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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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벤투의 스케치북>을 열면 처음 만나는 글과 그림이다.

 

 

사랑스러운 파슬리 드로잉으로 책의 서문을 대신하다니 고요하고 유쾌하다. 유쾌함을 빌미로 잠시 기억 속 파슬리를 더듬는다. 나무 도마 위의 빠글빠글 싱싱한 파슬리. 이어서 나무 도마의 오래된 흠집들이 초록색 원고지로 변하는 영상. 불쑥 부엌이라는 공간이 실재함을 알려주던 향기.

"곧 실체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 또는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이 속한다."(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 7과 그 증명)는 명제가 도마 위에서 무한히 잘개 다져져 초록이던 순간.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완전히 익은 자두, 우아하게 핀 붓꽃, 독서 중인 친구를 그리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17쪽) 동행이라. 이어서 등장하는 인물들. 치매에 걸린 아내의 요양비를 걱정하는 노인, 정치적인 이유로 캄보디아를 떠나온 부부, 창고형 할인매장에서 잠재적 도둑으로 내몰린 가난한 노동자들, 갤러리의 융통성 없는 관리들, 상품으로 전락하는 자연. 이런 현실이 읽히지도 않는 현수막처럼 삶의 윤곽이 되버린 독자에게 가만히 던져진 질문. 당신은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 

만약 "1942년 나는 내셔널갤러리에서 개최한 마이라 헤스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듣기 위해 이 계단을 올랐다. 공습 때문에 그림들은 대부분 치운 상태였다. 공연은 한낮에 있었다. 음악을 듣는 우리 관객들은. 벽에 걸린 몇 점 남지 않은 그림처럼 조용했다. 피아노 소리와 화음이 죽음의 철조망으로 묶은 꽃다발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생생한 꽃다발만 받고 철조망은 무시했다."(56쪽)면 <벤투의 스케치북>을 열고 사랑스러운 파슬리 그림을 보며 그 사소함에 유쾌했던 독자는 긴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동행이라는 단어도 평소와 다르게 읽힌다. 정치적으로.

 

존 버거는 드로잉이라는 행위로 그려진 대상과 보는 이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자체는 필시 죽은 사물이지만 그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사람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셈이다. 그가 스피노자의 스케치북을 발견하는 상상을 했던 이유도 거기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의 스케치북이 발견된다고 해도, 그 안에 대단한 작품이 있을 걸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의 말과, 철학자로서 그가 남긴 놀랄 만한 명제들을 다시 읽고, 동시에 그가 두 눈으로 직접 관찰했던 것들을 살펴볼 수 있기를 원했던 것뿐"(11쪽)이라고 저자는 담담하게 적었다. 그러나 그려진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반쯤은 그것과 하나 되기를 원한다는 마음이 그의 글과 그림 곳곳에 포진해 있다. 또한 그렇게 어떤 드로잉의 연장선이 되어 드로잉의 안과 밖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이해 안으로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드로잉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실천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서 발생하는 다른 지향의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드로잉을 할 때 나는, 하늘 길을 찾아가는 새나, 쫒기는 와중에 은신처를 찾아가는 산토끼, 혹은 알 낳을 곳을 알고 있는 물고기, 빛을 향해 자라는 나무, 자신들만의 방을 짓는 벌 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멀리, 소리없는 동행이 있음을 알고 있다. 별처럼 먼 곳이지만, 그럼에도 동행이다. 우리가 같은 우주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각자에게 맞는 양식에 따라- 무언가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155~156쪽)라는 문장 밖으로 부재하는 드로잉 하나가 반쯤은 묘사되고 반쯤은 상상으로 채워져 드러난다. 모든 저항의 현장과 동행의 현장이 모퉁이를 돌고 있는 어떤 드로잉 한 점. 모퉁이 밖은 여전히 그리고 아직 미완이지만 실체가 있는 한 필연적으로 실존은 드러날 터. 놀랍고 고요한 경험이다.  

 

저자는 어느 날 아름다운 드로잉 북을 선물받고 그것을 "벤투의 스케치북"이라 이름 붙인다. 이어 스피노자의 시선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 결과물이 <벤투의 스케치북>이다.

