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다보니 시적 순간이란 것과 대면하게 될 때가 있다.
갑자기 사방이 특정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느낌, 그 순간의 기억은 언제 꺼내 보아도 동일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특별한 시간이 존재한다. 나는 그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단어를 시에 삽입하듯, 내 기억에서는 그 순간이 어느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특정한 이미지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깡깡 얼어붙은 하늘에서 무언가 쏟아질 것 같았고, 내 손에는 기형도의 시집이 들려 있었고, 분홍색 스웨터는 추위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그 아이의 손은 하얗고 부드럽고 길었다.
  

쥐불놀이

- 겨울 版畵 5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 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시인과의 지독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내게 인연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 인연은 어긋남의 다른 기표였다. 내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그의 유년시절의 상처와 우울한 정열과 못다 이룬 사랑에 통감하며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죽은자였다. 하여 내가 그에게 표할 수 있는 경의는 그의 시를 잊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손이 유난히 고왔던 그 녀석과의 인연도 마침표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 이야기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길을 잃고 이야기속에 갇혀버렸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를 기억하는 이는 많다. 그의 한 권 뿐인 시집에 찬사를 보내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기형도가 고통스럽다. 그의 시는 내 삶의 중요한 어느 부분마다 불쑥불쑥 찾아와 생채기를 내놓고도 아무런 복수도 할 수 없게 너무 쓸쓸히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있다. 미워할 수도 없이 힘이 빠진 말간 얼굴을 하고 말이다. 
이미 겪은 고통이 아무리 잔인한 것이었다고 해도 덤덤하게 여겨질 날이 올 것이라는,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고 해도 나는 또 먹고 자는 일을 반복하리라는 사실이 오늘 덜컥 서.럽.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우 2010-01-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각의 기억, 후각의 기억, 청각의 기억.
기억이란 감각의 영역.

굿바이님의 '시적순간'이라는 말.
촌철살인.
마르셀 프루스트가 맡는 냄새.



굿바이 2010-01-2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다른 분들의 시적순간,이 궁금해졌어요. 언제 한 번 물어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