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로 됐어....
너무 뒤늦은 후기다. 그냥 넘어갈까 했는데, 메모까지 해뒀던 터라 간단하게라도 페이퍼를 작성한다.(며칠 후에 말러 8번과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후기도 천천히 작성할 생각이다.) 한 달 전 공연이지만, 4악장 후의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말러 교향곡 1번처럼 시원하고 박력있게 끝나는 곡이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이나 말러 교향곡 9번처럼 느리고 숙연하게 끝나는 곡이 좋아졌다. 그런데 비슷한 느낌의 말러 교향곡 4번은 그런 느낌이 들지를 않는다. 그건 아무래도 곡 전체의 느낌이 숙연한거와는 거리가 멀고 장조 곡이라서 그런 것 같다.
커튼콜을 몇 번 하고 혼자 나오면서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혼자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나온 기억이 새롭다. 왠지 모를 비장미, 숙연함 또는 어쩔 수 없는 ‘동의’라 할까. 어떤 글에서 보니깐 번스타인이 말러 교향곡 9번 4악장에 이런 메모를 해 놓았다고 한다. ‘Let it go'. ’그걸로 됐어....‘ 전체 곡을 듣고 난 후의 내 입에서 나온 첫 단어 또한, ‘Let it go'였다. 이 단어 이외 더 이상의 말이 사실상 필요 없는 공연이었다.
2011. 12. 8 말러 교향곡 9번, 서울시향, 정명훈
단원들이 들어온다. 주연선 첼로수석의 출산휴가로 공석인 파트는 송영훈 솔로이스트가 맡았다. 공연을 볼 때 마다 연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게 자리와 전방 시야인데, 다행히 오늘은 시야가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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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예습은 1952년 녹음의 Jascha Horenstein, Wiener Symphoniker 음반(이 음반은 레브레히트가 극찬한 앨범이어서 들어봤다)과 1999년 녹음된 Claudio Abbado
, Berliner Philharmoniker의 음반을 들었다. DVD로는 2010년 Abbado와 Lucerne Festival Orchestra와의 DVD를 봤다. 호렌슈타인의 연주는 1952년이라고 하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때도 발터 이외의 지휘자 중에 말러를 연주할 줄 아는 지휘자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지 그 이상의 감흥은 솔직히 없었다. 그러나 음질은 생각보다 좋은 편이다. 가장 자주 들은 음반은 아바도옹의 1999년 BPO와의 연주이다. 모 클래식 사이트에서 이 음반에 대한 평이 모두 최고(별 다섯 개)라 하지만, 사실 나에게는 서울시향의 실연만큼은 아닌 듯 하다. 음반과 실연은 엄연히 별개의 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우선 1악장의 런닝타임은 29분 정도다. 대부분의 연주가 24분에서 27분대인 것을 생각하면 좀 긴 편이었다. 29분 정도의 연주는 1961년 Bruno Walter, Columbia Symphony Orchestra의 연주와 1971년 Bruno Maderna와 BBC Symphony Orchestra와의 연주 그리고 예습으로 들었던 호렌슈타인의 1952년 앨범 정도가 비슷한 시간대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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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에 들려오는 하프 소리. 청초한 느낌이다. 그러나 힘이 느껴진다. 봤더니 하프 연주자 한명이 남자였다. 꼭 남자여서 그런건 아니겠지만, 음반과는 다르게 상당히 울림도 크게 들렸다. 호른 소리 또한 연주장에 부드럽게 울려 퍼진다.
영상물을 보건 실연을 보건 항상 생각 하는게 하나 있다. 뭐 내 생각이 보수적일 수도 있게다. 타악기 주자들을 보면 현악기 연주자처럼 항시 연주를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긴 시간동안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를 바라만 봐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보면 어떤 연주자들의 경우 팔짱을 끼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게 좀 보기에 좋지 않다. 연주를 하지 않더라도 연주를 듣고 참여해야 할 듯한데, 팔짱 낀 연주자는 연주자가 아닌 관람자(방관자) 같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이런 경우 보는 진짜(?) 관람자는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그렇다.
