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젊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말한다.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이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알랭드보통, 불안)

 

어떤 영역에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영역에서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모란은 몇 번 피었고 사월은 몇 번 흘렀는지 그것을 셈하는 일도 우스워 아침부터 초코칩쿠키만 축내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 환상들이 사라진 자리에 즐거움은 없다. 즐겁기 위해 뭘 더 버려야 하는지 버릴 것이 남아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즐거움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즐거움을 찾기 위해 뭔가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기어 오르다니. (스스로 올랐나? 뭐 그렇다 치고)

 

실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가을이 오면, 벌써 가을이 왔다고 떠벌리는 사람도 있더라마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가을이 오면, 나는 달릴 것이다.

달려서 가을을 통과하고 겨울을 통과하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통과하고 뭐 그렇게 계속 통과하고 또 통과하고. 그래서 '다행이야! 이제 몽땅 싸그리 사라졌어!'를 중얼거릴 수 있기를. 더는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지 않고 살아갈 날들을 넘겨보지도 않고 그렇게 그저 패쓰 또 패스. 그렇게 나는 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달린다고 하니 비웃는 사람이 한 트럭이다. 물론 걱정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밝히는 바 내 목표는 10km다,라고 말하니 걱정하던 몇 안되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비웃는 것,들만 남았다. 그럴 수 있다. 욕은 개인적으로 하겠다.

10km를 뛰기 위해 5개월을 준비할 예정이다,라고 말하니 나를 비웃던 것,들이 나를 동정하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다. 저주는 개인적으로 퍼붓겠다.

 

그럼에도, 염려와 비웃음과 격려와 동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해도, 나는 달릴 예정이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될 수 없었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너무 평범한 퍼포먼스라 해도. 혹시 모르지. 새로운 영성의 세계를 맛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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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8-1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뛸 때도 가오를 잊지 말아요!! (개인적으로 맞을게요 ㅠㅠ)

굿바이 2012-08-13 10:24   좋아요 0 | URL
알았어!! ㅠㅠ

비로그인 2012-08-1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내가 너무 버거워 여름이 가는데도 더위 먹은 개 마냥 숨을 헐떡거리고 ..내장에 커피를 들어붓고 .. 카페인 중독으로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랜다며 신경 안정제를 마시는 요즘.. 나는 여전히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그 적나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자신을 이리저리 업고 뛰며 여름을 보냈다.. 해서 친구야.. 패스 또 패스를 외칠 수 있는 가을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지... 그대와 같이 뛸까? 그러면 그 어느날 몽땅 사그라질 날이 올까? (노려보지 말게.. 무서워 ㅠㅠ) 난 힘들다는 거 알고 있다네..너무나..잘..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같이 뛰자!!!!
그래서 뭔가 하나라도 해결될 수 있으면 같이 뛰자!!!!!!

風流男兒 2012-08-11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보고싶어요.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돌아와라!!!!!

風流男兒 2012-08-11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쓰고 나니 저 이 말 너무 많이 했나 싶어요 푸하하핫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나도 돌아오라,는 말 너무 많이 했나 싶어 ^^

꽃도둑 2012-08-1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저도 달리고 싶어요.
준비 운동은 해야겠죠?...근데 겨울을 통과해서 나까지 통과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어요..
암튼 달리죠 뭐.

굿바이 2012-08-13 10:25   좋아요 0 | URL
우리 달려요 달려~!!!!

네꼬 2012-08-13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저는 "가을이 오면, 나는 달릴 것이다."가 어떤 상징적인 문장, 어떤 은유, 어떤 시... 그런 건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진짜 뛴다고요? 와 대단! 멋지시다.

굿바이 2012-08-13 10: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은유라뇨~~~~
진짜 뜁니다!!!
 

