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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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에는 일종의 체념과 허무가 포함되기 마련인가 보다.
그런 연유로 반백이 되어버린 내 아버지의 말씀은 항용 벼락처럼 내 귓전을 치지만, 아버지의 뒷태는 흡사 안개처럼 흐려지기 일쑤다. 어쩌면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혜와 깨달음을 내 아버지를 통해 엿볼 수 있었으나 그 값으로 원치 않는 허무를 알아챘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내게 [관촌수필]은 또 다른 이름의 아버지이자 사라져버리는 것들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이의 심중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거론함에 있어,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충청도 사투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여담이지만 나는 한때 모든 농촌은 충청도라 믿었었다. 그만큼 그의 글은 살아 움직여 마음을 헤집고 들어온다. 허나 방언은 잘 알려진 특징일 뿐, 작가의 수사학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작가가 조부로부터 득한 한문의 수사학에 힘 있고 격조있는 문어체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관촌수필]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관촌수필이 한 권으로 묶여 있지만 여덟편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나, 작가가 집필한 다른 저서들 역시 단편의 형식을 갖춘 것을 볼 때, 그의 글은 단편으로서의 묘미가 가장 크다. 그것은 구어체적 특징 때문이다. 그의 글은 툭 터진 웃음보마냥 또는 사레들린 사람의 기침처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거기에 더해진 에피소드들은 풍성하며 반듯하고, 훈훈하며 가슴을 쥐어지르는 것들이다. 이만한 글의 성찬이 또 어디있겠는가.

[관촌수필]을 술회하는 마음이 모두 같을 수는 없겠으나, 나는 이 책의 독자라면 누구나 심중에 간직한 나무 한 그루를 꺼내 보지 않았을까 싶다. 따라서 일락서산(日落西山)과 관산추정(關山芻丁)은 좀 더 각별했다. 조부를 상징하는 왕소나무, 어머니를 상징하는 감나무 그리고 이제 홀로 고향을 지키는 복산이라는 구부러진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분에 취해 내 유년기의 그때로 잠깐 헛발을 들여 놓고 허망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은 제 깜냥에도 친가에 있던 감나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몰락하는 존재의 운명앞에서 그리고 삭정이처럼 간신히 매달려있는 것들 앞에서 나는 비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옹점, 녹수청산(綠水靑山)의 대복, 공산토월(空山吐月)의 석공이라는 등장인물들은 책을 덮고도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옹점과 대복 그리고 석공처럼 무엇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리고 무엇도 채근하지 않으며, 언제든 달려가면 덥썩 끌어안아 줄 인연들을 삶의 어느 지점마다 매듭지어놓은 작가가 한없이 부러웠다. 

이 책을, 작고한 작가를, 아련하고 서운한 풍경을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이십년은 묵은 친구와 밤을 세워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그만큼 작가의 모든 것에 각별하다. 이는 누구의 말처럼 그는 내게 깜깜한 밤에도 길을 보여주는 북극성이었고, 울화가 치미는 속내를 털어놓고 치기를 부리고 싶은 선배였고, 연애를 걸고 싶은 진짜 남자였다. 그러니 2003년 2월 그의 부음을 듣고 부레가 끓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개인적인 욕심과 무관하더라도, 우리 문단에 그대로 있어야 할 어른이 아니었던가. 진짜 어른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2월이 왔다. 나는 한동안 그의 글 속에서 여투어 둔 마음을 담아 기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 글이 축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락서산의 한 대목으로 감히 축문을 갈음한다.
  

잘 있어라 옛집,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옛집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 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있었다. [현대문학, 197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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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 2010-02-0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문구작가처럼 살고싶다고 했었지? 요즘 너를 보면 많이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2월이구나.

굿바이 2010-02-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닮는다....나잇살과 주름살?^^ 선생님의 글이 그리워서인지, 아니면 맴돌기만하는 내가 못마땅해서인지, 2월이면 어김없이 멜랑꼴리해져.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