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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근처로 이사를 온 지 1년이 지났다. 거의 매일, 밤이 내린 강을 옆구리에 끼고, 나는 무언가를 듣거나, 읽거나, 쓰거나 했다. 그러다 지치면 때로는 뜨거운 커피에 쏟아지는 밤눈을 담아 마시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를 미끄덩거리며 빠져나가는 강바람을 잡아보려 하기고 하고, 번개에 갈라지는 검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기도 하고, 그렇게 흘러도 흘러도 흐르는 것 같지 않고, 고여도 고여도 썩지 않을 것 같은 달빛 아래 강,을 숨죽여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몇 일 전, 어두워지기 전 강변을 좀 걸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인적이 드문 보행로를 찾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 청년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불편했다. 불필요한 대응일 수도 있겠지만, 걸음이 빨라졌다. 청년도 걸음이 빨라졌다. 

청년이 내게 온다. 빤히 쳐다본다. 그러나 예측가능한 두려움은 잠깐. 청년은 아이처럼 웃고있다. 땀에 젖은 티셔츠에서는 쉰내가 풍기고, 배낭에는 어디서 뜯었는지 알 수 없는 풀이 한가득이다. 무언가 내게 말을 건낼 것 같은 입가에는 웃음과 침이 고여있다. 말이 느릴 수 밖에 없겠다. 나는 경계를 풀고 기다렸다. 

"보라색이 좋아요" 더듬거리는 청년의 말이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말과 다르게 민첩한 손놀림으로 내가 입고 있는 튜닉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시, "보라색이 좋아요"라며 벙긋 웃는다.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꽤 오래 망설였다. 옷을 벗어주면 달랑 속옷 하나를 걸치고 나는 이 길을 걸어야 할 것이고, 저 청년의 기세로 보아선 "보라색"을 내어주지 않고는 나는 이 길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색하고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시간이 얼마쯤 흐르고 나서야 나는 들고 나온 가방을 뒤졌다. 읽고 있었던 책 두 권과 선물 받은 색연필이 들어있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청년도 냉큼 따라와 앉는다. 메모지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어차피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라색 색연필을 꺼내고 두 권 중 크기가 더 큰 책을 꺼냈다. 그리고 책의 맨 앞에 자리한 하얀 속지에 그림을 그렸다.  

보라색 우산과 우산 주위로 떨어지는 보라색 비를 그려 넣었다.  

그림을 들여다본 청년이 박수를 치며 웃는다. 나도 멋쩍게 웃었다. 청년에게 책을, 아니 그림을 건냈다. 보라색 색연필도. 청년은 연신 침을 닦으며 웃다가 크게 그리고 몇 차례나 꾸벅거렸다. 이제 가겠다는 표시일 것이다. 예상처럼 청년은 그렇게 몇 번 뒤를 돌아보았지만,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한강 어디 쯤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청년은 나를 놓아주었고, 나는 보라색 우산과 보라색 비를 잃었다. 

긴장한 탓인지, 더위 탓인지, 지나가는 소나기 탓인지 나는 좀 나른했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캔커피를 샀고, 배낭에 운좋게 남겨진 책을 집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이었다. 아무 책장을 폈다. 몇 줄을 읽었을까, 날숨도 들숨도 거칠어졌다. 로르카 앞에 놓인 풍경이 내 앞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는 공감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와 나는 그렇게 보라색을 잃은 강가에서 만났고, 나는 그가 말한 메마른 '미'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헛헛한 울음을 닮아 있었다.  

"새카맣게 탄 꼬마 녀석들이 개울물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나와 뜨거운 길가에 털썩 눕는다.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해맑은 표정..... 밀을 잔뜩 실은 달구지가 뜨거운 햇볕 아래로 먼지를 일으키며 터덜터덜 걸어간다. 메마른 '미'음이 들려온다. <인상과 풍경>p.201"    

 

 

 

다시 지나가는 소나기를 한 차례 더 맞고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돌아왔지만, 꿈꾸는 청년도, 꿈꾸는 한강도 어디론가 그렇게, 나와는 무관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되뇌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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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7-2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덕분에 읽게 된 로르카. 이런 책도 있었군요. 아.

