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 있어 적어본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고 이해도 가는 글이지만, 한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다. "우리 인식 속에는 막연히 ‘환자를 많이 상대한 병원과 의사가 실력이 낫다’는 잠재의식이 있다." 이건 잠재의식 속의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 '현실'이 아닐까? 학생을 많이 대해보고 겪어본 교사가 학생들을 잘 이해할 수 있듯이 환자를 많이 대한 의사가 실력이 좋을 확률이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의사의 인간적 정과 환자에 대한 관심은 그 다음 문제일 듯 하다. 그리고 "국가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전문의가 된 의사들의 실력 차는 거의 없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라는 말도 그렇다. 의사건 판사건 검사건 나같은 교사건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흔히 말하는 전문직종은 정해진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예전에 그랬지 않았지만 요즘 임용고사같은 경우 경쟁률도 높고 공부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시험에 많이 응시해서 신규임용 교사의 경우 예전 무시험 전형때보다 교사들의 실력들이 좋다고 애기한다. 근데, 정말 그럴까? 

정해진 어려운 1차, 2차, 3차 시험에 통과했다고 '좋은교사'라는 보증수표가 될 수 있을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간단히 애기할 수 없는, 좀 더 복잡한 구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직업)을 평가하고 싶어하고 그것도 계량화된 간단한 도구을 이용하고 싶어한다. 바로 이게 문제다. 계량화된 평가를 할 수 없는(물론 평가 자체가 싫지만) 직종도 있다. 특히나 살아있는 인간을 대하는 교사와 의사같은 경우가 그런거 같다. 단순히 교과 실력이 좋다고(물론 이건 현재 우리나라의 학교 구조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교사에게 교과수업뿐만 아니라 행정잡무, 학생 생활지도 그것도 가정과 연계한 지도 등을 요구한다) 좋은, 훌륭한 교사일 수 있을까? 아니다. 현재까지의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애기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사회적 분위기는 '계량화된 교사', '표준화된 교사'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 글의 내용처럼 ‘환자의 심리적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의사는 사실 환자(수요자)들의 만족을 줄 수 없는 의사일 확률이 높다. 오히려 비효율적이고 괴짜로 보일 확률이 높다고 난 생각한다. 

자기 맡은 바 직분에서 최선을 다하는 개인적인 노력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이 그런 노력을 충분히 뒷받침해줄수 있는 사회적 구조의 탄탄함과 분위기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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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0.13  브랜드 선호와 좋은 병원, 좋은 의사 

브랜드, 명품 선호 현상이 이제는 병원 선택까지 좌지우지하는 시대다.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듯 이른바 ‘빅5’ 진료기관이라고 불리는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에서 수술이나 치료를 받으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건강 보장성이 높아지면서 본인부담금이 줄어 대형병원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더욱 가속화하는 추세다.

건강·의학 분야를 담당한 지난 1년여. “○○병원 ○○의사를 소개해 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유명 브랜드 종합병원 잘나가는(?) 의사들을 추천해 달라는 의미였다. 암 같은 중병은 물론이고 흔한 감기도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얼마 전 임신을 한 동생도 산부인과 병원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브랜드를 택했다. “분만은 위험하지 않으니 가까운 동네병원에 가라”는 내 충고는 먹히지 않았다. 동생뿐 아니라 젊은 여성들은 큰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덕분에 지방의 중소 산부인과는 설 곳이 없다. 동네 산부인과 병의원 중에 분만실이 있는 곳은 25%뿐이다. 강원 양구, 전북 무주, 경북 청송군 등은 산부인과 의원이 아예 없다. 심지어 콧물과 기침, 발열 증상만 보여도 동네병원이 아닌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 때문에 최근 산부인과뿐 아니라 동네의 내과·소아과·외과 등의 휴·폐업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인식 속에는 막연히 ‘환자를 많이 상대한 병원과 의사가 실력이 낫다’는 잠재의식이 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브랜드, 명품 병원 선호 현상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건강권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교통의 발달 등으로 지방 사람들도 서울에서 진료받는 일이 한결 편해지기도 했다. 최고의 병원, 최고의 의사에게 몸을 맡기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적어도 병원과 의사 선택에서는 브랜드가 꼭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명품이나 브랜드 제품을 찾는 건 상품의 품질과 신뢰도, 애프터서비스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빅5’ 병원은 어떤가. 주차비나 선택진료비 등 진료비는 높은 반면 정작 진료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는다. 맞춤처방 자체가 힘든 구조임은 물론이고 충실한 애프터서비스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시간과 비용 투자 대비 품질이 턱없이 낮다.