외로운 날이 있다. 탕탕거리는 소리가 난다. 마음에서 탕탕.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오래된 트럭이 탕탕거리 듯. 그렇게 시큰둥하게 힘을 쓰는 날. 그런 날 나는 외롭기 시작한다. 이것도 버릇처럼 고치기 힘든 일이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냥 견딘다. 이런 날 운이 좋으면 좋은 시를 만나는데 운이 좋다. 이은규의 시집이 곁에 있다.

 

미간(眉間)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이라 부르는 곳에 눈이 하나 더 있다면

나무와 나무 사이

고인 그늘에 햇빛 한줄기 허공의 뼈로 서 있을 것

 

최초의 방랑은 그 눈을 심안(心眼)이라 불렀다

왜 떠도는 발자국들은 그늘만 골라 딛을까

나무 그늘, 그의 미간 사이로 자라던 허공의 뼈

 

먼 눈빛보다 미간이 좋아

바라보며 서성이는 동안 모든 꽃이 오고 간다

 

나무가 편애하는 건 꽃이 아니라 허공

허공의 뼈가 흔들릴 때 나무는 더이상 직립이 아니다

그늘마다 떠도는 발자국이 길고

 

뒤돌아보는 꽃처럼 도착한 안부, 어느 마음의 투척(投擲)

이 당신의 심안을 깨뜨렸다는 것

돌맹이가 나뭇잎 한 장의 무게도 안 되더라는 말은 완성

되지 않았다

온전한 무게에 깨진 미간의 기억이 치명적이었다는 소견,

왜 미간의 다른 이름은 명궁(命宮)일까

 

사람들이 검은 액자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화염의 칼날이 깨끗이 발라낸 몸, 뼈가 아직 따뜻한데

직립을 잃은 허공이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눈인사 없이 떠난

그가 나무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믿지 않는 봄날

 

투척의 자리에

햇빛의 무늬, 밀려가고 밀려오는 

 

아무렇게나 상상한다. 눈썹과 눈썹 사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을 그 눈이 다시 허공을 향하는 마음을. 틀림없다. 시인의 마음도 탕탕거렸을 것이다. 눈을 피하고 나무를 피하고 허공으로 나를 보내는 마음. 걸리지 않는 시동. 그럼에도 애쓰고 싶지 않은 마음. "떠도는 발자국들은 그늘만 골라 딛을까"라고 중얼거리지만 그늘은 오고가는 햇빛의 무늬임을 또 그렇게 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밀려가고 밀려오는"이라는 마지막 문장이 마음으로 밀려오고 또 그렇게 멀어진다. 

 

아직 별들의 몸에선 운율이 내리고

 

엄마는 왜 가르쳤을까

자신에게 진실하면 너는 늘 옳다

 

불가능의 시대에 혁명을 부르짖는 것

혹은 별을 노래하는 것만큼, 허영을 채워주는 일도 드물

다는 당신의 편지를 노려보았다

밤새 가는 실핏줄 터지는 소리

 

한 혁명가의 꿈을 꾸는 밤

다리를 저는 그녀와 보폭을 맞추기가 어려웠는데

기다리기만 하는 자에세 올바른 순간이란 없다는 목소리

가 들려왔다

더 잘 실패한 후에 맞게 될 적기

 

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혁명을 과거사라고 믿는 당신에 불과할 것이다

아직 별들의 몸에서 운율이 내리고

당신과 나의 정체는 우리 자신을 앞지르며 밝혀질 것

 

얼음이 떠다니는 운하 속으로

한 시대가 던져지기 직전, 오고갔다는 문답

 

정체를 밝혀라

 

그걸 알아서 결정하시죠

수배자 사진을 보니 틀림없군

당신이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렇겠지요

 

때로 어떤 대답은 유언이 되고

 

엄마, 별을 비추기 위해 인간의 눈동자가 만들어졌다는

시구(詩句)를 믿을래

 

시체가 떠오르기 시작한

운하의 봄을 답신으로 보내는 새벽

 

