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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애먼 사람 많이 괴롭혔습니다. 문학 따위가 뭘 할 수 있냐고 주제넘게 숱하게 물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서둘러 문학도 문청도 모두 폐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랄맞은 현실이 만든 폐허가 딱히 싫지도 않았습니다. 폐허 앞에서도 박수치는 사람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물정 모르는 그들의 환호가 고소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폐허 어디쯤의 조등弔燈 앞에서 이렇게 나직히 울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내 따뜻하고 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울고 있는 줄 알았는지 궁금하십니까. 그의 비평에는 열등감도 허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장욱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진실은 존재의 어떤 자세다" 라고 쓰셨더군요. 그 말이 몇 일 밤과 낮을 따라다녔는지 모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장욱의 시집 한 귀퉁이에 저도 그렇게 썼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도 지금도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전작 <몰락의 에티카>를 집었을 때 제 딴에는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제목이 전부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저는 "몰락의 에티카"라는 제목이 책의 거의 모든 것이자 문학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김승옥과 이청준, 황지우와 강정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저작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보니 신형철이라는 이름의 울림도 나쁘지 않군요. 그럼 이번 책의 제목<느낌의 공동체>는 어떠했냐구요. 말을 빌려오자면 단독성이 특수성으로 나아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특별한 문학이 아닌 어떤 문학에 대해서는 비슷한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느낌의 곁을 내주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물론 모든 문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느낌도 아닐 것입니다. 그저 같은 계열에 놓인 그러나 꼭 일치할 필요도 없고 극하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동일한 느낌을 공유할 필요도 없고 공유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순서에 매이지 말고 책을 좀 볼까요.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더듬는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쓰셨더군요.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5.16 이후 김수영의 시가 그랬고, 10년 전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1999)가, 최근에는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 지성사,2005)가 그러했다. 이 시인들의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자聖者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 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라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p.126
저는 '실존적 깽판'이라는 표현을 보고 웃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내 머리를 조아렸지만 말입니다. 여튼 시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 사람만이 입성한다는 직관의 영역에 입성한 듯 싶더군요. 이럴 땐 저야말로 실존적 '깽판'을 거두고 그저 감탄과 존경을 바치면 되는 일이죠.
안현미의 <옥탑방>을 이야기는 장으로 넘어가 볼까요.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체험도 풍성해질 테니 인생을 모르는 핏덩이들은 더 기다려야 하겠고. 그러나 아니지. 중요한 건 체험의 부피가 아니라 전압이지. 무엇이건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전感電의 능력. 그래서 생겨나는 언어, 그 언어에 흐르는 전류. 이건 나이와 아무 상관없어. 그 뒤로 20년 정도 더 살기는 했지만 사실상 랭보는 이미 십대 후반에 감전사한 거지. 감전의 천재가 자기 자신에게 타살된 거야. -p.206
개인적으로 안현미의 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 시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비평이 꼭 날이 서있어야만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끼는 대목이었습니다.
최갑숙의 <밀물여인숙3>과 안시아의 <파도여인숙>에 대해 쓴 글도 좀 볼까요.
그런 날에는 또 이런 남녀들의 뽕짝 같은 수작들이 위로가 된다. 나만 아는 그런 여인숙, 어딘가에 꼭 하나만 있어서, 사랑이든 신파든, 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기적이 없는 세계에 신파라도 있어야지. -p.106
이런 감성도 있었단 말입니까.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순전한 가정이지만 알았으면 정말 오다가다 발목이라도 잡았겠습니다. 저는 늘 뽕짝 같은 수작에 들뜨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책을 나름 필사할 수는 있지만 이곳에 다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문학을 이야기하는 비평가가 현정권이 용산에서 벌인 일을 말하고, 최진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신경민의 멘트를 옮겨 적고, 가수인지 모르겠지만 여튼 가수 비가 부른 노래말을 논하는 것은 흥미롭다고 말해버리기는 아쉬웠습니다. 사유의 폭이 광폭이라고 하기에도 고종석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 꺼림칙합니다. 아니 사유의 폭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을 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저는 특정한 부조리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것을 중용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뜨거운 불구덩이에 빠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문학을 절망의 형식이라 말해주는 이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인들이여, 부디 사산死産되지 말고 기어이 태어나라"라고 주문하는 그 떨리는 목소리가 있어 나도 떨렸습니다. 그리보니 당신은 울고 있는 산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허 속에서 태어난 것들을 기쁘게 받아 앉고 그들이 목도해야 할 절망의 현실을 울어주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창동의 <시>에서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밖에 없네요."라고 말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지 모르는 '양미자'씨가 있는 한, 그리고 '양미자'가 사산되지 않고 태어날 것을 주문하는 산파가 있는 한 폐허에서 제가 본 불빛은 조등弔燈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지만 정녕 조등은 아니었을 겁니다.