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운다.  

어쩌자고, 또 우냐고 나는 물었다. 어쩌자고....K는 그렇게 울었다. 그렇게 한 30분을 울었다. 그리고 내게 묻는다. 이제 어쩌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K가 어떻게 사랑하고 또 어떻게 헤어져야 했는지, 나는 쭉 지켜봤었다. 그러니 나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바닥까지 다 드러낸 기특한 사랑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잊어라,하자니 내 마음이 철렁하고, 지나가게 두자,라고 하자니 바닥이 까무룩 멀어진다. 살아있는 한 따라다닐 시간이고, 따라다닐 기억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뭐든 오래 붙들고 생채기를 내고 그렇게 뒹구는 사람들.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제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사람이 따뜻하다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알았다고 K는 내게 말한다. 나는 그저 듣기만 한다. 커피 5잔을 축냈다. 그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사실 K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밥을 먹일까 싶었다. 얼마간 굶었을 것이고, 얼마간 울었으니 허기도 질 것이다. 그런데, 차마 밥먹자는 소리가 안나왔다. 그때, 눈은 다시 내리고 우리는 각자의 기억 어디쯤으로 잠시 피신할 수 있었다. 살아있어 다행인 밤, 그렇게 다시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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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탐>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책탐 - 넘쳐도 되는 욕심
김경집 지음 / 나무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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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의 들머리에서 작가는 "분석과 비판보다는 함께 느끼고 나눌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한다고 적고 있다.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현학적인 학자들이 넘치는 세태에서 이는 갸륵하고 또 갸륵한 마음이고 실천이다. 하여 그의 표현대로, 부지런히 서점을 돌아다니며 서가에 꽂힌 보석들을 찾아내는 '등뼈 찾기 순례'에 기꺼이 동참하리라는 마음으로 나는 책과 마주앉았다.   

책은 크게 네 개의 꼭지, 희망, 정의, 정체성, 창의적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시 주제에 부합하는 책들로 소분되어 있다. 이 주제만을 보더라도 작가의 성향이나 품성을 대략 읽을 수 있다. 또한, 작가는'등뼈 찾기 순례'를 통해 이 시대의 희망과 정의, 우리의 정체성 그리고 미래를 위한 창의적 생각들을 공유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노력이 결실맺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작가가 소개한 책들 중 어떤 책들은 이미 읽었고, 어떤 책들은 애써 외면했었고, 어떤 책들은 초면이었다. 소개된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작가가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책들을 소개받는 일은 큰 즐거움이다. 또한 감사할 일이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평가에 무조건 동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그가 소개한 책들 중 두서너 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그리고 그것을 소개하는 작가의 생각에는 동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희망'이라는 주제로 묶인 책들이 그렇고, '정의'라는 주제로 분류된 책들이 그랬다. 다행스럽게도 작가가 살아생전에 내 글을 읽을 일이 없을것임으로 나는 지금 한없이 용감할 수 있다.  

작가는 '노먼 베쑨'과 '체 게바라'를 소개하며 이념이 아닌 실천을 말하고 싶어했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통해 인간에게 자존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우고, '조지프 E.스티글리츠'의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 '카를 알브레히트 이멜'의[세계화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에서는 정의가 왜 필요한지 역설하고 싶어했다. '마리아 블루멘크루'의 [히말라야를 넘는 아이들]을 보며 아직도 제국주의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려고 했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워든]이나 '스콧니어링'의 자서전을 들려주며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같이 고민하고자 했다. 나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도 동감한다. 그런데,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작가가 안타까운 것일까. 학자로서 스승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작가가 왜 이리 순진하게 느껴지고 답답하기조차 한것일까.  

인간만이 희망,이라고 말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이 말을 할 때, 이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인지, 그가 처음 꺼내는 말인지, 그가 두려워서 하는 말인지 따져본다. 세상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사랑하고, 울었고, 끌어안았던 사람의 마지막 말이라면 나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운이 없게도 그런 이들을 쉽게 볼 수 없었다. 그저 세상을 향해 목울대를 울리거나, 정직한 근본주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인간만이 희망이다,를 들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 답답함의 이유를 알겠다. 작가가 한없이 착하고 정직한 근본주의자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를 어째.  