뭐든 견딜 만해지는 것이다. "아직 별들의 몸에선 운율이 흐르고"있다면 말이다. 그러니 시동이 걸리지 않는 마음도 견딘다. 무게를 갖지도 않고 서성이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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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6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8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8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9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8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이 의심스러웠다. 처음 있는 일. 몇 달을 이용한 버스인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대여섯 살로 보이는 스무 명쯤의 아이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다. 그 재잘거림과 여과되지 않은 웃음과 팡팡 터지는 에너지가. 아이들 주변을 떠도는 공기조차 내가 속한 세상과 다르게 보였다. 내가 타고 가던 버스가 흑백의 세상이었다면 아이들이 서 있는 버스 정류장은 온통 칼라의 세상이었다. 그저 놀랍다.

아이들이 버스에 올랐다. 서울숲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이름표에는 얼굴처럼 예쁜 이름들이 쓰여있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자리에 앉는다. 버스는 갑자기 동화책처럼 알록달록. 나는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찬찬히 본다. 리암 니슨이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다 해도 이렇게 울렁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담하건데. 뭔가 알 수 없는 에너지에 나는 멀미를 하듯 울렁거렸다.

그때다.

내 앞자리에 앉은 소녀가 고개를 정말 휙 돌려 나를 본다. 웃는다. 그리고 말을 건다.

 

총명탕같이 생긴 소녀 : "말 잇기 알아요?"

나 : "응, 그럼"

총명탕같이 생긴 소녀 : "거북이"

나: "이주민"

총명탕같이 생긴 소녀 : "이주민"이 뭔데요?

나: ..............(아...창피해)

총명탕같이 생긴 소녀 : "에이, 다시 기회를 줄께요. 거북이!"

나: ..... ......

 

소녀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휙 돌려 친구와 재잘거린다.

내 머릿속은 갑자기 안개다. "이"로 시작하는 수백의 단어가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소녀의 에너지에 내가 졌다. 그것도 기쁘게.

그리고 생각난 시 한 구절.

 

별똥

 

고은

 

옳거니 네가 나를 알아보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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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6-15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 ^^

"이름표에는 얼굴처럼 예쁜 이름들이 쓰여있었다" 라고 생각했다면서 .. ㅋㅋ
이름표..
했으면 표로 시작되는 단어는 많지는 않아서 .. 어찌 되었을지 ..^^
이주민은 몰라도 이름표는 ^^
<농담이야...ㅋㅋ>

하긴 소녀의 에너지에 네가 져 준..

그리고 저 예쁜 세 단어와 구절..

하기야

그것이면 되었지..
여기서 무얼 더 바라겠누..



어여쁘다.. 네가
그 시간 저 단어들을 생각하다니..

별똥. .고은.. 옳거니 네가 나를 알아보누나 라니..

굿바이 2012-06-18 21:0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인정!!!! 그날 완전 바보였어~

야ㅡ 진짜 이름표를 생각못했어, 역시 그대는 영민하오^^

다락방 2012-06-15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앞에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 같아요, 굿바이님. 알록달록한 아이들과 뒤를 돌아보고 굿바이님께 말 거는 소녀와 난처해하는 굿바이님, 모두가요.

굿바이 2012-06-18 21:0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락방님이었으면 어찌 하셨을지 궁금해요!!!!!
그나저나 잘 지내시죠?

2012-06-19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9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2-06-1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굿바이 2012-06-18 21:07   좋아요 0 | URL
와ㅡ 치니님이시다!!!!
제가 하고 다니는 짓이 늘 이렇습니다 ^_________^
아참! 요즘 그곳은 어떤가요? 눈부시겠죠?!

