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미쳤나보다고, 날씨가 너무 추운거 아니냐고, 지구가 따뜻해진다는 말은 다 나의 거짓말이라고 툴툴거리는 친구 녀석이, 결혼이고 직장이고 다 때려 치우고, 아르헨티나로 떠날거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너 말 한 번 잘했다, 오냐, 잘 생각했다. 가거들랑 이참에 같이 가자, 거기가서 부채춤을 추던지, 심수봉 노래를 부르던지 밥은 굶겠냐고, 한참을 떠들다가 무심코 어묵을 파는 트럭 앞에서 나는 멈췄다.

어묵을 파는 아저씨가 만삭인 젊은 여자를 파리 쫓듯이 내몰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홀린 사람처럼 트럭으로 다가갔다. 아저씨는 거친 말투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고, 여자는 겁난 표정으로 얼마만큼 물러 서다가 또 트럭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여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오뎅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그러면 안되는데, 나는 아저씨와 여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저씨, 어묵 한 꼬치 주세요." "칠백원 입니다."

나는 돈을 주고 건네받은 어묵 한 꼬치와 종이컵에 담은 국물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잠시 멀뚱멀뚱 머뭇거리더니 그 짧은 커트 머리를 긁적이며 어묵을 건네 받았다.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쏘아보더니 어묵 꼬치를 여자의 손에서 낚아챘다.

"이럼 안되지. 한 번 이러면 계속 여기로 온단 말이오. 아가씨가 내 장사 책임질꺼요?"  "아저씨, 저 배 안보이세요. 만삭이라구요. 만삭!"
"그래서 저년 배가 내 짓이오? 이 아가씨 정신이 없구만."
"미친년이건 안미친년이건 저 배 속에 생명이 있다구요, 그리고 아저씨 허기가 뭔지 아세요? 배고픈거요, 그거 아시냐구요? 그리고 내 돈 주고 내가 사서 누구를 주건 버리건 아저씨가 뭔 참견이래요. 이리 줘요."

나는 정말 한 대 칠 자세로 심하게 아저씨를 째려보며 아저씨가 낚아챈 어묵 꼬치를 다시 뺏어 그녀에게 건냈다. 그녀가 웃는다. 빨간 볼을 씰룩거리며 웃는다. 아직 뜨거운 어묵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다. 어묵의 뜨거운 기운이, 달짝지근한 국물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고이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보도블럭 언저리에 녹은 눈처럼 그렇게 어묵 국물에 녹아드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어서 가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가장 큰 햄버거를 시켰다. 그녀의 불룩 솟아오른 배. 짧게 잘린 머리. 빨간 볼. 갑자기 가슴은 헛헛하고, 허기지고, 눈물 나는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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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30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엉뚱하게 박순녀의 '영가'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아기 업은 남루한 여인이 보석상 쇼 윈도우 안 진열된 반지를 꼼짝않고 들여다보는 대목.
먹거리를 향한 고픔.. 마음의 고픔.. 자존의 고픔.
들창 너머 행복한 가정의 크리스마스 만찬을 들여다보는 성냥팔이 소녀.
그야말로 세밑의 겨울입니다.

굿바이님.
새해 건강과 행복을.

굿바이 2009-12-31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가"라는 소설이 궁금합니다. 한 번 읽어볼까 합니다.

동우님.
새해에는 동우님 가족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계획하시는 일들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9년이 다 가고 있음을, 갑자기 늘어난 통화량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한 해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궁금해하며, 대단할 건 없지만,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올해가 가기 전,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전화를 걸어온 그들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올해 모임 중 반수가 넘는, 실은 거의 모든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불참'이라는 버릇없는 입장을 밝힌 모임도 있고, 당일 잠수를 타버리겠다고 내심 다짐한 모임도 있다. 이유는 매우 불건전하게도, 귀찮아서다. 상대방들이 이런 내 속내를 알게 되면, 삼족을 멸한다고 으름짱을 놓겠지만, 나는 멸할 삼족이 없다. 그래서 전혀 두렵지 않다.  