"운명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을까. 운명에 종종 기하학 단위 같은 규칙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명사는 없다. 드로잉 한 점이 명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확신이 없다. 루카에게 드로잉을 주었고, 다음날 그는 액자에 넣었다."(71쪽)

드로잉 한 점이 명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대번에 나는 믿는다. 실은 믿고 싶었다. 이번에는 나름 근거있는 믿음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이어 <벤투의 스케치북>을 다시 본다. 조금 열려있는 문이 그려진 책 표지의 드로잉 한 점. 드로잉의 제목은 "It began like this"다. 운명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책의 표지 그림은 분명 어떤 명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고독하지만 우아하고 근사한 스케치북이다.  

 

“이 책은, 제가 바라기로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 관한 책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끔찍하지만,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을 담고 있는 세상 말입니다.” - 존 버거, 2011년 영국 비비시(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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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2-27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로잉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실천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서 발생하는 다른 지향의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드로잉을 할 때 나는, 하늘 길을 찾아가는 새나, 쫒기는 와중에 은신처를 찾아가는 산토끼, 혹은 알 낳을 곳을 알고 있는 물고기, 빛을 향해 자라는 나무, 자신들만의 방을 짓는 벌 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멀리, 소리없는 동행이 있음을 알고 있다. 별처럼 먼 곳이지만, 그럼에도 동행이다. 우리가 같은 우주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각자에게 맞는 양식에 따라- 무언가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155~156쪽)라는 문장 밖으로 부재하는 드로잉 하나가 반쯤은 묘사되고 반쯤은 상상으로 채워져 드러난다.


우아하고 근사한 책이기도 하고 글에 담긴 의미가 깊고 아름답구나..

'이제 봄이다'..라고 쓰려다가 무엔가 아쉬운 것인지, 쓸쓸한 것인지 슬쩍 입을 닫았어.

그래도 사는 일에는 어김이 없어서...


* 난 언제나 희망의 부재를 말하는 너의 입가 뒤로 희망을 품고 있는 너의 따뜻한 품성과 마알간 얼굴을, 네 희망을 빼앗아가는 이들 뒤로 네 희망을 지속시키는 힘을 지닌 이들을 함께 본다..


굿바이 2013-02-28 23:20   좋아요 0 | URL
그러게 사는 일에는 어김이 없네^^
아침에 일이 있어 혜화역에 갔는데 바람이 다르긴 하더라.
그런데 나도 뭐가 아쉬워서 그러는지 '봄'소리가 안나오더라.
신기하지. 참,신기한 일이었어. 고된 겨울이었는데.

네가 있어 든든하구나. 참 신나는 일이야 ^___________^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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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을 잡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치약을 짜서 양치질을 시작한다. 초등학교 등교 이후 반복한 일이다. 이후 머리를 감고 욕실을 나와 물을 마시고 거의 매일 동일한 시간이 소요된다. 동선을 그려보면 보폭이나 움직임의 경로도 일정할 것이다. 별 생각없이 하는 일이지만 생각하고 하는 일보다 월등히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정확한 결말에 이르는 유일한 행동이다. 따라서 내 일상은 거기까지만 안전하고 완벽하다. 그렇기에 내 기억 중 나도 믿고 남도 믿고 심지어 하느님도 믿는다고 인정해 줄 대목은 '아침의 양치질과 머리 감기 그리고 물 마시기'까지가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떤, 밀도가 높은 것처럼 보이는 기억은 '아침의 양치질과 머리 감기 그리고 물 마시기'를 의심하지 않듯이 의심없이 믿고 때때로 반복 재생한다. 공백이 많지 않아서, 노화의 심각한 과정을 밟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 나는 자주 격하게 그것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참 편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런 문장을 만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이유는 하나. 뭔가 들킨 것 같고 들킨 건 늘 창피할 일 밖에 없을 것 같고 더 나아가 그런다고 내가 앞으로 변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무능과 뻔뻔함에 스스로 놀라 아주 잠시 참회의 순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 무능과 뻔뻔함은 관성의 법칙을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쭉 지나온 내 인생을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칠 것이다. 심지어 나와 관계한 타인의 과거까지 손을 볼 것이다. 뻔하다. 특별한 인생이 아니었기에, 크게 다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이 있기에, 나는 살기 위해서라도 이 짓을 계속 할 것이다. 소용돌이 치는 무엇을 본다 하더라도, 혹여 내게 있어 베로니카를 만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뻔뻔한 다짐을 함에도, 알락 릭맨이 주연했던 <시와 점심(The Song of Lunch)>이 떠오르는 이유는 뭔지. 어딘지 찌질한 수다스러움 뒤에 묘하게 버티고 있는 진실. 우디 알렌의 농담이 종종 쓸쓸했던 이유.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농담도 참. 다들 너무들 하시는구려. 그나저나 이제 어쩌나. 농담도 한 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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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6-08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은 곳에 밑줄을 그은 언니를 보며. :)

