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청하, 1986)도 나에게 너무 가까이 와 있다. 그의 글들의 상당수는 남이 읽은 것들을 조금씩 변형해서 재조립한 것들이어서 깊이가 부족하다. 섬세한 문장이 때로 그것을 덮어주지만 다 성공하고 있지는 않다. 그가 치열하게 싸우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의 예외는 있는데, 그것은 그가 황지우를 비판할 때이다. 그것은 그의 무의식이 황지우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가 황지우에 대해 그의 시의 극렬성은 "위장의 극렬성이다"라고 말할 때, 그 진술은 크게 울린다. 그런 유의 치열성이 다른 글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약점이다. 그럴 때 그는 완전주의자가 아니라 타협주의자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자신은 독학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서문은 아름답다. 그는 역시 시인이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64페이지에 실린 글이다. 장석주의 최근작 <마흔의 서재>를 읽고 불편했던 마음이 저것이었구나,싶다. 가려운 곳을 저리 시원하게 긁어 주시다니. 그나저나 왕십리에 눈 온다. 큰 대자로 뻗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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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4-3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부산엔 꽃가루 날립니다.,.
어디 숨고 싶은 날입니다..
굿바이님, 잘 지내시죵?....^^
 

마음이 떠도는 날에 줄줄줄 흘렸던 말과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그곳이 지옥이겠다 싶다. 잠은 안오고 골고루 뒤척이는 밤에는 줄줄이 딸려나오는 상한 말과 마음들. 지옥은 내가 만들고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지 강 건너 먼 곳이 아니었다.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는 늦고 너무 거대해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후회에 쓴다. 그 무게에 눌려 꿈에서도 후회하는 내가 나를 지켜보는 식이다. 

 

겨울의 중심

 

무릎이 앙상해질 때

창문 밖에서

배고픈 택시들 질주하는 소리 들릴 때

겨울은 중심으로 응집된다

 

오른쪽 눈이 침침해졌다

비밀의 농도가 조금 옅어졌다

 

말없이 지구를 굴리던 사바나 코끼리가

잠시 한 숨 쉬는 사이

무릎이 해진 바지를 입고

아침부터 책상까지

5시부터 음악까지

서성이고 싶다

 

박연준의 시를 읽고 시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면 실제에서는 불가한 일이겠으나 어느 과거에서는 가능했을 시인과 내가 동거했던 자리들이 보인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시인과의 동거. 나와 당신도 있었던 자리. 마음이 옮겨다니던 자리. 금이 간 자리.

 

빨간 구름

 

안녕, 나를 해독해보렴

일그러진 벽돌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싶었어

으깨지는 가루를 분처럼 바르고

네 얼굴을 다 사용하고 싶었어

 

나는 조로(早老)하고 싶었으나

왜 자꾸 새로운 이빨이 돋아나는지

 

기억은 빨갛게 멍울 잡히고

네 외로움에 금이 갔나봐

 

펄펄 흩날리는 키스들아

나를 해독해보렴

 

번지고 싶었고 스며들고 싶었다. 간절했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돋아나는 것들. 그것들 때문에 내가 나였지만, 내가 나일 수 밖에 없음에 무릎이 해지는 날들. 내 머리 위에도  빨간 구름 낮게 낮게 떠다니고 상한 말과 마음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줄 흘렀다. 방법도 출구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 당신도 있었다. 있었던 것 같다.

 

겨울의 고도(高度)

 

빨간 코트가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얼굴 위로 자꾸만 음영이 드리워지는데

나를 덮은 우주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의 갈라진 살결, 그 가느다란 틈에

나는 끼워져 있다

 

앙상한 얼굴의 낯선 사내가

가끔 주먹으로 두드려보는

나는 겨울이 앓는 문둥병,

눈썹이 빠지고 코가 주저앉은 채로 휘파람 분다

 

애인은 내내 화두였다

전화는 오래도록 먹통이었고

바람이 유난히 보채는 날에는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여자들 오목한 허리선에

베이고 싶었다

 

입 열면 허연 입김

겨울에 피어나는 그을음처럼, 아득히 퍼지고

나는 겨울의 고도를 생각하며

자주 떨었다

 

명망있는 평론가는 박연준의 시집에 쥘 미슐레의 말을 옮겨 왔다. "어찌하여 이 땅 위에는 다만 혼자서 절망에 빠져 있는 한 여인이 있는 것일까?" 옮겨 적은 문장에서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다른 의도가 있었다 해도 읽어낼 재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불온하고 천진하게 시를 쓰는 시인은 결코 그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을 열면 허밍처럼 시가 흐르는 사람은 결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문학이 삶을 부축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 그가 모를 일이 없다.