물론 나 역시 그들 중 특정한 그들의 얼굴이 삼삼하고, 목소리가 그리우며, 근황이 궁금하다. 따라서 특정한 그들을 향한 나의 연민은, 애초에 전화 한 통화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시간과 상황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만날 수 있거나 만나야 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그들이라면 굳이 연말이라는 대목을 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그들과 나눌 나의 마음은 '크리스마스 한정판매'상품이 아니다. 상시 판매되는 '생필품'과 같은 것이다. 살아있으면 언제든 볼 수 있고 또 보면 된다. 그러니까 내가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쪽은, 매우 이기적인 발언이지만, 대부분의 그들이다. 점점 아득히 멀어진 그들. 아니 처음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 그들이라고 하겠다. 나는 바로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쩔 수 없이 멀리 떠나보내 나는 죽겠네,싶은 사람들도 아니고,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는 온통 그대 뿐이라오,라고 고백할 사람들도 아니고, 이 세상이 아니라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 만나요,라는 다짐을 할 사람들도 아니건만, 무슨 연유로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서울거리가 개념없는 운전자들로 넋을 놓고, 음식점은 단체예약으로 앉을 자리가 없으며, 까페는 끈적이는 연인들의 에너지로 공기가 탁하고, 유흥주점은 부녀회와 동호회가 장악한, 더 나아가 취객들이 노상방뇨하고, 길 잃은 청춘들이 숙박업소를 기웃거리고, 어엿한 아가씨가 노래방에서 소화기를 들고 노래하고, 멀쩡한 총각들이 양아치 흉내를 내는 이 때! 왜? 그것 뿐이더냐, 모임에 어울리는 의상, 모임에 어울리는 화장, 모임에 어울리는 머리가 잡지와 일간지에 드러누워 있고, 주위를 사로잡는 매너, 주위를 사로잡는 화제, 주위를 사로잡는 몸매가 책으로 발간되어 널부러진, 엽기와 허세가 장을 이끄는 이 때! 어째서! 왜?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 아니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우리 모두 서자. 그리고, 내가 없는 모임에서, 나를 안주삼아, 즐겁지도 않은 모임을 즐겁게 이끌기 위해 술잔을 기울일 그들에게 다시 밝히는 바, 올해는 만나지 말자. 만나지 않아도 산타도 오고, 선물도 생길지 모르고, 아기 예수도 오고, 보신각의 종은 울릴 것이고, 동해 바다에서는 사람들이 일출을 향해 두 손을 모을 것이다. 설날이 오고 떡국을 먹고, 나이도 먹고, 부모님에게 야단도 맞고, 사업은 어려울 것이고, 부부는 싸울 것이고, 친구는 배신할 지도 모르고, 이 땅의 4대 강들은 포크레인에 겁탈당할 지도 모르고, 인간관계는 더 힘들어 질 것이고, 배는 나올 것이고, 주름은 늘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우리 서로 무언가 확인하려 애쓰지 말고, 존재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지 말고, 시기심을 감추려 전전긍긍하지 말고, 허영을 부리려 말달리지 말자. 그저 따뜻한 방에서 읽지 못한 책이나 읽고, 재방송하는 영화나 보며, 고향에서 올라온 고구마나 쪄먹으며, 손톱 발톱이나 다듬다가 그것도 지겨우면, 어쩌다 그리워 가슴 답답한 사람이라도 있걸랑 부치지 못할 편지라도 쓰자. 그것이 그대들도 나도 씁쓸하지도, 헛헛하지도 않게 연말을 보내는 일일 것이다.  

서운할 지 모르지만, 진실로 진실로 이것은 진심이니, 이제 그만 관계안에서 조급해 하시라! 그리고 2010년, 그대들이여 안녕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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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2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낫살의 헛됨이여.
저 단호함. 저 아쌀함. 저 정연함.
젊음의 훌륭함이다.

낫살의 무거움이여.
관계는 조급하고 목숨은 춥다.

하하, 굿바이님.
술과 장미의 나날은..라비앙 로즈는.
세밑.