(라고 좋아하기엔, 네, 제가 밑줄이 좀 너무 많긴 해요. 그렇지만, 두번째 문장은 저도 특별히 옮겨 두었던 부분. 저는 이 소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에요. 엉엉)

굿바이 2012-06-08 18:00   좋아요 0 | URL
웬디와 늘 같은 곳을 보고 있구나, 좋다 :)

비로그인 2012-06-0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나와 관계한 타인의 과거까지 손을 볼 것이다. 뻔하다. 특별한 인생이 아니었기에, 크게 다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이 있기에..."


머리뿐만이 아니라 가슴까지 아픈 글이네..
나도 예외가 아닌 것을..

특히.. 태그에서 "나도 이리 아픈 것"을 보면
이라는 글을 읽자 눈물이 ..

빌어먹을 .. 나이들면서 느는 건.. 과잉 감정 뿐이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건 아니고.. 내 말은 과잉 혹은 결핍 혹은 정상 이성도 그닥 생의 의지가 되는 건 아니라서.. 덜 챙피한 건 아니라서 딱히 과잉 감정이라는 것이 나쁘다
생각드는 건 아니지만
나도 타인에게도 때론 무겁.. 아니다..솔직히 버거울 때가 있다..

암튼.. 잘 먹고 다녀라..
이 더위 날려면.. 무엇이든 먹어야 한다..


굿바이 2012-06-08 18:01   좋아요 0 | URL
무엇이든 먹세!!!!!
조만간 얼굴 한 번 보자. 그대 마음 편할 때. 알았지?

꽃도둑 2012-06-1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바이님의 리뷰에서 소설 냄새가 나는 건 왜일까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장에서 난단 말이죠. 아,,,사실 요즘 소설쓰고 싶어 죽갔시요.^^
그래서 곱씹으면서 읽게 되네요..


굿바이 2012-06-13 14:19   좋아요 0 | URL
정말요?
우히히히히히~!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________________^
 
이스탄불을 듣는다 대산세계문학총서 106
오르한 웰리 카늑 지음, 술탄 훼라 야크프나르 여.이현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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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섯에 요절한 시인의 직접적인 사인은 뇌출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빠르게 세상과 격리시킨 원인을 술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시인이 늘 취해 있었다 하니 그런 추측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언제가 죽게 되니 어찌 죽으나 뭐 그리 대수로울까 싶지만, 이건 말이 그렇지 어떤 이들은 그 죽음의 과정과 이유마저도 특별할 수 있다. 이건 시를 읽고 난 후 자발적으로 동의한 생각이다. 또한 그의 생애에서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도 뭐 그리 대수로울까 싶지만 그도 그리 말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시를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의 삶과 죽음이 갑자기 특별하게 느껴진 건 순전히 그의 시를 읽었기 때문이고, 그만큼 시인의 시가 특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해 뭘 좀 안다고 말하는 자신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물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말이다.

 

터키에서 시인의 시는 모더니즘시 운동의 상징으로 꼽힌다고 한다. 시인은 형식적인 혹은 상투적인 어떤(터키의 서정소곡) 시작법을 벗어났고,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리얼리즘과도 다른 길을 갔다고 한다. 감히 짐작하건데 시의 세계에 있어 양대 산맥을 벗어났으니 눈 밝은 독자는 즐거웠겠으나 시인은 외로웠을 것이라 짐작만 한다. 분석은 내 몫이 아니고, 분석할 깜냥도 없기에 그저 나는 짐작만 한다. 더 나아가 시인의 시를 읽고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며 즐겁고 외롭게 뒹굴 뿐. 시는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위무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뭔가 좀 아쉬워 옮긴이의 말을 또 다시 옮겨보면 이렇다. "오르한 웰리가 하층 민중들의 삶을 그들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빌려 시로 노래했을 때 문학의 후원자임을 자처했던 부르주아 계층은 이를 모욕처럼 받아들였으나 그의 시는 곧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의 시에는 어떤 과장된 영탄의 효과도, 화려한 수사도, 부풀린 이미지도 없다. 정제된 운율, 미리 결정된 형식과 리듬, 점잖은 듯 감추는 시어들에 거역하면서, 단순한 삶의 진실을 제시하고 때로는 감상적으로 보일 만큼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오호, 내 말이! 여튼 이제 시를 좀 읽자.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산다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사서

