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 분지 강원도달비장수 감비 천불붙이 첫눈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2
천승세.방영웅 외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천승세의 <신궁神弓>은 1977년『한국문학』에 실렸던 작품으로 당골례 왕년이의 비색한 운명과 가난한 어민들의 삶을 녹여낸 소설이다. 1970년대 문학을 이야기함에 있어 시대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전후 아찔한 속도로 진행되었던 근대화.산업화의 물결은,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부를 선물했을지 모르나, 그 물결에 휩쓸린 모든 사람들을 유토피아로 인도할 수는 없었다. 하여 해체되는 공동체와 편중되는 자본은 대다수 민중들을 변방으로 내몰았고, 그들의 삶을 비극으로 몰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삶은 예컨데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이문구의 <우리 동네>, 천승세의 <신궁>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당골례,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던가. 작고한 외할머니가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찾아가셨던 당집. 초라한 박수의 얼굴도 짠바람에 나부끼던 붉은 깃발도 나는 여태 잊을 수가 없다. 기억이란 때론 필요이상으로 명확하다. 늙은 박수의 해진 동정에서 풍기던 낙엽타던 냄새도, 검버섯 핀 뺨을 연신 훔치던 내 할머니의 모습도 꼭 어제 일처럼 그렇게 선명하다. 어쩌면 나는 시종일관 소설속의 당골례, 왕년이의 모습에서 이가 빠진 퍼즐의 어느 한 부분을 완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닷가에서 살아 본 사람이라면 혹은 나처럼 일정 기간이라도 체류해 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심심치않게 당집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집은 인간이 갖는 원초적인 공포를 드러내는 증거물이다. 하여 미신이나 곰팡내나는 관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굿이 인간에게 주는 위무가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어촌에 존재하는 무당은 서울 한 복판에 간판을 내건 이들과는 무늬가 다르다. 적어도 내가 겪고 들은 바에 의하면 말이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왕년이는 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습무로 주로 씻김굿을 하는 당골이다. 시어머니가 죽자 대를 이어 장선포에 자리를 잡은 왕년이는 한동안 무녀로서 부족할것 없는 삶을 살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대부업을 하는 판수의 살인적인 금리에 가진 재산을 전부 빼앗기고, 고기잡이 배를 타기 시작한 남편도 송장으로 돌아오면서 왕년이는 굿손을 놓아버린다. 왕년이가 굿손을 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실의에 빠져 하던 일을 멈추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공동의 소원을 대신 빌어주는 행위가 단절됨을 의미하며, 자본을 가진 한 사람, 판수에 의해 공동체가 와해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1세기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국제 헤지펀드와 같은 보이지 않는 금융자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70년대를 산 작가는 그것을 미리 내다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에서 왕년이는 남편이 죽고 처음으로 다시 굿판에 선다. 오랜만에 풍어를 기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그녀는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궁을 들고 바가지를 쓴 판수를 겨냥한 후 활시위를 당긴다.
"바가지를 쏘고 굿청에 떨어졌어야 할 화살은 바가지 깊숙히 꽂혀 끝대를 떨었고 판수는 바가지를 쓴 채 비식 옆으로 누웠다. 바가지 위로 꽃뱀 기듯 핏줄이 흘렀다." 
왕년이가 겨눈 활시위에서 화살이 튕겨져 나갈 때, 화살도 왕년이도 그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공동체를 와해시킨 한 사람,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한 사람, 불릴만큼 배를 불리고도 허기져하는 한 사람, 판수를 향해.   

한 개인의 한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맺힌 것인지라, 이 소설의 결말은 개인적인 한을 해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손을 탈탈 털고 돌아서 어디선가 넉장거리할 왕년이의 처연한 모습이 떠올랐다. 울 것도 웃을 것도 같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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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hoya 2010-02-0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다음에 계시질 않으니 자연 찾는 발길이 뜸합니다.
제 블로그 '책읽는 부족에게 고함'이란 포스팅에 미션 수행해 주시길요. *^^*

굿바이 2010-02-0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