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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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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낯설지만, 헌법이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요즘처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나 싶다. 정치적 분쟁이 헌법재판소를 통해 가르마 타지는 시절을 살면서 몇 번이고 "헌법이란 국가적 공동체의 존재 형태와 기본적 가치 질서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법규적인 논리 체계로 정립한 국가의 기본법"이라는 개념을 되뇌어 봤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그 때마다 [국민적 합의]라는 대목에서 여러차례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기억이 있고, 답답했던 적이 있었지만, 무지를 벗삼아 살아온 세월이 오래된지라, 그렇게 찾지 못한 답들을 한 켠으로 미루어 두었던 적도 많았다. 여하튼, 헌법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던 시점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딱히 난독증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고, [권력의 정당성]이라는 것에 의구심이 들었던 시점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따라서, 헌법을 대하며 느꼈던 답답함은 헌법 텍스트의 문제라기보다, 헌법을 해석하고 사용하는 권력 그리고 그것에 강제당하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표상 정치]의 한계와 [표상 정치]를 극복하려는 기획들을 설명하고, 헌법의 본질과 헌법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롭고 유용한 책이었다.  

이 책은 1.헌법이란 무엇인가, 2.헌법적 사고의 원형(고전적 헌정주의의 두 예), 3.헌정주의의 근대적 혁신, 4.헌법정치의 새로운 도전과 응전,이라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칫 현학적으로 빠질 수 있는 내용들이었음에도, 이해하기 쉬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어,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고, 헌법이라는, 상념으로 혹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거리감을 덜어주기 위해 사용한 친절한 텍스트는 많은 부분에서 독자를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식인이나 권력자들만이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애매하고 난해하게 쓰여진게 아닌가 싶은, 그런 의혹을 받아도 무방해 보이는 것들을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게 설명하려는 의지, 그것 자체가 바로 표상 정치의 왜곡을 피하려는 필자의 노력이 아닌가 싶었다. 또한, 각 장이 마무리 되는 지점에 -깊이 읽기, 라는 짧지만 거침없고 많은 부분 적확한 분석은 헌법과 표상 정치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4장에서 다뤄진 헌법 정치의 새로운 도전과 응전 편은, 헌정주의의 대응 방향 그리고 표상 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매우 유익한 읽을거리였다. 물론 필자가 제시한 표상 정치의 새로운 모델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기본 규범 위에 국제 사회가 존재하고, 집행력 있는 중간 규범 위에 주권 국가가 존재하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좀 더 강한 규범 위에 지역 공동체가 존재하는 모습이다" 라는 대목에서 잠시 힘이 빠지면서 공허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헌법에 입각해, 각각의 단위에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며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려고 할 때 이만한 대안도 없을 듯 싶다. 전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가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유난히 [대안]을 강조하는 센스(?)를 종종 발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언제부터인지 타인의 발언이 갖는 진정성보다 대안에 더 열을 올리고, 더 나아가 흠집을 내려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가릴 것이 있으면 뭐든 가리고 싶을 만큼 창피해진다. 여튼, 맺는 말에 적시된, 헌정주의의 실천을 위하여 주의할 점,이라는 글 역시 이 책을 유용하게 읽히게 하는 텍스트임에 부족함이 없었다. 헌정주의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표상 정치의 한계와 극복이라는 주제를 잘 풀어낸 책이어서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일독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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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아
 
비가 퍼붓고 눈이 쏟아져도 남녘에 네가 있어 얼마나 든든했던지.
칠순을 훌쩍 넘긴 노부부를 네게 맡기고 돌아서는 염치없는 자식은, 나보다 의젓한 네가, 고맙고 또 고마웠었다. 그렇게 13년이라는 세월, 돌아보면, 사는 일이 네게도 고역이었다는 사실을, 어찌 몰랐겠니.  

너를 훔치려고 담을 넘은 개도둑이 너에게 독극물을 먹이고, 칼로 목언저리를 베어 끌고 가려던 새벽, 언제나 새벽 4시면 너와 바닷가 산책을 나가시는 아버지가 마당에 나올 때 까지, 독극물을 먹고도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이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버티다가,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뛰어 나오시는 것을 보고 마당에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겁을 하고 또 살아주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그렇게 네가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을 받고 깨어나기를 3일. 그러나, 그때 나는 몰랐다. 네가 깨어나기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이별의 시작이었구나. 

