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니터를 통해 수컷 황제펭귄을 보다가 울었다. 울다 보니 암컷 황제펭귄 때문에 또 울었다. 동상이 걸리지 않게 진화한 펭귄의 발을 보며 더 울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어떻게든 기다리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꺼이꺼이 울었다. 울고 싶어 운 것인지 울다 보니 울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밝힌다고 돈이 나오는 일도 아니고 시원해지는 일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펭귄은 왜 펭귄인가. 잠이 물러난 자리에서 계속 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황제펭귄에게 다른 선택이란 본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남극의 블리자드를 고작 등짝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황제펭귄들이 동시에 했을 리는 없고 어느 허황한 펭귄의 선동이었을까. 새끼를 발등에 올리고 몇 달은 기꺼이 굶을 수 있다는 각오는 어떤 멍청하고 선량한 펭귄이 시작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펭귄이 펭귄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은 펭귄의 선택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고.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황제펭귄이 버티고 있는 남극은 그래 그렇다 치고 여기는 우짤라고 이리 춥나 이것저것 살펴 보니 어제도 들었고 그제도 들었던 이야기들도 있고 가물가물한 이야기들도 있다. 어제는 미세먼지가 극지방을 가려 복사열이 어쩌구 저쩌구 뭐 그런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춥다, 혹은 계속 추울 것이다, 더 추울 수도 있다,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내심 다음 주에는 영상으로 회복될 것 같아요, 혹은 겨울이 할 만큼 한 것 같네요, 라는 발랄한 예언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림없었다. 세상이 혹은 일기예보가 저는 이제 펙트에만 치중하겠어요, 라고 선언한 것 처럼 얄짤없이 야멸찼다. 가관이다. 언제부터 그랬다고 또는 어디까지 펙트라고. 욕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황제펭귄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다. 얼음도 쩡쩡 울어대는 남극의 겨울, 제 몸에 고개를 처박은 수컷 황제펭귄을 생각하면 뭐든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아가 고개를 처박기 전 암컷과 나누는 눈인사, 이런 말이 오고 갔으려나. 남은 펭귄과 떠나는 펭귄. 그들.

 

"내 마음 정한 곳은 당신뿐이니, 세상 끝에 가더라도 돌아올 거요" (<여울물 소리> 87쪽)

 

목숨을 담보로 한 약속의 몸짓, 자기 한계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으려는 그 미련함을 생각하노라면, 도리어 나는 뭐든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일들이 줄을 서서 달려드는, 좀 더 정확히 참을 수 없는 내가 나에게 모조리 들키는 요즘. 남극을, 블리자드를, 펭귄의 발을, 남극의 얼음바다로 뛰어드는 펭귄을,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또 생각한다. 펭귄은 왜 펭귄인가. 펭귄은 무엇인가. 생각과 행위의 경계가 없는 것, 초조해지지 않는 것, 쓰지 않고 읽지 않는 것, 꿈이 없는 잠을 자는 것, 실존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펭귄인가. 그래서 나는 펭귄일 수 없는가. 뭐 그런 생각을 한다. 펭귄일 수 없는 나는 심지어 무의미한가. 뭐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380만 년의 영원 속에서 자신의 삶은 아주 작은 좁쌀 같은 것이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말하겠습니다. 아니, 그것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면 400만 년이라는 인류의 삶조차 우주의 방대한 생성 안에서는 무의미해져버립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한순간의 섬광이라고 해도 불꽃처럼 덧없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는게 됩니다. 하지만- 역시 이럴 때는 니체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고뇌하며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뭔가의 원인이고 행위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사고의 오류에서 오는 거짓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행해진다! 어떤 때라도!"라고 노래하듯이 그는 말합니다. 즉 우리는 우주의 거대한 생성의 '일부이고' 그 '의미인' 것입니다. 이 방대한 우주의 생성 안에서 이리하여 우리가 말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을 자아내가는 것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의미입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267쪽)

 

하필 황제펭귄이었나. 운명처럼 황제펭귄이었나. 그러나 모니터에서 본 것이 황제펭귄이었는지 고개를 처박은  마흔이 된 나였는지 둘 다 였는지 실은 잘 모르겠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읽고 싶은 것만 읽기에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4쪽)

 

텍스트를 모든 혁명의 근원이라 말하는 저자의 책을 두고 나는 잠시 남극의 얼음 평원을, 하얀 설원 위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는 한 무리의 펭귄을 텍스트로 읽는다. 펭귄의 무리 안에서 펭귄의 가죽을 두르고 어정쩡 발을 옮기는 나 역시 텍스트로 읽는다. 어쩌다 펭귄을 텍스트로 읽는, 어쩌다 펭귄의 무리에서 나를 찾아내는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졌는지. 어쩌다 하필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저 단지 허우적거리고 서성이는 내게 황제펭귄은 어떤 텍스트보다 강렬하게 읽힌다. 심지어 뻔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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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그늘 2013-01-10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벗.. 굿바이님..

