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호 르디에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문제에 대한 통창력있는 글이 두편 실렸기에 스크랩한다. 얼마전 부터 무상급식, 무상교육과 같은 복지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부류들은 선별적 복지를 또 어떤 부류들은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것이 우리에게 올바른 문제해결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고 있는 상태에서 아래 글은 많은 도움을 준다. 내용이 길지만 우리나라 학자가 쓴 글이라 어렵지 않게 읽힌다.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8월호  오래된 미래, ‘기본소득’의 꿈 
[Corée 특집] 소득보장제도의 새 패러다임 
 

노동 유무와 무관하게 유아부터 노령자까지 모든 사회 성원에게 무조건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사실 어제오늘 제기된 주장이나 제도가 아니다.

기본소득의 주장은,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의 지도자인 토머스 페인의 <농업의 정의>(1796)에서 발견된다. 그는 국가 기금을 조성해 남녀를 불문하고 21살이 되는 국민에게 15파운드를 지급하며, 나아가 50살이 넘은 모든 국민에게는 매년 10파운드를 지급할 것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상실된 자연법적 권리에 대한 보상이며, 선조에게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모두의 동등한 권리다. 당시 아동 및 청소년, 그리고 여성의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감안할 때, 이는 파격적 주장이었다.

토머스 페인에서 프리드먼까지

토머스 페인의 주장은 1797년 토머스 스펜스의 <아동의 권리>를 거쳐, 19세기에는 샤를 푸리에와 조세프 샤를리에,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에게서 더욱 구체화된다. 마르크스의 ‘필요에 따른 분배’도 이를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서 버트런드 러셀은 노동과 무관한 사회소득이 모두에게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클리퍼드 H. 더글러스는 1924년 사회신용제도를 통해 모든 가족에게 국가 배당금을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틴버겐과 제임스 미드는 기본소득을 적극 주장했고, 제임스 토빈과 밀턴 프리드먼도 기본소득과 유사한 최소보장소득 내지 마이너스 소득세를 제안했다. 토빈은 처음에는 마이너스 소득세와 같은 최소보장소득을 주장했고, 신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를 수용해 구체화했다. 그러나 이후, 토빈은 사회복지국가를 급격히 단순화하며 마침내 절멸시키려는 미미한 최소보장소득과 마이너스 소득세의 구상에 반대해 ‘데모그랜트’(Demogrant)라고 부르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옹호했다.

한때 1930년 이후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더글러스의 영향을 받은 사회신용당이 집권해 ‘국가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소득과 유사한 정책을 실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다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1977년에는 네덜란드의 급진당이 기본소득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어 사회적 반향을 얻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덴마크,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더불어 1986년 판 파레이스를 포함한 샤를 푸리에 서클의 주도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2004년부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로 개칭됨)가 탄생하면서, 기본소득은 국제적으로 새로운 담론과 정책의 지평을 열었다. 이후 2009년에는 독일 총선에서 약 10%의  지역구 의원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당선되었고, 몽골의 대선에서도 최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한 후보가 당선되었다. 현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한국을 포함해 미국,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 비유럽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미국의 알래스카주에서는 석유 배당금 형태로 기본소득이 실시되며,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에서는 2008년부터 기본소득이 실험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2010년 들어서는 브라질의 산토 안토니오 도 핀할 지방에서 기본소득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브라질은 이미 2004년 전국적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실행 시기는 차후에 결정될 예정이다. 몽골 신정부는 2014년부터 기본소득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

한국에서는 2007년 대선 당시 사회당의 금민 후보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했으나, 본격적인 담론과 운동은 2009년 초 ‘기본소득네트워크’가 출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는 2010년 초에는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해 진보학계와 다양한 사회운동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이끌어냈으며, 7월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 참가해 17번째 가맹 단체로 인준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서울 은평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진보 단일 후보로 출마한 사회당의 금민 후보는 다시 한번 기본소득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기본소득이 무상급식과 더불어 한국에서 언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아직 알 수 없다.