Alicia 2012-06-15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눈부시네요.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저희 아빠님은 그런 아이들을 '눈쟁이'라고 불러요- :)

굿바이 2012-06-18 21:08   좋아요 0 | URL
오~! '눈쟁이'라는 말이 있군요. 예쁜데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겠죠. 참...아련합니다^^

2012-06-19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6-1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그런 꼬맹이들 만나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굿바이님 같은 분 만나고 싶어요! 응, 그럼- 하고 대답하는, 또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과 이야기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

굿바이 2012-06-18 21:10   좋아요 0 | URL
어린이집 주위를 어슬렁거려 보세요!!! ㅎㅎㅎ

그나저나 오다가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지 않을까요? (이거 무슨 작업 멘트 같아요, 시적으로 말하려고 한건데요 ^________^)

風流男兒 2012-06-1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쁘고, 좋아요. 하핫 ;)

굿바이 2012-06-18 21:10   좋아요 0 | URL
나는 그대가 더 예쁘고, 좋소 ;)
 

다른 모든 요소들을 제거한 뒤에 남아 있는 하나,

   그것이 바로 진실임에 틀림없다.

- 셜록 홈즈,<네 사람의 서명>

 

 

 

 

찰스 유. 기록할 이름이 하나 더 생겼다. 머리 나쁜 사람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여튼 기억하기로 하자. 이유는 하나. 책을 읽기 시작해 5분 안에 '이건 또 뭐야'라는 문장이 입 밖으로 툭-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사물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를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이 어찌 좀 불손해 보이지만, 순식간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은 '이건 또 뭐야'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옮긴다. 뭐, 작가가 이 글을 읽을 확률은 따질 필요도 없이 zero니까 말이다.

 

실은 '이건 또 뭐야'에는 나름의 계보가 있다. 2005년 이전의 계보는 새로울 것이 없으니 추억상자에 고이 모셔 두었고, 현재는 '이건 또 뭐야,시즌2' 로 불릴 수 있는 계보가 쓰여지고 있는 중이다. 살짝 리스트를 공개하면 '테드 창'과 '주노 디아스'가 '이건 또 뭐야,시즌2'에 포진해 있다. 그리보니 '테드 창'과 '주노 디아스' 그리고 '찰스 유'는 어찌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다. 아아-이름도 다정한 3인방이 아닌가. 테드와 주노 그리고 찰스. 

 

여튼 내게만 대단한 '이건 또 뭐야,시즌2'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찰스의 책은 제목이 주는 원대함, 범우주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서는<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유쾌함과 허탈함 그리고 기발함도 비슷하고. 물론 양적인 면에서야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또한 인생이란 거시기하게 무의미하오, 그래서 나 자신에게까지 빵빵 총질을 가할 수 있는 것이오,라고 말하는 면에서는 <이방인>과도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오호-까뮈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돌아가신 분에게 좀 죄스럽지만 찰스가 까뮈보다 좀 더 세련되었다. 물론 이 말은 조금 더 힘을 뺏다는 그러니까 의미과잉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다는 뜻이다. 몰론 이것은 우리 세대의 강박인지도 모른다. 의미과잉을 피하려는 몸부림. 물론 <이방인>이 의미과잉이라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비슷할까 싶지만, 워워- 이건 비교가 잘못되었다. 감히!(그런데 누구에게 감히,라고 말하는 것인가! 맞아 죽을 각오로 쓰면 신경숙이다) 게다가 찰스가 찾는 건 아버지다!  그런데 정녕 아버지일까?

한 가지 팁을 먼저 준다면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뭐든 쉽게 답하면 안된다. 왜냐, 그러면 재미없으니까. 재미없는 것이 뭐 그리 위험하냐고. 아니다. 재미없는 건 쉽게 무시될 수 있고 무시되는 건 잊혀질 수 있고 잊혀지는 것들은 안전하지 않다. 게다가 진실은 뭐랄까 상황이 무르익고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 스트레스로 각자의 페르소나 따위를 다 던져버릴 때, 쨔잔-하고 나타나야 제맛이다. 물론 쨔잔-하고 나타난 것이 김빠지게도 처음에 전두엽을 강타했던 생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쨔잔-이 중요하다. 쨔잔-  

 