그렇지만 나는 작가도, 이 책도,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어떤 책에도 딴지를 걸 마음이 없다. 그리고 양서를 찾아 기꺼이 세상에 알려준 작가의 노력에도 감사한다. 출판계에 얼마나 많은 지충이 서식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적어도 여기 소개된 책들은 나무의 죽음을 욕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부디 이 좋은 책들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뜻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책 속에 길이 있지는 않지만, 책 한권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아직은 믿는 그러나 정작 식탐밖에 남지 않은 나는, 여기서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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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1-08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간만이 희망,이라고 말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이 말을 할 때, 이 말이 그의 마지막 말인지, 그가 처음 꺼내는 말인지, 그가 두려워서 하는 말인지 따져본다."
햐. 대단하신 굿바이님.
제일 후자인 나를 간파하신. 하하

굿바이 2010-01-08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동우님은 전자가 아닐까요? 제 깜냥으로는 전자일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신부님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무진장 괴롭혔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여튼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그때, 신부님이 "그래도 인간이 희망이란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 문장을 붙들고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멀쩡한 사람되기는 틀린 모양입니다.
 

너무 일찍 성공한 친구 녀석이, 이 대목 나는 목이 메인다, 직원들에게 선물할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 직원에게 선물할 책이면 네가 골라라, 라고 했더니, 성질을 그렇게 쓰니 그 모양으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올해는 이 모양으로 살지 않기 위해 친구의 돼먹지 못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친구에게 추천한 책은 모두 스무권이다. 뭐든 있으면 사고 없으면 할 수 없고, 아무쪼록 정초부터 욕먹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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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꽝"없는 굿바이표 책선물 리스트_여름휴가
    from 에밀 시오랑을 기억하며 2010-07-20 12:53 
    역시나 똑같은 친구의 부탁으로, 사실 협박으로, 책선물 리스트를 또 보내주기로 했다. 올 초, 직원들에게 선물할 책을 좀 골라달라는 제안에 스무권의 책을 추천했는데, 호응이 좋았던 모양이다. 여름 휴가를 맞아 선심을 쓰고 싶은 C양은 내게 전화를 했다. 따끈따끈한 녀석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화를 냈다. 선물을 할 요량이면 네가 골라라, 나한테 부탁을 할 작정이면 좀 공손해라, 공손할 수도 없으면 돈을 내라, 정도가 내 주장이었는데
 
 
웽스북스 2010-01-05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느껴져요 ㅋㅋㅋㅋㅋㅋ

굿바이 2010-01-0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고마워요ㅋㅋㅋㅋㅋ

지윤 2010-01-0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10권 부탁!

굿바이 2010-01-0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10대!(주먹으로 할까, 연장으로 할까?)

동우 2010-01-08 0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를 제외한 책읽는 부족들의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가공할 독서량.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수 없지만, 주눅은 들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하하, 굿바이님.
그저 '내가 읽는 책이야기'에서 지정한 독서를 기본으로 하여 약간 웃도는 정도의 비교적 수월한 도서를 섭렵하기로.하하


굿바이 2010-01-0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우님!!!!! 주눅이라뇨!!!!!!

저는 그저, 정말 그저, 단지....
어찌 제가 다른 분들의 내공을 따라가겠나이까!!!
언제나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합니다.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고, 그래서 늘 책앞에서 서성일 뿐입니다.ㅜ.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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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주인공 애디의 죽음을 통해 한 가족이 겪는 일련의 감정적 변화와 사건들을, 각기 다른 주인공들의 독백으로 전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죽음이라는 한 사건을 두고 단일한 관점이 아닌 다원주의적 시선을 통해 설명하려는 노력은, 대체적으로 모던이즘이 지배하는 시절을 살았던 작가에게 실로 대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쓰여진 시절을 감안하면, 물론 미국문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관계로 정말 대충 더듬어 보면, 분명 형식적인 면에서는 혁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작가의 역량은 형식적인 실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난해함과 방관자적 입장이라는 변수를 끌어들여 신비로움과 처연함까지 덧붙였다. 실로 명민한 작가다. 그러나, 2010년을 살아가는 독자로서, 어찌나 실험적인 책들이 쏟아지는 시대를 살아가는지, 더 나아가 실험적이기만 하고 건질것은 없는 책들이 쏟아지는 시대를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이제 이런 부류의 책들을 읽는 일이 그리 달가운 과정만은 아니었음을 미리 밝힌다.  