하여튼 연주는 이어진다. 전개부에 나오는 트럼펫의 선율은 아주 시원시원하다. 또한 이어지는 하프의 몽환적인 반복구 선율. 띵. 띵.... 띵띵.... 머리가 '띵'했다. 또한 에드워드 최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긴 쇠막대기로 된 튜블러 벨(tubular bells)을 연주했는데, 이 놈이 보기에는 단순해 보여도 그 소리가 단순히 쇳 소리라기 보다는 좀 더 깊은 여운을 주는 무게감 있는 소리였다. 그리고 클라리넷은 연주를 한다기 보다는 춤추는 듯, 무슨 코브라 뱀을 부르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보일 정도였다.(작년 여름에 인도여행 갔을 때 거리를 지나다 보면 피리를 불며 코브라 뱀을 보여주는 할아버지들이 많았는데, 사진 찍고 구경하려고 얼굴을 내밀면 손바닥을 내밀며 ‘one dollar'하더라. 뭐 그들도 돈벌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후반부에 튜바 연주자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이유인즉슨 약음기을 끼웠다 뺐다를 반복하며 연주하는데 워낙 악기가 크다 보니 약음기도 워낙 커 연주자가 너무 힘들어 보였다. 보조 연주자가 필요해 보일 정도였다.
말러의 교향곡 9번은 곡의 여러 부분들에서 몰락과 죽음의 느낌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어 전 4악장 가운데 특히 1, 4악장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연주에서 또한, 1, 4악장에 무게감이 있어 보였다. 물론 여러 음악학자들이 지나치게 ‘죽음’에 무게를 두고 해석하는 모습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음악학자 피터 브라운은 교향곡 9번의 메모에 나타난 ‘이별’은 ‘젊음과의 이별’이지 ‘삶과의 이별’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키며 교향곡 1번과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장 파울의 소설을 바탕으로 작곡된 교향곡 1번에는 젊은 날을 그린 활기찬 팡파르와 장례식 음악이 나타나는데, 이는 교향곡 9번 1악장과 유사하다. 또한 음악학자 스폰호이어는 말러의 교향곡 9번의 의미를 지나치게 죽음과 이별 쪽으로 몰고 가는 식의 해석은 “애매한 죽음의 신비주의”와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하찮은 형이상학”이라 비판하면서 이 교향곡이 “이별과 슬픔의 분위기가 깔려있는 작품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거대하고 구조적이며 건축적인 힘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신음악의 첫 장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 네이버 캐스트 명곡 명연주 말러, 교향곡 9번에서 인용>
곡 전체로 보면 큰 문제는 없었지만 1악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악장 말미에 바이올린의 실수로 곡이 끝났는데 ‘띵’하며 현을 튕기는 소리가 난 것이다. 작은 소리였지만 워낙 조용한 순간이어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순간 다들 ‘이게 뭔 소리지’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순간 정명훈 지휘자의 표정은 ‘그런건 괜찮아, 신경 쓰지마’하는 표정이었다.
렌틀러 풍인 2악장의 런닝타임은 13분 30초 정도였다. 대부분의 앨범들이 14분에서 18분대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축에 속한다. 비슷한 시간대를 보이는 앨범은 1악장과 마찬가지로 1971년 Bruno Maderna와 BBC Symphony Orchestra와의 앨범 그리고 1952년 호렌슈타인의 앨범이 비슷한 시간대로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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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끼어린 바순, 클라리넷에 이은 저돌적이며 전투적인 제2바이올린의 연주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기존의 왈츠 풍의 리듬과는 다른 '어긋남'이 확연히 느껴졌다. 또한 2악장에서 인상 깊은 점은 연주자들의 집중력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지난 성시연 지휘자의 7번 공연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너무나도.... 그리고 악장의 끝은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끝맺었다.