그것으로 별을 만든다

음악은 영혼의 양식이라지

난 음악에 흠뻑 빠진다

 

나는 시를 쓰고

그것으로 오래된 물건과 바꾸고

또 음악을 산다

 

아, 내가 라크 술병 속 물고기라면

 

시를 써서 오래된 물건과 바꾸고 그것으로 별을 만들고 음악에 취한 시인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시인이 속한 식어가는 세계(오래된 물건으로 별을 만든다면 식어가는 세계가 아닐까)와 별빛 아래 흐르는 음악은 어찌 좀 와닿는다. 어쩌다가 이 구절이 내게 절로 다가와 별처럼 반짝이는지 설명은 불가하나 중요한 것은 어쩌면 영원히 반복될 지도 모를 절망을 이제는 좀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이것도 폼을 잡는 일일 수도 있으나 그럴 수 있다,는 뭐 그런 물고기같은 마음이라면 스스로에게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이 시는 어떤가.

 

아름다운 날들

 

이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망쳤지

이처럼 아름답던 어느 날에 일을 그만둔

나는 성실한 관리였네

이런 날에 처음 담배를 배웠고

이런 날이면 나는 사랑에 빠졌었지

집으로 빵과 소금을 가져가는 것도

이런 날에는 잊고 말았으니

으레 이런 날이면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이 생겼네

나를 망쳤네,

이토록 아름다운 날들이

 

살다보면 정해진 일인지 그것과 무관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과거의 나와 작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좀 더 편하게 설명하면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직감하게 되는 살 떨리는 날이 있다. 아찔하고 비루하고 혹은 쓸쓸하고 여튼 예전의 나와 작별하게 되는 어떤 그날.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망쳤네, 라고 쓴 시인의 저 아름다운 날들이 내가 기억하는 뭐라 명명하기도 묘한 그저 살 떨렸던 그날들과 닮아 있을까. 모르겠다. 그저 나를 망친 그날들마저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혹은 세련되게 조작되어 있으니 뭐가 뭐였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나마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은 내게 없었다는 것. 그러니까 마지막 정신줄, 창피해지는 일은 스스로 막았다는 것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 아니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내 속내는 그런 아름다운 날에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이 생긴 시인이 그저 부러울 뿐이라는 것.

 

시집은 오르한 웰리가 1945년 이스탄불에서 쓴 『이방인』을 위해,라는 작가의 글도 읽을 수 있고, 새로운 시 정신을 선언한 「이방인」의 서문도 볼 수 있고, 옮긴이의 자세한 설명도 읽을 수 있다. 모두 다 아껴 읽은 글들이었으나 여기에 옮길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시가 굳이 어떤 해석들을 기반으로 존재할 이유없고, 예술이 어떤 옹호들로 안전지대를 찾을 필요없겠다,싶은 마음이라면 이것도 개폼일까. 그래도 할 수 없고.

제일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집을 처음 펼치면 「게믈릭으로」라는 시가 나온다. '게믈릭'은 에게 해 연안의 항구도시란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이런 건 옮겨야 한다.

 

게믈릭으로

 

게믈릭으로 가면

바다를 볼 수 있을 거요

그때 놀라지는 마요

 

「게믈릭으로」라는 시는 오르한 웰리 카늑의 시집 <이스탄불을 듣는다>를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는 시다. 그러니까 "<이스탄불을 듣는다>를 펼치면 / 시를 읽을 수 있을 거요 / 그때 놀라지는 마요" 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는 또 여기서부터. 시인의 시가 어떻게 나를 유혹했는지 밝혀두고자 한다. 뭐랄까 "안 넘어갈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면 "왜요?"라고 물을 사람들을 위해서다. 시가 이렇게 쓰여있고, 이렇게 읽히는데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취향이 영 다르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또 이렇게 옮긴다.  