다시 돌아와 나는 어쩐담. 목발없이 서야 하는 나는 어쩐담.

후회하는 일 대신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통과할 수 있었으면 그게 뭐였을까, 시를 쓰고 싶지 않았을까. 이런 시. 하품.

 

하품

 

마음이라는 게 아주 작게 접으면

접힐 수도 있는 것인데

자꾸 활짝 피고 싶은 꿈을 어떻게 한다?

 

창문에서 맞은편 담벼락까지

허밍으로 날아가는 라일락 꽃잎

 

도착하지 않기로.

그저 날아가다 사라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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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1-19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아~ 어찌하여 마음을 이리도 헤집어 놓는가요?...
다른 거 눈에 들어오지 않는 요즘..시가 위로가 되네요...^^
이 시집 퍼 갑니다...암 말 마쇼~~

굿바이 2013-01-21 10:17   좋아요 0 | URL
주소라도 알면 보내드릴텐데요.
부담스럽지 않으시면 주소 알려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서울은 비같은 눈인지 눈같은 비인지 뭔가 한주먹씩 쏟아집니다.

뽈쥐의 독서일기 2015-02-0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자주 사는 편인데.. 시집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까요? 굿바이님 서재 죽- 둘러보니 좋은 시집이 참 많네요. 말의 울림이라는 게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시집 리뷰 쓰시는 분은 내공이 상당하신 분이 참 많네요. 글을 주저리 주저리 쓰는 습관이 있는 저는... 소설책만 너무 많이 읽었나봐요. 절제의 미를 좀 배워야 겠는걸요.
제목도 희안한 이 책은 장바구니에 쏙! 자주 놀러올게요^^
 

밤이 길다. 달력을 보니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그리고 내일, 밤은 더 길고 춥겠다.

책이라도 눈에 들어오면 좋겠는데, 잠을 좀 잤으면 좋겠는데, 모를 일이다.

 

우리는 우주적으로 하찮은 존재다. 공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고 시간에서는 한 찰나에 불과한, 헤아릴 길 없이 미미한 존재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만큼은 중요해질 수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우리 서로에게만은 말이다.

- 「무신예찬」, 피터싱어, 마이클 셔머, 그렉 이건 외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저 문장에 얹는다.

그리고, 문은 닫혔으나 넝쿨은 문을 타고 담을 넘는다고, 사람의 일은 모르겠으나 내가 본 넝쿨은 그렇더라고 전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동지에는 따뜻한 팥죽이라도 한 그릇 넘겼으면 좋겠노라고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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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이렇게 눈이 내린 다음 날은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아요. 햇빛이랑 눈이랑 함께 반짝여요. 이모 잘있죠?" 초등학교 5학년이 참 멜랑꼴리하다. 낯설고 신기하다. 조카가 말한 다른 세상을 잠시 내다 본다. 그래 어딘지 다르기도 하다. 어제와 다르기도 하고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르기도 하고. 여튼 조카의 문자때문에 나는 잠시 쉰다. 일 년에 두어 번 마실까 말까 한 인스턴트 커피도 한 잔 타서 말이지. 좋네. 적당히 달고. 대충 쓰고. 원래 이랬나. 좋네. 합정동 사거리에서 새벽 무렵 마셨던 인스턴트 커피도 좋았는데. 그때도 오늘 같았나. 아니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가을 내내 참말로 정신없었다. 가을은 말 그대로 산과 들에서 나고 자라는 거의 모든 먹을거리가 수확되는 계절이었다. 일손이 필요한 곳, 경기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돌았다. 몸에 익은 일이 아니니 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일이 너무 안되는 날이면 시를 노래처럼 불렀다. 좋다고들 하셨다. 다들 막걸리를 술술 넘겼다. 누구의 시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다른 시를 더 불러달라고 하기도 했다. 품팔이를 해도 뭔가 옵션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요령을 얻은 셈이다. 물론 차라리 그냥 유행가를 부르라고 요청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 나름 다짐이다.

여튼 지난 가을 때론 고되고 때론 짠하고 때론 먹먹했던 품팔이도 끝났다. 그리고 '백석'에서 시작해 '진은영'으로 이어졌던 노래도 끝났다. 마지막으로 노래처럼 읊었던 시를 옮긴다.