자, 이것은 시간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익숙해!식상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여행. 왠지 뻔할 것 같은 시간여행. 그러나 예단은 금물이다. 이 시간여행의 배경은 전반적으로 낯설고 심지어는 어렵고 게다가 찰스의 뻥까지 살짝 가미된 그래서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31번 국소 우주'다. '31번 국소 우주'는 건설과정에서 가벼운 손상을 입었다. 그러니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불능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타임머신이 나온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타임머신 'TM-31'은 굉장히(?) 독창적이어서 유리로 된 샤워부스와 닮아있다. 또한 'TM-31'은 '시간문법학'의 법칙에 따라, 그러니까 시제 변환을 동력으로 구동되는 기계다. 그러니까 '31번 국소 우주'의 공간과 시간을 넘나드는 타임머신은 샤워부스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시제 변환을 동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너무 뻔뻔하군, 찰스) 그러나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타임머신을 소개하는 찰스의 말을 들으면 어맛-소리를 내며 놀랄 것이다. 찰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모두가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타임머신이다. 단지 대부분 사람들의 타임머신은 고장 나 있을 뿐이다. 가장 이상하고 어려운 시간 여행 방법은 다른 무엇의 도움도 받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한 곳에 붙잡히기도, 순환 고리에 들어가기도 한다. 시간에 사로잡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타임머신이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게 제작된, 우리 내부에 타고 있는 승객에게 시간 여행을 경험하게 해주는, 시간 여행, 상실, 그리고 이해를 경험하게 해주는 최첨단 장비를 갖춘 타임머신인 것이다. (235쪽)

후반부를 너무 일찍 소개했지만 여튼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모두 타임머신이라는 사실이.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타임머신에서 각자의 시간을 경험하거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러니 찰스는 만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아버지를. 와우- 이것이 말하려는 것은 너무 쓸쓸하지만 또한 어째 너무 낯익지 않은가. 우리들의 관계와 우리들의 시간과 우리들의 기억과. 그러나 후반부의 놀라움은 시작의 의뭉함에 비하면 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시작은 더 의뭉하다. 시작은 이렇다.

그 일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일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쏜다.

뭐랄까, 지금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이 아니다. 내가 쏜 사람은 미래의 나 자신이다. 그는 타임머신에서 걸어 나와서, 자신을 찰스 유라고 소개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를 죽인다. 나는 미래의 나 자신을 죽인다.(책의 처음)

미래의 자신을 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젠장- 갑자기 엄숙해지려고 하다니. 아니다. 그럴 필요없다. 이것은 뭐랄까 엄숙하면 재미없는 그래서 차라리 허탈해야 하는 그런 여행이니까. 그러니 지금 단호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그건 재미도 없고 어렵다. 차라리 이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시간문법학의 공리'를 들여다 보는 것이 옳다. 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SF 공간 안에서, 기억과 후회는 하나로 모였을 때 타임머신을 만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한다.(59쪽)

여기에 힌트가 있고 답이 있는 것 같다. 왠지 추리가 되는 날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타임머신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여기에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사소한 명제' 하나를 연결해 생각한다면 더욱 명쾌해 질 수 있다.

사소한 명제

당신의 삶 중, 다음 명제가 진실이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일 당신은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된다.(301쪽)