누구에게나 다 하나씩 있지 않을까해요?
기적을 바라는 어떤 무엇..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값없이 주시는 선물)
이라고도 해요. 굿바이님은 그런것이 없나요?

혹여나.. 마음이 향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위해 두 손을 꽁꽁묶고 마음으로 기도해 드릴께요..

한웅재의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마음을 따스하게 하네요
한 번 들어보세요 좋아요^^

굿바이 2013-01-10 10:28   좋아요 0 | URL
오호, 이렇게 따뜻한 노래도 추천해주시고 늘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을 또 이렇게 늘 넙죽 받기만 합니다. 염치없어 어쩐답니까...

잘 지내시죠? 올해 좋은 계획들은 세우셨나요?
저도 가끔 흰그늘님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2013-01-1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이 글 보고 나니 마음이 짠해져요. 위로가 되는 느낌이에요. 황제 펭귄을 생각하면서 이 겨울을, 이 추운 나라를 견디겠어요. 우리는 새해에 복을 받자구요.

마노아 2013-01-1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댓글 달고 나니 로그아웃 되었네요. 요 위의 댓글 제가 썼어요.(>_<)

굿바이 2013-01-10 10:22   좋아요 0 | URL
악, 마노아님이다!!!
잘 지내시죠? 무조건 잘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어찌되었건 봄은 와요. 봄이 오면 우리 모두 거들먹거리며 겨울을 추억하자구요. 화이팅!

비로그인 2013-01-1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 2013-01-11 10:58   좋아요 0 | URL
겉으로만 여물지 말고 안으로 더 단단해지라고 겨울이 모질게 춥다.
그래서 감사하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어찌 지내니? 오다가다 뜨거운 거 생각나면 연락해.
연주가 좋네. 조근조근하니.

꽃도둑 2013-01-10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인해 낮밤을 무겁게 지내고 있는데..살아가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은 아..무위의 몸짓이었음을,,,그저 나는 행하고 있었음을 글을 읽으면서 알았네요...ㅜ.ㅜ

굿바이 2013-01-11 11:06   좋아요 0 | URL
꽃도둑님, 여전히 낮도 밤도 무거우신가요? 우짭니까....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
그러게요. 그런 물음은 뭐할라꼬 따라오는지, 참 거시기합니다.
'짚불에 무쇠가 녹는다'고 어떤 할아버지가 제게 그러더군요.
마음에 짚불처럼 힘없는 불씨가 붙었다고 방심하면 안됩니다. 자나깨나 불관리 잘하셔야합니다. 화이팅 ㅜㅡ
 

밤이 길다. 달력을 보니 동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그리고 내일, 밤은 더 길고 춥겠다.

책이라도 눈에 들어오면 좋겠는데, 잠을 좀 잤으면 좋겠는데, 모를 일이다.

 

우리는 우주적으로 하찮은 존재다. 공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고 시간에서는 한 찰나에 불과한, 헤아릴 길 없이 미미한 존재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만큼은 중요해질 수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우리 서로에게만은 말이다.

- 「무신예찬」, 피터싱어, 마이클 셔머, 그렉 이건 외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저 문장에 얹는다.

그리고, 문은 닫혔으나 넝쿨은 문을 타고 담을 넘는다고, 사람의 일은 모르겠으나 내가 본 넝쿨은 그렇더라고 전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동지에는 따뜻한 팥죽이라도 한 그릇 넘겼으면 좋겠노라고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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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이렇게 눈이 내린 다음 날은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아요. 햇빛이랑 눈이랑 함께 반짝여요. 이모 잘있죠?" 초등학교 5학년이 참 멜랑꼴리하다. 낯설고 신기하다. 조카가 말한 다른 세상을 잠시 내다 본다. 그래 어딘지 다르기도 하다. 어제와 다르기도 하고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르기도 하고. 여튼 조카의 문자때문에 나는 잠시 쉰다. 일 년에 두어 번 마실까 말까 한 인스턴트 커피도 한 잔 타서 말이지. 좋네. 적당히 달고. 대충 쓰고. 원래 이랬나. 좋네. 합정동 사거리에서 새벽 무렵 마셨던 인스턴트 커피도 좋았는데. 그때도 오늘 같았나. 아니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가을 내내 참말로 정신없었다. 가을은 말 그대로 산과 들에서 나고 자라는 거의 모든 먹을거리가 수확되는 계절이었다. 일손이 필요한 곳, 경기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돌았다. 몸에 익은 일이 아니니 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일이 너무 안되는 날이면 시를 노래처럼 불렀다. 좋다고들 하셨다. 다들 막걸리를 술술 넘겼다. 누구의 시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다른 시를 더 불러달라고 하기도 했다. 품팔이를 해도 뭔가 옵션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요령을 얻은 셈이다. 물론 차라리 그냥 유행가를 부르라고 요청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 나름 다짐이다.