그 청년도 그렇지만 언니도 참.
보라색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청년이 다가와, 빨간색 좋아하세요? 하면 얘기가 달라졌을 듯.
아. 저는 왜 늘 결론이 코미디일까요.

굿바이 2010-07-21 22:50   좋아요 0 | URL
빨간색 좋아해요,라고 했으면 아주 개싸움이...^^ 속옷이 빨간색이었거든ㅎㅎ

멜라니아 2010-07-22 14:3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식 조크

빨간색 내의는 어느쪽일까를 상상할 수밖에 없는...

배꼽은 겨우 붙여 놓았습니다 안 빠지게. ㅋㅋ

웽스북스 2010-07-2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결국 언니 때문에 간만에 도서구매. 세상에. 저 책이 5천원이라뇨!

굿바이 2010-07-21 22:5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알라딘 만세!!!!1

blanca 2010-07-2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단편 소설 같아요. 보라색이 좋아요...저도 좋아하는데...이 책 넘 좋죠!! 엄청난 간지와 줄로 두툼해져서 지금도 제 옆에 있어요. 아무 데나 펴서 읽어도 아...

굿바이 2010-07-21 22:5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 책 너무 좋죠~~ 정말 아무 곳이나 펴서 읽어도 좋아요.
이 책은 떠도는 사람이나, 머물러 있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예요^^


치니 2010-07-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굿바이님. :)

굿바이 2010-07-21 22:5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사실 저도 처음엔 쫄았어요ㅜ.ㅜ

2010-07-21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1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전 2010-07-2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라색 좋아하는 데...
주위에서 제 옷이나 소품, 하다못해 운동화 끈이라도 보라색이 하나는 들어간다고.
위의 이야기 짧은 소설인줄 알았어요.
<인상과 풍경> 저도 주문해야겠어요. 우선 책 값이 맘에 들어서리...

굿바이 2010-07-21 22:54   좋아요 0 | URL
저도 보라색 참 좋아해요. 보라색 옷은 몇 벌 안되지만 펜은 꽤 많아요.
그나저나 책값이 참 좋죠? ㅎㅎㅎ

pjy 2010-07-2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소설같은 일상이네요.... 호러결말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예요~
요새 현실이 하도 사악한지라--;

굿바이 2010-07-21 22:56   좋아요 0 | URL
실은 저도 조마조마 했어요. 지난 일이라서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거죠. 그런데 청년이 참 순해보였어요.

하루 2010-07-21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렇게 이어지는 책 이야기라니. 읽어봐야겠는걸요.
+첨언하자면 다행스러움이 반이고, 멋지시다는 생각이 반입니다. :)

굿바이 2010-07-21 22:58   좋아요 0 | URL
책은 읽어보셔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워낙 개인적인 감상이라서요...
멋지다뇨ㅜ.ㅜ 실은 겁났어요. 엉엉~

Tomek 2010-07-26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하루!

굿바이 2010-07-27 11: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D

hohoya 2010-07-2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같은 상황에 내가 있었으면 난 무서워서 그냥 도망갔을텐데.
굿바이님 여린 몸 어디에 그런 강단이 숨어있는지......마냥 부럽삼.

굿바이 2010-07-27 11:18   좋아요 0 | URL
강단이 아니라, 정신이 없는거죠 ㅋㅋㅋㅋ
더운 여름, 잘 지내고 계시죠?
 