그렇지만, 구조가 갖는 답답함과 난삽함은 그저 내 게으름이나 무지를 탓하면 될 문제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 서경식의 책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에드워드 사이드를 기억한다」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사이드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은 말이다. 서경식의 진술을 들여다보며,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나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절망]이라고 이해했었고, 승산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조롱]이라고 이해했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서경식의 책을 떠올렸던 까닭은, 책 전반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고 한 것이 [인간에 대한 절망]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며, [절망]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자세를 [조롱]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들 중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 아버지, 죽은 부인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벌어지는 모든 성가신 일들을 타인과 아들들에게 맡겨버리는 남편, 큰아들이 다리를 다치자 병원으로 향하는 대신 다친 다리위에 시멘트를 붓는 아버지, 또 다른 아들의 가장 아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버리는 아버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방관자로 것돌고, 심지어 부인을 매장한 후 바로 머리를 빗고 옷을 단정히 입고 새 여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이자 남편인 앤스에게 작가는 어떤 판단의 잣대도 들이대지 않는 듯 보인다. 작가는 '저 놈은 원래 저런 놈이고, 저런 놈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인간은 사실 다 저런 놈일 수 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혹은 부성애라는 사람들의 기대는 이데올로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어?' 정도의 썩소를 날릴 뿐. 물론, 앤스의 세째 아들인 주얼이 앤스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따라서 앤스가 오쟁이진 남편이라는 정황을 살짝 흘려보내며, 잠시나마 앤스를 비웃어 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글쎄....앤스가 부인의 부정을 알았던들 괴로워나 했을까! 되려 그것을 핑계로 철저히 노골적으로 군림하지는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이 소설은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거꾸러뜨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후 행보를 보았을 때, 이 소설은 그를 일으켜 세운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면, 또한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이 무심하게 풍경을 바라보듯 이루어 질 수 있었다면, 그는 작가가 아니라 神이 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을 조롱할 수 있는 것은, 실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내가 이 책을 덮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인간에 대해 '어떻게?" 혹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김훈을 꽤나 닮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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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01-03 09:21 
    책읽는 부족의 독후감 도치님: http://blog.daum.net/shave4ever/17145132 쟁님: http://zanygenie.tistory.com/27 동우님 http://blog.daum.net/hun0207/13291016 호호야님 http://blog.daum.net/touchbytouch...
 
 
후니마미 2010-01-0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으면서 재미가 반감되는 바람에 주인공들에게 공을 들이지 못한 이 소설을
굿바이님의 독후감을 읽으면 재평가를 하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절망 그래서 이 소설이 작가의 조롱이 된다는 평에
동감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아버지 앤스, 남편 앤스의 작태를 굵은 선으로 놓고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살필 수도 있겠군요
사람이 왜 그래? 라기 보다
그럴 수 있음에 인간인 것이 슬픈 일
사실 비일비재하지만 우리 독자는 그런 걸 문학으로까지 읽고 싶지는 않은가봐요
문학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매달려
문학적 인간을 짝사랑하는 독자가 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내 주위의 그렇고 그런 인간, 그래서 어처구니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일 자체가
문학이어서 가능했던 게 이번 소설이 아닌가싶네요
굿바이님의 독후감은 핵심을 탁 짚어주는 깊이가 있어
독후감 읽는 맛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도치 2010-01-03 22:0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상주의라는게 있어서 실증적이건 지극히 냉소적이건 학습되어지고 무의식중에 기대하고 있는 향이나 방향이 있나봅니다. 그 무의식적인 망상에 사로 잡혀서 바라보는 식견도 좁아진 경우가 늘상 있는 일이긴 하죠. ^^;

정신 없는 시기인 연말연초에 깜빡하고 올해 목록을 이제서야 스크랩해갔습니다. 책 주문하고 틈틈히 읽어야겠어요.

굿바이 2010-01-06 16:10   좋아요 0 | URL
문학에서의 인간말고, 후니마미님이 생각하시는 인간,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가 더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언제 한 번 고견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책을 통해서건 아니면 사석에서건 말입니다.
그리고, 매번 허접한 글 독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치 2010-01-0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약간의 허무주의도 느껴지기도 했는데 제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던 영화에서는 가족영화이다 보니 뻔한 교훈을 남겨주고 보는 관객은 그 뻔한 것을 확인하면서 만족감과 함께 훈훈함을 느끼려는 의도와 부합됐기에 그와 비슷한 소제의 이 소설에서의 결말의 횡포는 눈물이 날정도였습니다. ^^