이후, 독극물이 퍼진 장기에 종양이 생기고,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복수가 차기 시작하면서,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어야 했고, 약으로 그 시간들을 버텨냈으니, 그 일이 있은 후 5년은 네가 덤으로 버텨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몇일 전 더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혈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내가 내려갈 때까지 버텨달라고 했는데, 오늘 너의 혼백이 흰 눈처럼 쏟아지는구나, 세상이 희여도 너무 흰 상여로구나. 

눈송이 같은 내 사랑, 잘가라, 예기치 않은 어떤 날 불쑥 네가 없다는 사실이,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봄 눈처럼 속절없이 내 마음을 흔들어도, 그렇게 또 나는 살아갈 것이고, 어느 날에는 또 희미해 질 것이지만, 눈송이 같은 내 사랑, 잘가라, 남녘에, 이렇게 흰 울음으로 너를 묻는다.    
 
내 사랑 백진아 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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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3-22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진이가, 또 차마 언니 손으로 속상한 일 하게 할 수 없어서, 그랬나봐요.
녀석, 끝까지 늠름하고 멋있네. 흰 눈과 함께 갔네.

오늘은 맘껏 속상해해요 언니. 마침, 펑펑 눈도 내리고.

굿바이 2010-03-23 00:44   좋아요 0 | URL
그랬을까? 그랬으면 내가 더 미안하지. 집에 내려갔어도, 안락사 시킬 수 있었을까 싶어. 주사기 들고 울기만 했을 것 같다. 해도 잘 들고, 바람도 좋은 곳으로 데려가 묻어주셨다고, 아버지가 그러시네.

마음 써 줘서 고마워.

L.SHIN 2010-03-22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열받네, 그 개도둑 새끼들...

전에 키우던 우리집 개도, 어떤 미친 노인 부부가 3층에서 떨어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안 가서 죽었는데...

굿바이 2010-03-23 00:48   좋아요 0 | URL
L.SHIN님,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많이 안쓰러웠겠습니다.
13년을 같이 한 녀석이라 우리 백진이는 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내니, 마음이 털썩 주저앉습니다.

마음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2010-03-23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3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0-03-2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엉, 저 지금 지붕킥 해리처럼 울고 싶어요.

굿바이 2010-03-23 11:53   좋아요 0 | URL
치니님, 아주 죽겠습니다. 마음이 참.... 살아도, 살아도, 이별은 감당이 안됩니다.

또다른세상 2010-03-2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이쁜 녀석이네요.. ㅠㅠㅠㅠ 좋은 곳으로 가서 편안히 지낼겁니다.

우리집 똥강아지녀석도 집나가서 보름만에 컴백. 정말 속이 다 문드러지는 줄 알았답니다. 얼마나 찾으러 다니고, 울기는 또 얼마나 울었던지..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해요~ 정말 울집 막내 동생이랍니다. 헌데 어제 저녁 놀다가 검은 혹을 발견 혹 집나갔다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엄마랑 잔뜩 겁먹었는데 아침에 다시 살펴보니 흡혈진드기!!! 출근전부터 경기날뻔 했어요. 당장 퇴근하고, 동물병원갈껀데 큰 탈없어야할텐데 말이죠.

제 마음이 이런데 님 마음은 어떨지.. 세상에서 말못하는 동물 학대하는 인간들 싸잡아 다 죽여버려야 합니다!!! 흠~ 망할 개장수같으니라구.

굿바이 2010-03-23 21:57   좋아요 0 | URL
예쁜 강아지랑 동물병원은 잘 다녀오셨나요? 진드기는 제거만 잘 해주면 된다고 알고 있는데, 치료 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 써 주셔서 우리 백진이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새초롬너구리 2010-03-23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어떻게 위로드려야할지..저도 무지하게 사랑하는, 저를 행복하게 해주고 웃게만들어주는 강아지가 있는지라.. 사진을 보니 귀도 쫑긋, 선도 곱고 털도 고운, 아주 예쁜네요. 표정도 행복한 느낌인지라..착하게 강하게 열심히 자신의 생을 다했으니, 분명!!!! 하느님도 백진이에게 잘해줄거예요!!!!

