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24 첫 시집 낼 무렵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속삭였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⑬ 신경림 선생의 전화를 받고
원고를 올려보냈습니다
몇편을 바꿨으면 한다는 편지에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시는 삶 속에, 이 땅 위에 뿌리박은
서정과 용기여야 한다고 믿었지만
형상화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동인지 <분단시대>를 내고 바쁘게 뛰어다니던 어느 날, 신경림 선생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 시집을 내고자 하니 원고를 보내라는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받으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전화 중의 하나였습니다. 원고를 들고 여기저기 출판사를 쫓아다녀야 할 신인에 지나지 않는 제게 시집을 내 주시겠다고 전화를 하셨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것도 창비에서. 부랴부랴 원고를 정리해서 올려 보내고 난 뒤 이시영 시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가는 글씨로 원고지에 써 보낸 편지 속에는 다른 시로 바꾸었으면 하는 십여 편의 시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좋은 시집을 내고자 하는 의도로 그러는 것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고 써 있었지만 낯이 뜨거웠습니다. 그 편지를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다. 시집이 나오고서 보니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부족한 데가 많은 시집이었습니다. 시집을 내면서 저는 후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민중이니 민족이니 역사니 하는 것을 먼 곳에서 찾지 않는다. 식민지 시절에 앗기우며 한 세월을 보낸 할아버지, 태평양전쟁 말기 남양군도에 징용으로 끌려가 돌아가신 큰아버지, 그 큰아버지와도 싸웠을 군대에 배속되어 분단의 전쟁을 치른 아버지, 소금장수, 이발쟁이, 날품팔이, 농사꾼 형제들, 언청이, 못난이 누이들,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내 이웃의 삶 속에는 생생한 역사와 아리고 한스러운 흔적들이 흉터처럼 박히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민중은 내 가까운 피붙이와 내 자신 속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다.
(…)시는 삶 속에, 이 땅 위에 튼튼히 뿌리를 박는 서정과 용기이어야 하리라 믿는다. 분단시대 약소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들 속에 서서 튼튼한 시를 쓰고 싶었다.”
민중문학, 민족문학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던 때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제게 민중이 어떻게 다가와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글입니다. 이 시집 안에는 <삼대>라는 연작시와 <죠센데이신따이>(조선정신대)라는 연작시가 들어 있습니다. <삼대>라는 연작시를 통해서 할아버지 때부터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이 나라의 역사를 우리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죠센데이신따이> 연작시는 애국봉사대 간호원이라고 속아서 열여섯 살에 버마전선에 정신대로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으나 조국에서 더 냉대를 당하고 있는 배옥수 할머니의 사례를 중심으로 아픈 역사를 재확인하고 우리 모두를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해설을 써 주신 이동순 교수께서는 이 작품이 평면적인 서술에 그친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다른 시들도 당시의 민중시들에서 보이는 고정화된 틀과, 따분한 투식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과 문학의 소집단 활동이 정서의 개별성을 거부하거나 문학성을 위축시키는 강박이 된다면 그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라는 지적도 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우려를 의식하면서 문학성과 문학운동성을 잘 아우르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가 삶 속에, 이 땅 위에 튼튼히 뿌리를 박는 서정과 용기”이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서정과 용기를 조화시키는 일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문학의 서정성과 민족문학적 정신 두 가지가 서로 잘 스며들게 하는 시는 말처럼 잘 써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는 시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의욕은 앞서 있었지만 그 앞선 의욕 때문에 어딘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데가 드러나곤 했습니다. 첫 시집 제목으로 삼은 시 <고두미 마을에서>도 그런 우려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 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 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질 찢고 드는 바람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욱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어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집 구들장 밑 오그려 누워 지냈더니
오십 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 12~14행은 단재 선생의 한시 <가형기일>에서 인용
-졸시 <고두미 마을에서-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 전문
고두미라는 동네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의 옛이름입니다. 청주시 근교인 그곳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이 있습니다. 신규식, 신홍식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령신씨 문중이 그 근방에 모여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고,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삼일절에 가 보면 문풍지가 다 찢어져 있곤 했습니다. 가장 비타협적인 독립운동 노선을 걸었고 이승만의 위임통치노선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탓에 해방된 조국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속이 상했습니다. 1936년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뒤에도 일제가 매장허가를 내 주지 않아 유해를 몰래 암매장해야 했고, 최근까지도 국적을 회복해 주지 않아 후손들은 재산권 행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과연 해방된 나라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분단시대’ 동인들과 단재사당을 찾아갔는데 묘소 주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젊은이 둘이 근처를 서성이는 게 보였습니다. 형사들이었습니다. 거기까지 저희를 미행하며 따라온 것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첫 시집이니 출판기념회라는 걸 하자고 해서 시내에서 동인들과 선후배 문인들이 모였습니다. 돌아가신 채광석 선배가 오셔서 강연을 해 주셨습니다.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던 채광석 선배는 그날도 뒷주머니에 박노해의 노동시 원고를 복사해서 넣고 와 뒤풀이 자리에서 열정적으로 낭송을 하거나 혼자 몇십 분씩 노래를 해서 모인 사람들 기가 질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미운오리새끼’의 신동인 선배도 술이 취해서 참석하였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 같은 신 선배를 바라보며 조마조마했습니다. 이 따위를 시라고 써 가지고 출판기념회라고 이렇게 사람들 불러놓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냐고 소리치며 판을 뒤집을 것 같았습니다. 신 선배는 전두환 정권 칠년간 신문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금강경만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의 눈에 저는 타락한 현실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가는 걱정스러운 사람으로 비쳤을 겁니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일행들이 뒤풀이 장소로 옮겨가는 동안 신 선배는 마지막까지 출판기념회장에 남아 제게 걱정스러워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신 선배의 모습을 보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생각했습니다. 구도의 길을 끝까지 벗어나지 않았던 사문 고빈다와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가 현실의 온갖 오탁을 경험하며 순례하는 싯다르타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불도의 길에서 떠나 카마라에게 가서 애욕을 배웠고 카마스바미에게서 장사를 배워 돈을 모은 뒤 그것을 낭비하고, 위를 사랑하고 관능에 아첨하며 사는 싯다르타를 보고 고빈다는 자네는 순례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순례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강에서 황제의 음성과 투사의 음성과 황소의 음성과 밤새의 음성과 산모의 음성과 탄식의 음성 이런 수천 가지 음성을 동시에 가진 강물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곧 깨달음의 소리 ‘옴’이라는 걸 압니다. 그걸 들을 줄 아는 것, 그 듣는 법 자체가 중요하다는 걸 배우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것, 세계를 경멸하지 않는 것, 세계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계와 나 그리고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과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신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싯다르타의 그 말을 생각했습니다. 싯다르타가 거쳐 간 길과 고빈다가 지켜 간 길이 하나의 강에서 만나게 되듯 우리도 어디쯤에선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채광석 선배가 있는 뒤풀이 장소로 내려갔습니다.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