셜록 홈즈가 아니더라도 이제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를 대충 눈치챘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지도 알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다면- 음- 방법이-있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책을 읽으면 된다. 당연히 알게 된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나만의 'TM-31'을 만들었다. 시간문법학의 법칙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기억과 후회가 만나 폭발하고 있는 지점들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 물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떠난 여행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떤 밤이기도 때로는 어떤 아침이기도 했던 순간들. 상처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혹은 상처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행동했던 어리석고 약한 내가 시간축 이곳 저곳에 뒹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참혹한 모습들로. 또한 그 시간축에는 타인의 시간도 엮여 있었다. 안타까운 대목이다. 관계가 어긋난 순간들을 바라보는 것은 늘 고통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 어리석은 나에게 아무리 소리를 쳐도 과거의 나는 요지부동이다. 과거의 나는 또 그 순간을 그렇게 최선을 다해 머저리같이 살아내고야 만다. 지금의 더 머저리같은 나를 만나기 위해 전력질주를 할 뿐이다. 물론 내게도 꽃 피고 달 뜨고 눈 내리던 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 수는 없다. 기억할 수는 있지만 재현할 수도 머무를 수도 없다. 만약 그 시간에 갇힐 수 있다 해도 나는 거부할 것이다.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간에 나 혼자가 아닌 타인도 가두어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 아니 될 말이다. 말이 아닌 것은 할 필요도 없고.

오호-또 뭔가 우울해지려 하다니. 역시 촌스럽다. 나는 그저 머저리다. 머저리라는 사실은 기쁘게 받아들이겠으나 촌스러울 수는 없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면 우습지만. 우스워도 할 수 없다. 이건 뭐랄까 내 존재의 사소한 명제니까 말이다. 우울한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의도에서 찰스의 책에서 찰스의 문장을 하나 더 소개할까 한다. 물론 쓰면서 후회한다. 이것도 쫌 우울하군.

삶이란 어떻게 보면 미래의 나 자신과 나누는 확장된 대화와도 같은 것이다. 미래를 맞이하며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실망시킬 것인가에 관한 대화.(162쪽)

역시나 실패다. 우울하네. 아니다. 책은 우울하지 않다. 엄훠-소리를 내며 낄낄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이 가득하다. 진짜로. 그리고 자신을 그리고 아직은 비워진 현재를 만날 수도 있다. 이것도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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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2-02-2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드 창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저로서는 찰스도 왠지 어려울 것만 같은;;; 덜덜. 하지만 낄낄 웃을 수 있다고 하시니 일단 입력!

굿바이 2012-02-24 19:21   좋아요 0 | URL
치니님! 절대 어렵지~않아요~~!!!

그나저나 잘 지내시죠? ^____^

꽃도둑 2012-02-2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또 뭐야?"..
근간에 소설을 한 편도 읽지 못한 저로서는 감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는지
굿바이님 리뷰를 읽으면서 내뱉은 소리이지 뭡니까...ㅡ.ㅡ

찰스~ 는 이제 내친구?...전 찰스가 뭐하는 넘인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굿바이 2012-03-02 11:24   좋아요 0 | URL
오호~ 찰스가 궁금해지셨군요?^^
찰스의 이력을 보니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더군요.
그런데 책은 쫌 더 대단합니다.

2012-03-27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까지 토했으니 거의 이틀을 토한 것 같다. 생각이 생각을 넘고 마음이 마음을 떠나려는 날에는 그렇게 몸이 곡(哭)을 한다. 뭐 하나 남기지 않겠노라고. 말간 몸과 마음으로 태어나겠노라고 간신히 넘긴 물 한 모금도 다 쏟아내버린다. 병원에 갈 이유가 없다. 몸이 운다고 말하면 어떤 의사가 온전히 바라보겠는가. 그저 이 모든 과정이 언제쯤 끝날 것인지 경험으로 알기에 화장실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그저 누워있는다. 눈을 감고. 제발, 잠을 청하며.

 

그리고 지금 택배가 왔다. 초인종이 울리는데 일어날 수가 없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부른다. 정녕 그 이름이 듣기 싫어 벌떡 일어난다. 현관문을 연다. 책이다. 상자를 열고 박주택의 시집만을 꺼낸다. 그리고 시인의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라는 시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찾아 꾹꾹 눌러가며 읽는다. 그렇게라도 허기를 달래자. 시가 통째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다. 달다.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박주택

 