캐나다에서 몽골, 알래스카까지

기본소득은 오래된 미래지만, 앞으로는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브라질에서 그리고 독일과 몽골에서 갑자기 기본소득이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 것처럼, 그리고 한국의 무상급식이 순식간에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면서 대대적인 성공의 전망을 만들어낸 것처럼, 기본소득의 미래는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빠른 속도로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와 진보뿐만 아니라, 케인스주의자나 심지어 자유주의자 중에도 기본 소득 내지 이와 유사한 제도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자본주의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며 지속 가능한 대안경제 체제를 새롭게 기획하고 실현할 수 있다면, 기본소득은 그 사회에서 더 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누구도 현재 자본주의에서 가처분 국내총샌산(GDP)의 60~70%를 차지하는 비노동소득(투기·불로소득)에 대한 독점권을 갖지 못하며, 대신 노동소득 이외의 모든 소득에 대해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안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물론 여기에 앞서 기본소득의 정당성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원리는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인류를 지배해온 오래된 이데올로기다. 보수와 가진 자들은 자신은 노동하지 않거나 노동한 이상으로 향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꼴은 못 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왔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투기·불로소득을 향유하며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해왔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강조되는 이데올로기며 현실이기도 하다. 실업급여나 연금 같은 사회복지도 노동할 의지 내지 과거의 노동과 연계되어 있으며, ‘무노동·무임금’도 최근 한국의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담대한, 그리고 정당한 제도

통계로 확인된 것만 해도 한국의 가처분 GDP 중 40% 수준은 불로소득(이자, 배당, 임대료)이다. 그리고 GDP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이자·임대료소득 과 부동산·증권양도차익 등 투기소득을 감안하면 가처분 GDP의 70% 내외는 투기·불로소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소득은 사실상 가처분 GDP의 30% 안팎에 불과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인구의 5%도 안 되는 극소수 자본가와 부자에게 최대한의 투기·불로소득을 보장하는 체제인 셈이다. 곧 ‘무노동·무임금’을 근본 원리로 한다는 현대 자본주의는 ‘무노동의 투기·불로소득을 극대화’하는 체제다. 어쨌든 ‘무노동·무임금’이라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원리에 따를 때조차, 기본소득은 현재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더 정당하다.  

그렇다고 전통적 진보가 주장하는 ‘노동에 따른 소득’을 미래 사회의 근본 원리로 하기에는 문제가 따른다. 가처분 GDP 중 임금노동 소득 및 노동계급의 권리 극대화를 최우선 과제로 지향하는 전통적 진보의 원칙은, 임금노동자가 전체 인구의 30~40%밖에 되지 않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정치적으로 거의 실현 불가능한 기획이다. 자본가를 제외한 55~65%의 비임금노동자(자영업자, 실업자,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노령인구, 가정주부, 노숙자)가 그런 원칙을 소극적으로라도 지지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21세기 진보는 정규직과 프레카리아트(Precariat·소득이 없거나 불안정한 사람들)(1) 모두가 상생하는 새로운 원칙과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프레카리아트는 비정규직과 가난한 비임금노동자 모두를 포함한 새로운 개념어이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을 통해 더 많은 소득과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럴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과 조상, 그리고 자신의 연합 지성과 후세대 양성을 통해 만들어진 전 사회적인 부와 소득에 대해 정규직이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평등한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더 많은 소득과 더 많은 자유를

이런 새로운 원칙에 따르면, 미래 사회의 가처분소득은 ‘노동소득의 상승 +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의 극대화 + 투기·불로소득의 극소화’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소득의 증가와  추가로 지급받는 기본소득으로 인해 노동자의 총소득은 급증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불안정한 소득으로 고통받는 과반수 인구에게도 어느 체제보다 많은 현금 및 현물 소득을 보장한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소수에게 독점되었던 투기·불로소득은 급격히 또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노동소득과 모두가 향유하는 기본소득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은 정규직 노동자와 프레카리아트의 연대 가능성을 크게 증진시킬 것이다. 

기본소득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최대한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 수준이 경제적으로 최대한 지속 가능한 수준을 밑돌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기본소득이 실현된 직후의 삶은 지금의 고통을 천천히 완화하는 수준에 머물 수 있다. 물론 무상급식처럼 낮은 수준의 부분 기본소득이라도 예상보다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가난한 학생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친환경 무상급식으로 농촌의 소득이 안정되고, 학생들은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충분한 기본소득조차, 충분한 기본소득을 열망하는 능력과 더 많은 평등에 대한 열망을 배가할 것이다.