 

요염히 눕다

 

그녀는 몸을 늘이고 나른히 누워 있다

그녀의 치마가 조금 말려 올라갔구나

그녀가 팔을 올리니

살며시 겨드랑이 비치는데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보듬는구나

나는 안다,

그녀 안에 나쁜 마음이 없음을

나는 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품지 않음을

그러나......

저러면 안 되네

저렇게 요염히 누워선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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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2-09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 첫 추천이 저였는데...ㅋㅋ
어제 제가 시간이 없어서 잠깐 들어와서는 우선 알라딘 서재로 보내야 할 것 같아서 눌렀어요.

좋네요. 저도 시를 쓰고 매치시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늘 생각만이에요. ㅋ

아픈 건, 다 나으신거죠?


굿바이 2012-02-09 17:57   좋아요 0 | URL
우앗~! 그 마법의 추천이 페크님이었군요. 감사 또 감사 또또 감사~!!!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몇 일 못먹었던 것들을 미친듯 탐하고 있습니다^^
페크님도 잘 지내시죠?


chaire 2012-02-0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시, 재미나요. 게믈릭, 이라는 이름도 왠지 혀에 착 감기는 요염하면서도 귀여운 어감이네요.^^

굿바이 2012-02-09 17:58   좋아요 0 | URL
그죠~!
'게믈릭'이라고 발음하는데 뭔가 좀 신비했어요. 물론 한참 중얼거리니까
욕으로 들리기도 했지만요 ㅋㅋㅋ

라로 2012-02-10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9, 총 22922 방문

저는 이런 숫자 잡는 거 좋아해요~.^^
어제 일찍 잤더니 일찍 일어났어요, ㅎㅎㅎㅎ

오늘이 제게는 아름다운 날이에요,
몸이 아직도 좀 메롱이지만 서울 가서 친구를 만나 담배 피우는 걸 가르쳐 달라고 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성공여부와는 상관없이, 음, 굿바이님께 별 얘기를 다해요, ㅎㅎㅎㅎ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친구라서 그 나이에 뭘 배우려고 하냐 집어치웟! 이럴 거 같아요, ㅋㅎㅎㅎㅎㅎㅎㅎㅎ

굿바이 2012-02-10 14:25   좋아요 0 | URL
음...어찌하여 담배를 배울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말리기도 참으로 그렇습니다.

무엇으로든 몸과 마음이 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뭐든 응원합니다^^
까지껏 얼마나 산다구요, 삶이 또 뭐 그리 대단하다구요(이렇게 쓰니 너무 무책임한 것 같지만, 아실겁니다. 이 마음~)

라로 2012-02-13 11:31   좋아요 0 | URL
하하하 굿바이님 걱정하셨군요~.^^
결국 실패로 되었어요,,,,담배를 배워서 피우고 싶었던건 아니고
인생에 딱 한번은 담배를 피워보고 싶었어요,,,그런데 그 순간이 개그처럼 끝나고 말았답니다,,친구들의 아까운 담배 한 개피만 축냈지요,,^^;;
담배가 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자명하게 알려주었다면 웃으시려나???ㅎㅎㅎ


굿바이 2012-02-13 13: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몸개그 하셨군요?
그러니까 뭐든 쉬운 것이 없어요. 그죠?

아참, 이제 몸은 괜찮으시죠?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흰그늘 2012-02-1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이토록 아름다운 날들을 알지 못했네.

2. 그토록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망쳤네.

3. 그토록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이끌고 왔었네.