굿바이님의 이 글은 예제 좀 퍼 날랐으면 합니다.

굿바이 2009-12-2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탄은 잘 보내셨는지요?

동우님, 저는 전혀 훌륭할 것 없는 젊음입니다. 여전히 안쓰럽고 답답한 관계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뭔가 아쌀해보려고 노력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과는 삽질입니다^^
술과 장미의 나날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붕붕 떠오르는 걸 보면, 멜랑꼴리는 제 팔자인가 봅니다. 서울은 어제 내린 눈의 흔적들이 마음을 심란하게 합니다.

동우 2009-12-30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허락하실줄 알고.
이글 베껴다가 모처에다 올리겠습니다.
 
<고종석의 여자들>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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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관계의 틀 속에 몰아넣지 않아도, 마음을 주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하는 인물이건, 과거에 실존했던 인물이건, 책이나 영화 속에서 창조된 인물이건 그렇게 동의하고, 감동하고, 응원하고, 박수치고, 기도하고, 따라 울게 되는 사람들. 그들을 나는 [굿바이의 시너지스트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후일 내가 혹여라도 꿈 꾸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을 자랑스럽게 세상에 선보이리라 다짐했었다. 물론, 삽질의 대가인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만, 거의 이미 알려진 사람들이고, 또한 이미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 알려진 사람들이라는, 실로 앞으로 내가 하겠다고 다짐한 작업이 뻘짓에 머무를 것,이라는 한계를 태생 이전에 갖고 있지만 말이다. 새삼 내 삶에 있어 비극을 넘은 희극이 이것 뿐이겠는가.

책을 읽기 전, 고종석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했지만, 작가는 [그녀들]을 선정하는데 있어, 적어도 나보다는 공정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들머리에 놓인 그의 말, "그 삶이 흥미롭다고 판단되면, 나는 펜을 들이댔다." 가 단서였다면 단서였다. 그렇지만, 명민한 작가는 "내가 자이노파일이긴 하지만, 거기에도 편애는 있으니까, 그 선택은, 당연히, 인물의 중요도가 아니라 내 취향과 변덕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기술한다. 고종석이 [굿바이의 시너지스트]라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자랑스럽다. 왜냐하면 편애는 그의 솔직한 고백이자, 그가 관념론자라고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 아닐까,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또한 나의 심한 편애지만 말이다. 

그가 더듬은 서른네 사람의 여자들은, 때론 그의 상찬이 지나치다 싶은 여인들도 있고, 매우 답갑지 않은 여인들도 있으며, 어떤 부분 작가의 미감이 이 정도로 좁았나,싶기도 했지만, 하여튼 로자 룩셈부르크, 오리아나 팔라치, 라 파시오나리아, 아룬다티 로이, 마리 블롱드, 로자 파크스, 클라라 체트킨, 시몬 베유, 강금실 등은 작가도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녹여지고, 얻어맞은 만큼 그 크기를 넓히고, 차갑게 식어서는 은은한 빛과 소리를 멀리까지 전하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쓰임을 지속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 방짜 유기와 닮아 있었다. 이제와서야 그 아름다움과 쓰임을 절감하는 방짜처럼, 내게도 한 번은 뜨거웠던 그녀들, 여전히 놓을 수 없는 그녀들을 다시 만나 기쁘고 안쓰러웠다. 