무상급식은 부분적 기본소득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한 기본소득이 점차적인 기본소득보다 오히려 더 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은 세계사적 정황과 각 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어쨌든 충분한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우리 삶은 지금과는 판이해질 것이다. 양성의 경제적 평등이 앞당겨지고,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병원비나 생활비가 부족해 치료를 못 받는 사람도 없어지고,  장애인은 적어지고 경제적·육체적 고통에서 획기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노인은 손자뿐 아니라 자식과 이웃에게도 맛있는 식사 한번 대접하는 인심을 쓸 수 있다. 대학생은 먹고살기 위해 공부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는 좀더 원하는 노동을 하며, 더욱 짧은 시간만 노동할 것이다. 예체능 인구와 사회운동가들이 폭증할 것이다. 노숙자와 거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들이 싸우는 일도 줄어들며, 자살률도 급감할 것이다. 사회는 활기차고 다채로워지며,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자유로운 연합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 이후의 이런 삶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기본소득은 그만큼 우리의 미래 사회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그 간결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이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글•곽노완 
한국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이며, 2006년 이후 기본소득에 관한 논문을 10편 발표하는 등 한국의 기본소득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각주>
(1)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프레카리(precari)와 ‘노동자 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이다. 시간강사처럼 고학력자인 경우 등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통틀어 프레카리아트라고 한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8월호  기본소득,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Corée 특집] 소득보장제도의 새 패러다임 
 

모두에게 아무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 집안에 어려운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므로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몇 가지 우려스러운 질문을 하게 된다. 이 글은 대표적인 네 가지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질문 1.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노동유인이 사라져 아무도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 국민의 총소득이 1천조원 정도니까, 스웨덴처럼 50%를 세금으로 낸다면 500조원의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이 중에서 정부의 일반예산으로 200조 원을 쓴다면, 300조 원 정도를 기본소득으로 나눠가질 수 있다. 좀더 현실적으로 35%를 세금으로 걷는다면, 1인당 월 25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할 수 있다. 이 정도의 돈을 받는다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 선별해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선별복지 정책을 쓰고 있다. 선별복지는 사람들을 ‘복지의 함정’에 빠뜨리는 경향이 있다. 복지 함정이란 한번 복지 혜택으로 살되면, 계속 복지에 의존해 살아가려는 경향을 말한다. 복지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저생계비 100만원을 보조받던 사람에게 100만원짜리 일자리가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이 일을 안 할 것이다. 일을 하면 월급 100만원을 받는 대신 최저생계비 100만원을 못 받으니까 소득은 100만원 그대로다. 괜히 일하느라 힘만 들게 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보편복지에 속한다. 기본소득에는 이런 복지 함정이 없다. 4인 가족이 기본소득 100만원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아빠에게 100만원짜리 일자리가 생기면 아빠는 당연히 그 일을 할 것이다. 일을 하면 힘들겠지만 소득이 200만원이 되기 때문이다.
 
질문 2.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 부자를 이롭게 할 뿐이며, 사회적 낭비다.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모든 국민에게 인간답게 사는 헌법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는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부자가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만드는 것이다(표 참조).

어떤 나라에 모두 5명이 있고 소득은 0원, 200만원, 400만원 등이다. 사람 1에게 90만원의 소득을 보장하는 선별복지 정책을 실시하려면 세금을 90만원 걷으면 된다. 비례세를 가정할 때 3%의 세율이 된다. 3%의 세금을 내고 복지를 받고 나면 사람들의 소득은 90만원, 194만원, 388만원 등으로 바뀐다. 사람 1 외에 모든 사람의 소득이 줄어든다.

이제 모든 사람에게 90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실시하려면 세금 450만원을 걷어야 하고 세율은 15%가 된다. 세금을 내고 기본소득을 받고 나면 사람들의 소득은 90만원, 260만원, 430만원 등으로 바뀐다. 제일 부자인 사람 5를 생각해보자. 선별복지일 때에는 소득이 1552만원이었는데, 기본소득일 때에는 1450만원이 되었다. 이와 같이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부자에게 유리하지 않고 불리하다. 기본소득 정책을 쓸 때 부자는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된다.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숨은 의도는 부자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다.

이 표는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더 보여준다.

첫째, 노동유인을 비교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 1과 일하는 사람 2의 세후소득 차이를 보자. 선별복지 아래에서는 104만원이었는데, 기본소득 아래에서는 170만원으로 벌어진다. 기본소득이 일을 하는 사람에게 훨씬 유리한 것이다.

둘째로 선별복지 정책은 사람 1만 이득을 보지만, 기본소득은 사람 3까지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인구의 대다수를 이롭게 하는 정책이다. 소득 격차가 클수록, 그리고 누진 세율로 과세할수록 전체 국민 중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의 비율은 더 커진다.
 