굿바이 2010-03-23 22:01   좋아요 0 | URL
이렇게, 마음을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예쁜 강아지 키우시는 것 같은데, 하루하루 좋은 기억들 많이 만드시면 좋겠습니다. 이곳에 있을 때도 사랑을 많이 받았던 녀석이었는데, 먼 길 가면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風流男兒 2010-03-25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누나.. 난 이름이 백진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네요, 숨을 거둘 때까지 백진이는 가족만 생각한 것 같아요. 그저 두번, 세번, 네번, 다섯번, 읽고 또 읽고 있네요. 참 또랑또랑한 밤을 보내게 되겠어요 오늘은 특히.

굿바이 2010-03-25 17:15   좋아요 0 | URL
괜히 잠 설치게 했나보다.... 또랑또랑한 밤 보내고, 출근은 잘 했니? 음...나도 누군가에게 백진이처럼 행동할 수 있으면 좋겠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말이야.

후니마미 2010-04-0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덤으로 살았다는 그 5년이 백진이
가족들에게 남긴 선물이란 생각이 드네요
빨리 포기하지 않고 어쨌든간에 살아주어서 이별의 시간을 예감하게 해준 생명.
저는 어릴 때 집에 키우던 개가 있었지만
동물에게 별 애정을 갖지 못하고 있는데 이 글 읽으니 키우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도 생각이 나겠어요. 믿음직한 친구.
 

선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전철에서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이라는 책을 보고 있었다. 선배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나를 불러냈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또 나는 그렇게 거절하고 돌아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여하간 찹찹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뭉뚱그려진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역부터 내 옆에 앉으셨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내게 6.0 이상의 강도로 다가오신 그분, 할아버지 혹은 노신사와의 벼락같은 조우는 이러했다.  

그분 : 독서하는데, 방해가... 

나 : 네? (화들짝 반, 적개심 반) 

그분 : 그 책 재미있나요? 꽤 집중해서 보는 것 같아서. 

나 : 아~ 네, 아~ 재미있습니다. 

그분 : 책을 많이 보나요? 학생은? 

나 : 아~ 그건 아니구요, 그리고 학생도 아니구요, 그냥, 그저 심심하고 무료해서요. (버벅버벅)

그분 : 제목이?  

나 :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입니다. 정선태씨가 쓴 글이구요. 

그분 : 응...그런데 겁이 많아 보여요? 인상도 그렇고, 자세도 그렇고. (미소) 

나 : (뭐래? 작업이래? 아~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할아버지가...) 뭐..그다지... 

그분 : 멍이 잘 들지 않나요?  

나 : 아~ 네, 잘 들어요. 몸이 좀 부실해서요. 

그분 : 마음에 멍도 잘 들지 않나요? 

나 : (이건 또 뭐래? 도를 믿으세요, 뭐 그런 부류의 할아버지? 그러기엔, 세련된, 어...신종?) 아뇨, 마음에 멍이라니...잘...그런데 저 이제 내릴겁니다. (뭐냐? 왜 내려? 여기가 어디래?) 

그분 : 괜히 놀래켰나 보네요. 몸이 안좋으면, 아직 젊어 보이니까 꾸준히 운동하세요. 그리고, 호신술 배워봐요, 세상이 참 무섭잖아요. 낙법도 배워보구요. 잘 넘어지는 사람들은 그거, 낙법이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그리고, 책도 많이 읽으면 좋긴한데, 실전에서 강해야지요. 사람 많이 만나요. 아파도 보고, 다쳐도 봐야지요. 자꾸 아프고 다치다 보면 마음의 낙법이라는 것도 배우게 되요. 안다칠 수는 없어요, 사는 일이, 그러니까 잘 다치는 법을 배워야죠.  

나 :............. 