" 매번 꽃이 피고 꾀꼴새가 우는 날이거나 국화가 피는 중양절에 일대의 시인 . 묵객. 금우琴友 .가옹歌翁이 이곳 유괴정사에 모여 거문고를 뜯고 피리를 불거나, 시를 짓고 글씨를 썼다. "  - 『청유첩, 마성린』

나는 아무래도 저 시절에 태어났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보니 그 시절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쩌면 말짱 헛것이지만 말이다.

어제는 찔레꽃 향기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꼬꾸라졌다는 한량의 이야기를 들으며, 찔레꽃대 가만히 끊어먹었던 기억이, 달달하고 알알한 맛이 되살아나 혼자서 벌쭉 웃었다. 누가 보면 필시 미쳤다고 할 것이고, 옳다구나! 이때다 싶어 백차를 불러, 저것을 좀 가두시오, 이 봄이 갈 때 까지, 하겠지만, 여튼, 그렇게 좋을까? 나 자신 어리석을 만큼 무엇이든 피어난다는 말이 그리 좋고, 또 알록달록하고 푸른 것들만 보면 이것 저것 뜯어 허발하고 먹어대니 참 무안한 일이다.

나는 그런 생명이 참 좋다.

언제 추웠더냐, 언제 열매 떨어졌더냐, 언제 꽃몽우리 졌더냐, 하면서 겁나게 들고 일어나는 그런 생명이 그지없이 기특하다. 참말로 새싹 돋는 화분 앞에서도 '살아줘서 참 거시기하게 고맙다.' 하며 엉엉 울었더라. 그러면서 또 내 너를 위해 시 한 수 지어주마,하고는 막상 그럴 재주가 없어 어정쩡하게 우물우물 하다가 꼭 화분이 눈 지릅뜨고 기다리는 것만 같아, 에라! 모르겠다 싶어 '봄날은 간다' 한 소절을 읊어주고 돌아섰다.

"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뭐 저런 물건이 있어,라고 화분이 한 마디 쏘아붙였겠지만, 모른 척 또 웃는다. 봄날은 오면서 또 그리 가지만, 그래, 그렇게 뭐든 살아야지, 세상에 나왔으면 그 격에 맞춰 뭐든 살아야지,하며 마지막 말을 흘린다. 허, 참, 말은 말이지만 내가 들어도 미친년 널뛰는 소리같다. 듣는 이가 화분이라 다행이다 싶다.

그나저나 시방 한 말이 참말인가?  진심인가? 언제나 노래처럼, 꿈처럼, 주문처럼, 기필코 꽃 그늘 아래서 죽어번지리라, 아쌀하게 막 피고 번지고 날리고 하는 잘생긴 꽃나무 아래서 나는 오필리어처럼 화환 쓰고 아주 누워번지리라 했는데, 이렇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다. 뭐든, 살아달라니, 저는 기를 쓰고 죽어번지리라 말하면서, 뭐든 살아달라니. 내 마음 하나, 내 입 하나 펄럭이는 것을 단속하지 못하는 나는, 이 봄이 어김없이 겁난다.

나는 뭐랄까 항시 그랬다. 태어나는 것은 기뻐서 안쓰럽고, 죽어가는 것은 슬프지만 걱정없고.
뭣 땀시 그런 심보를 갖었냐고 묻는다면, 아이 해브 노 아이디어다.
그저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이미 지상의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단디 믿었던 것 같다.
그럼 시방 네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수작이야고 묻는다면, 네버다. 그렇게까지 화끈하게 미쳤겠는가. 그저 한 번이라도 아름답고 싶었다, 온전한 생명이고 싶었다, 까지다.

아! 봄이다.
책은 무신 책. 글은 무신 글. 이런 계절에는 까닭없이 걷고 내남없이 노래하면 그만인것을.
팔각 성냥통 안에 불 붙은 성냥 개비 하나를 던지 듯, 봄바람이 이 가지 저 가지 불을 놓으니, 꽃불이 따로 있을까, 꽃불에 들러붙은 혼불은 또 얼마나 많을까. 산소에 피어 있던 꽃 나무 아래서, 나는 그렇게 발목을 자르고 싶었다. 설레서 초라하고 쓸쓸한 이 마음을 주저 앉히고 싶은 봄이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생에서의 영이별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불렀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버려라 운운.' " - 『봉별기逢別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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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2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저는 ..
목구멍이 타올라 옆에 계셨다면 몇번이고 굿바이님의 손을 잡았을꺼예요.
'주책이구나..저 여자' .. 하셔도 어쩔 수 없이 그랬을거예요.