저는 2와3의 어스름에 놓여 있는 것인가 싶어 한 번 적어 보았답니다.
그리하여도 먼훗날 나의 달려갈 길 다마치고 난 후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이끌고 왔었네.' 하며 잠들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럼.. 위의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어질까요?^^

굿바이 2012-02-13 13:00   좋아요 0 | URL
늘 느끼는 것이지만 흰그늘님은 사유의 폭이 참 넓으신 것 같아요.
어스름에 놓여있다....어둠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걸어나오시면
좀 더 선명해지는 어떤 것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꽃이 핀다 - 자연에서 찾은 우리 색 보림 창작 그림책
백지혜 글.그림 / 보림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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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보면서 늘 느꼈던 아쉬움은 그림에 대한 것이었다. 
조금 더 색이 고우면 좋겠고, 조금 더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좋겠고, 보는 순간 울렁거리면 좋겠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겠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내 아쉬움의 이유들이었다.  
물론 눈이 반짝 가슴이 콩닥거리는 그림책들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서양 화가들이 일러스트에 참여한 경우라서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아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고운 그림책을 만났다. 백지혜작가의 <꽃이 핀다>라는 그림책이다.
일전에 전시회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책의 존재를 왜 몰랐을까 싶다. 백지혜는 한국화를 그리는 화가다. 그런 화가가 우리 산과 들에서 자라는 꽃과 열매를 전통 채색 기법으로 그려 이 책에 담았다. 자연 염료를 사용하여 비단에 그린 그림들은 손가락을 올려놓으면 손끝을 타고 그 맑고 여린 염료들이 흘러들어 내 몸 어딘가도 그렇게 젖어들 것만 같다. 그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애틋하기만 한 순간들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은 말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책 속의 그림들을 여기에 조금 옮긴다. 이런 수고와 욕심을 내는 이유는 혹여 오다가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도 이 그림책을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책은 빨강, 동백 / 노랑, 민들레 / 분홍,진달래 / 연파랑, 꽃마리 / 자주,모란 / 연두, 버들잎 /
파랑, 달개비 / 초록,대나무 / 보라, 도라지 / 주황,나리 / 갈색, 밤 / 하양,찔레 / 검정, 송악
등을 글과 그림으로 소개하고 있다.

백지혜작가가 묘사하는 사물들이 곱고 바람처럼 가볍고 정교한 이유는 그녀가 배체법이라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불화에 많이 사용되는 방식인데 종이나 비단의 뒷면에 물감을 가볍게 칠해 맑은 중간 색조의 투명성이 강조되고, 뒷면의 색이 앞면으로 우러나온 상태에서 음영과 채색을 보강하는 기법이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조형미가 더해져 기존의 그림에서 느낄 수 없는 시선을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멀리 어떤 것은 위에서 들여다 보듯이 그렇게 작품속으로 자연스럽게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 

책 소개가 길었다. 부질없는 일인 것을 알지만 자꾸 뭔가 좋은 걸 만나면 이렇게 허둥댄다.
내친김에 이 여름 지금 어디쯤 피어있을 찔레꽃 그림 하나 더 보고 간다.
이 여름이 꼭 찔레꽃만 같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백지혜 작가의 봄이 오는 소리,라는 작품을 여기 옮겨 놓는다.  
자꾸 봐도 고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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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1-08-0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굿바이 2011-08-05 11:06   좋아요 0 | URL
좋죠?!

cyrus 2011-08-0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참 이뻐요, 특히 꽃 그림은요. 저 꽃 그림에 향기까지 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 될 수 있을거 같다는 상상도 해보네요,
꽃 그림에 향기나는 책이 나오는 날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요. ^^;;
찔레꽃 그림을 보니깐 장사익 씨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

굿바이 2011-08-05 11:09   좋아요 0 | URL
엄훠, 장사익씨 노래를 아시는구나. 그 노래 모르는 분들도 꽤 많던데, cyrus님의 관심은 역시나 광폭이십니다~!

책을 덮고 있는 붉은 커버를 벗기면 찔레꽃이 까꿍,하고 나와요.
정말 예뻐요^^

무스탕 2011-08-0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좋아서 그냥 못 가겠어요.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 드리는것 같아요. 맞나요? ^^;;;
그 동안 계속 살짝살짝 읽고만 갔었는데 오늘은 드디어 절 눌러 앉혀 버리셨어요.

