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 분지 강원도달비장수 감비 천불붙이 첫눈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2
천승세.방영웅 외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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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승세의 <신궁神弓>은 1977년『한국문학』에 실렸던 작품으로 당골례 왕년이의 비색한 운명과 가난한 어민들의 삶을 녹여낸 소설이다. 1970년대 문학을 이야기함에 있어 시대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전후 아찔한 속도로 진행되었던 근대화.산업화의 물결은,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부를 선물했을지 모르나, 그 물결에 휩쓸린 모든 사람들을 유토피아로 인도할 수는 없었다. 하여 해체되는 공동체와 편중되는 자본은 대다수 민중들을 변방으로 내몰았고, 그들의 삶을 비극으로 몰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삶은 예컨데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이문구의 <우리 동네>, 천승세의 <신궁>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당골례,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던가. 작고한 외할머니가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찾아가셨던 당집. 초라한 박수의 얼굴도 짠바람에 나부끼던 붉은 깃발도 나는 여태 잊을 수가 없다. 기억이란 때론 필요이상으로 명확하다. 늙은 박수의 해진 동정에서 풍기던 낙엽타던 냄새도, 검버섯 핀 뺨을 연신 훔치던 내 할머니의 모습도 꼭 어제 일처럼 그렇게 선명하다. 어쩌면 나는 시종일관 소설속의 당골례, 왕년이의 모습에서 이가 빠진 퍼즐의 어느 한 부분을 완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닷가에서 살아 본 사람이라면 혹은 나처럼 일정 기간이라도 체류해 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심심치않게 당집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집은 인간이 갖는 원초적인 공포를 드러내는 증거물이다. 하여 미신이나 곰팡내나는 관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굿이 인간에게 주는 위무가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어촌에 존재하는 무당은 서울 한 복판에 간판을 내건 이들과는 무늬가 다르다. 적어도 내가 겪고 들은 바에 의하면 말이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왕년이는 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습무로 주로 씻김굿을 하는 당골이다. 시어머니가 죽자 대를 이어 장선포에 자리를 잡은 왕년이는 한동안 무녀로서 부족할것 없는 삶을 살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대부업을 하는 판수의 살인적인 금리에 가진 재산을 전부 빼앗기고, 고기잡이 배를 타기 시작한 남편도 송장으로 돌아오면서 왕년이는 굿손을 놓아버린다. 왕년이가 굿손을 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실의에 빠져 하던 일을 멈추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공동의 소원을 대신 빌어주는 행위가 단절됨을 의미하며, 자본을 가진 한 사람, 판수에 의해 공동체가 와해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1세기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국제 헤지펀드와 같은 보이지 않는 금융자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70년대를 산 작가는 그것을 미리 내다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에서 왕년이는 남편이 죽고 처음으로 다시 굿판에 선다. 오랜만에 풍어를 기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그녀는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궁을 들고 바가지를 쓴 판수를 겨냥한 후 활시위를 당긴다.
"바가지를 쏘고 굿청에 떨어졌어야 할 화살은 바가지 깊숙히 꽂혀 끝대를 떨었고 판수는 바가지를 쓴 채 비식 옆으로 누웠다. 바가지 위로 꽃뱀 기듯 핏줄이 흘렀다." 
왕년이가 겨눈 활시위에서 화살이 튕겨져 나갈 때, 화살도 왕년이도 그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공동체를 와해시킨 한 사람,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한 사람, 불릴만큼 배를 불리고도 허기져하는 한 사람, 판수를 향해.   