내릴 역도 아니었는데, 냅다 내려 버렸다. 마음의 낙법이라, 마음의 낙법이라, 잘 다치는 법.........할아버지 누구세요? 도대체? 누구시랍니까? 그리고 여기는 어디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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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 2010-03-2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그 할아버지 진짜 누구실까요? 마음의 낙법이라니... 표현도 그럴싸!
방금 박민규의 [절(용넷이있는 한자)]을 읽었는데 숨겨진 무림의 고수아니신지?
언니 함 봐야는데 공부하느라 마음의 낙법은 커녕 여유도 찾기 힘들어요. ㅠㅠ

굿바이 2010-03-2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살짝 얼굴봐서 좋더라~ 캬아~

후니마미 2010-04-0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은 서울에 사시니까 경계심이 더 강하신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일까요?
재빨리 내리신 굿바이 님 못지않게 궁금증 유발하는 분이네요
아마 굿바이님이 예쁘시니까 거기다 책을 보고 있으니까
호감이 생기긴 했나 봐요
근데 할아버지라서 ㅎㅎㅎ

요즘은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쪽은.
 
<리영희프리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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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상념들을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막막하다. 어차피 이 책에 글을 올린 필자들처럼 리영희,라는 프리즘으로 현실 사회를 진단할 능력이 없음을 제 깜냥에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개 숙여 큰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살았던 시절보다 어쩌면 더 가망 없어진 시절을 어찌 살아내야 하는지 무슨 나침반 하나라도 거져 얻고 싶었다. 끈 떨어진 마음이 갈 곳 몰라 떠돌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 덜 된 꼴을 이렇게도 확인하는 요즘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모호한(?) 성격의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그곳에 있던 쌘(지금 보면 무섭지도, 선동적이지도 않지만 그땐 그렇게 보였다) 책들을 읽기 시작할 무렵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배는 나를 잘 못 골랐다.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읽은 후, 되려 쌘 책들과 멀어졌고, 선배들의 주입식 교육을 의심했고, 자연스럽게 주변인으로 겉돌기 시작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병권은 이 책에 적고 있다.  

정녕 그러했다! 절대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우고, 익히던 시절에 마침표를 찍게 한 사람, 내가 안다고 믿었던 신, 인간, 사회구조, 주의, 냉전, 자본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 사람, 그가 리영희,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IMF라는 재갈이 물려, 무한 경쟁이라는 시절을 벼락처럼 맞아야 했고, 그에 따라 수적으로는 다수일지라도 구조적으로는 소수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곁을 멤돌면서, 국가도 조직이라고 본다면, 조직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어떻게 개인들을 위축시키는지, 조직원으로서 더 잘 조련되는지를 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조련에 동원된 언론, 지식인 사회,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 꾸준히 봐야만 했다. 리영희 선생님이 전 삶을 걸고 완강하게 싸운 [우상]을 떼거지로 목도한 시절이었다. 또한, 사회가 지능적으로 잔인하다는 것도, 그에 대한 각 개인의 대비가 이렇게 허술했구나,라는 사실도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경험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이 자리를 잡고 가망 없는 시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시절 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보험설계사 한 분을 만났다. 요즘처럼 영업이 힘든 건, 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라고 했다. 해약은 많고, 가입은 적다고. 진심은 아니었지만, 경제 대통령 시절이고,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고, 토건 사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 경제가 그리 얼어붙었을까요,라고 나는 물었다. 내 음험한 물음에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니까요,가 그분의 대답이었다. 중산층이 무너지다뇨,라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싶었지만, 그분이 무슨 죄라고 내 비아냥을 참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만두었다.  

여튼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중산층뿐일까? 아니 중산층이라 정의되는 계급이 무너진다는 것이 경제적 의미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구조적 소수자로 내몰리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나는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스승에게, 예의없는 태도로, 스승이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가망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최장집의 말을 빌려, 권위주의 시대처럼 명백한 부정의 때문에 정의가 쉽게 파악되는 시절도 아니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을 위한 질서도 그 외피를 바꿨을지언정 변하지 않은, 그러기에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우르르 몰려 다니며 속고 속이는 시절이라고.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평화의 옷을 입고, 글로벌이라는 이름이 무한 경쟁을 재촉하고,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사교육에 올인해야 하고, 조직의 무탈을 위해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개인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투자와 저축보다 투기만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절이라고. 이보다 가망 없는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고.

