치안을 교란시키고 차베스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콜롬비아 마피아, 마약·무기 유입

베네수엘라 국경 부근 타치라 지역의 아푸레와 줄리아를 장악한 ‘파라코’(무장조직)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범죄예방정보국(Disip) 국장을 역임한 엘리에제르 오타이자는 2008년 “그들 중 2만 명 정도가 국내로 침투해 납치, 청부 살인, 마약 거래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9)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내에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베네수엘라 언론이 침묵하는 사이 콜롬비아 일간지 <엘 에스펙타도르>는 2009년 1월 31일 “조직 ‘아귈라스 네그라스’(10), 베네수엘라로 근거지를 옮기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를 쓴 엔리크 비바스 기자는 타치라 지역에 들어가 이 조직들이 “불법 조직을 구축하고 주민의 생활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심지어 의료보험제도까지 운영하게 된 과정”을 추적했다. 물론 베네수엘라 통합사회당(PSUV) 당원은 이런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지난 2월과 3월 당원 상당수가 암살을 당했다.

파라코는 줄리아 지역 경찰과 반정부 성향의 주정부 비호 아래 폭력을 사용하거나 자금을 대출해주는 방식으로 마라카이보의 몇몇 지역과 라스 플라이타스의 상업지역을 장악했다. 한 증언에 따르면, “줄리아 정부가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농민 모임을 조직한다. 상당수 콜롬비아인이 이곳으로 건너와 본국에 돌아가지 않고 남는다”.

그들은 차베스의 목숨을 노린다

    
▲ <카라카스>, 2010-모리스 르무안
 
베네수엘라 바리나스주의 한 주민이 말한다. “콜롬비아인이 이렇게 많이 몰려온 건 처음이다. 그들은 집을 사들여 세를 놓는다. 문제가 있을 땐 돈을 꿔주기도 한다. 브라질의 ‘나크로’(마약 범죄조직)가 쓰는 수법이다. 그들 때문에 폭력 범죄가 급증해서 지금은 거의 카라카스 수준을 넘보고 있다.” 결국 같은 말의 반복이다. 베네수엘라인은 이 사태에 아무 책임이 없는가? 일반 범죄자와 무장조직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그 기준이 출신 국가가 아니라는 건 자명하다. “예전에는 콜롬비아인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주로 카라카스로 갔다. 그때는 지금처럼 청부살인이나 유혈 충돌, 납치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07년 4월 23일, 코헤데스주 경찰은 경영인 니콜라 알베르토 시드 수토를 납치한 죄로 전 콜롬비아연합자위군(AUC) 지도자 게르손 알바레스를 체포했다. AUC는 공식적으로 이미 해체된 조직이지만 여전히 조직 ‘아귈라스 네그라스’에 자금을 대고 있다. 2008년 3월에는 줄리아 지역에서 나르코 무장조직 지도자 에르마고라스 곤살레스가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베네수엘라 범죄예방정보국과 국가수비대 소속을 증명하는 서류를 지니고 있었다. 2009년 11월 19일에는 마라카이보에서 ‘라 페를라’(‘진주’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마갈리 모레노가 붙잡혔다. AUC에서 활동한 모레노는 콜롬비아 정보국 DAS와 군대, 정계 고위층과 끈이 닿아 있었다.

경고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차베스주의’의 아성인 에네로 23지구의 시몬 볼리바르 연합 소속 구아달루프 로드리게스는 미간을 찌푸린다. “치안이 급격하게 불안해지는 순간이 있다. 정세를 불안하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해온 페레스 고등학술원 부원장은 “카라카스의 현 상황은 1980년대 콜롬비아의 메데인(한때 마약 도시로 악명을 떨쳤다 - 역자)과 비슷하다. 불법적 이해관계를 가진 무리가 치안을 악화시켜 이중 국가 상황을 만들려 한다.”

베네수엘라의 한 외교관은 “제5열(第五列)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지나친 추측일까? 외부 개입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라고 묻는다. 그는 이게 얼마나 미묘한 문제인지 안다. 이런 식의 추측은 곧바로 차베스에 대한 비난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러단체로 규정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의 유착 관계가 폭로되자 차베스가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역으로 ‘외부 음모론’을 제기한다는 식의 비난 말이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이들에게 복수하고 치안 악화의 책임을 회피하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다.

2004년 카라카스 근교 닥타리 농원(Finca)에서 국내 치안 불안을 조장하고 차베스를 암살할 준비를 하던 콜롬비아 무장조직원 116명이 체포됐다. 국민투표를 며칠 앞둔 2007년 12월 2일에는 라 베가 지역에서 다수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11)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라 베가, 로스 테크, 페타레 등의 서민 지구에서 콜롬비아인이 주택을 사들이고 식당과 바를 개업한다고 한다. 그곳에서 불법 마약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도박장, 경마, 성매매, 택시 운수회사와 협동조합 등을 장악하고 있다. 또한 월 7% 이율로 담보 없이 돈을 대출해주고, 안전을 담보(물론 강요된 것이다)로 돈을 갈취한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려면 국경 지방인 아푸레와 타치라의 상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무장조직은 이곳에서 폭력과 살인, 납치 등을 일삼으며 혼란을 조장해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우리와 함께하면 마약, 범죄, 매춘이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뿌리고 다닌다. 공포심을 조장한 당사자가 ‘구원자’로 나서는 식이다.

혼란할수록 반차베스 세력 유리

한 고위 관리는 익명을 요구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정부 관리는 사태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무장조직’의 위협보다 범죄집단에 대해서만 말하려 든다.”

그의 경고는 과장됐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베네수엘라 ‘전복 기도’에 맞선 경험만으로 현재의 복잡한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특별한 정치적 지향점이 없고, 정세 불안 음모와 무관한 폭력집단이 출현한 것일까?