백지혜작가 그림 참 이쁘죠? 저도 살짝 아는 작가인데 이 책 나왔을때 너무도 반가워서 얼른 구입을 했었지요. 몇 년전 압구정동에서 개인전을 할때도 보러 갔었는데 혹시 보셨다는 전시회가 같은걸까 싶네요 ^^

굿바이 2011-08-08 09:37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안녕하세요?!
아무래도 무스탕님이 본 개인전을 저도 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잠깐이나마 같은 공간에 있었군요^^

그나저나 바람이 많이 부는 월요일입니다. 어디에 계시든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웽스북스 2011-08-13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저도 어제 이 책 받았어요. 사진보다 훨씬 고와요~

흰그늘 2011-09-0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갓 돌 지난 여자아이가.. 혹여나.. 꽃을 꺽을까봐.. 꽃 앞에서서.. 좋은 향기를 맡는 모습을 보여주곤 하면.. 꽃을 보면 그러노라고.. 할까 봐.. 봄이 오는 소리 그림을 보고나니
못내 아쉬움 남네요.. 왜.. 한 번도 귀기울이는 모습은 생각지 못했을까요..

하양,찔레 앞에서서 혹여나 아이가.. 귀기울여 준다면.. 언젠가..
꽃이지고난.. 저.. 너머엔.. 아주 에쁘게 자란 아이가.. 걸어오고 있지는
않을까 해요.. 아침빛 뚜렷한 걸음으로..

제.. 조카 아이도.. 참.. 예쁘답니다..^^

투덜이 2011-09-2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좋은 책 만나고 갑니다.^^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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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먼 사람 많이 괴롭혔습니다. 문학 따위가 뭘 할 수 있냐고 주제넘게 숱하게 물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서둘러 문학도 문청도 모두 폐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랄맞은 현실이 만든 폐허가 딱히 싫지도 않았습니다. 폐허 앞에서도 박수치는 사람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물정 모르는 그들의 환호가 고소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폐허 어디쯤의 조등弔燈 앞에서 이렇게 나직히 울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내 따뜻하고 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울고 있는 줄 알았는지 궁금하십니까. 그의 비평에는 열등감도 허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장욱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진실은 존재의 어떤 자세다" 라고 쓰셨더군요. 그 말이 몇 일 밤과 낮을 따라다녔는지 모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장욱의 시집 한 귀퉁이에 저도 그렇게 썼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도 지금도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전작 <몰락의 에티카>를 집었을 때 제 딴에는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제목이 전부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저는 "몰락의 에티카"라는 제목이 책의 거의 모든 것이자 문학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김승옥과 이청준, 황지우와 강정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저작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보니 신형철이라는 이름의 울림도 나쁘지 않군요. 그럼 이번 책의 제목<느낌의 공동체>는 어떠했냐구요. 말을 빌려오자면 단독성이 특수성으로 나아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특별한 문학이 아닌 어떤 문학에 대해서는 비슷한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느낌의 곁을 내주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물론 모든 문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느낌도 아닐 것입니다. 그저 같은 계열에 놓인 그러나 꼭 일치할 필요도 없고 극하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동일한 느낌을 공유할 필요도 없고 공유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순서에 매이지 말고 책을 좀 볼까요.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더듬는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쓰셨더군요.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5.16 이후 김수영의 시가 그랬고, 10년 전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1999)가, 최근에는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 지성사,2005)가 그러했다. 이 시인들의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자聖者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 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라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p.126 
 
저는 '실존적 깽판'이라는 표현을 보고 웃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내 머리를 조아렸지만 말입니다. 여튼 시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 사람만이 입성한다는 직관의 영역에 입성한 듯 싶더군요. 이럴 땐 저야말로 실존적 '깽판'을 거두고 그저 감탄과 존경을 바치면 되는 일이죠.   

안현미의 <옥탑방>을 이야기는 장으로 넘어가 볼까요.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체험도 풍성해질 테니 인생을 모르는 핏덩이들은 더 기다려야 하겠고. 그러나 아니지. 중요한 건 체험의 부피가 아니라 전압이지. 무엇이건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전感電의 능력. 그래서 생겨나는 언어, 그 언어에 흐르는 전류. 이건 나이와 아무 상관없어. 그 뒤로 20년 정도 더 살기는 했지만 사실상 랭보는 이미 십대 후반에 감전사한 거지. 감전의 천재가 자기 자신에게 타살된 거야. -p.206   

개인적으로 안현미의 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 시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비평이 꼭 날이 서있어야만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끼는 대목이었습니다.  
 