그 무렵 잠에서 나 배웠네

기적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게을렀고 복록을 찾기엔

너무 함부로 살았다는 것을, 잠의 해안에 배 한 척

슬그머니 풀려나 때때로 부두를 드나들 때에

쓸쓸한 노래들이 한적하게 귀를 적시기도 했었지만

내게 病은 높은 것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낮은 것 때문이

었다네

유리창에 나무 그림자가 물들고 노을이 쓰르라미 소리로

삶을 열고자 할 때 물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네

새들이 지저귀어 나무 전체가 소리를 내고

덮거나 씻어내려 하는 것들이 못 본 척 지나갈 때

어느 한 고개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네

나 다시 잠에 드네, 잠의 벌판에는 말이 있고

나는 말의 등에 올라타 쏜살같이 초원을 달리네

전율을 가르며 갈기털이 다 빠져나가도록

폐와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가

마침내 말도 없고 나도 없어져 정적만 남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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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2-0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낮잠을 2시간, 저녁잠을 2시간 잤어요. 생각이 생각을 넘지 못하고 마음이 마음을 동여매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굿바이님의 글을 보니 어느 정도 제 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태그에 깊이 공감해요, 가오는 다아 뻥!

ps. 내일 도서관에서 굿바이님의 서재에 출연한 책들을 섭외해올 생각이랍니다 :)

굿바이 2012-02-03 21:28   좋아요 0 | URL
그렇죠 가오는 다 뻥입니다!!!^^

음...저와 반대의 상황이지만 어떤 상황인지 짐작은 합니다.
뭐든 빠르게 빠르게 지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래요.

그나저나 어떤 책을 업어 오실지 궁금해요. 재미있어야 할텐데 말이죠^^

흰그늘 2012-02-0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해내도, 토해내어져도 자취를 감출 뿐 남는것들은 남아 불현듯 영혼에 불면의 몸살을 안겨다 주기도 하던데, 저는..

그럴때면 시편 4편 8절의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말씀을 허기를 달래듯 잠잠히 읊조리며 잠을 청하고 했던 날들이 그냥 굿바이님의 글을 읽고 나니 떠오르네요..^^

잘지내시죠?
매번..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글'들 많이 읽게해주셔서 고마워하고 있어요 (지금은 아주 엷게 웃고 있지요..)

굿바이 2012-02-08 16:48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날이 차서 안부를 묻는 일도 조심스럽습니다.

매번 좋은 말씀 남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전생에 제가 뭘 잘했을까요?^^

꽃도둑 2012-02-06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구 많이 아프셨구나...
근데,,,죄송하게도 글 읽다가 웃었어요...
아파도 할 건 하는구나...이러면서,,ㅋㅋ
저는 아프면 만사 귀찮아서 암것도 안하는 편이거든요.
굿바이님, 이제 아프지마요~~^^

굿바이 2012-02-08 16:4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역시나!!!!!

이제 괜찮습니다. 꽃도둑님도 잘 지내시죠?

2012-02-07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2-07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은 아프다는데 웃어서 미안합니다. 위의 꽃도둑님의 글이 하도 웃겨서... 그만...빵 터졌어요.

"근데,,,죄송하게도 글 읽다가 웃었어요...아파도 할 건 하는구나...이러면서,,ㅋㅋ" - 이 글이 저를 웃겼어요. 굿바이님이 웃긴 것이기도 하고요. 우린 원리 아파도 살 책은 사고, 읽을 책은 읽죠. 그런데 그걸 글로 보면 웃음을 참지 못하네요.

굿바이님, 다 나으신거죠? 그렇죠? 다 나았다고 새 글 올려 주셔야지요. ㅋ 기다릴게요. 또 방문할 겁니다. ㅋ

굿바이 2012-02-08 16:51   좋아요 0 | URL
저도 빵!!! 터졌어요.
생각하니 저도 참....아마 덜 아팠던 모양입니다^^

봄이 올 모양입니다. 겨울이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보아선 말이죠.
잘 지내시죠? 무조건 버텨서 모두 신나는 봄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