봄과 가을이면 삼청각과 길상사에 자주 들르곤해요.
이번 해 봄은 유독 꽃이 늦어서 삼청각 앞산의 벚꽃들도 이제야 필까 말까 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 나는 오필리어처럼 화환 쓰고 아주 누워번지리라 했는데", "저는 기를 쓰고 죽어번지리라 말하면서",
봄이면 피는 꽃나무들에게, 길을 걷다가 지나치는 어린 아이들에게 "피워주어, 살아주어, 태어나주어" 고맙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러면서도 이내 그들도 죽어버릴 것이, 이 생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갈것이 기억되어 마음 한끝이 싸하고 .. 그래서 그것들을 보면 눈물이 났는지도 ..모르겠어요.

굿바이님..
굿바이님..

말씀해주신대로 "책은 무신 책.. 글을 무신 글.. .일까요.
이 봄.. 까닭없이 걷고 내남없이 노래하면 그만인것을요.. "


<이런 글을,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이 봄은 제게 이미 충분한지도 모르겠어요.>

굿바이 2010-04-20 12:04   좋아요 0 | URL
어쩜~ 저만 그런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 이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혹여라도 오다가다 만나면 어쩌면 알아 볼 수도 있으리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허접한 몇 줄 감상에 마음 주셔서 감사하고, 이런 마음을, 이런! 마음을! 얻을 수 있어서 이봄은 제게 이미 충분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멜라니아 2010-04-20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산에서 돌아오니 이곳 봄은 매일이고 도망가고 싶은 날의 연속입니다
보고 싶지도 그 ㄱ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가
어느 날 마음 가벼이해서 나무와 꽃들 속으로 가면 봄은 흘러가고 있어요
며칠 전 피었던 꽃이 다 지고 그 자리에 푸른 잎이 돋아나고
온도계는 겨울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어쩌다 온화해진 햇빛을 기어이 받고 꽃이 피고 지고 나무가 움트고
나는 봄이 없었다고 할 것 같은데, 몇 번 보여준 꽃과 나무를 빼면
봄이 있었나 반문하고 있을 때 어느덧 여름이라고 놀랄 것 같아요.

이건 누구를 만난 건가요?
카테고리에서 힌트를 찾으려 했지만 볼 수 없었어요.
혹은 자기 자신인가도 하고.

탐구하고 발견해야 할 게 많은 사람, 굿바이님

굿바이 2010-04-21 13:51   좋아요 0 | URL
저를 만난거죠 ㅋㅋㅋ

봄이 좀 그렇죠, 까탈스럽고 이유없이 투정부리는 것 같고, 상처받으려고 작정한 것 같고, 그런데 속살은 곱고, 그렇게 슥 지나가 버리고, 입 속에서만 맴돌고.....

저는 멜라니아님이 더 궁금해요, 섬에 갇힌, 섬을 품은, 바다를 떠도는, 바다에 묶인...


웽스북스 2010-04-21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에는 남산을 걸었어요. 실수로 버스를 탔는데, 길이 너무 예뻐서,
돌아오는 길에 같은 버스를 다시 고의로 타고 그냥 내려서 무작정 걸었어요.
그래서 병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병이 난대도,
그 오후에 마주한 하늘, 꽃, 바람, 초록잎.
언제그랬냐는 듯 피어오르던 그 광경들을 보며, 걷는 일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했지요.