굿바이 2010-01-06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윌리엄 포크너에게 삿대질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그래서 나름 위안을 받았답니다. 안그랬으면 저도 눈물이...^^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도, 작년에 봤던 [그랜 토리너]처럼, 물론 조금 다른 의미의 가족영화이지만, 뻔할 것을 알면서도 그리 끝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을 때가 있습니다. 워낙 사는 일이 팍팍하다보니 감동을 비타민처럼 소비할 때가 있죠. 작가에게 그 정도까지 바랬던 것은 아니지만, 여튼 저는 너무 위대한(?)작가는 좀 거시기 할 때가 많습니다.ㅎㅎ

동우 2010-01-08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작가가 전달하려는 '인간에 대한 절망'의 뜻을 '조롱'이라는 형식의 메시지로 표현하였다는.
굿바이님은 독수리처럼 이 책을 읽으셨습니다.
예리하고 신랄하기가.
김훈의 표정을 지으시고. 하하

서경식은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나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절망이라고 이해했었고, 승산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조롱이라고 이해했었다."는 말씀도 날카롭게 들립니다.

존재의 가벼움들이 싣고 떠나는 존재의 무거움.
그 상징성의 그림은 절망의 색채만 있었던것은 아니었다고 읽은 나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때'와는 상당히 다릅니다만, 굿바이님의 시각을 이해하고 동감하는바 없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젊으신 분의 사유가 너무 깊어 어두운게 아닐까 하는 늙은이의 노파심 하나.. 하하하


굿바이 2010-01-0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김훈작가 표정을 흉내낼 수 있을까요? 아~ 정말 한때는 남자였으면 좋겠다,싶었습니다.
[대부]의 "말론 브란도"정도의 표정이나,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드롱"이나, [데블스 에드버킷]의 "알파치노" 정도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아니 [미스틱 리버]의 "숀펜"정도?
그렇지만, 저는....그저 늙고(?) 병든 굿바이의 얼굴. 아흐~

여튼, 동우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막 탈선할까 생각중입니다.^^

민정 2010-01-14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인을 못살게 구는 못난 남편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더라구요. ㅎㅎㅎ
저는 예전에 숙제로 읽던 1920년대 일제 강점기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아버지, 남편상은 맨날 술먹고 집에와서 부인이나 때리고, 아니면 첩을 얻어오고, 이런 모습들이라 화가 나고 챙피했었어요.
그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데서 위안(?) ㅎㅎㅎ

저 아버지 캐릭터 진짜 물건은 물건이죠?
뻔뻔하게 나가서 주얼의 말 팔고 돌아왔을때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뭐 저런게 다있나 하고. ㅎㅎㅎ

약간이나마 작가에게 점수를 주자면
그런 바닥의 바닥에 있는 인간들에게서
결코 무관심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랄까요.
현실을 조롱하는 사람들 보다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고 인생사를 예쁘게 포장하는 작가가
저는 더 무서운 사람들 같아요.
 
