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게서 내 사랑하는 조카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다름아니라 조카가 연애인을 좋아한다는 것.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연애인을 좋아한다는 것이 뭐 그리 깜짝 놀랄 일이라고. 언니의 호들갑에 웃었지만 그간 워낙 특이한 녀석이었기에 나도 내심 놀랐다. 하여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내 십대를 소환해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나는 연애인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고, 그 옛날 언니도 오빠도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부 스스로를 너무 잘난 인간들이라 엄청난 착각을 했던 것 같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누구를 마음에 두기 보다 스스로를 사랑하기에도 바빴다. 돌이켜보니 참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었다 싶다. 반대로 조카는 우리와 다른 정상적인 녀석이라는 생각에 다행이다 싶고.

 

조카가 좋아하는 연애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아무개라고 한다. 전화를 끊고 아무개를 검색하니 웃는 모습이 참 고운 청년이었다. 음........곱네.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그정도. 조카의 취향이 궁금해진 나는 아무개가 출연한 작품이 뭐가 있나 검색하고, 최근에 출연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몇 편을 다운받아 시청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은 역시나 웃는 모습이 곱고 나름 반듯해 보인다는 것. 그리고 드라마에서 주어진 역할이 만들어낸 이미지라고 짐작되지만 마초같은 모습도 있었다. 여튼 소녀가 된 내 조카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구나 싶으니 귀엽기도 하고. 아, 이 녀석에게도 이제는 이런 설렘과 이런 기쁨들이 찾아들겠구나 싶으니 기쁘고 짠하고 여튼 묘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 마초는 좋아하지 마라, 그것은 박복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는 일이란다, 뭐 이런 헛소리를 혼자 하고 있으니 나는 참 할 일 없는 이모다.

 

조카와 추석에 만나 수다를 떨려면 나는 그 고운 청년이 나오는 드라마를 좀 더 봐야할 것 같다. 그래야 조카의 상상과 설렘에 동참해 조금이라도 훈수를 두거나 깔깔거릴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라도 의식적으로 조카의 곁에 오래 머물고 싶은 것을 보면 나는 조카에게 약자다. 그래서 뭐 서운한 건 없고. 그저 제발 드라마가 재미있기를, 지나치게 억지스럽지 않기를, 캐릭터들이 적당하게 이성적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노파심에 소녀가 된 조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으니, 라 보예시가 쓴《자발적 복종》이다. 이 책이 조카의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 싶지만 앞으로 종종 살아가면서 꺼내 볼 수도 있으리라. 왜냐하면 이 책은 모든 상황에서 타성적 습관과 자유의 망각이 가져 올 공포의 현장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랑도 그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랑에 접어드는 특수한 타이밍과 그것이 유지되는 지난한 시간들 안에는 누군가는 주인으로 또는 누군가는 마름으로 둔갑할 수 있는 여러 지점들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혹여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 조카에게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그럴 때마다 이 책이 조카의 머뭇거리는 발목을 잡아주기를 기대한다. 결과적으로 소녀에게 줄 추석선물로 이만한 게 없다.

 

 

 

독재군주는 자신의 눈에 들고자 애쓰며 호감을 구걸하는 아첨꾼들을 항상 본다. 이런 자들은 독재군주가 말하는 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군주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생각을 미리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의 환심을 사야 한다.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학대해가며,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고 군주의 일을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 군주의 즐거움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야 하며 군주의 취향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본래의 취향 따위는 버려야 한다. 체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본성은 완전히 내던져야 한다. 군주의 말과 목소리, 그의 눈짓과 사소한 표정의 변화에 유의해야 한다. 군주의 뜻을 살피고 그의 생각을 알아내는 데 첨병 역할을 하지 못하는 눈과 손, 발은 군주에게 쓸모가 없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 행복할까? 그렇게 사는 것을 과연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수조차 있을까? 그런 삶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또 있을까?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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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2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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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가 부코스키답게 글을 쓰는 것이 뭐가 문제겠는가. 작가의 소설이건 책이건 몽땅 한 권에 옮겨 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것.
여튼 시의 행간을 읽지 않아도 부질없는 것들의 부질없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시집.
부럽소! 오라버니!

좋았던 문장 하나
˝ she`s so good that I almost miss my death, but not qu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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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팔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알라딘 중고서점 직원들이 책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뭐랄까 기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물론 나만 그럴 수도 있고. 그러니까 낙서의 유무, 책 자체의 손상 정도, 구입여부(증정품은 제외되는 것으로 알고 있음), 구간과 신간, 알라딘이 보유하고 있는 동일 서적의 양 등이 해당 기준으로 보인다. 더 많은 기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잘 모르겠으니 일단 이 정도. 물론 나는 지금 알라딘의 서적 매입 기준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방학을 맞아 어떤 퍼포먼스라도 하고 싶어 책장을 정리하고 더는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골라냈다. 책을 골라낸 후 알라딘에 팔 수 있는 책과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면 좋을 책을 나누는데, 기증으로 분류된 책들은 대체로 출판사에서  증정받은 책 혹은 선물로 받았으나 내 취향과는 먼 책들, 그리고 시집들이다. 기증에 해당하는 도서들은 내가 구매하지 않은 책이니 나도 그냥 내놓는게 자연스러운 것 같고, 시집이 기증물품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이건 정말 개인적인 이유이지만, 시가 돈으로 환산되는 어떤 느낌이 싫어서다. 쓰고 보니 더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여튼 그렇다. 그렇게 분류를 하고 나니 알라딘에 팔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았다. 아참 이번에는 시집 한 권도 팔았다. 처음 있는 일이다. 그 시집은 팔아도 될 것 같았다. 시인을 향한 나의 복수는 이렇게 극도로 쪼잔했다.

