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8월호 ‘복원’의 과시욕과 ‘보존’의 겸허함
문화재란 과거의 인류가 남긴 모든 유·무형의 문화적·자연적 유산을 일컫는다. 그러나 넓게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또는 미래에까지 우리 후손에게 남겨야 할 모든 것이 그 대상에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남아 있는 모든 유산을 안전하게 ‘보존’해서 후손에게 넘겨줘야 할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
▲ 1968년 12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참관한 광화문 현판 제막식. <정부기록사진집>.
오늘의 우리는 문화재 보존을 위한 차선책으로서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이뤄진 불가항력적 훼손에 대처하기 위해 ‘복원’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복원 자체가 원형을 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최선의 복원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온전한 보존이 수반돼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서는 땅속에 묻힌 문화재 보존은 외면한 채 지상의 문화재 복원 작업에만 치중하는 파행적 국면이 일어나고 있다.
복원은 하되 보존하지 않는 파행
지금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는 두 곳의 귀중한 국보급 문화재의 복원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두 곳 모두 조선왕조(1392~1910) 개국과 함께 지은, 숭례문과 광화문이다. 한성의 주작로(朱雀路)랄 수 있는 지금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이어지는 대로의 남쪽과 북쪽 끝에 자리잡은 고도 서울의 상징물 같은 곳이다. 이 양 대문이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가설 덧집에 가린 채 안에서 한창 복원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숭례문은 18.7km에 이르는 서울 성곽을 따라 세운 사대문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대문이고, 광화문은 조선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두 건물은 우리 민족의 다사다난한 역사처럼 기구한 역경 속에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간신히 이어왔다.
우선 숭례문은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서 6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몇 차례 보수가 있었지만 잦은 외침과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별 탈 없이 최근까지 무사히 건재해왔다. 그러나 2008년 2월, 한 방화범에 의해 목조로 된 중층 문루(門樓)의 반 이상이 소실돼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사건 이후 곧장 복구 작업에 들어가 2012년 12월 준공 예정으로 공사 중이다.
한편 광화문은 조선 초기 숭례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졌지만 숭례문과는 달리 많은 시련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1592~98) 때 경복궁과 함께 소진된 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270년 만인 고종 2년(1865)에 착수된 경복궁 중건 공사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건물이다. 경복궁은 이후 고종 25년(1888)에 이르기까지 20여 년에 걸쳐 대원군에 의해 꾸준히 공사가 진행돼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경복궁 내의 근정전과 경회루 등 몇몇 주요 건물을 제외하고 나머지 건물을 철거했고, 광화문도 일제의 무자비한 훼손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18년에 착공된 조선총독부 신축 부지가 근정전의 남쪽 정면으로 확정되면서 바로 정면에 있던 광화문을 해체시켜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文) 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쪽으로 옮겨버렸다.
그 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채 한동안 방치되던 것을 1968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던 중앙청 정면의 원위치에 가까운 곳을 찾아 다시 복원을 했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만 비슷할 뿐 우리의 전통 건축과는 거리가 먼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더구나 위치도 원래보다 북쪽으로 물러나 있었고, 좌향(坐向)도 경복궁보다 중앙청 건물에 주축(主軸)을 맞추다 보니 한쪽으로 비스듬히 틀어졌다.
현재 광화문 복원 공사는 경복궁 복원 계획의 일환이다. 콘크리트 건물을 모두 헐어내고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역사적 고증 자료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얻은 충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원위치에 원래 모습을 찾아 공사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한 조선왕조의 5대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서 규모가 가장 큰 정궁인 경복궁의 대대적인 복원 공사에 착수한 것은 1990년이었다. 당초 20년의 장기 계획으로 시작한 복원 공사는 지금까지 건물 93채가 완공됐고, 2006년에 시작돼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는 광화문 복원은 그 마지막 사업이다.
서울은 고도(古都)이다. 암사동과 같은, 한반도 내에서도 굴지의 신석기시대 취락 유적이 서울의 한강 유역에 형성되었다.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1천여 년 뒤에는 고대 백제 왕국이 개국해 500여 년 동안 도읍을 이룬 곳이다. 그 뒤 고려왕조에 이르러서도 남경(南京)으로 건재하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드디어 왕도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 이후 고도 서울
1394년(태조 3년) 개경 천도와 함께 국기(國基)의 주축이 될 한성에 성곽을 쌓고 그 안에 궁궐이 들어서면서 점차 국도(國都)로서 기틀이 잡혔다.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주작대로 양쪽으로는 국정을 총괄해나가는 육조(六曹) 거리가 자리잡고, 그 주변으로는 중요 관가가 세워졌다. 이 밖에 사대문 안에는 민가와 상가 등이 밀집한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점차 도읍의 면모를 갖추었다.
1840년대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首善全圖) 등 서울의 옛 지도에서 당시 시가지 모습을 살필 수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서도 지도와 부합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서울 성곽 내부, 즉 사대문 안에서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친 갖가지 유구(遺構)들이 드러나 당시 이곳에서 이룬 풍성한 삶의 흔적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최근까지 서울 도심의 지하에 남아 있는 유적은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개발 논리에 밀려 무방비 상태로 파괴돼왔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학계를 중심으로 지하 유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는데, 그 결정적 계기는 청계천의 복원·정비 공사에서 비롯됐다.
