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떠도는 날에 줄줄줄 흘렸던 말과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그곳이 지옥이겠다 싶다. 잠은 안오고 골고루 뒤척이는 밤에는 줄줄이 딸려나오는 상한 말과 마음들. 지옥은 내가 만들고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지 강 건너 먼 곳이 아니었다.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는 늦고 너무 거대해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후회에 쓴다. 그 무게에 눌려 꿈에서도 후회하는 내가 나를 지켜보는 식이다.
겨울의 중심
무릎이 앙상해질 때
창문 밖에서
배고픈 택시들 질주하는 소리 들릴 때
겨울은 중심으로 응집된다
오른쪽 눈이 침침해졌다
비밀의 농도가 조금 옅어졌다
말없이 지구를 굴리던 사바나 코끼리가
잠시 한 숨 쉬는 사이
무릎이 해진 바지를 입고
아침부터 책상까지
5시부터 음악까지
서성이고 싶다
박연준의 시를 읽고 시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면 실제에서는 불가한 일이겠으나 어느 과거에서는 가능했을 시인과 내가 동거했던 자리들이 보인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시인과의 동거. 나와 당신도 있었던 자리. 마음이 옮겨다니던 자리. 금이 간 자리.
빨간 구름
안녕, 나를 해독해보렴
일그러진 벽돌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싶었어
으깨지는 가루를 분처럼 바르고
네 얼굴을 다 사용하고 싶었어
나는 조로(早老)하고 싶었으나
왜 자꾸 새로운 이빨이 돋아나는지
기억은 빨갛게 멍울 잡히고
네 외로움에 금이 갔나봐
펄펄 흩날리는 키스들아
나를 해독해보렴
번지고 싶었고 스며들고 싶었다. 간절했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돋아나는 것들. 그것들 때문에 내가 나였지만, 내가 나일 수 밖에 없음에 무릎이 해지는 날들. 내 머리 위에도 빨간 구름 낮게 낮게 떠다니고 상한 말과 마음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줄 흘렀다. 방법도 출구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 당신도 있었다. 있었던 것 같다.
겨울의 고도(高度)
빨간 코트가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얼굴 위로 자꾸만 음영이 드리워지는데
나를 덮은 우주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의 갈라진 살결, 그 가느다란 틈에
나는 끼워져 있다
앙상한 얼굴의 낯선 사내가
가끔 주먹으로 두드려보는
나는 겨울이 앓는 문둥병,
눈썹이 빠지고 코가 주저앉은 채로 휘파람 분다
애인은 내내 화두였다
전화는 오래도록 먹통이었고
바람이 유난히 보채는 날에는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여자들 오목한 허리선에
베이고 싶었다
입 열면 허연 입김
겨울에 피어나는 그을음처럼, 아득히 퍼지고
나는 겨울의 고도를 생각하며
자주 떨었다
명망있는 평론가는 박연준의 시집에 쥘 미슐레의 말을 옮겨 왔다. "어찌하여 이 땅 위에는 다만 혼자서 절망에 빠져 있는 한 여인이 있는 것일까?" 옮겨 적은 문장에서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다른 의도가 있었다 해도 읽어낼 재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불온하고 천진하게 시를 쓰는 시인은 결코 그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을 열면 허밍처럼 시가 흐르는 사람은 결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문학이 삶을 부축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 그가 모를 일이 없다.
다시 돌아와 나는 어쩐담. 목발없이 서야 하는 나는 어쩐담.
후회하는 일 대신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통과할 수 있었으면 그게 뭐였을까, 시를 쓰고 싶지 않았을까. 이런 시. 하품.
하품
마음이라는 게 아주 작게 접으면
접힐 수도 있는 것인데
자꾸 활짝 피고 싶은 꿈을 어떻게 한다?
창문에서 맞은편 담벼락까지
허밍으로 날아가는 라일락 꽃잎
도착하지 않기로.
그저 날아가다 사라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