최갑숙의 <밀물여인숙3>과 안시아의 <파도여인숙>에 대해 쓴 글도 좀 볼까요.  
그런 날에는 또 이런 남녀들의 뽕짝 같은 수작들이 위로가 된다. 나만 아는 그런 여인숙, 어딘가에 꼭 하나만 있어서, 사랑이든 신파든, 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기적이 없는 세계에 신파라도 있어야지. -p.106 

이런 감성도 있었단 말입니까.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순전한 가정이지만 알았으면 정말 오다가다 발목이라도 잡았겠습니다. 저는 늘 뽕짝 같은 수작에 들뜨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책을 나름 필사할 수는 있지만 이곳에 다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문학을 이야기하는 비평가가 현정권이 용산에서 벌인 일을 말하고, 최진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신경민의 멘트를 옮겨 적고, 가수인지 모르겠지만 여튼 가수 비가 부른 노래말을 논하는 것은 흥미롭다고 말해버리기는 아쉬웠습니다. 사유의 폭이 광폭이라고 하기에도 고종석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 꺼림칙합니다. 아니 사유의 폭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을 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저는 특정한 부조리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것을 중용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뜨거운 불구덩이에 빠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문학을 절망의 형식이라 말해주는 이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인들이여, 부디 사산死産되지 말고 기어이 태어나라"라고 주문하는 그 떨리는 목소리가 있어 나도 떨렸습니다. 그리보니 당신은 울고 있는 산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허 속에서 태어난 것들을 기쁘게 받아 앉고 그들이 목도해야 할 절망의 현실을 울어주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창동의 <시>에서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밖에 없네요."라고 말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지 모르는 '양미자'씨가 있는 한, 그리고 '양미자'가 사산되지 않고 태어날 것을 주문하는 산파가 있는 한 폐허에서 제가 본 불빛은 조등弔燈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지만 정녕 조등은 아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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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5-2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꼭 씹어 먹는다,는 건 이런 거군요! 음..
굿바이님이 저자에게 보내는 연서 같아서 댓글로 끼어들기가 좀 민망하지만, 덕분에 저도 이 책을 읽어보싶어졌으니 고맙다는 인사로 기어이 한 줄 남기고 갑니다. 멋진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굿바이 2011-05-20 18:00   좋아요 0 | URL
제가 더 감사하죠^^
연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마음일 것 같아요. 이왕이면 비평도 문학적이면 좋겠는데 저자의 책은 전문성과 함께 문학성도 뛰어나서 읽기 불편하지 않아요.
메리포핀스님, 금요일이에요. 뭐든 즐겁고 편안하시길 바래요~


치니 2011-05-2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여차하면 눈물 바람부터 하니, 늙은 탓만 하기도 민망합니다. 암튼 또 울컥하게 만드셨어요. ㅠ

굿바이 2011-05-23 09:17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는 잘 울어요. 혼자 걷다가도 울고, 나무 보고도 울고....
아침에도 머리 감다가 울었어요. 정말 나이드는 탓만 하기에도 민망해요 ㅜㅡ

흰그늘 2011-05-2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가.. 조등弔燈에 대한.. 생각들로 오랜 시간을 앉아있었드랬습니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주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불빛은.. 오랜시간.. 품어왔었던..
그 무언가를 향하여..

나로하여금..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지..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누구나가 품은 '꿈' 은 다르지만.. 꿈조차 추워지는..

조등앞에서 서러워지는 날들에라도.. 여전히.. 마음에 '진심' 을 담아봅니다..^^
위의 글을 읽어며..








굿바이 2011-05-23 09:22   좋아요 0 | URL
그저 느낌으로 짐작만합니다.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꿈조차 추워지는 그런 세상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진심'을 담는 분이 있다는 것이 든든하기만 합니다.
여름이 오고 있다고 하네요. 모쪼록 뭐든 즐거운 여름 보내셨으면 합니다 :)

2011-05-31 0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31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1-06-0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 님의 책이 나왔군요. 굿바이 님 리뷰 때문에 알았네요.
별 다섯개에다 그야말로 애정어린 마음이 촘촘하게 밀도있게 그려저 있네요.
리뷰 좋은데요! 감성 감성,,, 고것이 지금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굿바이 2011-06-02 11:12   좋아요 0 | URL
애정을 들키다니 저는 아직 멀었나 봅니다^^
요즘은 신형철씨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아진 것 같습니다. 괜히 혼자 뿌듯해하고 있답니다. 그나저나 날도 더워지는데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