현재로서는 에네로 23지구나 구아레나, 구아티레 등 수십 년간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어 자치적 통제가 되는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회활동가들은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다. “지역 위원회는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안을 찾기엔 역부족이다.” 바리나스주 농민과 함께 활동하는 한 브라질인의 지적이다. 아니발 에스페호는 ‘로호스-로히토스’(붉은 너무도 붉은) 지역들을 예로 들며 “주민들도 상황은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유의 문제를 해결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2002년 4월 13일, 반차베스 쿠데타가 발발하고 이틀 후 서민 지역에서 거리로 쏟아져나온 대규모 군중이 반군세력의 철수와 차베스의 복권을 외쳤다. 페레스 학술원 부원장인 루이스 브리토 가르시아는 “만약 바리오스(빈민가)를 중심으로 조직된 무장조직이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4월 13일과 같은 저항은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그보다 시급한 문제를 지적한다. “범죄집단이 조장하는 혼란은 우파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언론도 과장된 보도를 통해 혼란을 부추긴다. 사람이 죽어 나갈수록 반차베스 세력이 더 많은 표를 얻게 될 것이다.”

*차베스는 1999년 대통령 취임 뒤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명을 ‘베네수엘라 공화국’에서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공화국’으로 바꿨다. 볼리바리안은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의 독립혁명가인 ‘볼리바르’의 형용사다.-편집자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Caracas, Una guerra sin nombre’, <El Pais semanal>, 2010년 4월 18일자.
(2) ‘Situation de los Derechos Humanos en Venezuela’, <Informe Anual>, 2009년 9~10월. Programa venezuolano de Educacion-Acction en Derechos humanos(Provea), 카라카스, 2009년 12월.
(3) ‘공포의 도시 카라카스’, <L’Express>, 파리, 2010년 5월 26일자.
(4) <Raids>, n°127, 파리, 1996년 12월.
(5) 오는 9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6) 콜롬비아인 중 52만 명이 베네수엘라 국적을 취득했으며, 난민 자격으로 머무는 사람은 20만 명에 달한다. 100만 명 정도는 ‘장기 체류’ 자격을 취득했다. 나머지는 ‘불법체류’ 신분이고 그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7)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이 사실 때문에 베네수엘라를 ‘마약 국가’로 볼 수 없다. 국경 통제에 실패해 600억 달러(최종 가격 기준)에 달하는 국내 불법 마약 시장을 갖게 된 미국이야말로 ‘불량 국가’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8) 모리스 르무안, ‘콜롬비아, 인터폴, 사이버게릴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7월.
(9) <Ultimas Noticias>, 카라카스, 2008년 3월 6일.
(10) ‘검은 독수리’라는 뜻. 논란이 많던 ‘정의와 평화법’에 따라 2005년 해체된 후 다시 조직을 결성했다.
(11) <Vea>, 카라카스, 2008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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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에 연재되는 새 단체장에게 듣느다 코너에 실린 글이다. 지리적인 내용이 좀 있어 스크랩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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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8  “‘베드타운’ 벗어나 기회의 땅으로” 

“교통·교육 중심 자족도시 만들것”
양기대 경기 광명시장은 7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시장이 되고 사고를 한 번 쳤다”고 말했다. ‘사고’는, 국토해양부가 광명·시흥 일대에 추진중인 보금자리주택 개발에 대해 명품 자족도시가 안 되면 좌시하지만은 않겠다고 한 것을 말한다.

총면적 1736만㎡, 수용 인구 27만5500명, 보금자리주택 규모로만 보면 분당 규모의 새도시가 광명에 하나 생기는 것이다. 보금자리가 들어서면 광명시 인구는 50만명이 되면서 전국 5위인 인구 밀도가 3위로 올라선다. 양 시장은 “홍수는 물론 교통대책과 환경, 자족 기능이 전혀 준비 안 된 채 사업이 강행되는데 이런 문제점을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시민들한테 죄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인구밀도를 낮추고 자족기능 확충을 요구했다.

양 시장은 “처음에는 국토부의 반응이 싸늘했지만 현재는 광명시의 문제 제기를 수긍하면서 적극 협조하려 하고 있다”며 “그러나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으면 자치단체 역량을 다해 제동을 걸 것”이라고 했다.

양 시장은 광명을 일러 ‘기회의 땅’이라고 했다. 통일시 시발역이 될 케이티엑스 광명역이 있는데다, 제2·3경인고속도로에 이어 강남~광명, 수원~광명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사통팔달의 도시’, ‘수도권 서남부 요지’가 될 거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주민 70∼80%가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광명시는 ‘베드타운’이 됐고, 학부모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울 목동으로 보내는 게 광명의 현실”이라고 양 시장은 말했다.

베드타운을 어떻게 기회의 땅으로 살려낼까? 양 시장은 ‘교통과 교육 문제가 해결된 명품 자족도시’를 꼽았다. 지지부진한 광명 경전철과는 별도로, 구로 지하철 차량기지를 끌어와 구로~하안동으로 이어지는 전철을 연장하고 보금자리내 경전철 건설을 통해 광명을 순환하는 대중교통시스템을 갖출 방침이다. 양 시장은 광명에서 초·중·고부터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게 일관성 있는 교육체계를 마련하고, 무상급식과 혁신학교지구 지정, 대학 유치 등도 해결하겠다고 했다.

양 시장은 유쾌하고 화통하다. <동아일보> 재직 때 ‘특종 기자’로 이름을 떨친 그는 “시장이 되고 나서 보니 시장직이 매일 결정하고 고민하는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양 시장은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시장을 한다”며 “돈 안먹고 소신껏 일해서 4년 뒤 시민들에게 평가받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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