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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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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 무엇이더냐고 묻는다면, 그는 [거대한 바위에 들어있는 형상을 꺼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시가 무엇이오, 그리고 철학이 무엇이란 말이오,라고 이 책의 저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삶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상에서 우발적인 사건을 접하게 되는, 의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준비되지도 않은 어느 시점, 그렇게 벼락 맞듯이 삶을 뒤흔드는 사건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 그런 순간들은 비젼으로서 제시된 이념과 구호들이 사실이라는 견고한 힘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순간들이다. 이 책에 소개된 유하의 [오징어]라는 시를 보자. "눈앞의 저 빛!/찬란한 저 빛/그러나/저건 죽음이다./의심하라/모오든 광명을!"  어떤 이유를 들이대서라도 [모오든 광명을]향해 기를 쓰고 달려들던,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자극하고 유효성을 제시하는지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몸과 마음을 다해 광명을 탐하던 내게 혹은 우리들에게, [욕망의 저 빛!],은 [죽음]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광명]을 [죽음]이라는 기표로 치환함으로써 시인은 [광명]을 낯설게 만든다. 낯설어짐은 삶을 긴장하게 만들고, 이 긴장은 우리를 두리번거리게 혹은 멈추게 한다. 그리고 낯선 풍경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시는 가치론적인 측면으로만 평가될 수 없다. 시에는 존재론적인 측면도 엄연히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시가 언제나 삶을 낯설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미학적 측면만이 강조될 수도 있고, 시의 목적성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런 다양성이 배제된다면 그건 또 다른 폭력이기에 시를 읽고 시적 감흥을 혹은 낯설어짐을 경험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취향에 맡기는 것이 온당하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떠한가? 철학은 이 점에서 시와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철학은 타자에게 건너가기 위해 또는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이 새로운 삶, 새로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기존의 정서와 사유를 거스르는 측면이 시보다 강하고, 지속가능한 실천을 끌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태생적 무게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철학도 기존 정서와 사유를 거스르지 않는 영역이 있지만 그 부분은 논외로 하자. 

이 책에 소개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일부분을 보면 "아르헨티나와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아이히만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은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할 수 없음은 그의 생각할 수 없음, 즉,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 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타자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아이히만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성실히 살해한 전범이다. 아이히만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지켜본 아렌트는 여타의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분노와는 달리, 아이히만의 엽기적 행각을 개인의 악마적 본성으로 규정하지 않고, 타자와의 소통할 수 없음 그리고 그 근본에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이 있음을 드러냈다. 다시 말해, 사유하지 않는, [무사유]가 [악]임을, 또한 그것은 아이히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향할 수 있는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마주하기 싫은 사실을 마주하게 하고, 그 낯설음을 강제하고, 이를 통해 사유하고 변화하기를 촉구하는 일련의 과정인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다. 시가 어떤 특정한 순간에 우리를 깨우는 죽비라면, 철학은 이 순간이 갖는 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시인들, 넘어설 수 없는 철학자들, 스스로 오라비라 이름 붙였던 그들앞에서 숱한 좌절을 한 내게 그럼에도 시를 읽어야 하고 사유해야 함을, 그래서 누구나 악일 수 있는 동시에 소수로 내몰릴 수 있는 현실에서 유연하면서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잃지 않기를 독려하는 이 책은 오랜만에 조우한 오라비처럼 반갑고 뜨거웠다. 역시나 오라비들의 즐겨찾기는 나를 실망시키지도 나를 우롱하지도 않는다. 다만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매우 애.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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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3-09 0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의 사변은 철학적이고 종장의 '매우 애닯다'는 시적이고.. 철학적 시읽기..

굿바이 2010-03-09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껏도 아닌 것이 뭐라도 행세하고 싶어 말만 길어집니다. ㅜ.ㅜ
 