다시 [굿바이의 시너지스트들]로 돌아가, 나는 고종석의 글을 매우 아끼는 사람이다. 글을 아낀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아끼고, 배우고, 흉내내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서얼단상]이 그랬고, [감염된 언어],[자유의 무늬],[언문세설],[국어의 풍경들]이 그랬다. 그 밖에도 그의 글은 뭐랄까, 근본주의자들과 멀어지려는 노력이, 중심을 잡으려는 의지가, 정중함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가, 그럼에도 어딘지 퇴폐적인 미감이 나와 맞았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매번 컸고, 지금도 크다. 물론 내가 지금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매번 컸다고 운을 띄우는 것은, 자수하는 바, 이 책이 그 기대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느 작가에게 처럼 인색하지 않고, 경박한 삿대질을 자제하는 이유는, 안으로 굽은 팔을 밖으로 꺾기란 본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라마 야드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야박하게 얘기하면, 그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결합은 가장 나쁜 의미의 실용주의, 기회주의인지도 모른다"라고 적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을 산다. 먹고 살아야 하고, 이름을 유지해야 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가야 한다. 또한 실존으로서의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면서, 실존으로서의 이름을 유지하며 어디론가 나아간다는 것이, 이 때의 방향성이라는 것이, 언제나 옳고 그름의 나침반을 들이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잘 모르겠다. 인간은 그렇게 관념만을 지키기에는 너무 나약하거나 사악하고, 선명성을 따져 묻는 것도 상황에 따라 아둔하고 희극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 대해 어떤 방향성도 선명성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가 라마 야드를 서술한 문장이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으면, 그것으로 족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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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1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2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9-12-2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언니의 리뷰는 좋아요. 어쩌면 고종석은 균형에 대한 강박적 근본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쳤지요. ㅋㅋㅋㅋ

굿바이 2009-12-2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균형에 대한 강박적 근본주의라...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 생각하니, 우리는 모두 근본있는 사람들이었구나....ㅋㅋㅋ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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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거주하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현재에 이르러 좀 더 확대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굳이 바다 건너 먼 나라의 형편을 살피지 않아도 이산離散의 피해와 고통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차고 넘친다. 제국주의는 막을 내렸고, 식민植民의 기억도 사라지고 있으며, 전쟁도 휴전인 이 땅에 아직도 이산離散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줄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책의 주인공 바리의 행로를, 가족이 해체되고, 두만강을 건너고, 불법 노동자로 일하고, 밀항을 하고, 영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어린 바리가 감당했을 차가운 두만강도, 밀항의 시간들도 나는 상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린 바리가 극적으로 도착한 영국이라는 신세계는 그녀처럼 내몰린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이름의 지옥일 뿐이었다. 갖가지 피부색을 한,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혹은 도망친 그들은, 일류국가의 삼류시민, 불법체류자의 이름으로 살 수 밖에 없었고, 배타적인 시선 속에서 또 다시 표적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것인지, 흘러갈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주홍글씨를 목에 걸게 하고, 기약 없는 시간으로 몰아가는 대단한 제국들과 교만한 통치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에게 그리고 언젠가 내몰릴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희망이란 있는 것일까? 

폭정과 기근을 피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넌 이들이 무관심과 착취로 인해 또 다시 죽어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우리의 주인공 바리는 설화의 한 대목처럼 그들을 그리고 자신을 구원할 [생명수]를 찾으려 한다. 생명수를 찾기 위해 들어간 지옥 같은 환상 속에서 바리가 떠도는 불쌍한 주검들과 나누는 통한의 대화는 이 소설을 넘어 이 시대를 관통하는 [절망]이었다. 환상에서 돌아온 바리가 그들을 구원할 생명수를 찾지 못했다고 토로하자 압둘 할아버지가 그녀를 가만히 달랜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남을 위해 눈물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 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P.286" 