여튼 지난 가을 때론 고되고 때론 짠하고 때론 먹먹했던 품팔이도 끝났다. 그리고 '백석'에서 시작해 '진은영'으로 이어졌던 노래도 끝났다. 마지막으로 노래처럼 읊었던 시를 옮긴다.

 

멸치의 아이러니

 

진은영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고집을 꺾으려고

어머니는 도시락 가득 고추장멸치볶음을 싸주셨다

그것은 밥과 몇개의 유순한 계란말이 사이에 칸으로 막

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항상 흩어져 있다

 

시인의 순결한 양식

그 흰 쌀밥에서 나는 숭고한 몸짓으로 붉은 멸치를 하나

하나 골라내곤 했다

시민의 순결한 양식

그 붉은 쌀밥에서 나는 결연한 젓가락질로 하얘진 멸치

를 골라내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 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

는 것

 

왜 멸치는 숭고한 맛이 아닌가

왜 멸치볶음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가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는 반찬 칸을 뛰어넘어 언

제나 내 밥알을 물들이는가

왜 흔들리면서 뒤섞이는가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가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멸치여, 그대여, 아예 도시락 뚜껑을 넘어 흩어져준다면,

밥알과 함께 쏟아져만 준다면

그 신비의 알리바이로 나는 영원토록 굶을 수 있었겠네

 

두 눈 속에 갇힌 사시(斜視)의 맑은 눈빛으로

다른 쪽의 눈동자를 그립게 흘겨보는 고독한 천사처럼

 

이 시를 어떻게 노래처럼 불렀는지 돌이켜보면 섬뜩하지만 박수도 받았고 술도 받았다. 그랬으면 됐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어제는 눈이 내리고 오늘은 다른 세상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다. 그래서인지 또 눈이 내린다. 그러니 내일이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고 당분간 나는 다른 세상을 살 것이다. 다행이다. 숭고할 것 없는 다른 세상도, 멜랑꼴리한 조카가 내 곁에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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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12-0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 인상적이었는데, 언니의 가을을 함께 마감한 시였군요!

귀연이는 똑똑하기만 한 게 아니었군요! 점점 크면서 언니를 닮는 것 같아요. 고기 많이 먹는 것만 빼고! ㅎㅎ 오늘은 눈이 참 예쁘게 내리네요. 올 겨울은 부디 좀더 관대하길!

굿바이 2012-12-07 10:30   좋아요 0 | URL
나를 닮으면 큰일이지!!!!ㅋㅋㅋ
어찌되었건 참 사랑스러운 녀석이야.

風流男兒 2012-12-0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을 어루만지다 그새 가을이 가버렸네요! ㅠ 이제 시작된 농한기에는, 만나요 누나 ㅎㅎ

굿바이 2012-12-07 10:30   좋아요 0 | URL
농한기가 시작되었으니 어서 보세~!

치니 2012-12-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팔이 하시면서 어르신들 앞에서 시를 읊어드리는 굿바이 님, 으아아아아, 정말 사랑스러워요. 저라도 막걸리 펑펑 따라 드렸을 듯. 참 멋진 양반.

굿바이 2012-12-07 10:32   좋아요 0 | URL
히히. 칭찬이죠? 신나요!!!
할 줄 아는게 없어서 그냥 시라도 읊었어요. 이거라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꽃도둑 2012-12-1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멋져요~~~ 전국팔도(?)를 다니면서 뭘 하신지는 대충 알겠는데,,,
갑자기 느닷없게....아니 어울리지 않게...아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아니,,몰라요 몰라요...아무튼 여튼 멋진 사람인 것 같아요..^^

굿바이 2012-12-17 10:48   좋아요 0 | URL
멋지긴요. 후져요. 그것도 매우 후져요 ㅠㅠ
 

               금산을 찾은 건 태풍이 오리라는 소식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해 여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벌써 십오 년이 흘렀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간절했는지 무슨 성지순례처럼 보리암으로 향했다. 가방에는 시집 열 권, 무려 열 권이 들어 있었다. 소설이었으면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져간 시집들도 참! 김수영도 있었고, 이성복도 있었고, 기형도도 있었고, 백석도 있었고, 오탁번도 있었고.... 맞다. 송창식 1집도 있었다. 참으로 다양하고 어지러웠으니 여튼 그때는 그렇게 화끈거렸다. 지금은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짓이다. 