<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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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규모와 무관하게, 한 집단안에서 리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코흘리개 시절의 경험이 증명하듯 그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도 힘들었었다. 하물며 결과에 따라 손익이 극명하게 갈리는 집단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우두머리는 필연적으로 비극적 상황을 즐기거나(?)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 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여튼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우두머리로 지목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역사를 훑던 주위를 둘러보건 답은 명확하다. [사랑]받거나, [공포]를 유발하거나, [사랑]도 받고 [공포]도 행사할 수 있거나. 물론 여기서 [공포]는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카리스마 정도로 하자. 현직 대통령을 그리고 고인이 되었거나 생존하지만 생계가 어려워지신 분들을 위 조건에 대입해보면 [사랑]과 [공포]를 동시에 거머쥔 분은 안타깝게도 없는 듯 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2009년을 떠올리면 개인적으로도 환난의 한 해였지만,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손으로 뽑고, 온전한 마음으로 지지를 보냈던 16대 대통령을 잃었고, 현직 대통령과 냉전적 보수세력의 부패와 오만을 목도해야 했고, 진보라 불려지는 세력들의 전략없는 정략에 기겁을 했고, 신자유주의에 눈 먼 우리들을 지켜봐야 했다. 참담함에 어이를 상실한 한 해였다. 주위에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전직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사랑해서 죄송하다고 했던 것 같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를 이렇게 치르는구나,싶다고. 치러야 할 대가가 내게도 남아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손호철교수의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를 읽는 동안, 불편했던 까닭을 나는 안다. 내 불편함의 절반은 나를 포함한 우리를 향한 것이고, 나머지 반은 저자를 향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해가 져야 비상을 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대중의 움직임에 대해 사후적 해석만을 할 뿐, 언제 대중은 분노하고 언제 대중은 침묵하는지, 알 수 없는 나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문장을 읽히는 대로만 읽고 받아들인다면 저자는 본인의 무력함을 탓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리 읽히지가 않는다. 물론 저자의 고백 속에 담긴 진정성에는 동의한다. 억측이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내게 읽히는 저자의 진정성은 이런 것이다. 첫째는 대중을 가늠할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대중을 향해 아둔하고 천박하다고 일갈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대중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이리라. 내 추측이 오독이 아니라고 단정짓고 위의 문장을 곱씹어 본다면 부인하고 싶지도 않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나 역시 내가 포함된 우리를 향해 얼마나 많은 삿대질과 저주를 퍼부었는가. 그에 비하면 저자의 탄식은 절창에 가깝다. 그렇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때로는 아둔하고 실익에 눈 먼 대중이 항상 소인배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이 정의와 소수를 지켜내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깍아내릴 수 없는 진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직 대통령의 정책을 서슴없이 비판하기도 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활동을 하는 집단이 어떻게 잘 못 끼워진 단추들을 풀 수 있는지 역사를 근거로 설명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한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물론 저자를 향해 그리고 명민하고 진보적인 성향을 띈 학자들을 향해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는 그대들은 이제껏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 들지만 그건 치기임에 분명하다. 이미 답은 있고, 행동해야 하는 시절만 남아 있는데,필요없는 전력 소모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혹여 답답하고 불온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담벼락을 상대로 하면 그만이다.   

3월이다. 그리고 봄이다. 봄이 그러한 것 처럼 나는 현정권의 자살골에도 설렌다. 자살골에라도 기대어 현정권의 무능과 부패와 오만이 평가받기를 바라는 못난 마음이다. 그리고 한편 걱정이 앞선다. 봄이 그러하듯, 곧 꽃이 필 것만 같은데 꽃샘추위에 여린 꽃망울들이 주춤거리는 것처럼, 전직 대통령이 옥쇄하여 다시 살려낸 정당과 정치인들이 결정골을 날릴 전략도 각오도 배짱도 없어 또다시 우리가 주춤거릴까봐 겁난다. 그렇지만 그래도 봄이다. 봄이기에 봄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언제나 봄이기만한 당신은 정작 봄을 믿는가? 나는 그것이 문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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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3-03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과 악수를 했지요.

치니 2010-03-0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굿바이 2010-03-03 13:14   좋아요 0 | URL
캬아~몸둘바를!

웽스북스 2010-03-0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댓글은 술김에 쓴 댓글이고

언니 리뷰 다시 읽어보니 그저 슬플 뿐이고
전 저 대중에 대한 부분 때문에 제가 했던 말들이 그저 마구 떠오르면서 속상해지네요.

하연이가 입학했고, 언니는 무려 입학 축하쇼까지했으니,
봄은 봄이죠. 봄이 봄인지는 모르겠지만.

굿바이 2010-03-0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쨔쓰까잉!

아렌트가 그랬니? [무사유]가 악이라고. 필연적으로 연대되어 있는 관계들인데, 참....