그러나, 나는 압둘 할어버지의 위로, 그러니까 [희망]이라는 환상이 필요한 현실, 그리고 그것이라도 붙들어야만 하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희망]이라는 묘약을 주입하여 현실을 위무하고 버티게 하는 무엇이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희망]을 처방하는 약장사들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들이 내놓는 묘약은 이미 숱한 [절망]과 [극기]의 시간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희망]을 말하는 것, [희망]만 놓지 않으면 현실은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동하는 행위는 위험하다. 그리고 그것은 기만이다. 물론 인간이란 [희망]없이 살기 어려운 것이라서, 神을 만들어 낸 생명체가 아니었냐고 한다면, 나는 그 대목에서는 할 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처방이 아니다. 그것은 아편일 뿐이다. 아편을 처방받은 이의 결말은 너무 뻔하다. 죽음이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P.223"
오히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나를 붙드는 바리의 손끝에서, 나는 염치없이 위로받고 있다. 견디는 것, 지나가는 것, 그것들이 [희망]이라는 말 보다 나는 좋다. 물론 견디고 기다리기 위해 뭔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무엇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꼭 [희망]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견디고, 지나가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절망]이라면 오히려 편하다.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자가 자신의 언어로 온전히 상처를 드러내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고통의 순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도, 그것을 타인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치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상처는 치료를 위해서건 화해를 위해서건 기록되어야 하고, 비슷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곤혹스럽게도 언제나 고통을 해석하는 타자의 시선은 일정한 선을 넘기가 힘들고, 때로는 자의적인 해석이 곁들여지기 일쑤다. 그러한 이유로 매개자의 자질과 능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일 때도 그렇지만 역사라는 집합적 기억을 다룰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여 우리시대의 상처, 바리의 고통을 알리는 작가 황석영의 글은 치밀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점, 섣불리 감정을 들쑤시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분투했다는 점에서 그가 수행한 매개자의 역할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이 땅에 이산離散의 고통이 차고 넘치는 이유는 우리 모두 [희망]을 잃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힘 있는 자들이 더 큰 힘을 얻고, 힘 없는 자들이 더 많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여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찾아야 할 [생명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패러다임, 이분법적인 구조로 세상을 가르지 않는 상생의 윤리라면 나 역시 [생명수]라는 [희망]을 붙들어 보고 싶다. 아니, 다시 한 번 속을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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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17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아스포라'라는 어휘는 유대적인 슬픔과 유대적인 희망이 내포된 복합어의 느낌.
얼마전 이른바 좌파로부터 똥바가지를 덮어쓴 적도 있지만(작품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황석영은 훌륭한 작가입니다. 김일성과 만찬을 한사람이지만 적어도 '바리데기'를 쓸수 있는.
북한,중국,영국,아프가니스탄.. 세계사적 지정학적 정치사회적 그 복잡한 공학(力學)구조의 계산법은 현실의 약장사마다 다르겠지요.
하하 굿바이님. 당연히 희망을 처방하는 현실의 약장사는 굿바이님의 폄을 받아도 무방합니다.
굿바이님의 말씀처럼 '견디는 것', 그 '산다는 것' 속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희망.
바리데기의 희망, 디아스포라의 희망. 아우슈비츠의 희망.
하하, 굿바이님 마씀처럼 우리 그 희망이나 봅시다그려.

굿바이 2009-12-1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황석영 작가는 훌륭한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문학세계와 진정성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워낙 액션이 크신 분이라서 간혹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더는 아니 그러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 실수를 한들 어쩌겠습니까? 말달리고 싶은 어르신에게서 고삐를 뺏을 수도 없고^^

겨울입니다. 기다리고 견디는 것을 배우기에 겨울 만큼 좋은 계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웽스북스 2009-12-20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그렇게 속상해하며 술마시던 그날 밤이 떠올라요 언니.
지나고보니, 또 오라버니, 좀 측은하고 귀엽고 그러기도 하고..

아. 그래도 왜그랬을까 싶기도하고...

굿바이 2009-12-2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그러던데, 사람은 과거를 혹은 미래를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실존으로서의 현재만 살 수 있다고....오라버니도 그저 그 순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면죄부를 백 마흔 다섯개쯤 얻겠다는 심뽀이지만^^

요즘 잘 먹지는 못하는 술을, 그것도 속상해하며 마시는 날이 너무 많아져서, 이제는 그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나는 오늘도 절망의 끝에서, 이 시대의 습속과 괴멸을 외치고 있다오~ 아흐~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 현대문화론 강의
이진경 엮음 / 그린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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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문화정치학의 영토들]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이념을, 현대문화를 특징짓는 일련의 현상들 안에서 살펴봄으로써, 근대의 삶과 현대의 삶을 조명한 현대문화 강의서다. 
이 책이 다루려고 하는 문화정치학은 이미 알만한 학자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분야이고, 나름의 깃발을 꼽고 그들의 진지를 구축해 놓은 상태다. 따라서 우리의 재기 발랄하고 젊은 집필자들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이념을 설명함에 있어, 단지 현상만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복의 실현 가능성 그리고 긍정적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듯 하다.