생각없는 노예로 죽어가는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깨어있는 삶을 그리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을 통해 각성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정작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체제, 자본, 시장이라는 [우상]앞에서 정녕 어찌해야 하는지, 쪽팔림이라도 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두려움과 기갈로 우왕자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따져 묻지도 말라는[우상]의 엄포앞에서 작은 용기, 내 삶이 피해입지 않을 정도의 용기로 맞섰으니까, 내가 할 몫은 다한거 아니냐고, 그런데 현실은 갈수록 왜 이모양이냐고, 계속 불평만을 늘어놓는 나에게, 삶과 앎이 불일치한 너는 리영희,를 왜 읽었느냐고, 리영희,가 그저 지적 유희로 소비되었던 것이었냐고,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네가 읽은 책 속의 어떤 글 한 줄도 너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면 그 책들은 무엇하려 읽은 것이냐고, 이제는 선생이 다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생의 글이, 선생의 삶이 여전히 내 주위를 떠돌며 나를 부끄럽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한, 적어도 가망 없는 시절을 핑계삼아 어딘가에 숨는 일도 이제는 어려울 듯 싶다. 화끈거리는 마음은 쥐구멍 앞을 서성이지만 그도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 사랑을 목발 짚어 살아온 어느 시인처럼, 선생님을 목발 짚어 살아보려는 후학, 아니 후학이라고 혼자 우기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반가우실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다독이고 독려해야 할 청춘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직 많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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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호락 가지 않는 겨울이라서, 호락호락 오지 않는 봄이라서, 나는 좋아, 나는 좋아,라고 눈 내리는 밤, 한강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무엇에 그리 쉽게 끌려다니던 마음이었는지, 나는 버티는 것들은 뭐든 대견하다고 토닥거리고, 심지어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오래된 인형들에게 마저 눈인사를 하고, 찬물을 들이키고는 자리에 누웠다. 별 없는 밤은 잠도 별 일이 없는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되려 불면도 대견해 하며 뒤척이다가 맞은 아침. 출근길에 귤 껍질을 버리려고 쓰레기 분리수거장 한 켠에 놓인 음식물 쓰레기통을 찾으니,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덮여있는 쓰레기통 옆에 무언가 떨어져 있다. 들여다 보니, 모시조개다. 어느 짠 물에도, 어느 뜨거운 국물에도 버텼는지, 조개는 몸을 닫고 있었다. 거 참, 봄도 버티니까 너도 버텼구나,싶어 모시조개를 주워 다시 찬찬히 살핀다. 조개의 발인지, 손인지, 혀인지, 아주 조금 벌어진 틈으로 붉은 살이 삐죽 나와있다.  

버티겠다고, 제 살을 끊다니, 제 혀를 물다니, 그렇게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살살 풀어놓은 소금물에 다 토해내지, 꾸역꾸역 토해내기라도 하지, 쩍 벌어진 몰골이 던접스럽더라도, 저렇게 버려질 것을, 오롯이 버려지기만 할 것이라는 것을, 그대의 치아에 씹혀보지도 못하고, 그대의 내장 안에서 굴러본 추억도 없이 저리 버려질 것을 몰랐더란 말이지, 틀렸구나. 내가 틀렸어. 호락호락 오지 않고, 버티고 또 버텨서, 기다리고 애닯게 온다고, 나는 좋아, 나는 좋아,라고 하면 안되는 거였구나.  

쩍 벌어진 봄이여, 호락호락 와라. 그래서 와락 안겨라. 그리고, 나 없이 어디선가 늙어가는 그대들이여, 벌어진 봄 틈으로 마음 한 자락 흘려다오. 잘근잘근 씹고, 혀로 얼려서, 넘실거리는 살 갈피마다 꽂아줄터이니, 그대여 그리고 그대들이여, 마음 한 자락 토해내서 보내주어라. 봄, 그래도 봄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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