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목사의 옥중서신을 읽으며 나는 이성복의 시를 떠올렸다.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무관하게 어떤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에만 눈이 갔고, 그 짐이 한 사람의 등에 얹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만 마음이 끌린 셈이다.

짐을 진다는 것은 분명 힘이 들고 힘을 써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내 경우 그 짐이 있어 중심을 잡을 때가 있었고, 그 짐이 있어 지리한 시간들을 견딘 적도 있었다. 허공에 걸린 줄을 타는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줄 위에 서는 것처럼 맨몸으로는 도리어 건널 수 없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이 시작되는 지점에 함께 존재한 죽음이라는 시간을 외면하거나 잊고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체구가 감당할 수 있는 물리적인 양보다 조금 더 나가는 짐보따리 하나 씩을 등에 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외롭고 쓸쓸한 죽음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아마도. 그렇게. 우리는 옥중에서 그리고 남해 금산에서도 짐을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다. 지독히 무섭고 외로워서.

 

편지 1

 

이성복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

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

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지성 시인선 472
임승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일 누군가의 흔적을 뒤졌던 적이 있다. 그리고 흠결을 찾아내면 웃었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역시나 울었다. 아마 임승유 시인이라면 울었다,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은밀함이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시간을 들어올리는 지렛대를 가져본 적 없는 나는 시인이 부럽다. 그래서 시인의 흔적을 찾아보려 시어들을 쫓아가 본다. 결국 흠결은 찾지 못했고 불길하지만 단단한 진술들과 마주한다. 울기도 뭣하고 웃기도 뭣한 밤이다.

 

구조와 성질

 

임승유

 

 

 

창문을 그리고

그 앞에

잎이 무성한 나무를 그렸다

 

안에 있는 사람을 지켜주려고

 

어느 날은

 

나뭇가지를 옆으로 치우고

창문을 그렸다

 

한 손에

돌멩이를 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쁘다는 핑계로 사람 구실을 못하니 원성이 자자하다. 예감했던 일이라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저 내가 바쁜 동안 다들 무탈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심지어 열심히 빌었다. 물론 기도로 해결된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나도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늙어 시작한 공부는 더디기만 한데, 늙어 시작한 공부라는 이유로 다들 뭔가 잘해주기를 바라니, 짜낼 수 있는 시간은 다 짜낼 수 밖에. 결국 생명줄을 끊어서 가방줄로 연결하는 셈이다. 어리석고 무모한 나의 가을은 이렇게 가고 있는 중.

 

그런 와중에 김양의 방문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다. 김양이 많이 참은 것이지, 몇 번을 달려와도 왔을 터인데 나를 많이 배려한 것이지. 그러나 올 것은 온다. 그럼 그렇지. 가을인데. 사랑이야기가 빠질 계절이 아니지. 진짜 가을이니까. 김양의 가을은 늘 그러했으니까. 따순 정종에 오뎅탕을 혼자 먹을 수는 없는 일이며, 둘둘 감은 스카프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비밀같은 눈인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김양의 말대로 우리는 그렇게 사랑이 필요한 계절을 살고 있으며, 이 계절을 또 살아내야 하니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오로지 나만 빼고. 오로지 나는 기필코 제외하겠다는 신의 각오가 있는듯 뭐 그렇게. 엠병할.

 

어찌되었건 이번에는 잘되라. 그리고 이번에는 왠지 예감이 좋더라.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상대가 그렇고, 선한 눈매가 그렇고, 상식적인 생각들이 그렇다. 그러니 더는 어떤 아슬아슬함이나 애절함에 이끌리지 않기를, 그저 둔하더라도 따뜻하고,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맑기를, 스스로를 파먹지 않고 서로 단 것들을 그저 나눠먹기를, 그래서 지칠 마음도 내려앉는 한숨도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내가 못한 일이라 어쩌면 더 간절하게 바라는 일인지도 모르겠고.

 

집에 돌아와 신해욱의 산문집『일인용 책』을 잠깐 집어 들었다.

이 가면은 일종의 위선일까.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알량한 위선이나마 이기적 성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가려주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이 가면이 우리의 얼굴에, 우리의 마음에 들러붙어 아예 떨어지지 않기를, 시작은 가면이었으되 언젠가는 가면이 얼굴 자체가 되기를, 그날 친구와 나는 우리의 치사한 마음과 함께 이 소망을 눈빛으로 공유했다(41페이지).