 

그렇게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팔고, 천천히 알라딘 서가를 둘러보니, 오호~ 반가운 책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놀랐던 것은, 책 안쪽에 저자의 친필로 가늠할 수 있는 메모가 있었고, 그 메모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것. 그런데 이 책을 받은 사람은 왜 팔았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알라딘은 이런 메모가 있는 책을 매입하나? 그것도 궁금했다. 그래서 망상에 가까운 공상으로 나는 뭔가 이 책이 내게 발견된 이유를 애써서 찾고 싶어졌다. 혹시 아니?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따위에 내몰린 것이.........

 

그렇게 완벽한 몰입의 상태로 책을 다 읽어갈 무렵 나는 이 책이 알라딘 서가에 꽂혀있는 이유를  발견했다. 단서는 저자의 글에서 찾았다.

책에서 읽은 다른 이의 말을 나의 언어로 둔갑시켜 차용하지 마세요. 다른 이의 말을 빌려서 내 욕망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런 좋은 말들은 듣고 난 뒤 씹어서 뱉어 버리세요.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책도 여러분의 말이 아닙니다. 읽고 나서 버리던가, 남을 주던가, 아무튼 몸 밖으로 뱉어 버리세요(p.267) 

 

오호~이렇게 자연스럽게 멋있는 사람들을 보았나. 순전히 내 추측에 추측을 더했지만, 정말 저 말 때문에 책의 주인이 이 책을 팔았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퍼포먼스인지.  그리고 기계적인 줄 알았던 알라딘 도서매입 직원의 작은 실수(?) 또한 얼마나 즐거운 퍼포먼스인지. 인간이 그리는 무늬들이 이렇게 재미나다니. 정말 별 일도 아닌 일로 혼자 키득거리는 나는 이 밤이 참 좋네.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오랜만에 몰입하니 사는 일이 재미있네요. 정말. 

 

아참, 엄한 소리만 하다가 책 이야기를 못했다. 글을 읽으면서 EBS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현생인류의 어떤 한 종족의 남성이 야생에서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모습. 조용히 손에 쥔 연장을 꽉 움켜잡고 일격을 가하려는 모습. 눈빛에서 느껴지는 결기와 그 민첩한 손동작. 저자의 글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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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히틀러
막스 피카르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어제 뉴스에 따르면 드론이 잠자리처럼 날아다니는 세상을 내가 살아생전에 겪을 판이다. 드론규제만 완화되면 침체된 글로벌 경제가 한방에 해결될 것 같으니, 아마존이 큰일한다 싶다. 여튼 택배도 드론으로 오고, 농약도 드론으로 뿌리고, 뭐 대충 안되는 것 빼고 다 될 듯하다.

이쯤에서 피카르트의 글을 꼭 옮기고 싶은 내 마음을 드론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열정이 없이 저질러진 잔혹한 범죄, 그 현장에 잊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범죄의 경우 사람들은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도구가 어찌 죄책감을 알겠는가. 그저 우연처럼 범죄를 생산했을 따름이다. 도구는 얼마든지 달리도 쓰일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무슨 기계파괴 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드론이 우리집 창문에 와서 서성이는 상상은 참으로 안하고 싶다. 더 나아가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고 있을 나를 상상하는건 더 끔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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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삶이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17쪽)

 

저런 환장할 문장을 보았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소리내어 읽기 참 좋은 문장임에 틀림없다.

안타깝지만 부카우스키의 어떤 면들은 내가 살면서 피하고자 하는 혹은 혐오하는 것들과 나란히 놓여있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의 책을 매번 사서 읽는 것은 그가 무례할지언정 둘러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딱히 정직하고자 하는 강박도 아니고, 스타일에 대한 집착도 아닌 것 같다. 애쓰지 않겠다는 그래서 정말 애쓰지 않는 삶. 아무렇게와는 또다른 그저 애쓰지 않는 삶이 나는 부럽다. 더 정확히 그렇게 살아지는 삶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홀연 살아가는 작가가 부럽다.

 

늘 뭔가 탐나고 부럽고 열등해서 애만 쓰다 끝나버린 그 동안의 시간들을 위무할 방법은 없지만, 어떻게 좀 남은 시간들은 애쓰지 말고 살았으면 싶다. 어느 주머니에 죽음을 넣고 다니는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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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6-01-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 전 죽음 후의 세상을 믿지 않거든요. 사는 과정이 힘들고 고단해서 그렇지 죽음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 싶어요.

굿바이 2016-01-06 23:40   좋아요 0 | URL
저도 사후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게 있다면 여기나 거기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참 새해 좋은 일만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개 2016-01-06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지 않는 삶....을 살려고 애쓰지 않아야 하는데 그게 참....

우체국을 읽고 찰스 아저씨에게 완전 반해버렸어요.
이 책도 보관함에 있는데
조만간 꼭 읽고 싶네요.

아침부터 마음이 뭔가 울컥울컥하네요...

굿바이 2016-01-06 23:41   좋아요 0 | URL
저도 우체국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은 일기라서 그런지 소설보다는 부카우스키가 좀 처량하기도 해요 :)

어찌되었건 새해인데, 건강하시고 신나는 일들 많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웽스북스 2016-01-0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이번 생은 틀렸어요. 언니는 매사에 모든 걸 다 엄청 열심히하고 잘해서 큰일입니다. ㅋㅋㅋ

굿바이 2016-01-06 23:40   좋아요 0 | URL
일단 이번 생은 틀렸다에 완전 동의해!!!!!!ㅜㅜ
뭘 잘하면 애쓰겠니? 그저 허우적거리는 그런 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