한 개인의 한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맺힌 것인지라, 이 소설의 결말은 개인적인 한을 해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손을 탈탈 털고 돌아서 어디선가 넉장거리할 왕년이의 처연한 모습이 떠올랐다. 울 것도 웃을 것도 같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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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hoya 2010-02-0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다음에 계시질 않으니 자연 찾는 발길이 뜸합니다.
제 블로그 '책읽는 부족에게 고함'이란 포스팅에 미션 수행해 주시길요. *^^*

굿바이 2010-02-0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알겠습니다.^^
 
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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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에는 일종의 체념과 허무가 포함되기 마련인가 보다.
그런 연유로 반백이 되어버린 내 아버지의 말씀은 항용 벼락처럼 내 귓전을 치지만, 아버지의 뒷태는 흡사 안개처럼 흐려지기 일쑤다. 어쩌면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혜와 깨달음을 내 아버지를 통해 엿볼 수 있었으나 그 값으로 원치 않는 허무를 알아챘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내게 [관촌수필]은 또 다른 이름의 아버지이자 사라져버리는 것들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이의 심중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거론함에 있어,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충청도 사투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여담이지만 나는 한때 모든 농촌은 충청도라 믿었었다. 그만큼 그의 글은 살아 움직여 마음을 헤집고 들어온다. 허나 방언은 잘 알려진 특징일 뿐, 작가의 수사학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작가가 조부로부터 득한 한문의 수사학에 힘 있고 격조있는 문어체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관촌수필]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관촌수필이 한 권으로 묶여 있지만 여덟편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나, 작가가 집필한 다른 저서들 역시 단편의 형식을 갖춘 것을 볼 때, 그의 글은 단편으로서의 묘미가 가장 크다. 그것은 구어체적 특징 때문이다. 그의 글은 툭 터진 웃음보마냥 또는 사레들린 사람의 기침처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거기에 더해진 에피소드들은 풍성하며 반듯하고, 훈훈하며 가슴을 쥐어지르는 것들이다. 이만한 글의 성찬이 또 어디있겠는가.

[관촌수필]을 술회하는 마음이 모두 같을 수는 없겠으나, 나는 이 책의 독자라면 누구나 심중에 간직한 나무 한 그루를 꺼내 보지 않았을까 싶다. 따라서 일락서산(日落西山)과 관산추정(關山芻丁)은 좀 더 각별했다. 조부를 상징하는 왕소나무, 어머니를 상징하는 감나무 그리고 이제 홀로 고향을 지키는 복산이라는 구부러진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분에 취해 내 유년기의 그때로 잠깐 헛발을 들여 놓고 허망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은 제 깜냥에도 친가에 있던 감나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몰락하는 존재의 운명앞에서 그리고 삭정이처럼 간신히 매달려있는 것들 앞에서 나는 비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옹점, 녹수청산(綠水靑山)의 대복, 공산토월(空山吐月)의 석공이라는 등장인물들은 책을 덮고도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옹점과 대복 그리고 석공처럼 무엇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리고 무엇도 채근하지 않으며, 언제든 달려가면 덥썩 끌어안아 줄 인연들을 삶의 어느 지점마다 매듭지어놓은 작가가 한없이 부러웠다. 

이 책을, 작고한 작가를, 아련하고 서운한 풍경을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이십년은 묵은 친구와 밤을 세워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그만큼 작가의 모든 것에 각별하다. 이는 누구의 말처럼 그는 내게 깜깜한 밤에도 길을 보여주는 북극성이었고, 울화가 치미는 속내를 털어놓고 치기를 부리고 싶은 선배였고, 연애를 걸고 싶은 진짜 남자였다. 그러니 2003년 2월 그의 부음을 듣고 부레가 끓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개인적인 욕심과 무관하더라도, 우리 문단에 그대로 있어야 할 어른이 아니었던가. 진짜 어른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2월이 왔다. 나는 한동안 그의 글 속에서 여투어 둔 마음을 담아 기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 글이 축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락서산의 한 대목으로 감히 축문을 갈음한다.
  

잘 있어라 옛집,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옛집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 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있었다. [현대문학, 197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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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 2010-02-0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문구작가처럼 살고싶다고 했었지? 요즘 너를 보면 많이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2월이구나.