병원의 브랜드나 환자 수, 의사 수, 크기가 ‘실력’과 반드시 비례한다고 볼 수도 없다. 국가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전문의가 된 의사들의 실력 차는 거의 없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의사의 시술이나 처치 역시 자의적 판단보다는 대개 진료지침서에 의존한다. 의사들은 “암 수술만 봐도 경험이 10회 미만이면 실력이 뛰어난 의사도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20번 이상 경험을 한 뒤부터는 횟수에서 오는 실력 차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마케팅이나 언론노출 과정에서 브랜드 병원, 스타 의사의 실력이 과장되는 경우도 있다. 동네 병의원에도 유능한 의사들이 널렸다”고 말한다.

나에게 좋은 병원, 유능한 의사란? 환자를 얼마나 진심과 정성으로 대하느냐, 환자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내게 꼭 필요한 처치를 해주느냐 여부로 따져야 할 것 같다. 병은 신기하게도 물리적 수술이나 처치뿐 아니라 ‘환자의 심리나 만족도’에 따라 예후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만큼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와 교감이 중요하다. 적어도 당신에게 좋은 병원과 좋은 의사는 ‘나를 잘 아는’, 그래서 맞춤처방과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한 동네의원이나 중소병원의 의사일 수 있다.

김미영 스페셜콘텐츠부 기자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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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의 신간이 얼마 전에 출간되었다. 조지오웰하면 <1984>나 <동물농장>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아직 난 둘 다 완독해보지는 못했다. ㅠ.ㅠ 

기사에도 나와있듯, 내가 이책에 관심이 가는 이유중에 하나는 오웰의 궁금증에 중첩되는 '내'가 왜 글을 쓰고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에 관심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도 일상의 밖 풍경, 냄새에서도 어수선한 풍취가 느껴진다. 그 어수선함이 날 이 책에 끌리게 만드는 듯 하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건 이런 어수선함에도 그 모든 걸 날려버릴수 있는 편안함을 줄 수 있는 나의 가족과 휴식처가 있다는 사실이다. 

조지 오웰의 책들을 정리해본다. <동물농장>은 여러 출판사에서 많은 종류가 나와있다. 그 수 많은 다양한 표지가 눈에 띈다. 표지만 봐도 재미있을 정도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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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1 한겨레21 제829호  “시절이 평화로웠다면 아름다운 글만 썼겠지”

버마 식민지 경찰부터 부랑자 생활, 스페인 내전 참전까지…

조지 오웰의 치열한 체험이 낳은 ‘정치적’ 에세이 29편 <나는 왜 쓰는가>

짐작하건대 이 책을 서가에서 집어드는 대부분의 사람은 조지 오웰이 왜 쓰는가를 궁금해한다기보다는 ‘내’가 왜 쓰는가를 더 궁금해할 것이다. 남이 글 쓰는 데 이유를 살피고 눈치를 보는 이라면 평소에 글을 쓰든 안 쓰든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을 것이란 추측이 그 이유다. 위대한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에 비춰 한 조각이라도 자신과 닮은 점을 찾는다면, 혹은 그 작가가 타고난 문학 천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면, 읽는 이는 적어도 ‘조지 오웰만큼은 쓰겠다’는 환상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을 읽는 이유는 그래서 어쩌면 마음속 깊이 간직한 욕망을 다독이는, 위로와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펴냄)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이미 너무 유명해 여러 장르로 변주되거나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줬던 소설 <동물농장>과 <1984> 외에도 오웰은 많은 작품을 썼다. 오로지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탓이다. 그래서 47살의 짧은 생을 살았던 작가는 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 외에도 서평과 칼럼을 포함한 수백 편의 에세이를 남길 수 있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생전에 다 묶이지 못했던 그의 에세이를 모아 4권으로 엮은 저작집 중 옮긴이가 29편을 골라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책의 중반이 한참 지나고야 나오는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읽지 않아도 독자는 그가 ‘왜’ 글을 쓰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부랑자 임시숙소에서의 며칠을 그린 ‘스파이크’,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을 쓴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 명문 이튼스쿨 졸업생 중 유일무이하게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 노릇을 한 경험을 살려 쓴 ‘코끼리를 쏘다’ 등은 오웰이 직접 몸으로 겪고 자신의 시선으로 옮긴 당시의 세상이다. 르포 성격을 띤 이 에세이들이 쓰인 동기는 겪은 이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시절의 혼란스러움’일 것이다.