 

               다시 찾은 보리암은, 모르겠더라. 길도 낯설고 처음 온 곳처럼 모르겠더라. 지나간 것은 그렇구나 싶었다. 길도 모르겠으니 그냥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가면 되었다. 아니다. 자동차가 산을 오른 셈이다. 보리암 아래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조금 올라가니 보리암이 보였다. 수능을 기원하는 프랭카드가 보였다. 갑자기 내려가고 싶었다. 물론 참았다. 보리암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금산 정상으로 향했다. 기억 속의 봉화대가 그대로 있었다. 봉화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은 태풍이 오기 전이라 고요했다. 뭔가 큰 일을 준비하는 듯한 엄숙함과 떨림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보았던 편백나무도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조금 들면 바다가 보이고 더 들면 하늘이 보였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눈부신 빛이 하늘과 바다와 산과 편백나무를 피어나게 했다. 태풍이 오기 전에만 볼 수 있는 바다고 산이다. 어떤 것도 눈에 들이지 않고 오직 그것들만 보았다. 간혹 새 한 마리가 울었다. 나도 입을 동그랗게 말아 비슷한 소리를 냈다. 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했다. 그리고 몰래 가져간 시집을 꺼냈다. 심지어 읽었다. 시절이 스치고 계절이 스치고 몸과 몸이 스치고 나와 그대가 스친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스쳤다. 시집 한 권을 그리고 시 한 편을 읽는 동안.

 

               영원은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내려오는 길. 내 앞을 킬힐 신은 처자가 천천히 걷는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다린다는 것일진데 저 처자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궁금했다. 또한 온 몸의 무게를 저 구두가, 무려 11센티가 감당하고 있다니 놀랍고 처연했다. 정녕 푹풍이 오고 있구나 싶었다. 문득 그 처자 불러 세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은 본디 외로운 존재라오!"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15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하지 못한 거지요!"라고.

 

통영

 

박정대

 

한 구절도 생각하지 못했어

유행가만 중얼거리다가

너에게 보낼 한 구절도 생각하지 못했어

담배를 피우며 가볍디 가벼운

내 1밀리그램의 영혼을 생각했을 뿐이야

밤이 깊고 새벽이 오고 아침이 될 때까지

너는 어느 길 위에서

지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니

 

통영이라는 곳의 어둠

지금 이곳에서 나는 고요히 네 생각을 해

그런데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행진 중이었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가 가는 길의 지도 위에 네가 없었다면

소라 방등 켠 객줏집 토방에서

너를 껴안고 오래도록

사랑을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통영이라는 곳의 깊은 밤

내 담배 연기는 내 영혼에 부딪혀 부서지고

별들의 숨소리는 통영 앞바다에 와 부서지는데

이곳을 지나 난바다에 가서 죽는 바람들

이곳을 지나 너의 부드러운 혀 속으로 가서 죽는

나의 딱딱한 추억들

항구를 떠난 갈매기들도

이제는 잠에서 깨어

너의 편지를 물고 돌아오는데

 

통영이라는 곳의 아침

나는, 천희(千姬)라는 여자와 천 마리의 시와

밤새도록의 파도 소리와 새벽별과

너의 숨소리를 오래도록 생각다가

한때 내 영혼의 통제사가 오래 머물던 곳

통영이라는 곳에서

끝내 너에게 보낼

단 한 마디의 말도 생각하지 못한 거야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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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8-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창 밖에서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글을, 이 시를 읽었어요. 오래 전 통영에서 본 아주 새카만 밤이 떠오르네요. 저의 조그마한 온기를 보냅니다.

웽스북스 2012-08-28 22:36   좋아요 0 | URL
오늘은 네꼬님 글도 보고 굿바이언니 글도 보고. 계탔네 계탔어. 덩실덩실.

굿바이 2012-08-29 12:17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저는 뭘 보낼까요?
결이 고운 바람을 보냅니다~!