굿바이 2010-02-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닮는다....나잇살과 주름살?^^ 선생님의 글이 그리워서인지, 아니면 맴돌기만하는 내가 못마땅해서인지, 2월이면 어김없이 멜랑꼴리해져. ㅜ.ㅜ
 
<불만합창단>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만합창단 - 세상을 바꾸는 불만쟁이들의 유쾌한 반란
김이혜연, 곽현지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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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조직은 강하고, 개인은 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개인이 조직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나를 설명함에 있어, 내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관계에서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나라는 사람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노력들이 창피하다는 사실과 어떤 관계도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나는 내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온전한 개인으로서 나를 설명하고, 인정받으려고 했다. 물론 이러한 발상도 유치찬란 혹은 가오(?)였다는 사실을 지금은 뼈저리게 통감하지만, 여튼 그래서 선택했던 일이 사회운동가,정도로 불릴 그런일이었다.  

거기서 나는 박원순선생님을 만났다. 상상했던것 보다 몇 갑절은 강철같은 선생님에게서 나는 뭐랄까 힘을 얻었었고,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매우 긍정적일 것이라는 너무 쉬운 착각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의 내 상념들과 현재의 나를, 이 책의 형식을 빌려 노래하자면 아래와 같다. 

희망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어떤 고백보다 달콤했었지 / 내 눈을 바라보며 거짓말하는 당신, 그래도 사랑해 / 웃자고 시작한 일에 죽자고 달려드니 남은 것은 마이너스 통장과 위장약 / 내 눈을 바라보던 당신의 두려움, 그래도 사랑해 / 진심은 통할거라 내 마음을 다 드러내니 그것조차 자기기만이라고 했었지 / 내 눈을 바라보던 당신의 탐구심, 그래도 사랑해 / 40킬로 쌀포대를 한 시간을 걸어 배달해준 할머니의 집에는 젊은 아들이 자고 있었지 / 내 눈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친 당신의 연기, 그래도 사랑해 / 혼자서 아이를 낳아 분유값이 없다고 금반지를 내어 주니 다른 남자와 커플링을 맞췄더군 / 내 눈을 바라보던 너의 절절함, 그래도 사랑해 / 공무원의 입맛에 맞는 기획서를 써오라하네 / 내 눈을 바라보던 당신의 피곤함, 그래도 사랑해 / 기부금 영수증을 아들 이름으로 만들어 달라던 타워팰리스에 사는 아주머니 / 내 눈을 바라보던 당신의 알뜰함, 그래도 사랑해 / 수족을 쓸 수 없어 기증을 못한다고 찾아간 집에서 쓰레기 두 가마니를 내게 건낸 아저씨 / 내 눈을 바라보던 당신의 불편함, 그래도 사랑해 / 약값이 없어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고 해서 버스요금까지 털어주고 걸어가는 내앞에서 택시를 타던 할아버지 / 내 눈을 바라보던 당신의 유쾌함, 그래도 사랑해 / 한 번만 믿어주면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너를 천 번은 믿었건만 / 내 눈을 바라보며 인내를 가르치는 당신, 그래도 사랑해 / 우리는 안전한 곳에서만 구호를 외쳤네 / 우리는 우리를 사랑했네

노래가 끝난 줄 알았는데, 몇 소절이 더 남았다. 마지막 몇 소절은 이 책을 쓴 저자와 이 책을 만든 출판사를 향한 것이다. 