이는 책의 여러 장을 넘겨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만나는 한 문장과도 연결된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정치’가 글을 쓰게 한 것이다. 그는 글을 쓰는 이유를 4가지로 요약해 말했는데(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이 중 네 번째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나는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책을 썼을지 모르며,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한편 일상에 관한 따뜻한 마음을 담은 에세이도 눈에 띈다. ‘물속의 달’은 오웰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펍(선술집)에 대해 쓴 글이다. ‘물속의 달’에서는 맛있는 맥주가 손님들의 식감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분홍빛 머그잔에 담겨 나온다. 인자한 여자 바텐더들은 손님 대부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아무에게나 ‘오빠’ ‘언니’라 부르지 않는다. 꽤 큰 뜰이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다. 아빠만 밖에 나가고 엄마 혼자 집에 남아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서글픔 따위는 날릴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현실에는 없는, 오웰의 상상 속 펍이다. 이 에세이를 쓴 동기는 그가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와 연결지을 수 있겠다. “미학적 열정. 자신이 체감한 바를 나누고자 하는 욕구는 소중하여 차마 놓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일까, 놓치기 싫은 아름다운 상상은 현실로 나타났다. 이 에세이의 영향으로 영국에는 ‘물속의 달’이란 이름의 펍이 많이 생겼고, 이 글의 내용에 착안해 만든 펍 ‘웨더스푼’은 현재 700여 개 체인을 거느리고 있단다.

이 시대에 곱씹어볼 만한 주제를 담은 작품들을 선별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대부분의 글은 현재의 여러 가지 정황과 연결된다. 약소국과 강대국의 불공정한 관계, 억압적인 교육, 부랑자나 빈민층의 문제가 연이어 떠오른다. 무거운 주제일 법하지만 대부분의 문장은 위트 있고 거기 담긴 감정은 솔직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글을 쓰는 이유 중 첫 번째로 꼽은 ‘순전한 이기심’을 두고 쓴 문장이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그런가 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굳이 쓰는 일에 목매는 이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쉬이 공감을 줄 법한 솔직함이 문장과 단어 사이에서 문득문득 솟아오른다.

한국의 현재와 연결되는 20세기 중반의 세계

음악에서 뜻 없이 쓰이는 음표 하나 없듯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29편의 에세이는 개개의 의미를 품고 하나의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편곡’해 읽어보자. 쓰인 순서대로 배열된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적잖이 띠고 있으니 오웰 생의 궤적을 더듬어가며 읽는 것도 의미가 있겠고, 여러 장을 건너뛰어 ‘나는 왜 쓰는가’를 먼저 읽은 뒤 각각의 에세이들이 어떤 동기로 쓰였는지를 짐작하며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그러다 보면, 쓰고 읽는 통로가 많아진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자꾸만 쓰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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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리시버는 TEAC의 DR-H300p와 스피커는 QUAD의 11L2 

 

 

  

아직 귀가 뚫리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소리의 질은 좋은듯하다. 살짝 고음부분이 귀에 거슬리는 부분도 없지않아 있는것 같기는 한데, 그것의 정체는 모르겠다. 근데 이 쿼드 스피커 정말 물건이다. 스피커의 외관 마감부분이 정말 고급스럽다. 이 가격대에 이런 마감재를 사용한 스피커가 나올수 있나 싶을 정도로. 물론 소리가 좋아야 하겠지만. 소리라는게 스피커의 물리적인 외관과 마감재의 특성에 의해서도 좌우되기 때문에 '때깔'도 중요하다고 한다. ㅋㅋ 

DVD 리시버는 동회사의 CD리시버를 사려 하다 물건도 없고 이 놈이 DVD도 재생되는 장점때문에 이 놈을 골랐다. DVD를 넣어도 소리는 재생이 되니, 가끔 쓸만할 듯 하다.