봄이 봄인지 실은 나도 모르겠지만, 희망을 처방전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조카가 입학을 하고, 또 내 조카들이 부딪쳐야하는 구조적 폭력들이 엄연히 보이는데, 이모에게 봄을 묻는 아이들에게, 이미지로서의 봄도 봄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역사의공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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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새책 [역사의 공간]을 접하기 얼마 전, 나는 지인과 함께 한국인의 [빨리빨리]라고 불려지는 습속에 대해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주장과 지인의 주장은 달랐는데, 나는 우리사회가 [빨리빨리]라는 사회적 리듬에 젖게 된 시점을 일제 강점기로 보았고, 지인은 군인에 의해 산업화가 본격화된 시점을 그 계기로 판단했다. 그때 나는 [빨리빨리]라는 것이 시간의 개념이라는 것을 주장의 근거로 가져왔었다. 분침과 초침으로 명확히 계산되고 누적될 수 있는 시간! 새로운 시간! 즉, 원형적 시간이 아닌 선형적 시간이 언제 역사의 공간에 등장했는지, 선형적 시간의 개념이 무엇을 목적으로 유포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초기 자본을 끌어들인 침략국 일본은 노동을 착취해 생산잉여를 극대화하려고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민중에게 강요했을 것이고, 근대화되지 못한 신체를 근대적 리듬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근면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제시했고, [빨리빨리]라는 사회적 리듬을 강제했을 것이다,가 내 주장이었다. 이진경의 [역사의 공간]은 이 개인적인 논쟁에 온전한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내 주장을 뒷받침해 줄 광범위한 사유를 던져주었다. 이 아니 어여쁠쏘냐! 

[역사의 공간]은 필자가 밝힌 것처럼 역사, 시간,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등의 공동성을 역사의 공간안에서 사유한 책이다. 필자의 사유가 워낙 광폭이고 또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을 소화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시공간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욕망을 새로운 시간 혹은 역사가 요구하는 욕망의 구도로 어떻게 편입시켰는지를 보여주는 부분과, 어떤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건 그 사회안에서 소수로, 타자로 존재했던 사람들을 향한 억압과 착취 그리고 혁명을 사유하는 부분은 선험적 지식의 양과 무관하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공포의 정치로 기억되는 시절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70년대에 태어났지만 70년대와 80년대를 버텨냈다고 할 수 없기에 나는 공포정치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권력이 어떤 유효성을 제시해 대중을 포섭하고 길들였는지를 체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내가 정치적 판단이 가능해진 시점의 한국은 민주화의 초입이었고, 내가 경제적 판단이 가능해진 시점은 IMF의 초입이었다. 하여 그당시 실존으로서의 먹고 사는 일이 어찌나 큰 화두가 되어 버렸는지, 사회혁명의 짜투리를 넘겨다 보는 일조차 실로 사치였다면 개인적인 과장일까, 여튼 그랬었다. 그렇다고 중심부에 편입되었던 것도 아니니 나는 주변부의 상황 역시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심기를 자극했던 사건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때마다 작게 분노하고, 작게 동정하는 일이 내가 취한 최대한의 도덕이었다.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위안이었지만, 쉽게 얻은 만족이기에 한편 하찮을 수 밖에 없었다. 

집단적 이익만이 존재하는, 심지어 생명의 권리마저 자본의 권리를 위해 폐기되는 사회를 산다는 일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사회적 리듬에 엇박을 놓을 수 있는, 적어도 제단된 욕망을 의심하기라도 하는 사람들을 찾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그러나 쉽게 메워지지 않는 균열을 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버려지는 것들을 되살리는 일, 그 일을 통해 얻어진 댓가를 주변부의 사람들과 나누는 일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실패했다. 필자가 말하는 [흐름의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공간에 존재하는 [대중]을 파악하지 못했고, [소수자] 혹은 [타자]들의 연대를 구축하지 못했다. 실패의 기억은 쓰라리지만 그렇다고 얻은 것이 없지는 않다.  