웬디양! 잘 잤나요? ^^

2012-08-28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8-2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남해라는 글에 냉큼 찾아왔습니다.
절이든 보리암이든 무엇이든 모두... 뭐랄까 속세(?) 실속(?)만 따지는 거 같아서 뭔가 안타까워요. 그냥 남해 이야기에 찾아왔다구요. 헤헤헤헤 ㅎㅎ

굿바이 2012-08-29 12:2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이진님~!

보리암은 좀 아쉬웠지만 또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의 삶과 닮아있는 건 아닌지 싶었습니다. 삶과 닮아있어서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또 짠하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태풍 피해는 없으셨나요?

이진 2012-08-29 21:29   좋아요 0 | URL
남해는 태풍 거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태풍 피해가 그나마 없었어요. 바람이 한나절동안 강하게 불긴 했지만 농작물이나 주택들에 피해 줄만한 정도는 아니었구요. 굿바이님은 괜찮으셨죠?

2012-08-30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31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03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말한다.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이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알랭드보통, 불안)

 

어떤 영역에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영역에서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모란은 몇 번 피었고 사월은 몇 번 흘렀는지 그것을 셈하는 일도 우스워 아침부터 초코칩쿠키만 축내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 환상들이 사라진 자리에 즐거움은 없다. 즐겁기 위해 뭘 더 버려야 하는지 버릴 것이 남아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즐거움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 뭔가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기어 오르다니. (스스로 올랐나? 뭐 그렇다 치고)

 

실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가을이 오면, 벌써 가을이 왔다고 떠벌리는 사람도 있더라마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가을이 오면, 나는 달릴 것이다.

달려서 가을을 통과하고 겨울을 통과하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통과하고 뭐 그렇게 계속 통과하고 또 통과하고. 그래서 '다행이야! 이제 몽땅 싸그리 사라졌어!'를 중얼거릴 수 있기를. 더는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지 않고 살아갈 날들을 넘겨보지도 않고 그렇게 그저 패쓰 또 패스. 그렇게 나는 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달린다고 하니 비웃는 사람이 한 트럭이다. 물론 걱정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밝히는 바 내 목표는 10km다,라고 말하니 걱정하던 몇 안되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비웃는 것,들만 남았다. 그럴 수 있다. 욕은 개인적으로 하겠다.

10km를 뛰기 위해 5개월을 준비할 예정이다,라고 말하니 나를 비웃던 것,들이 나를 동정하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다. 저주는 개인적으로 퍼붓겠다.

 

그럼에도, 염려와 비웃음과 격려와 동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해도, 나는 달릴 예정이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될 수 없었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너무 평범한 퍼포먼스라 해도. 혹시 모르지. 새로운 영성의 세계를 맛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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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8-1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뛸 때도 가오를 잊지 말아요!! (개인적으로 맞을게요 ㅠㅠ)

굿바이 2012-08-13 10:24   좋아요 0 | URL
알았어!! ㅠㅠ

비로그인 2012-08-1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내가 너무 버거워 여름이 가는데도 더위 먹은 개 마냥 숨을 헐떡거리고 ..내장에 커피를 들어붓고 .. 카페인 중독으로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랜다며 신경 안정제를 마시는 요즘.. 나는 여전히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그 적나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자신을 이리저리 업고 뛰며 여름을 보냈다.. 해서 친구야.. 패스 또 패스를 외칠 수 있는 가을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지... 그대와 같이 뛸까? 그러면 그 어느날 몽땅 사그라질 날이 올까? (노려보지 말게.. 무서워 ㅠㅠ) 난 힘들다는 거 알고 있다네..너무나..잘..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같이 뛰자!!!!
그래서 뭔가 하나라도 해결될 수 있으면 같이 뛰자!!!!!!

風流男兒 2012-08-11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보고싶어요.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돌아와라!!!!!

風流男兒 2012-08-11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쓰고 나니 저 이 말 너무 많이 했나 싶어요 푸하하핫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나도 돌아오라,는 말 너무 많이 했나 싶어 ^^

꽃도둑 2012-08-1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저도 달리고 싶어요.
준비 운동은 해야겠죠?...근데 겨울을 통과해서 나까지 통과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어요..
암튼 달리죠 뭐.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우리 달려요 달려~!!!!

네꼬 2012-08-13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저는 "가을이 오면, 나는 달릴 것이다."가 어떤 상징적인 문장, 어떤 은유, 어떤 시... 그런 건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진짜 뛴다고요? 와 대단! 멋지시다.

굿바이 2012-08-13 10: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은유라뇨~~~~
진짜 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