 

이번에 이사간 집 서재 책장이다. 아직 다 정리가 덜 됬지만...책장이 좀 모자란듯 하다.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는듯 하다. 처음에는 서재만 있었으면 했는데, 서재가 생기니 좀 더 큰 서재가...큰 서재가 생기니 좀더 많은 책꽃이가 있었으면 하고 좋은 책꽃이였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이제 그런 욕심은 버리고 있는 책, CD 열심히 읽고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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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3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햇빛눈물 2010-11-24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한 이유는요...제가 착각을 했네요. ㅋㅋ 지금은 영국이 아니라 중국에서 생산합니다. 생산 단가 때문에 어쩔수 없겠죠. 그래도 가격에 비해 마감과 소리는 좋습니다. 예전에 쓰던 우퍼를 달고 쓰고 있는데 좋네요.
 

2년전부터 클래식에 빠져살고 있다. 하루에 앨범을 3개씩은 듣는 것 같다. 지금도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을 듣고 있다. 아.... 

독일의 도이치그라마폰이라고 하는 역사 깊은 레이블에서 작년에 111주년을 기념해서 박스반이 나왔다. 작년에는 본체만체 했는데 올해 보니 너무 좋고 사고싶었는데, 절판. 그때 이 박스반의 2탄이 나왔다. 1탄 2탄 다하면 시디가 111개이다. ㅋㅋ 

그래서 2탄은 국내에서 주문하고 1탄은 수소문한 끝에 영국의 MDT라고 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입했다. 가격은 71파운드 한화로 하면 약 12만3천원이다. 국내에 재발매된 가격이 17만원이니 가격은 참 저렴한 편.  

  

해외사이트에서 사용한 신용카드는 금융수수료가 붙는데 생각보다 아주 적게 나왔다. 총 결재금액이 13만원이니...ㅋㅋ 참 신기한 세상이다. 국내에서는 17만원인 음반이 저 멀리 몇천 km 떨어진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것인데 가격이 더 싸다니. 바로 이런 일의 가능성, 시스템이 자본주의의 힘, 마력, 유지력, 문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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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24  첫 시집 낼 무렵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속삭였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⑬ 신경림 선생의 전화를 받고 

원고를 올려보냈습니다
몇편을 바꿨으면 한다는 편지에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시는 삶 속에, 이 땅 위에 뿌리박은
서정과 용기여야 한다고 믿었지만
형상화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동인지 <분단시대>를 내고 바쁘게 뛰어다니던 어느 날, 신경림 선생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 시집을 내고자 하니 원고를 보내라는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받으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전화 중의 하나였습니다. 원고를 들고 여기저기 출판사를 쫓아다녀야 할 신인에 지나지 않는 제게 시집을 내 주시겠다고 전화를 하셨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것도 창비에서. 부랴부랴 원고를 정리해서 올려 보내고 난 뒤 이시영 시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가는 글씨로 원고지에 써 보낸 편지 속에는 다른 시로 바꾸었으면 하는 십여 편의 시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좋은 시집을 내고자 하는 의도로 그러는 것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고 써 있었지만 낯이 뜨거웠습니다. 그 편지를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다. 시집이 나오고서 보니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부족한 데가 많은 시집이었습니다. 시집을 내면서 저는 후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민중이니 민족이니 역사니 하는 것을 먼 곳에서 찾지 않는다. 식민지 시절에 앗기우며 한 세월을 보낸 할아버지, 태평양전쟁 말기 남양군도에 징용으로 끌려가 돌아가신 큰아버지, 그 큰아버지와도 싸웠을 군대에 배속되어 분단의 전쟁을 치른 아버지, 소금장수, 이발쟁이, 날품팔이, 농사꾼 형제들, 언청이, 못난이 누이들,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내 이웃의 삶 속에는 생생한 역사와 아리고 한스러운 흔적들이 흉터처럼 박히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민중은 내 가까운 피붙이와 내 자신 속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다.

(…)시는 삶 속에, 이 땅 위에 튼튼히 뿌리를 박는 서정과 용기이어야 하리라 믿는다. 분단시대 약소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들 속에 서서 튼튼한 시를 쓰고 싶었다.”