아무도 없던 길 (어쩜 아무도 안걷던지) 혼자 걸어서 좋았지만,
함께이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하나 둘 스쳐지나가 아쉽기도 했어요.
다음 봄엔, 때론 도란도란, 때론 말없이 같이 걸어요.

제가 애들이랑 좀 미친 척 대화를 하더라도, 그냥 눈감아주세요.
서로 다 아는 처지에. ㅋㅋㅋㅋ

굿바이 2010-04-21 13:54   좋아요 0 | URL
그건 미친게 아닐거요, 암만, 우리는 멀쩡하잖니!~~

병이 나지 않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마음에 방어벽이 뚫리면 몸도 뚫릴까?
나도 꼭 그렇게, 머리에 꽃이 피는 날이면, 그렇게 무작정 걷는 날이면, 아프더라. 다음엔 단디 입고, 같이 걷자, 같이...

風流男兒 2010-04-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누나, 이 아찔한 봄내를 이리도 글에 실어놓으시면 어흑흑
어제 점심에 잠시 일이 있어 길을 걷는데 바람에 흐르는 꽃잎들에 정말 울컥,
할뻔했더랬지요. 아, 그보다는 멍~하며 취해있었던듯.

그러게요, 봄이네요. 정말 봄.

굿바이 2010-04-21 17:20   좋아요 0 | URL
바람에 흐르는 꽃잎이라....그대의 감성에 백만표를!!!!!

참 걷기 좋아지는 시절이야. 여름이 오기전까지 좀 많이 걷자.

메르헨 2010-04-21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
저는 왜 지금에야 님의 서재에 왔을까요.......
이 봄이 가기 전에 온게 다행입니다.
제 서재에 글 주셔서 고마워 답방 왔다가 주저 앉고 맙니다.....

굿바이 2010-04-21 17:21   좋아요 0 | URL
메르헨님,

주위를 보면 참 좋은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렇게 봄이 가기 전에 마음으로라도 인사 나눌 수 있어서 참 많이 감사합니다.
 

어느 가수는 앉은 자리에서 곡에 노랫말을 붙이고
어느 시인은 북적이는 전철안에서도 시를 썼다고 하는데
노래가 짠해서도 아니고 시가 안쓰러워서도 아닌데

그저 오늘같은 바람이 불고, 변변하지 못한 청춘이 가여운 날에는  
선/운/사/에 가/고/싶/습/니/다.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떠나실 거에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 선운사, 송창식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것은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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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2-2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에 미친척하고 민정언니랑 셋이 한번 갈까요 언니?

굿바이 2010-02-20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미친척하지 않아도 갈 수 있어. 그러니까 고!

동우 2010-03-0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하. 굿바이님, 웬디양 (웬디양님 해야 되는 건가요? 하하)
당연한 말씀.
좁은 한반도 어디인들, 아무렴요 미친척 하지 않아도 훌쩍 떠날수 있는 곳.
4월의 부산 봄바다도 그러하지요. ㅎㅎ

굿바이 2010-03-0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아~ 4월의 부산! 완전 좋아요^^

니나 2010-03-08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암사 화장실에서 나는 잃어버린 삶의 경건성과 삶의 자유로움과 삶의 서늘함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눈물겨웠다. 아, 그리운 것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그러니 그리운 것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운 것들을 향해서 가자. 가자. 가자. 무릎걸음으로 기어서라도 기어이 가자. 그것들이 살아 있는 한, 내 마침내 그곳에 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사랑은 불우하지 않으리.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김훈, 자전거여행

언니 글 읽고서 생각나서 찾아봤어요.
똥사면서 내세를 생각하는 이남자... (싫지 않으니 어쩜 조아)

굿바이 2010-03-0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러게, 어쩜 좋니~
 

대낮부터 퍼마시는 소주가 달달하다고, 언제쯤 목포에 내려오냐고, 오거들랑 얼굴이나 보자고, 칼바람 앞에 두고 휘청거리는 친구의 생생한 음성을 듣고 있노라니 영란횟집 유리문이 드르륵,거리며 열리는 소리랑 널부러진 소주병 옆에 놓인 쌈장 종지랑 뜨거운 매운탕 김으로 축축해진 음란한 달력이랑 민어, 민어 한 마리가 떠올랐다. 