대체적으로 이 책의 주요 논쟁거리인 [근대]를 특징 짓는 어떤 이념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삶과 땔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인간을 神으로부터 빼돌리는데 일조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절대자로부터 도망친 인간이 완전한 해방을 누렸는가,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여하간 신으로부터 탈주한 인간들은 독립적인 영토를 구축하고, 그 땅에 새로운 씨앗을 뿌렸으니, 씨앗이 싹터 맺은 열매를 우리는 [이성性]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근대]의 시간은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이며, 이성의 잣대로 가늠할 때, 비합리적인 것들을 합리적인 상태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존재했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심하고 주목할 점은 바로 [합리적인 상태]다. 말은 그럴싸 하지만 [합리성]을 강요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합리성]인지, 마지막으로 [합리성]의 결과물이 어때했는지를 검증해 본다면, 의도도 투명하지 않으며 결과도 기대에 못미친다는 사실을 간파 할 수 있다. 따라서 쉽고 간단하게 짚으면 [근대의 시간]은 그것이 주장했던 [합리성]과는 무관하게 비합리적인 행태와 문제점을 적지 않게 표출하였다. 이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선언이 바로 [탈근대]다. 

근대는 이미 지나간 시절이라고 하지만, 특히 예술의 영역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던이 지배적인 추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현대의 삶은 근대적인 삶의 형태와 사유로부터 벗어나 크게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주제 중 [현대 자본주의와 현대문화], [근대의 욕망과 신체], [근대의 이념적 경계들]은 우리의 신체와 감각이 서구적 지배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근대적 사유에 어떤 식으로 철저히 붙들려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들을 무수히 많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거운 현대 문화의 현상들은, 매우 그럴싸해 보이지만, 전혀 그럴 듯 하지 않으며, 또한 새로울 것도 없으며,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너무 쉽게 매몰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간들 무슨 큰 일이 생기겠냐고 하겠지만, 현대의 문제점은 현대 문화의 병패가 단순히 외부적인 공격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각할 수 없는 교묘한 장치들을 동원해 인간의 내연에 틈을 만들고,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스미스의 몸 안에서 그를 조각조각 찢어 놓듯이, 인간의 내부를 폭파시킨다는데 있다. 따라서 현대의 특징으로 불려지는 무수한 지점들, 자본주의로 포장된, 이제는 나열하는 것도 지겨운 현상들을 의심하고, 판단하고, 극복하지 않으면 神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물론 현대 문화의 괴기스러움을 극복하고 제시되어야 하는 새로운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막연하다. 즉 서양적인 것을 극복하는 것이 동양적인 것인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공동체주의인가,라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내게 있어 가장 큰 숙제인, 인간은 그럴 수 있는가, 모두가 더 낳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의심하는 것으로 부터 출발해 고민하고 검증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인간 스스로 무차별하게 소비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여기서 답을 얻고 방법을 찾아 현대 문화의 비정상적인 현상들을 균열낼 수만 있다면, 균열된 영토에서 새로운 시대의 유토피아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상상만 하는, 불평만 하는 나는 얼마나 또 근대적인 사람인가. 아! 포스트모던한 신체에 깃든 모던한 정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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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17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정치학의 이데올로기'를 모자란 지식과 이해력을 동원하여 겨우 읽어냈던 적은 있지만 나로서는 생경한 '문화정치학'
굿바이님의 글은 내 이해에 훌륭하였습니다.

패러독스의 한마디가 일품이었습니다.
"아! 포스트모던한 신체에 깃든 모던한 정신이여!"
그런데 굿바이님, 내 생각에 신체는 일단 모던합니다.
포스트모던한 것은 바로 정신이지요.
그래야 파라독스.. 하하

굿바이 2009-12-18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포스트모던한 신체는....언제 저를 한 번 보시면 이해하시리라 사려되옵니다. 더는 괴로워서 드릴 말씀이....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