민중문학, 민족문학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던 때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제게 민중이 어떻게 다가와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글입니다. 이 시집 안에는 <삼대>라는 연작시와 <죠센데이신따이>(조선정신대)라는 연작시가 들어 있습니다. <삼대>라는 연작시를 통해서 할아버지 때부터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이 나라의 역사를 우리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죠센데이신따이> 연작시는 애국봉사대 간호원이라고 속아서 열여섯 살에 버마전선에 정신대로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으나 조국에서 더 냉대를 당하고 있는 배옥수 할머니의 사례를 중심으로 아픈 역사를 재확인하고 우리 모두를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해설을 써 주신 이동순 교수께서는 이 작품이 평면적인 서술에 그친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다른 시들도 당시의 민중시들에서 보이는 고정화된 틀과, 따분한 투식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과 문학의 소집단 활동이 정서의 개별성을 거부하거나 문학성을 위축시키는 강박이 된다면 그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라는 지적도 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우려를 의식하면서 문학성과 문학운동성을 잘 아우르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가 삶 속에, 이 땅 위에 튼튼히 뿌리를 박는 서정과 용기”이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서정과 용기를 조화시키는 일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문학의 서정성과 민족문학적 정신 두 가지가 서로 잘 스며들게 하는 시는 말처럼 잘 써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는 시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의욕은 앞서 있었지만 그 앞선 의욕 때문에 어딘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데가 드러나곤 했습니다. 첫 시집 제목으로 삼은 시 <고두미 마을에서>도 그런 우려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 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 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질 찢고 드는 바람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욱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어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집 구들장 밑 오그려 누워 지냈더니
오십 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 12~14행은 단재 선생의 한시 <가형기일>에서 인용
-졸시 <고두미 마을에서-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 전문


고두미라는 동네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의 옛이름입니다. 청주시 근교인 그곳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이 있습니다. 신규식, 신홍식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령신씨 문중이 그 근방에 모여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고,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삼일절에 가 보면 문풍지가 다 찢어져 있곤 했습니다. 가장 비타협적인 독립운동 노선을 걸었고 이승만의 위임통치노선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탓에 해방된 조국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속이 상했습니다. 1936년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뒤에도 일제가 매장허가를 내 주지 않아 유해를 몰래 암매장해야 했고, 최근까지도 국적을 회복해 주지 않아 후손들은 재산권 행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과연 해방된 나라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분단시대’ 동인들과 단재사당을 찾아갔는데 묘소 주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젊은이 둘이 근처를 서성이는 게 보였습니다. 형사들이었습니다. 거기까지 저희를 미행하며 따라온 것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첫 시집이니 출판기념회라는 걸 하자고 해서 시내에서 동인들과 선후배 문인들이 모였습니다. 돌아가신 채광석 선배가 오셔서 강연을 해 주셨습니다.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던 채광석 선배는 그날도 뒷주머니에 박노해의 노동시 원고를 복사해서 넣고 와 뒤풀이 자리에서 열정적으로 낭송을 하거나 혼자 몇십 분씩 노래를 해서 모인 사람들 기가 질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미운오리새끼’의 신동인 선배도 술이 취해서 참석하였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 같은 신 선배를 바라보며 조마조마했습니다. 이 따위를 시라고 써 가지고 출판기념회라고 이렇게 사람들 불러놓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냐고 소리치며 판을 뒤집을 것 같았습니다. 신 선배는 전두환 정권 칠년간 신문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금강경만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의 눈에 저는 타락한 현실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가는 걱정스러운 사람으로 비쳤을 겁니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일행들이 뒤풀이 장소로 옮겨가는 동안 신 선배는 마지막까지 출판기념회장에 남아 제게 걱정스러워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신 선배의 모습을 보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생각했습니다. 구도의 길을 끝까지 벗어나지 않았던 사문 고빈다와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가 현실의 온갖 오탁을 경험하며 순례하는 싯다르타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불도의 길에서 떠나 카마라에게 가서 애욕을 배웠고 카마스바미에게서 장사를 배워 돈을 모은 뒤 그것을 낭비하고, 위를 사랑하고 관능에 아첨하며 사는 싯다르타를 보고 고빈다는 자네는 순례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순례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강에서 황제의 음성과 투사의 음성과 황소의 음성과 밤새의 음성과 산모의 음성과 탄식의 음성 이런 수천 가지 음성을 동시에 가진 강물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곧 깨달음의 소리 ‘옴’이라는 걸 압니다. 그걸 들을 줄 아는 것, 그 듣는 법 자체가 중요하다는 걸 배우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것, 세계를 경멸하지 않는 것, 세계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계와 나 그리고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과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신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싯다르타의 그 말을 생각했습니다. 싯다르타가 거쳐 간 길과 고빈다가 지켜 간 길이 하나의 강에서 만나게 되듯 우리도 어디쯤에선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채광석 선배가 있는 뒤풀이 장소로 내려갔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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