그나마 복원도 아닌 정비 수준
공사에 앞서 작업한 구제(救濟) 발굴(2003년 9~12월)에서 얻은 결과는 학계로부터 ‘졸속’ 발굴이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많은 국민과 행정 당국자에게 서울 도심에 묻힌 매장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식을 심어주었다. 물론 발굴 결과가 청계천 복원 사업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도심 속 생태하천’이란 미명하에 복원이 아닌 정비 수준에 그치고 말았지만, 서울의 땅 속에서는 아직도 고도의 흔적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서울 동대문운동장 터에 건립하기 위한 ‘디자인 플라자’ 부지 조성 중에 드러난 지하 유구 발굴(2008년 1월~2009년 5월)을 통해 조선 전기에 축성된 서울 성곽과 함께 수문(水門)이 나타났고, 많은 건물터가 확인됐다. 이 건물들은 조선시대의 도성 방어와 관련된 관청과, 화약 제조와 철 생산을 담당한 부속 군사시설로 밝혀졌다. 발굴 뒤 성벽과 수문이 복원됐고, 발굴 유적의 극히 일부가 형식적으로 이전 복원돼 주변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미화되고 있다. 그러나 원래 현지에 보존돼야 했던 대부분의 유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밖에 ‘서울의 심장부’인 서울시청 신청사 예정 부지와 종로의 청진동 개발지구, 그리고 경복궁 옆 옛 종친부(宗親府) 터 일대의 발굴을 통해 조선시대의 중요한 유적을 조사하고 있다. 반경 1km 이내에 있는 이 유적들은 일반 민가가 아닌 조선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형성된 공공시설지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굴된 유적에 대해서는 극히 부분적인 현지 보존 전시라는 미온적 대처 방안이 마련되고 있지만, 이는 이 도심 지역이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현실적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임기응변식 대응에 불과하다. 하루빨리 지하에 매장된 고도의 보존을 위한 항구적 정책이 수립돼야 한다.
서울은 조선왕조 500년 도읍지로서, 서울 성곽 사대문 안은 오랜 세월을 꾸준히 왕도로서의 기능을 계속해온 곳이다. 그만큼 서울의 지상과 지하에는 엄청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경주나 부여, 공주, 익산 같은 고도와 달리 지금껏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시가지 개발이 자행돼왔다. 기껏해야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 성곽이나 5대궁, 종묘 주변의 신축 빌딩에 대한 고도 제한 말고는 지하 유구에 대해 아무런 제재 조치도 없었다.
땅 속의 옛 도시 보존 시급
지금까지 행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과오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더 이상 ‘한성 옛터’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서울을, 최소한 사대문 안만이라도 고도 차원의 도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옛 도시의 보존을 위해 진행해온 외국의 도시 정책 사례를 들어왔다. 인도의 ‘올드델리’와 ‘뉴델리’, ‘로마’와 ‘신로마’(EUR), ‘파리’와 ‘라데팡스’ 등 옛 도시 보존 정책을 통해 보존과 개발의 한계를 현명하게 극복해온 사례 말이다.
우리에게도 자구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어나는 강북 도시 팽창의 한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착수했으나, 강북은 강북대로 여전히 별다른 보존 대책 없이 재개발이 계속돼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지하에 묻힌 문화재가 개발을 위한 하등의 저해 요인이 되지 않았기에 강남처럼 강북의 도심 개발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만시지탄의 감이 절실하지만 지금이라도 ‘고도 서울’이 더는 훼손되지 않게 범국가적 홍보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아울러 서울시와 문화재 관리 당국은 지하의 고도 보존에 더 적극적인 시책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살아 숨쉬는 도시 전체를 현상 그대로 보존만 하자는 말은 아니다. 부분적인 개발은 허용하되, 지역에 따라 선별적 차등화 작업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지도 등 문헌 자료와 지표 조사를 통해 중요 문화재가 매장된 것이 분명한 5대궁 주변의 일정 범위 등 한성 도심지구는 ‘절대보존지구’로 고시해 일체의 지하 굴착 행위를 제한해야 한다. 그 밖에 절대보존지구를 벗어난 주변과 일반 주거지역은 ‘보존지구’로 구획해 발굴로 확인된 지하 유구의 성격에 따라 개발 제한 정도를 명시하는 게 절실하다.
광화문과 숭례문을 새로이 복원하는 사업도 중요하지만 지하에 매장된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4년 가까운 공사 끝에 광화문의 가설 덧집이 제거되고 복원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어서 곧 웅장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문화 외적인 정책적 여건에 따라 준공 시기가 앞당겨지고, 현판의 글씨 내용으로 일각에서 왈가왈부가 이는 듯하지만, 우선 오랜 공기를 거쳐 이뤄진 대역사(大役事)의 마무리는 높이 평가할 일이다.
글•지건길
프랑스 렌대학교대학원 박사.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장과 국립경주박물관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