칠순을 훨씬 넘긴 노모는 늙고 병든 딸년에게 뭐라도 먹이겠다고 벌써 음식 장만을 하신다고 하고, 아마 민어도 어느 선장에게 주문해 놓았으리라, 어미의 걱정과는 달리 살이 통통 오른 딸년은 가벼운 주머니를 고심하는데, 어미가 좋아하는 과일은 비싸기도 하구나.

아침부터 입 안은 까끌거리는데 민어, 그 꼬순 뒷맛이 생각나니 혀 밑에 침이 한가득이다. 
친구가 나를 찾지 않아도 목포로 곧장 달려갈 이유는 이렇듯 애달프다.

민어회 

- 안도현

집에서 멀리 나가 혼자 어둑하게 누워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밤 등대처럼 울지 모
르겠으나, 나는

곧장 목포 유달산 밑으로 가서 영란횟집 계산대 앞에
민어 한 마리로 누워 있겠다 벗겨 손질한 껍질 옆에다 소
금 종지를 두고 내장을 냄비에 끓여 미나리라도 반드시 몇
가닥 얹겠다

혹여 전화하지 마라 올 테면 연분홍 살을 뜨는 칼처럼
오라 바다의 무릉도원에서 딴 복사꽃을 살의 갈피마다
켜켜이 끼워둘 것이니

때로 살다가 저며내고 발라내야 할 것들 때문에 뼈는
아리지 그래도 뼈만이 폭풍 속에 화석을 새겨넣지

그러므로 당신은 울지 마라 소주병처럼 속을 다 비워
낸 뒤에야 바닷가 언덕에 서서 호이호이 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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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2-16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바이님. 고향이 없는 내게 설명절은 오히려 가벼운 기쁨올시다.ㅎㅎㅎ

어디선가 '설은 설워서 설'이라는 글을 읽었던 기억.
민어..어머니..매운탕..소주.. 호이호이 눈물짓는 바닷가 등대..
오호, 고향. 또하나 설처럼 설운 이름. 내게 없는 이름.

굿바이 2010-02-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은 잘 보내셨는지요?
민어회는 거짓말 보태지않고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엄마와 친한 선장아저씨가 잡아다 주신건데, 태어나서 그리 큰 민어는 처음 봤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니 바닷가는 제게 다 고향입니다. 고향이 없는 동우님이나 바닷가는 다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저나, 떠다니는 마음은 비슷하지 않을까요^^

웽스북스 2010-02-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딱 없어져버리고 싶은 월요일 같은 화요일이에요. 아무것도 손에 안잡히고, 날좀 잡아달라고 아우성치는 녀석들은 줄을 서있고. ㅎㅎ

명절 잘 보냈죠, 언니?

굿바이 2010-02-1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날좀 잡아달라는 녀석들을 언니가 회쳐줄까? 아니면 맛난 거 사줄까?^^
그렇게 뭐든 손에 안잡히는 날이 있는 것 같더라. 그럴때는 잠시 거리를 두고, 산보를 하던지 낮잠을 자던지 하면 좀 좋을텐데, 여건이 안되니. 안타깝네.

웬디도 명정 잘 보냈지? 나는 너무 많이 먹어서, 솔직히 미친듯이 먹어서, 엄마가 의심하시더라. 굷고 다니는지^^

웽스북스 2010-02-1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버렸어요. 내일이 걱정이긴 하지만, 또 내일은 내일대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이에요. 저녁에 슬렁슬렁 좀 놀았더니 나아진 ㅋㅋㅋ (역시 사람은 좀 놀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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