사회운동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네 / 큰 그림을 그려주면 작은 그림은 알아서 그리라 하네 / 요즘 운동의 대세는 방관인가 보네 / 대중을 신뢰하는 것과 대중속으로 들어가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것 같네 / 보고서로도 충분할 내용을 책으로 출간하네 / 눈으로 보이는 실적에 연연하는 그대들이 안쓰러웠네 / 내용이 중요하니까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철학을 지닌 듯한 출판사 /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네 / 기획 의도를 정말 철저히 숨긴 것일까 / 편집자는 말이 없네 / 어쩌면 나는 다시는 시대의 창에서 출간한 책들은 읽지 않을 것 같네 / 이제는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나를, 나는 사랑하기로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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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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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으레 터널을 만나게 된다. 어디론가 뚫려있는 터널은 이제껏 조우한 고만고만한 경관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풍경으로 진입하는, 그래서 그 길이와 무관하게 항상 일정한 두려움과 기대를 갖게 한다. 이때 터널의 입구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터널 뒤의 세상과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의 신경증이라면, 터널안에서의 기대는 현실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망상의 신경증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여행은, 현실에서 맞이하는 터널과 같은 것이다. 답답한 실존으로서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며, 숙명처럼 새로운 것들을 만날 수 있는, 끊임없이 불안하고 끝없이 설레는 정신병. 하므로 여행에 거는 기대는 처음부터 측정이 불가할 수 밖에 없고 떠나는 자의 기쁨이 여행지에서도 온전하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의 탈출을 조금이라도 도와 줄 조력자를 구하게 되는 것이리라. 가장 저렴하고 신뢰할 수 있는 한 권의 책!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처음 채우게 될 어긋난 단추일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엘리아스 카네티를 통해 만난 모로코는 여행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수십개의 불편함(예로 언어의 문제, 바가지 요금, 불친절한 여행사 직원, 난방시설이 고장난 호텔, 지독한 모기때, 잃어버린 여권 등등)보다 더 불편했다. 그러니 불편이라는 단어는 내가 작가에게 갖는 호의적인 감정의 마지막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책을 읽는 동안 힘들었다. 조금 지난 일이지만 한국의 중견작가가 집필한 인도 기행서를 읽을 때의 악몽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를 시작으로 그를 답습한 인도 기행서가 무수히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한결같이 슬프고, 비밀스럽고, 무기력하고, 가난한 인도의 이야기들이.

작가는 모로코의 오래된 도시 마라케시를 천천히 걸으며 낙타가 한끼 식사거리로 팔리는 낙타 시장에서 침통해 하고, 성고문에 시달리는 나귀의 오후에 구토를 느끼며, 수치심을 가난과 바꾼 거리의 아이들에게 동전을 주고, 히잡속에 감추어진 여자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뻔뻔하지만 천진한 젊은 실업자를 위해 편지를 쓰고, 거지인지 성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일개의 무리들을 예의바르게 관찰하고, 아내의 아랫도리를 팔아먹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처럼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은 모로코라는 단어가 내 마음에 새겨놓은 기표를 말끔히 지워내는데 충분했다. 아니 저항이 없다면 새로운 기표를 만들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는 왜 끝까지 그의 표현처럼 성실하지만 무정한 여행자,로 머무를 수 밖에 없었을까? 나는 그에게 쓸데없는 혐의를 씌우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의 차례와 마주보는 지면에 그려진 마라케시의 도시 그림을 손으로 짚어 보았다.  

역설적으로 이 책의 글과 사진을 통틀어 나는 이 그림이 가장 좋았다. 이 도시 그림에는 위쪽부터 밥 두칼라 사원, 벤 유수프 사원, 제마알프나 광장, 쿠르비아 사원, 밥 아게나우, 바히아 왕궁등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어느 한 시절, 그림의 사원들에서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성자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나누어 주었을 것이며, 수많은 학문이 연구되고 그들의 문화가 꽃을 피웠을 것이다. 그림의 왕궁에서는 강한 왕이 태어나 나라를 지키고 외국과 교류했을 것이며, 교육을 장려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림의 광장에서는 명민한 이야기꾼이 영광의 역사를 이야기하거나 영웅과 아름다운 공주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도시의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을 것이다. 그림에는 없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일하는 손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흥정으로 꾀를 겨루고 시장에서 기술을 겨루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내가 작가에게, 적어도 품격있고 명망 있는 어른으로서의 그에게 기대했던 여행기는 낡은 성곽의 돌 하나, 광장의 돌탑 하나에서도 세월의 암호를 해독해서 보여주는 여행기였다. 나 같은 사람은 모로코를 옆집처럼 드나들어도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그런 여행기, 잊혀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오도된 모로코를 그의 유려한 문장으로 온전히 살려낸 시간을 뛰어넘는 여행기, 그래서 나처럼 모로코라는 도시를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또는 앞으로 그곳을 찾을 사람들에게 작가가 보지 못한 이상의 것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는 여행기 말이다.