이어지는 3악장 12분 30초 정도였다. 다른 앨범들도 13분 정도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Rondo - Burleske. Allegro assai. Sehr trotzig. 론도 - 익살스럽게. 매우 빠르게. 매우 완고하게. 말 그대로 빠르고 휘몰아치듯이 하지만, 부를레스크(Burleske)라는 타이틀이 의미하듯이 ‘풍자’와 ‘조소’의 느낌도 살아있어야 하는 악장이다. 이 날 서울시향의 연주는 휘몰아치는 질주감과 안정적인 호른 그리고 돋보이는 클라리넷 연주자들의 호흡 또한 돋보였다. 특히,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으나 자주 나오는 A clarinet(이것도 찾아보니 우리가 흔히 보는 클라리넷의 명칭이 이것인것 같다.) 보다 좀 작은 클라리넷의 연주는 너무 부드러웠다. 악장의 후반부 홍웨이 황의 비올라 솔로는 구슬퍼서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악장의 말미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정명훈 지휘자의 템포 루바토는 나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지휘 동작에서 템포를 잡았다 빼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4악장 Adagio - Sehr langsam und noch zuruckhaltend. 아다지오 - 매우 느리게 그리고 주춤하듯이. 런닝타임은 25분 정도였다. 대부분의 앨범들이 20분에서 24분대의 연주 시간을 보이고 있으며 25분 이상의 연주를 보여주는 앨범으로는 1979년 실황 녹음으로 Leonard Bernstein과 Berliner Philharmoniker의 연주, 1966년 녹음된 Jascha Horenstein, London Symphony Orchestra와의 연주, 1952년 녹음의 Jascha Horenstein, Wiener Symphoniker의 연주이다. 내가 들은 연주 중에 가장 긴 4악장은 1991년 일본 Suntory Hall에서 실황으로 녹음된 Gary Bertini, Kölner Rundfunk-Sinfonieorchester와의 연주인데, 무려 28분 34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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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긋하게 이어지는 25분은 좀 지루할 만도 한데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초반 바이올린 파트로 시작되는 부분과 더블베이스의 소리는 처절했다. ‘어쩔 수 없어....’, ‘그럴 수 밖에.... 받아들이자.’라고 음들이 말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미련 두지 말자.’
NHK Symphony Orchestra conducted by Chung Myung-Whun. NHK Hall, Tokyo, 2008.
현악기 위주이고 특히 저음현의 배경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더블베이스와 첼로 그리고 비올라 파트가 아주 안정적으로 연주를 해주었다. 종결부에 가 모든 악기들은 연주를 마치고 오직 현악기만이 마지막을 이어나간다. 말 그대로 ‘죽어가듯이’(ersterbend). 2010년 루체른페스트벌 오케스트라 아바도옹의 연주는 4악장이 백미(白眉)였다. 죽음과 싸우며 지휘를 하는 노거장의 마음과 말러의 마음이 통했던 걸까? 모든 관객이 숨을 죽인채 지휘자를 주시하며 그의 연주에 대한 ‘예’(禮)를 표하듯이 끝까지 적막을 지켜주는 모습은 우리의 관객 문화에 비춰보면 너무나 부러운 모습이었다.
Mahler 9th Symphony 4mov - 2010 Lucerne Festival Orchestra - Claudio Abbado
정명훈도 종반부로 달려가고 있다. ‘그걸로 됐어. 정말이야.’ 꼭 그러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첼로의 소리는 나지막히 말하고 있다. ‘이제 됐어....’ 그런데, 그런 여운과 생각의 말미를 남기지 않고 지휘자가 지휘봉을 내려 놓은 순간이 너무 빨랐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조금만 더... 1분 정도만....’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처음으로 연주를 듣고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축 처지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게 정명훈 지휘자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