 

12월에 방학하면 그때 보자. 우리 가을을 살고 보자. 햇빛을 따라다니지 말고, 바람의 방향으로 서지 말고, 나무에게 말 걸지 말고 그렇게 살살 이 가을을 살고, 눈 내리는 가을에는 그저 또 눈 내린다고 적당히 웃으면서 그렇게 보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15-10-2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굿바이 님. :)
무슨 공부를 하시는진 모르지만, 무조건 응원 또 응원. 사람은 어차피 평생 공부해야 하는 거 같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위선 좀 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위선이라도 떨면 세상 그나마 겉으로라도 살 만하지 않을까 그런 패배주의적인 바람.

굿바이 2015-10-28 21:44   좋아요 0 | URL
치니님 잘 지내시죠??
어찌지내시는지 가끔 궁금합니다요:) 돈안되는 공부 하고 있습니다. 저는 늘 이래요ㅜㅜ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까. 지구와 북극곰과 고래와 플랑크톤과 산소와 너와 나는. 속죄도 타이밍이 있다는 것을 언제 알았는지 모르겠다. 잘못한 일을 싹싹 빌고 싶은데 이제는 머쓱해서 이 일을 어쩌나. 흰 눈이 오면 너를 만나러 가야겠다. 정말 무릎을 꿇고 너에게 한 모든 저주에 대해 빌고 또 빌어야겠다. 사람이 되겠다고 먹었던 마늘과 쑥을 다 토하고 싶은 밤. 그런데도 나는 소화제를 먹는군. 뭘 또 소화시키겠다고 말이지. 미안하다고 하기에는 지은 죄가 크고, 죽여달라고 하기에는 또 다시 너를 귀찮게하는 것 같아 나는, 참, 늘, 그렇지만, 타이밍을 참 놓치고 말았다. 북극곰은 말라가고, 돌고래는 한강에서도 죽어가는데 나는 이렇게 또 오늘을 산다. 타이레놀과 베아제를 한 웅큼 먹고.

 

화이트 크리스마스

 

신해욱

 

 

 

눈이 온다.

 

하지만 머릿속이 하얀 건

오늘 하얀 밥을 먹었기 때문.

 

하지만 하얀 옷을 더렵혔으니

이제 나는 악마가 되겠지.

 

앞이 보이지 않겠지.

 

신발 속에는 발가락들이 우글거려서

걸음을 옳길 수가 없겠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9-09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먼지와의 싸움에서 이겨보리라 다짐한 지 어언 20년. 결론부터 말하면 백전백패다. 물론 오늘도 졌다. 책 한 권을 찾다가 결국 책장의 먼지를 닦아내는 일에 혈안이 된 나는, 책장 사이사이 집요하게 쌓인 검은 먼지들을 보며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다 퍼부었다. 다행히 집에는 나 혼자다. 실체를 들키지 않아 다행이다. 휴~

 

그러니까 무슨 책을 찾은 거냐면, 『일만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라는 시집인데, 여튼 찾았다. 이 시집을 찾은 이유는 작가의 시로 추정되는 어떤 시가 불쑥 생각나서였는데, 찾아서 다시 읽으니, 이 시가 아닌게라. 뭐냐. 휴~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날이면 날마다 확인하고 있지만, 참으로 이제는 자체 폐기를 해야 할 시간이 온 걸까. 나도 우리의 아놀드처럼 굿바이!하면서, 엄지 손가락 하나 치켜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휴~

 

그래도 이 시를 발견한 것은 기쁜 일이고!

 

자리

 

조용미

 

무엇이 있다가

사라진 자리는 적막이 가득하다

 

절이 있던 터

연못이 있던 자리

사람이 있던 자리

꽃이 머물다 간 자리

 

고요함의 현현,

무엇이 있다 사라진 자리는

바라볼 수 없는 고요로

바글거린다

 

여느 때 같으면 이 시를 읽고 나는 무엇인가 존재했던 혹은 그렇게 믿었던 것들의 자리를 기억하며, 약간은 우울하게 혹은 약간은 비장하게 뭔가 씨부렸겠지만, 지금 나는 먼지가 있었던 자리를 가만히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쳐다볼 뿐이다. 휴~

 

그리고, 나는 묻는다. 이건 뭔지?????? 혹시 인터스텔라?????? 뭔가 싸인이냐??????? 그런거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15-08-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지가 쌓인 자리가 싸인? ㅋㅋ 책장 먼지라니, 저는 한참동안 외면중 ㅠㅠ

굿바이 2015-08-17 13:45   좋아요 0 | URL
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이래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