혹자가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며, 쓸데없는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또 말하고 싶다. 내게 현실을 홀딱 벗겨 보여 줄 여행기라면 나는 읽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내가 모로코에 가면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공항에 도착해서 부터 지저분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며, 거지를 만나게 될 것이고, 지친 낙타와 나귀도 보게 될 것이고, 지겹도록 히잡을 둘러쓴 여자들과 마주 칠 것이고, 매춘부도 보게 될 것이라고. 나의 관음증으로 말한다면 절대 그대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여기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어렵게 구축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로 이 책의 리뷰를 쓰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식으로 들여다 볼 필요도 없으며 그렇게 읽혀질 이유도 없다. 내가 실로 이 책을 읽으며 작고한 작가에게 어설픈 날을 세워가며 경계하는 이유는, 작가의 높은 명성과 본보기 될 만한 글쓰기에 휘둘려 생각없이 이 책을 베끼는 모로코 여행기가 넘쳐나지는 않을까,하는 기우 때문이다. 관음증이라면 대가의 그것 하나로 충분하다. 그런 것이라면 정말이지 그만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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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1-2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제목도 지독하게 낯선 책들.
통찰한듯 낯선 것들을 수렴하면서 이토록 자의식 강한 사람이 누구였을까하고 잠시 생각합니다. 하하
무수한 구상 추상의 인물들, 누구였을까..하하
굿바이님이 닮은 사람, 굿바이님을 닮은 사람.


굿바이 2010-01-2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는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닮고 싶은 사람들이야 너무 많은데, 다행스럽게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았고, 그리고 저를 닮은 사람이라....아마 없을거예요. 저는 좀..... 많이 실망스러운 사람이거든요.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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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시적 순간이란 것과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
갑자기 사방이 특정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느낌, 그 순간의 기억은 언제 꺼내 보아도 동일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특별한 시간이 존재한다. 나는 그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단어를 시에 삽입하듯, 내 기억에서는 그 순간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특정한 이미지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깡깡 얼어붙은 하늘에서 무언가 쏟아질 것 같았고, 내 손에는 기형도의 시집이 들려 있었고, 분홍색 스웨터는 추위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그 아이의 손은 하얗고 부드럽고 길었다.
  

쥐불놀이

- 겨울 版畵 5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 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시인과의 지독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내게 인연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 인연은 어긋남의 다른 기표였다. 내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그의 유년시절의 상처와 우울한 정열과 못다 이룬 사랑에 통감하며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죽은자였다. 하여 내가 그에게 표할 수 있는 경의는 그의 시를 잊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손이 유난히 고왔던 그 녀석과의 인연도 마침표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 이야기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길을 잃고 이야기속에 갇혀버렸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를 기억하는 이는 많다. 그의 한 권 뿐인 시집에 찬사를 보내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기형도가 고통스럽다. 그의 시는 내 삶의 중요한 어느 부분마다 불쑥불쑥 찾아와 생채기를 내놓고도 아무런 복수도 할 수 없게 너무 쓸쓸히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다. 미워할 수도 없이 힘이 빠진 말간 얼굴을 하고 말이다. 
이미 겪은 고통이 아무리 잔인한 것이었다고 해도 덤덤하게 여겨질 날이 올 것이라는,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고 해도 나는 또 먹고 자는 일을 반복하리라는 사실이 오늘 덜컥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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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1-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각의 기억, 후각의 기억, 청각의 기억.
기억이란 감각의 영역.

굿바이님의 '시적순간'이라는 말.
촌철살인.
마르셀 프루스트가 맡는 냄새.



굿바이 2010-01-2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다른 분들의 시적순간,이 궁금해졌어요. 언제 한 번 물어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