책으로 돌아가자. 필자는 내게 이렇게 묻는다. "자신들의 고통, 자신들의 저항마저도 자신만의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모든 타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것, 이를 통해 다수자들과 거리를 느끼고 간극을 만들기 시작한 모든 이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저항과 돌발의 지대로 유인하는 것,.......어떤 저항과 투쟁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그 공감이 공명되며 확대되어갈 때, 그리하여 또 다른 커다란 돌발의 흐름이 만들어질 때, 그것을 소비하는 속물들이 출현하는 일이야 어디서나 피할 수 없는 '조그만 불행'아닌가. 그 조그만 불행을 피하기 위해 자기들만의 순수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조그만 불행을 큰 불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어리석음과 오기로 탈진해 버렸던 지난 시절이 안쓰럽고,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무엇을 할 것인지', '운동이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또한 내가 꿈꾸었던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려 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정주하면서도 떠날 수 있고, 이동하면서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시점일 것이다. 거대하고 단단한 그 어느 지점에 균열을 내기 위해 되돌아 간다는 것, 그것은 이미 내게 정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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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2-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조 양반의 미덕은 천천히, 우아하게...였겠지요.
식민지 시대 착취의 대상이 되면서 천박한 빠름이 '빨리빨리'의 원형이 되었겠지만,
그것이 전국민의 '빨빨화'로 확산된 것은 아무래도 산업사회의 리듬감이라고 봐야겠죠.
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땅은 농민들의 삶이 지배하는 1년 단위의 느린 호흡을 가졌더랬으니 말입니다.

굿바이 2010-02-2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의 말처럼, 다시 생각해보니 산업화의 리드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제 주장은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에 묶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가수는 앉은 자리에서 곡에 노랫말을 붙이고
어느 시인은 북적이는 전철안에서도 시를 썼다고 하는데
노래가 짠해서도 아니고 시가 안쓰러워서도 아닌데

그저 오늘같은 바람이 불고, 변변하지 못한 청춘이 가여운 날에는  
선/운/사/에 가/고/싶/습/니/다.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떠나실 거에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 선운사, 송창식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것은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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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2-2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에 미친척하고 민정언니랑 셋이 한번 갈까요 언니?

굿바이 2010-02-20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미친척하지 않아도 갈 수 있어. 그러니까 고!

동우 2010-03-0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하. 굿바이님, 웬디양 (웬디양님 해야 되는 건가요? 하하)
당연한 말씀.
좁은 한반도 어디인들, 아무렴요 미친척 하지 않아도 훌쩍 떠날수 있는 곳.
4월의 부산 봄바다도 그러하지요. ㅎㅎ

굿바이 2010-03-0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아~ 4월의 부산! 완전 좋아요^^

니나 2010-03-08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암사 화장실에서 나는 잃어버린 삶의 경건성과 삶의 자유로움과 삶의 서늘함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눈물겨웠다. 아, 그리운 것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그러니 그리운 것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운 것들을 향해서 가자. 가자. 가자. 무릎걸음으로 기어서라도 기어이 가자. 그것들이 살아 있는 한, 내 마침내 그곳에 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사랑은 불우하지 않으리.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김훈, 자전거여행

언니 글 읽고서 생각나서 찾아봤어요.
똥사면서 내세를 생각하는 이남자... (싫지 않으니 어쩜 조아)