<피와 천둥의 시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피와 천둥의 시대 - 미국의 서부 정복과 아메리칸 인디언 멸망사
햄프턴 시드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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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매사추세스 플리머스에 청교도라 불리는 일단의 백인들이 상륙한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전혀 예측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유로 자신들이 일가를 이루었던 땅에서 내몰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 역사의 시작이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수난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팽창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적 판단의 도덕성을 스스로 검열하기도 전에,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적 판단 앞에 도덕성이라는 것이 개입될 자리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1845년 오설리반이라는 뉴욕의 젊은 편집자는 "뉴욕 모닝 뉴스"에 한 편의 논설을 실었다. 오설리번의 논설은 "매년 증가하는 수백만의 인구가 자유롭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욱 뻗어나가 신이 내려주신 대륙 전체를 차지해야" 한다였고, 이것을 미국의 "자명한 운명Manifast Destiny"이라고 규정지었다. 이 오만불손한 한 편의 논설은 미국이 멕시코령 텍사스를 병합하고, 캘리포니아를 점령하고, 끝없이 서진하는 중에 마주칠 수 밖에 없었던 원주민들을 신의 이름으로 완벽히 살육하는데 핵심적인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이 책 [피와 천둥의 시대]는 이렇듯 19세기, 미국의 팽창주의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며 야심차게 진행한, 미국의 서부 정복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멸족사를, 특히 "나바호"라 불렸던 원주민들과 "크리스토퍼 카슨"의 행보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저자 햄튼 사이즈는 크리스토퍼 카슨이라는, 적어도 미국인들에게는 영웅인 서부 사나이의 행적과 나바호 원주민들의 멸망사를 방대한 사료를 근거로 꼼꼼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흡족한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작가가 객관성을 잃지 않고, 원주민들의 항전과 멸망, 정복자들의 패배와 승리를 보여주려 노력한 흔적도 적지 않다. 어쩌면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정서를 감추고, 객관적으로 사실들을 나열하려는 자세가, 오히려 더 큰 조롱이었는지는 작가만이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가고, 다시 미국인들과 인디언들의 영토 분쟁이 치열했던 시기, 새로운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을 멸종시키는 대신 백인 사회로부터 물리적으로 격리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인디언 전체가 절멸할 것을 우려한 인도주의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포장과는 달리 철저히 인종주의가 깔려 있었고, 사회경제적 비용을 고려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백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겁탈하기 이전부터 이미 원주민들은 이 땅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고, 스스로를 부양했으며, 단일신이 아닌 수많은 신들과 교감하면서 그들의 존엄을 지켜왔다. 그런 원주민들을 경계밖으로 몰아내고, 문화적 자살을 감행하게끔 만드는 것이 어찌 인도주의적이며, 더 나아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정녕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정신나간 나팔수들에게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구덩이를 경험하게 하리니.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영웅이었던 크리스토퍼 카슨은 "일반명령 15호"라는 나바호 원주민들을 향한 마지막 작전을 감행한다. 이 명령은 나바호 원주민들을 집단 거주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그들을 무력화하고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 골자다. 학살이라기보다는 항복이 그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일궈놓은 삶의 터전을 철저히 파괴하고, 농작물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죽여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극단의 공포와 굶주림으로 몰아넣는 행위가 학살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알 수 없다. 물론, 서부개척 시대에 등장했던 수많은, 기독교라는 정신적 이념과 금이라는 물질적 신에 붙들린 백인들이 저질렀던 학살과 강탈에 비하면, 카슨이 실행한 "일반명령 15호"는 얼마쯤 피가 덜 흐르고, 살점이 덜 튀기는 작전이었다고 자위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전 존재와 원주민들이 가진 모든 것을 역사속에서 영원히 모욕하는 행위가 인도주의적인 처사였다고 항변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갖을 이유가 없다.  

미국의 역사는 말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디언들과의 전쟁은 종식되었으며, 그들은 안전한 집단 거주지역으로 옮겨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적어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부분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 문화에 포위되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했다. 더 이상 그들의 푸른 산을 이야기할 수 없고, 초원 위의 버팔로를 그릴 수 없으며, 그들의 신을 존경할 수 없고, 술과 마약으로부터 자신들의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 미국은 총, 위스키, 성병, 돈, 기독교를 앞세워 게걸스레 서부의 모든 것들을 먹어치워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버젓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들먹이고,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전 지구의 방위대 역활을 하며 배를 불리고 있다.  

시대의 나팔수 오설리번이 말한 "자명한 운명"이라는 것이 역사에 존재한다면, 진실로 바라건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겪었던 "자명한 운명"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희생당했던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소수 민족들의 "자명한 운명이, 역사의 수레 바퀴 아래서 이제는 방향을 틀어 인종주의와 팽창주의로 무장한 모든 민족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게 있어 피와 천둥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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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1-0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평화시대'라는 명제 앞에 숨어 있는 '피와 천둥의 시대'.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제국주의적 속성인가요?
흐음, 지금도 지구촌 어디선가에서는 '피와 천둥의 시대'를 지나고 있겠지요.

참, 굿바이님.
책읽는부족 이달의 숙제는 해를 넘기셨네요. 하하

굿바이님의 새해, 모쪼록 밝게. 하하


굿바이 2010-01-05 18:1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여전히 '피와 천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죠.
안다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누군가 말했었는데, 그 말이 요즘 참 절절합니다.

게으름과 밀린 일들을 핑계로 기한을 놓쳤습니다.
죽여주십시오ㅜ.ㅜ

굿바이 2010-01-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아버지와 서부영화를 함께 보면서, 백인 총잡이들이 왠지 정의의 용사같아서
막 응원하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영화도 한심하고 저도 한심하고 그렇습니다.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것도 바뀔 수 있다고 믿어왔던 시간들이 참 헛헛합니다.
나무의자님의 말씀처럼 이제는 분노조차 할 수 없어 저는 자해중입니다.

후니마미 2010-01-08 20: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 나무의자가 저랑 같은 사람인 거 아시죠? ㅎㅎ
오래전에 저도 알라딘에 흔적이 남겼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