 

멸치의 아이러니

 

진은영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고집을 꺾으려고

어머니는 도시락 가득 고추장멸치볶음을 싸주셨다

그것은 밥과 몇개의 유순한 계란말이 사이에 칸으로 막

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항상 흩어져 있다

 

시인의 순결한 양식

그 흰 쌀밥에서 나는 숭고한 몸짓으로 붉은 멸치를 하나

하나 골라내곤 했다

시민의 순결한 양식

그 붉은 쌀밥에서 나는 결연한 젓가락질로 하얘진 멸치

를 골라내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 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

는 것

 

왜 멸치는 숭고한 맛이 아닌가

왜 멸치볶음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가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는 반찬 칸을 뛰어넘어 언

제나 내 밥알을 물들이는가

왜 흔들리면서 뒤섞이는가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가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멸치여, 그대여, 아예 도시락 뚜껑을 넘어 흩어져준다면,

밥알과 함께 쏟아져만 준다면

그 신비의 알리바이로 나는 영원토록 굶을 수 있었겠네

 

두 눈 속에 갇힌 사시(斜視)의 맑은 눈빛으로

다른 쪽의 눈동자를 그립게 흘겨보는 고독한 천사처럼

 

이 시를 어떻게 노래처럼 불렀는지 돌이켜보면 섬뜩하지만 박수도 받았고 술도 받았다. 그랬으면 됐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어제는 눈이 내리고 오늘은 다른 세상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다. 그래서인지 또 눈이 내린다. 그러니 내일이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고 당분간 나는 다른 세상을 살 것이다. 다행이다. 숭고할 것 없는 다른 세상도, 멜랑꼴리한 조카가 내 곁에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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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12-0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 인상적이었는데, 언니의 가을을 함께 마감한 시였군요!

귀연이는 똑똑하기만 한 게 아니었군요! 점점 크면서 언니를 닮는 것 같아요. 고기 많이 먹는 것만 빼고! ㅎㅎ 오늘은 눈이 참 예쁘게 내리네요. 올 겨울은 부디 좀더 관대하길!

굿바이 2012-12-07 10:30   좋아요 0 | URL
나를 닮으면 큰일이지!!!!ㅋㅋㅋ
어찌되었건 참 사랑스러운 녀석이야.

風流男兒 2012-12-0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을 어루만지다 그새 가을이 가버렸네요! ㅠ 이제 시작된 농한기에는, 만나요 누나 ㅎㅎ

굿바이 2012-12-07 10:30   좋아요 0 | URL
농한기가 시작되었으니 어서 보세~!

치니 2012-12-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팔이 하시면서 어르신들 앞에서 시를 읊어드리는 굿바이 님, 으아아아아, 정말 사랑스러워요. 저라도 막걸리 펑펑 따라 드렸을 듯. 참 멋진 양반.

굿바이 2012-12-07 10:32   좋아요 0 | URL
히히. 칭찬이죠? 신나요!!!
할 줄 아는게 없어서 그냥 시라도 읊었어요. 이거라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꽃도둑 2012-12-1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멋져요~~~ 전국팔도(?)를 다니면서 뭘 하신지는 대충 알겠는데,,,
갑자기 느닷없게....아니 어울리지 않게...아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아니,,몰라요 몰라요...아무튼 여튼 멋진 사람인 것 같아요..^^

굿바이 2012-12-17 10:48   좋아요 0 | URL
멋지긴요. 후져요. 그것도 매우 후져요 ㅠㅠ
 

               금산을 찾은 건 태풍이 오리라는 소식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해 여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벌써 십오 년이 흘렀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간절했는지 무슨 성지순례처럼 보리암으로 향했다. 가방에는 시집 열 권, 무려 열 권이 들어 있었다. 소설이었으면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져간 시집들도 참! 김수영도 있었고, 이성복도 있었고, 기형도도 있었고, 백석도 있었고, 오탁번도 있었고.... 맞다. 송창식 1집도 있었다. 참으로 다양하고 어지러웠으니 여튼 그때는 그렇게 화끈거렸다. 지금은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짓이다. 