굿바이 2010-03-0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러게, 어쩜 좋니~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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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식이 매우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책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산업사회의 폐단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제시한 작가의 노력때문일 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아름다운 점도 있고, 위안을 가져다 주는 부분도 있지만, 이것 또한 또다른 방식의 억압이라는 것을 체험하다 보니 그것말고 뭐 다른 것은 없나,하는 생각이 계속 차고 올랐다. 그렇지만 어찌되었건 이 작품을 두고 외설 논쟁을 벌이거나 에로티시즘을 운운하는 것은 매우 소모적인 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무엇이 아쉬웠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럴 근거가 별로 없거나, 있다고 치더라도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시대적 배경이 1차 세계대전 이후고 공간적 배경이 영국이다 보니, 작가의 눈에 비춰지는 산업화의 속도나 돈에 미쳐가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역겨웠으리라. 2010년을 사는 내가 느끼는 욕지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것은 하나도 없었으리라. 그 마음이 클리퍼드를 하반신 불구로 설정했을 터이고, 코니와 멜러즈를 자연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는 성정으로 설정했으리라.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납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임에는 틀림없었다. 또한, 계급의 상층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나 하층민이나 모두 돈에 미친 아귀같은 존재로 그려내는 대목은, 가난하거나 억압당하는 자들은 선량하고 순박할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데올로기, 즉 검증되지도 않았고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사실무근인 헛소리들을 쏟아내지 않았다. D.H 로렌스라는 작가의 위대함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걸치고 있는 옷, 먹는 음식, 사는 집과 무관하게 누구나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심지어 이기적인 존재다. 물론 간혹 이타적인 인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존재하는 극소수다. 따라서 쓸데없는, 심지어 허구적인 감상에 빠져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외면하는 작가는, 혼나야 한다. 매우.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훌륭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자꾸 나는 그 사랑이라는 것, 좀더 협소한 의미로서의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다 뭣이다냐,하는 생각이 들어 책과 무관하에 계속 곁가지만 치고 있었다. 언제나 잿밥에만 눈이 돌아가는 이 꼬라지는 언제쯤에나 바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한때 사랑이라는 것에, 또는 신념이라는 것에 내가 가진 알량한 것들을 몽땅 걸었던 적이 있었다.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이 한심해 보여, 싸그리 그리고 아쌀하게 사랑이든, 일이든, 뭣이든 해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 얻은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내가 허망하다고 지껄이던 목숨이라는 것을 혹은 내가 가진 몇 푼 안되는 돈과 이력과 온전하다고 믿었던 감정들을 그렇게 꼭 다 걸었어야만 했던 것일까. 이제와 돌아와 거울앞에 선다는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가슴 철렁했던 시절의 모퉁이를 돌아 헛헛한 마음으로 골방에 들어앉아 보니, 허망하다고 말했던 것들이 정녕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허망하기 때문에 지켜야 했던 것이 나였는지, 허망하기 때문에 버려야 했던 것이 나였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책 표지의 그녀, 코니의 뒷모습은 이쪽이 아닌 저쪽으로 가라는 표지 같았지만, 내 깜냥에 이미 강을 건너버린 것 같은 마음은 또 다른 저쪽이 어디인지 이제는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길을 잃고만 싶었던 청춘은 이제 정말 길을 잃은 셈이다. 아,아,아, 채털리 부인의 연인쯤은 아니더라도 선운사 동백꽃 지는 날, 같이 울어줄 사람 하나 있었으면. 아,아,아 푸른 달빛 부서지는 밤 담벼락 아래서 그렇게 가만히 곁에 서 있어줄 사람 하나 있었으면. 오다가다 오도가도 못할 마음 하나가 채털리 부인 앞에서 서성이는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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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채털리부인의 연인 1,2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02-17 19:10 
    책읽는 부족의 독후감 : 호호야님:http://blog.daum.net/touchbytouch/16847320 쟁님: http://zanygenie.tistory.com/30 서민정님: http://blog.daum.net/crabbit/16522600 동우님: http://blog.daum.net/hun02..
  2. 채털리 부인의 연인 : 깊은 관찰 없이는 독자에겐 불륜
    from moratorium life 2010-04-06 01:05 
    채털리 부인의 연인 1(세계문학전집 85) 저자 D. H. 로렌스 지음 | 이인규 옮김 출판사 민음사 펴냄 | 2002.12.15 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음락한 호색 문..
 
 
후니마미 2010-02-17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마 이 책은 지금 당장 독자가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달리 읽을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독자 중에 클리포드의 입장에 있어서 바람난 여자를 마누라로 삼고 있는 남자가 없어서 그렇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코니와 멜러즈를 우리들처럼 자유의 뭣으로 자연의 뭣으로 운운하지 못할 거에요. 코니나 멜러즈에 대한 감상조차도 사실은 그 연애의 뒤끝이 어떻게 되는지 다 쓰지 않았고 애써 우리들도 그 미래를 좋게 보려고 해서 그렇지
대부분 우리들 주변의 연애라는 것, 또 그런 식으로 유부녀가 계급 아래인 남자, 연하 남자, 뭐 이런식으로 연결되면은, 대개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안 되잖아요
굿바이님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우리 두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며 공통으로 갖고 있는
사랑과 그 낭만에 대한 생각이 비슷했음을 느껴요
어쩌다 이렇게 젊었을 적 열정을 남의 이야기로 엿보는 때에, 주인공들에게 그런 거 언제까지 가나보자. 하는 못된 마음이 들더라구요
30대 때 볼 때 다르고 20대에 볼 때는 더 다르고
지금 마흔 줄에 들어서 보는 이야기가 또 다른 거에요
우리 경험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독후감상이 이렇게 달라져요
어느 게 내 맘인지 나도 몰라^^

동우 2010-02-19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으시고 적확하게 포착하신 '관계'라는 문제.
세상사 인생사 무엇 하나 관계 아닌것 있으리오마는.

그 놈의 관계.
따스하고 부드럽고 위선이 아니고 위악도 아니고 무식하지 않고 무교양하지 않으면서.. 제인부인과 토마스경과 같은 그런 관계.
선운사 동백꽃 지는 날, 같이 울어줄...푸른 달빛 부서지는 밤 담벼락 아래서 그렇게 가만히 곁에 서 있어줄... 그런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