질문 3. 기본소득보다 완전고용이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에서 모든 정부가 고용 창출을 목표로 해왔지만 완전고용은 한 번도 달성된 적이 없었다.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완전고용이라는 목표를 포기하고 고용 창출이라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지금까지 완전고용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현대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기술(IT) 혁명이다. IT 혁명으로 산업혁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고용 없는 성장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항구적 추세가 되었다. 노동이 불필요해지니까 노동자를 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으로 고용해 저임금을 주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는 정규직  800만 명과 비정규직 800만 명으로 구성됐는데,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다. 영세자영업자가 400만 명이고, 사실상의 실업자가 100만 명이다. 청년의 체감실업률은 25%나 된다. 청년 4명 중 1명이 백수인 셈이다.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은 일류 대학에 진학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게 되었다.

정부가 나서서 아무리 채용하라고 외쳐도 기업은 더 이상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실제로 다른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태에서 불필요한 고용을 늘릴 여력이 없다. 청년은 ‘88만원 세대’로 전락해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고 있다. 30살에 결혼하면 빨리 결혼한다고 축하를 받게 되었다. 이제 유토피아 사회에서나 완전고용을 꿈꿀 수 있을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미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쓴 마지막 저작들(대표적으로 1995년의 <완전고용 다시 회복?>)에서 현재의 조건에서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본소득은 다음과 같은 여러 경로로 완전고용의 길을 열어준다.

첫째, 기본소득은 노동시간 단축을 가능하게 해준다. 현대자본주의에서 노동시간 단축 없이 완전고용은 불가능하다. 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잔업의 필요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힘들게 잔업하는 대신 여가를 활용하고 싶은 노동자가 생겨날 것이다.

둘째로, 기본소득은 비자본주의적 노동을 증가시켜 노동시장에 공급 압력을 줄인다. 우리 사회에는 돈을 많이 버는 노동보다 보람 있는 노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친환경 농부,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등 비영리단체 활동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종사자, 예술가, 비인기 학문 전공자, 정치가, 지역 운동가, 발명가, 환경운동가, 고아원·양로원 복지가, 언론인, 사회복지 노동자 등 수많은 사람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생계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노동에 종사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임금노동자가 되어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이런 사람들을 비자본주의적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해준다.

셋째로,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일자리를 증가시킨다. 기본소득은 내수시장을 키운다. 서민 지출이 늘기 때문에, 서민이 소비하는 상품과 서비스 시장이 커진다. 내수 서민 부문은 수출 부문이나 사치품 부문에 비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이 존속할 수 있는 여지가 크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증가하게 된다. 노동자가 중소기업에 취업하려는 의사도 커지게 된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더라도 중소기업에서 받는 임금과 기본소득을 합치면 생활이 보장될 뿐 아니라, 중소기업이 실패하더라도 기본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 이와 같이 기본소득은 중소기업의 구인난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질문 4. 기본소득은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경제는 기본소득에 대한 재정 부담을 질 여력이 충분히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세금을 적게 내는 나라에 속한다. 2008년 총조세부담률은 26.6%에 불과하다. 우리나라가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가  되려면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세금을 더 내지 않으면서 복지국가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흔히 세금을 많이 내면 경제성장을 못하게 될까 걱정하는데,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는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기본소득 도입을 위해서는 총조세부담률을 35~40%로 늘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세금을 너무 적게 내고 있어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 부동산세를 토지세로 단일화하고 3% 세율을 매기면 30조원이 마련된다. 증권양도소득세를 신설하고 배당, 이자소득세율을 30%로 인상하면 적어도 60조원이 생긴다. 탄소세 같은 환경세를 매겨 30조원을 마련할 수 있다. 앞으로 환경세는 더 늘려가야 할 것이다. IT 기술을 활용하면 250조원의 지하경제에서 세원을 포착해 30조원을 더 걷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를 인상하지 않고도 1인당 연간 300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경제력에 비춰보면 기본소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정치적 의지다. 기본소득은 실제로 상당히 가까이 와 있다. 몽골·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독일에서 대다수가 찬성하고 있고, 나미비아의 실험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알래스카주에서는 이미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노인의 70%는 기초노령연금을 받고 있다. 이것을 100%로 늘리고 증액하면 된다. 아동수당법은 올해 발의됐다. 증액을 하고 시기를 앞당겨서 법을 통과시키면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청장년에게도 기본소득을 지급하기로 합의하면 된다.

기본소득은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이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복지 수준이 낮고, 경쟁력을 중시하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큰 나라에 적합한 복지정책이다.

글•강남훈 
한국 기본소득네트워크 대표, 전국교수노조 부위원장. 주요 저서로 <정보혁명의 정치경제학>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