 

               다시 찾은 보리암은, 모르겠더라. 길도 낯설고 처음 온 곳처럼 모르겠더라. 지나간 것은 그렇구나 싶었다. 길도 모르겠으니 그냥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가면 되었다. 아니다. 자동차가 산을 오른 셈이다. 보리암 아래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조금 올라가니 보리암이 보였다. 수능을 기원하는 프랭카드가 보였다. 갑자기 내려가고 싶었다. 물론 참았다. 보리암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금산 정상으로 향했다. 기억 속의 봉화대가 그대로 있었다. 봉화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은 태풍이 오기 전이라 고요했다. 뭔가 큰 일을 준비하는 듯한 엄숙함과 떨림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보았던 편백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조금 들면 바다가 보이고 더 들면 하늘이 보였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눈부신 빛이 하늘과 바다와 산과 편백나무를 피어나게 했다. 태풍이 오기 전에만 볼 수 있는 바다고 산이다. 어떤 것도 눈에 들이지 않고 오직 그것들만 보았다. 간혹 새 한 마리가 울었다. 나도 입을 동그랗게 말아 비슷한 소리를 냈다. 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했다. 그리고 몰래 가져간 시집을 꺼냈다. 심지어 읽었다. 시절이 스치고 계절이 스치고 몸과 몸이 스치고 나와 그대가 스친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스쳤다. 시집 한 권을 그리고 시 한 편을 읽는 동안.

 

               영원은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내려오는 길. 내 앞을 킬힐 신은 처자가 천천히 걷는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다린다는 것일진데 저 처자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궁금했다. 또한 온 몸의 무게를 저 구두가, 무려 11센티가 감당하고 있다니 놀랍고 처연했다. 정녕 푹풍이 오고 있구나 싶었다. 문득 그 처자 불러 세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은 본디 외로운 존재라오!"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15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하지 못한 거지요!"라고.

 

통영

 

박정대

 

한 구절도 생각하지 못했어

유행가만 중얼거리다가

너에게 보낼 한 구절도 생각하지 못했어

담배를 피우며 가볍디 가벼운

내 1밀리그램의 영혼을 생각했을 뿐이야

밤이 깊고 새벽이 오고 아침이 될 때까지

너는 어느 길 위에서

지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니

 

통영이라는 곳의 어둠

지금 이곳에서 나는 고요히 네 생각을 해

그런데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행진 중이었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가 가는 길의 지도 위에 네가 없었다면

소라 방등 켠 객줏집 토방에서

너를 껴안고 오래도록

사랑을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통영이라는 곳의 깊은 밤

내 담배 연기는 내 영혼에 부딪혀 부서지고

별들의 숨소리는 통영 앞바다에 와 부서지는데

이곳을 지나 난바다에 가서 죽는 바람들

이곳을 지나 너의 부드러운 혀 속으로 가서 죽는

나의 딱딱한 추억들

항구를 떠난 갈매기들도

이제는 잠에서 깨어

너의 편지를 물고 돌아오는데

 

통영이라는 곳의 아침

나는, 천희(千姬)라는 여자와 천 마리의 시와

밤새도록의 파도 소리와 새벽별과

너의 숨소리를 오래도록 생각다가

한때 내 영혼의 통제사가 오래 머물던 곳

통영이라는 곳에서

끝내 너에게 보낼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하지 못한 거야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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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8-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창 밖에서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글을, 이 시를 읽었어요. 오래 전 통영에서 본 아주 새카만 밤이 떠오르네요. 저의 조그마한 온기를 보냅니다.

웽스북스 2012-08-28 22:36   좋아요 0 | URL
오늘은 네꼬님 글도 보고 굿바이언니 글도 보고. 계탔네 계탔어. 덩실덩실.

굿바이 2012-08-29 12:17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저는 뭘 보낼까요?
결이 고운 바람을 보냅니다~!

웬디양! 잘 잤나요? ^^

2012-08-28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8-2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남해라는 글에 냉큼 찾아왔습니다.
절이든 보리암이든 무엇이든 모두... 뭐랄까 속세(?) 실속(?)만 따지는 거 같아서 뭔가 안타까워요. 그냥 남해 이야기에 찾아왔다구요. 헤헤헤헤 ㅎㅎ

굿바이 2012-08-29 12:2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이진님~!

보리암은 좀 아쉬웠지만 또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의 삶과 닮아있는 건 아닌지 싶었습니다. 삶과 닮아있어서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또 짠하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태풍 피해는 없으셨나요?

이진 2012-08-29 21:29   좋아요 0 | URL
남해는 태풍 거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태풍 피해가 그나마 없었어요. 바람이 한나절동안 강하게 불긴 했지만 농작물이나 주택들에 피해 줄만한 정도는 아니었구요. 굿바이님은 괜찮으셨죠?

2012-08-30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31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03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